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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등가의 소드마스터-314화 (314/446)

완성 (5)

314화 

알렉산데르에게 남부는 자기 기반이자 고향이었다. 

남부의 신민들은 마경으로부터 제국을, 더 나아가 세상을 지키기 위해 항상 날을 갈고 있어야 했다. 

알렉산데르는 그들과 함께 전장을 누볐고, 함께 전장을 누빈 전우들에게 나름의 경애를 지니고 있었다. 

헌데 그리 오랜 시간 의무를 다하며 투쟁해왔던 신민들과 신도들을 외면하려는 교단에게 알렉산데르는 실망과 회의감을 느꼈다. 

알렉산데르는 되도록 남부를 지켜내고 싶었다. 

뭐, 여기까지는 큰 거짓 없는 진실이기는 했다. 

알렉산데르가 감정 없는 인간도 아니었기에 당연히 그러한 감상 쯤은 가질 수 있었다. 

헌데... 

알렉산데르는 교황청의 회의장을 박차고 나간 이후, 위에 서술된 감상을 이유로 들며 나만은 남부를 포기할 수 없다고 시위를 시작했다. 

자신이 지휘권을 가진 부대 일부까지 마경을 향해 전진배치한 알렉산데르는 지원이 없더라도 마경을 치겠다고 주장했다. 

그건 순수한 의도에서 비롯된 행위가 아니라 다분히 정치질에 가까웠다. 

뭐... 이 세계에서 민중의 지지가 어마어마한 힘을 발휘하냐 묻는다면 그건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민중의 지지와 인기를 얻을 수 있다면 권력자에게 분명 큰 도움이 되었다. 

민중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는 쇼가 중요했다. 

그리고 이 쇼라는 건 대개 자신을 띄우기 위해 남을 개새끼로 만드는 게 핵심이었다. 

빈집인 걸 알고 찾아갔으면서 대문을 두드리고 그 앞에서 몇 시간 동안 서성이는 모습을 연출한다거나. 

남들이 다 뜯어말릴 걸 알고서 듣기에는 시원한 과잉 대응을 격분한 척 주장하다가 좌절되는 상황을 연출한다던가. 

결국 핵심은 동일했다. 

교황청의 모두가 도망가자고 지들끼리 쑥덕대는 와중에 알렉산데르만이 남부를 지키겠다고 검을 뽑았다. 

이 사실이 추후 대외적으로 알려지면 알렉산데르는 남부의 신민들과 신도들에게 더욱 열렬한 지지를 받을 수 있게 될 것이다. 

물론 이건 대놓고 교황청을 엿 먹이는 정치질이었다. 

자기 이미지 챙기겠다고 다른 최고위 성직자들을 개새끼들로 만들어버린 것 아닌가. 

헌데 엿을 먹었다고 교황청에서 당장 알렉산데르를 어찌하긴 어려웠다. 

지금 교황청은 알렉산데르의 힘과 명성이 꼭 필요했다. 

속으로는 '시발련아'를 되뇌면서도 이 악물고 알렉산데르에게 손을 내밀 수밖에 없었다.

"..." 

대륙 회의가 시작된지 이제 열흘이 흘렀다. 

알렉산데르는 지평선 너머에 흐릿하게 보이는 마경을 바라보며 부관에게 물었다. 

"아직 대륙 회의는 지지부진한가?" 

"예, 그렇습니다. 제국의 수호자께서 강경하게 원정을 주장하고 있다고는 합니다만..." 

알렉산데르가 피식 웃었다. 

레이는 지금 대륙 회의에 참가해 같은 주장만 앵무새처럼 반복하고 있었다. 

레이는, 알렉산데르가 먼저 마경의 침공을 강경하게 주장한다면 황제 또한 힘을 얻으리라 말했다. 

허나 알렉산데르가 생각하기에 그건 완전히 레이의 착각이었다. 

알렉산데르가 남부의 구심점 역할을 하는 인물 중 한 명은 맞았다. 

그렇지만 진짜 중요한 것은 결국 교황청의 의지였다. 

신성 교단의 신도들은 모든 국가에 존재했으며, 그렇기에 교황청의 영향력은 때때로 제국과 비견될만했다. 

교황청의 수뇌부가 움직여야 여론이 힘을 받을텐데 알렉산데르 혼자서 떠들어봤자 그 한계가 명확했다. 

