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홍등가의 소드마스터-313화 (313/446)

완성 (4)

313화 

아도이아에게 안내받던 도중. 

레이는 황성 앞에서 에른스트와 만났다. 

울적한 기색을 내보이던 레이는 바로 표정을 바꾸며 에른스트와 인사를 나누었다. 

에른스트는 묘한 눈빛으로 레이를 바라보았다. 

엘프의 영역에 다녀온 후 레이의 분위기가 변했다는 것을 에른스트도 인지하고 있었다. 

초월의 경지에 발을 들인 건 아닌 것 같은데, 그럼에도 무언가 정체를 알기 힘든 스산함이 번져나오고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에른스트가 레이를 경계하는 것은 아니었다. 

"네 의견은 어떻느냐?" 

에른스트가 레이와 함께 황성 안으로 들어서며 물었다. 

쉽사리 대답할만한 질문이 아니었음에도 레이는 단언했다. 

"마경을 쳐야 합니다." 

"지난한 일이다. 감수해야할 위험이 너무 크다. 멸망을 앞당기는 결과만 초래할 확률이 높다." 

"그렇다 해도 천천히 말라죽기를 택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입니다. 우리가 지금 이 난제를 해결하지 않는다면 후대는 유일한 기회를 놓친 우리를 어리석었다가 비난하며 원망하겠지요. 역사의 죄인이 될 수는 없습니다." 

"...원정을 성공할 자신이 있느냐?" 

"예, 있습니다." 

"..." 

레이가 이리 중대한 사안에 대해 자신 없는 것을 자신 있다고 허언을 할 성격은 아니었다. 

허나 에른스트가 고민해보기에도 마경으로의 원정은 실패했을 때 감당해야할 대가가 너무 컸다. 

생각이 복잡해보이는 에른스트를 향해 레이가 물었다. 

"회의에서 제 의견을 적극적으로 제시해도 됩니까?" 

"원하는 대로 하여도 된다. 황제 폐하께서는 신중히 모두의 의견을 경청하실 테니, 네가 발언하고자 하는 내용이 있다면 거리낄 것 없다." 

"그렇습니까..." 

레이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국에서 레이의 발언권은 굉장히 강한 편이었다. 

허나 그건 어디까지나 황제와 에른스트가 레이의 배경이 되어주었기 때문이었다. 

레이는 '자기 세력'이라 칭할 수 있는 기반이 미약했기에 두 사람의 지지 없이는 혼자서 대단한 영향력을 끼칠 수 없었다. 

나쁘게 표현하자면 실권 없는 쭉정이었는데, 이건 레이가 스스로 원한 결과였다. 

실권을 많이 가지고 있지 않았기에 레이는 지금까지 부담 없이 건방을 떨 수 있었다. 

때문에 레이는, 에른스트가 설령 거북함을 표했다고 하더라도 이제부터 진행될 대륙 회의에서 자유롭게 발언할 생각이었다. 다행히 허락을 받았지만 말이다. 

이내 레이는 황성 내부의 회의장 앞에 도착했다. 

에른스트가 레이에게 먼저 입장하라며 발걸음을 멈추고는 짧게 당부했다. 

"공적인 자리에서는 내가 너를 존대할 것이다. 저 안에서는 자신을 함부로 낮추지 말거라." 

"알겠습니다." 

레이는 고개를 끄덕이고 회의장으로 들어섰다. 

시종이 레이를 황제와 가장 가까운 상석 중 한 곳으로 안내해주었다. 

잠시 뒤, 대륙 회의가 시작되었다. 

대륙 회의에는 총 6개국이 참가하게 된다. 

제대로 된 국가의 형태를 이루고 있는 세력들은 전부 참가한다고 보아도 무방했다. 

거창한 의견 조율이 필요한 사안이 발생했을 때만 대륙 회의가 개최되었는데, 대륙 회의의 역사를 뒤져봐도 이번만큼 심각한 사안은 찾기가 힘들었다. 