"우습군." 

알렉산데르는 리프에서 헤어지기 전에 레이가 했던 당부를 떠올렸다. 

알렉산데르가 의견 표명을 해야 자기가 도와줄 수 있다고 했던가. 

"아주 우스워." 

아무리 대단한 재능을 타고났다 해도 아직 나이가 어려서인지 순진하게 구는 면이 있었다. 

레이는 제국 수호 훈장을 지니고 있다고 자기 영향력을 과대 평가 한듯 싶었다. 기껏해야 실권 없는 쭉정이인데 말이다. 

그리 중얼거리던 알렉산데르는 이내 정색했다. 

우습게 볼 인간이 따로 있지. 

제국의 역사에서도 유례를 찾기 힘든 공적을 연거푸 세운 작자를 어찌 우습게 보려 하는가? 

알렉산데르는 나름 오만했지만 결코 멍청하지 않았다. 

"...아, 그래... 그렇다면... 그걸... 설마..." 

뒤늦게 무언가를 깨닫고 다시 웃음을 머금은 알렉산데르가 부관에게 물었다. 

"혹시라도 말이야, 내가 마경으로 향한다면... 같이 가겠는가?" 

"여부가 있겠습니까. 이 목숨이 다할 때까지 따르겠습니다." 

"흠... 그러면 여기서 이러지 말고 미리 준비 좀 하지. 혹시, 모르니까 말이야." 

레이가 대륙 회의 때문에 황성으로 간 후. 

루나는 레이가 며칠 동안 머물렀던 방 안에 홀로 남아 긴 시간 자리를 지켰다. 

루나는 눈을 감은 채 천천히 과거의 기억들을 되돌아보았다. 

레이와의 첫만남은 너무나 강렬히 루나의 기억 속에 남아있었다. 

레이와 함께한 모든 순간 또한 여전히 뚜렷하게 루나의 기억 속에 남아있었다. 

"..." 

레이가 어린 시절 고아들을 거둔 것은 호의나 동정 때문이 아니었다. 

아주 가끔, 레이는 루나 앞에서... 루나가 지닌 마음의 짐을 덜어내려는 듯 그렇게 자신의 행위를 비하했었다. 

허나 루나는 여전히 어린 시절 레이의 눈동자에 담겨 있던 감정을 기억하고 있었다. 

레이는 아이들을 연민했다. 

연민하는 아이들에게 아닌 척하며 정을 주었고, 그 아이들을 지키고자 했다. 

어린 날의 레이는 피폐해진 정신을 지탱하기 위해 감정을 절제하고 벽을 세웠다. 

그리 위선을 행하는 척 철인을 연기했으나, 그럼에도 레이가 건네는 헌신은 처음부터 따뜻했다. 

과거에 비해... 

루나를 바라보는 레이의 눈동자에 더해진 감정은 죄책감 뿐이었다. 

한때 루나는 연민과 따뜻함이 깃든 레이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행복을 느꼈다. 

그리고 여전히 변치 않은 레이의 눈동자를 바라보는 게, 이제는 끔찍했다. 구역질이 나왔다. 

"..." 

루나는 과거에 매몰되어 가는 자신의 정신을 억지로 끌어올렸다. 

아직 레이가 마경으로 향하는 것이 결정된 게 아니었다. 

레이가 홀로 마경을 치자고 해도 동조하는 인물들이 없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 

레이 또한 자기 계획이 무산될 수 있으리란 걸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조금 이상했다. 루나가 생각하기에 레이의 계획은 무산될 확률이 월등히 높았다.

그럼에도 레이는 묘하게 자신의 계획이 실행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는 듯 했다. 

"..." 

루나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방을 나섰다. 

그리고는 밖으로 나가 점점 빠르게 걷더니 아예 정령을 소환해 비행하려 했다. 

허나 미처 정령을 부르기도 전에 루나는 자신이 늦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 

앞을 바라보던 루나가 등을 돌렸다. 

잿빛으로 물들어가는듯한 세상을 루나는 천천히 걸었다. 

여론을 하나로 수렴하지 못했더라도. 

제국의 황제라면 마경으로의 원정을 강압적으로 실행하는 것도 가능은 했다. 

당연히 불협 화음이 여기저기서 발생할 것이고 연합군 통솔에 한계도 있을 테지만, 사실 여기까지는 큰 문제가 아니긴 했다. 

그리고 만약 원정에 실패해 병력 손실이 생긴다면, 이것까지도 경우에 따라 부차적인 문제로 치부할 수 있었다. 

강압적으로 진행된 원정이 실패할 시 진짜 문제는 따로 있었다. 

인류의 중심은 제국이다. 

제국의 중심은 황제다. 

즉, 황제는 인류의 구심점이었다. 

헌데 강압적으로 진행된 원정이 실패하는 순간 황제의 권위는 심대한 타격을 입는다. 

막강한 상징성으로 인류의 100년 전쟁을 통솔해야할 황제의 권위가 추락해버리면 정말 감당이 안 됐다. 

그렇기에 황제는 일단 침묵하며 각 세력의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런데 대부분의 권력자들도 황제와 입장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적극적으로 원정 같은 걸 밀어붙였다가 망하면 뒷감당을 어떻게 한단 말인가. 

이런 상황에서 유일하게 레이만이 강력하게 마경으로의 원정을 주장했다. 

상식을 벗어난 업적을 연거푸 이룬 제국의 수호자가 강력하게 주장하자 다들 처음에는 레이의 권위에 눌려 서로 눈치를 봤다. 

허나 황제가 침묵하고, 에른스트 또한 논의가 너무 과열되었을 때나 개입하며 말을 아끼자 분위기가 조금씩 변했다. 

사실, 레이는 이런 자리에서 무시당할 조건도 충분히 갖추고 있었다. 

나이도 어리고 타고난 신분도 천한데다 명확한 실권을 쥐고 있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물론 면전에서 레이를 무시하는 정신나간 놈은 없었지만, 더 이상 레이의 권위에 겁 먹어 입을 다물고 있지는 않았다. 

"말라죽다니요." 

한 왕국의 귀족이 레이의 발언에 반박했다. 

"백년대계, 이백년대계를 세워서라도 차근차근 다시 대지를 수복해나가면 되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이번엔 청색 마탑주 이자벨이 귀족의 의견에 공감을 표했다. 

"이건 꿀을 바른 함정입니다. 응해줄 필요가 없다는 게 제 견해입니다." 

"했던 말을 다시하게 만드는군. 대지를 수복해? 근거 없는 낙관적인 견해로 멸망을 막을 유일한 기회를 외면하려 하는가?" 

대화는 빙빙 돌았다. 

그리고 레이의 주장에 반대하는 자들도 늘어났다. 

이제는 이 회의장에 있는 이들 중 상당수가, 레이가 공명심에 취해 주제 파악도 못하고 무리한 고집을 떠들어댄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지금 누가봐도 레이의 꼴이 우습기는 했다. 

그나마 이제까지 레이가 세운 공적이 있기에 다들 함부로 비웃음을 내비치지 못할 뿐이었다. 

그때, 마물 연구에 관한 저명한 학자이자 제국 북부에 영지를 지니고 있는 귀족이 조심스레 의견을 개진했다. 

"수호자께서 하시는 말씀이 그릇되었다고 생각하진 않으나... 제국의 역사를 돌아봐도 마경으로의 원정은 유례가 없는 시도입니다." 

유례가 없는 시도이기에 정보가 부족하다. 정보가 부족하기에 변수가 너무 많고, 그렇기에 이 원정은 너무 위험하다. 

귀족은 그런 식의 논리를 전개하려 했으나 레이가 말을 끊었다. 

"아니, 이번이 두 번째다." 

"..." 

침묵하고만 있던 황제가 처음으로 레이를 돌아보았다. 

레이는 한쪽만 붉게 물든 눈동자로 회의장에 모인 인물들을 돌아보며 거칠어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홀로 기적을 이루고 고독한 최후를 맞이했다. 너희들은 이제라도 그의 죽음에 다하지 못했던 의무를 이행해야 한다." 

알아들을 수가 없는 이야기였다. 

누군가가 따지고 들기 위해 입을 열려는데, 마침 남부 변경백의 서신이 도착했다. 

대기하고 있던 시종이 알렉산데르의 서신을 읽었다. 

내용을 요약하자면 나는 나의 고향과 남부의 신민들을 버릴 수 없으니 혼자서라도 끝까지 맞서 싸우겠다, 뭐 그런 내용이었다. 