각국을 대표할만한 권력자나 그들의 대리인, 그리고 실무자들이 다수 회의에 참석했다. 

물론 그들이 전부 황성의 회의장에 모인 것은 아니었다. 

츠즈즉! 

고위 마법사들이 대륙 회의를 위해 준비된 황성의 회의장 안에 미리 각인되어 있던 마법진을 점검하고 조율한 뒤 발동시켰다. 

그러자 멀리 떨어진 공간에서 회의를 준비하고 있던 참석자들의 모습이 황성의 회의장 안에 뚜렷하게 구현되었다. 

레이는 '증강 현실'이라는 단어가 자연스레 머리 속에 떠올랐다. 

이 세계의 마법이란 건 21세기 지구를 경험했던 레이에게도 꽤나 놀라운 경험을 체험시켜주고는 했다. 

다행히 마법진은 정상적으로 작동하여 서로 다른 장소에 있는 이들이 마치 한 곳에 모인 것처럼 소통할 수 있었다. 

회의 참석자 중에서는 마탑주나 이름 높은 기사단의 단장, 그리고 엘프도 보였다. 

참석자의 신분을 확인하는 절차를 거친 뒤, 엘프를 제외한 모두가 가장 먼저 황제에게 예를 갖추었다. 

황제가 이 대륙의 주인임을 모르는 자들은 없었다. 

이제껏 제국이 대륙을 일통할 힘이 없어서 하지 못한 것이 아니었다. 

다만 그러한 통일이 결국 분열과 비효율을 발생시킨다는 것을 알았기에 제국은 인류의 중심을 자처하며 자리를 지켰을 뿐이었다. 

성의를 다해 예를 갖추는 참석자들을 바라보던 황제가 입을 열었다. 

"시작하지." 

대륙 회의가 시작되었다. 

일단 전문적인 지식을 갖춘 각국의 마법사와 학자, 그리고 실무자들이 먼저 논의를 시작했다. 

1년 안에 부활할 드래곤, 프레체스의 제거를 포기하게 된다면 우리는 얼마나 거대한 피해를 감수해야 하는가? 

마경이 확장되게 되면 일단 전선이 미친듯이 넓어진다. 지금처럼 마경을 감시하고 틀어막는 건 불가능하다. 

마족들은 지금보다 훨씬 쉽사리 인류가 살아가는 대륙을 침범해 혼란을 일으키려 들 것이다. 

세계수의 영역까지 침식되는 순간 답이 없기에 엘프 쪽에도 계속해서 지원을 쏟아부어야 한다. 

엘-람의 축복이 약해지며 마경화되지 않은 대지 또한 환경이 나쁜 쪽으로 변질될 것이다. 

학자들의 의견이 조금씩 상이하긴 했지만... 

어쨌든 우리는 좆 됐다라는 결론에는 이견이 없었다. 

어차피 침식되는 건 알리모와 제국 땅 아니냐, 변방에 있는 우리는 크게 상관 없지 않느냐, 뭐 이런 무식한 생각을 품고 있던 소수도 슬슬 현실을 자각하기 시작했다. 

레이는 학자들의 토의를 들으며 한숨을 삼켰다. 

'환경 변화에 대해서는 안이한 의견이 비교적 많네.' 

예측하기 쉽지 않은 문제이기는 했다. 

붉은 하늘, 끈적한 공기, 메마른 대지가 그 시대를 살아갈 인간에게 얼마나 끔찍한 우울감을 선사할지 직접 경험해보지 않고 어찌 확답하겠는가. 

그래도 마물의 흉포화에 대해 걱정하는 목소리는 상당히 컸다. 

토의가 길어질수록 낙관적인 의견은 찾기 힘들어졌다. 

마경이 대륙 끝자락만 차지하고 있을 때도 인류에게 커다란 위협이었다. 

헌데 마경이 대륙의 반절 가까이를 침식한다면 얼마나 끔찍한 시기가 찾아올지... 막막하기 그지없었다. 