서신의 내용을 들은 회의 참가자들의 반응은 각양각색이었다. 

알렉산데르의 정치적 목적을 파악하고 헛웃음을 삼키는 자들도 있었고, 그의 기백을 칭찬하면서도 무모하다고 고개를 젓는 자들도 있었다. 

서신의 마지막에는 자신과 뜻을 같이하는 자들을 황성으로 보낼테니 회의에 참여시켜달라고 부탁하고 있었다. 

서신의 내용을 전부 들은 황제가 잠시 휴회를 지시했다. 

허나 휴회 시간 동안 회의장을 떠나는 이들은 적었다. 다들 서로 의견을 나누기 바빴는데, 레이가 자리에서 의자를 끌며 일어났다. 

"좀 쉬다 오겠습니다." 

레이는 그리 말하고 시종에게 휴게실로 안내해주기를 부탁했다. 

알렉산데르의 저의가 무엇이든 대외적으로는 레이에게 협력하겠다고 입장을 표했으니 이제 혼자서 광대짓을 하는 것도 끝이었다. 

레이는 가라앉은 얼굴로 회의장을 벗어났다. 

로얄가드 파울라가 자리를 지키고 서 있다가 눈을 살짝 크게 떴다. 

면식이 있다고 표현하기에도 좀 모자랐지만, 어쨌든 얼굴을 아는 자가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파울라는 자연스레 표정 위로 호의를 드러냈는데, 그건 상대가 황도 방위전의 영웅 중 한 명이었기 때문이다. 

"반갑습니다, 안소니우스 님. 로얄가드, 파울라입니다. 혹시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황도에 방문하셨습니까?" 

상대가 안소니우스인만큼 꽤 살갑게 인사를 건넸으나 안소니우스는 고개를 한 번 젓고는 계속해서 다가왔다. 

파울라는 당연히 불쾌감을 느꼈으나, 안소니우스는 파울라를 그냥 지나쳐버렸다. 

파울라가 안소니우스를 제지하기 위해 손을 뻗었으나 신성 결계에 막혀 닿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본 다른 기사들이 검을 뽑으려 했다. 

헌데 그때. 

뭐라 설명하기 막연한 직감을 느낀 파울라가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거대한 방패를 손에 쥐며 명령했다. 

"모두 진열을 갖춰라." 

잠시 얼이 빠졌던 기사들이 뒤늦게 검을 꽂아넣고 방패를 들었다. 

그리고. 

앞으로 나아간 안소니우스가 성검을 손에 쥐었다. 

지켜보던 모두가 호흡도 멈춘 채 눈을 크게 뜬 순간. 

안소니우스가 이끄는 대로 성검이 부드럽게 뽑혀나왔다. 

그와 동시에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땅이 울리며 눈이 멀 것처럼 강렬한 섬광의 기둥이 하늘로 솟구쳤다. 

공기를 울리는 충격파에 직격당한 탓에 파울라는 귀에서 핏물을 줄줄 흘렸다. 

그럼에도 파울라는 만면에 웃음 꽃을 피우며 방패까지 치워내고 자기 몸으로 충격을 견디며 앞을 바라보았다. 

각막을 태워버릴 것처럼 강렬한 섬광 속에서. 

성검을 쥔 안소니우스가 걸어나오며 짧게 선언했다. 

"성전을, 준비하라." 

계시가 내렸다. 

신성력으로 이루어진 빛의 기둥이 황도에서 나타났다. 

지상에 전개되어 있던 마법 결계를 꿰뚫고 나가 더욱 거대해진 빛의 기둥은 구름을 밀어내고 천공으로 치솟았다. 

빛의 기둥은 대륙에서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 모두 볼 수 있을 만큼 높이높이 치솟아 세상 만물을 향해 축복의 기운을 선사했다. 

모두가 천공을 향해 뻗어가는 빛의 기둥을 향해 고개를 돌렸으나, 레이는 굳이 바깥의 풍경을 바라보지 않았다. 

레이는 그냥 자리에 앉아서, 몸을 훑고 지나가는 거대한 신성력의 파동을 느끼며 천천히 술잔을 들어올렸다. 

"그래, 안소니우스." 

너를 위해. 

나를 위해. 

그리고 너와 내가 애정하는 모든 이들을 위해. 

"우리의 신화를... 완성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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