문제는, 인류가 총력전의 각오를 지니고 마경으로 원정이라도 감행하지 않는 이상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거기다 정황을 보면 이게 프레체스의 함정일 확률도 상당했다. 

마경에 병력을 들이밀었다가 그냥 꼬라박아 버리면 진짜 여러모로 감당이 안 됐다. 

"..." 

마경 확장의 폐해에 관해 마법사와 학자, 그리고 실무자들의 의견이 어느 정도 수렴될 때까지 대부분의 권력자들은 침묵을 유지했다. 

그때, 레이가 가장 먼저 입을 열었다. 

"다른 선택지가 없습니다. 마경을 쳐야 합니다." 

대륙 회의가 시작된 지 일주일이 흘렀다. 

마경의 확장을 어떻게 저지할 것인가, 이에 관한 논의의 진척은 지지부진했다. 

각 국가 내에서도 의견이 달랐고, 황제는 아직까지 침묵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대로 시간이 흐른다면 대륙 회의의 논제는 '마경 확장 저지'에서 '확장될 마경에 대한 대비'로 전환될 것이다. 

"..." 

수많은 권력자들을 포함해, 알렉산데르 또한 마경으로의 원정이 성사되리란 것에 극히 회의적이었다. 

감수해야할 리스크가 너무 크다보니 아무래도 분위기가 보수적으로 흐를 수밖에 없었다. 

마경의 원정은 실패할 경우 누구 한 명이 책임지고 마무리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허나 알렉산데르는 교황청 내부의 여론만큼은 다를 것이라 예상했다. 

그도 그럴게 현재 신성 교단의 기반은 대부분 남부에 집중되어 있지 않은가? 

스스로를 신성 교단의 신실한 신도라고 자부하는 수많은 신도들 또한 남부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남부가 통째로 소실된다면 교단은 어마어마한 인적 자원과 물적 자원의 손실을 감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어떻게든 남부를 지켜야한다는 여론이 다른 곳보다 강세일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교단은 대륙 회의에 추기경 한 명을 파견하고는 교황청에 고위 성직자들을 불러 따로 회의를 진행했다. 

교황, 추기경 다수, 그리고 교단의 주요 실무자들이 모여 진행된 회의에서는 첫날부터 이주 계획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마경을 뚫고 들어가 프레체스를 죽여서 남부를 지켜야한다는 선택지는 처음부터 논외인 것처럼 취급했다. 

알렉산데르는 교황청 내부의 분위기를 상당히 이해하기 힘들었다. 

허나 고위 성직자들이 그러한 태도를 취하는 것에는 사실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신성 교단의 뿌리는 굉장히 오래되었다. 그 뿌리의 깊이는 제국보다도 한참이 까마득했다. 

오랜 역사 속에서 엘-람을 추앙하는 교단은 이름이 바뀌고, 형태가 바뀌고, 분파가 나뉘기도 했으며 중심지 또한 계속해서 변했다. 

그러다 제국이 건설될 때쯤 지금과 같은 형태와 구조로 완전히 정착되었다. 

신성 교단은 저들의 뿌리와 관련된 자료를 많이 소실하기는 했지만, 또한 여전히 남아있는 기록들도 꽤 있었다. 

남아있는 기록들을 살펴보다 보면 광신이 절정에 이른 시기의 교단이나 국가가 마경을 정화하겠다고 대규모 군세를 일으켰던 경우를 꽤 빈번하게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교단은 과거 광신도들의 역사로부터 한 가지 교훈을 얻었다. 

[마경에 발을 들이면 안 된다.] 

그건 금기나 마찬가지였다. 그건 그냥 멍청하고 정신나간 자살행위였다. 

이와 관련된 내용은 금서로 취급되어 읽을 수 있는 사람이 한정되었는데, 사실 알렉산데르도 읽으려 했다면 찾아 읽을 수 있었다. 

다만 굳이 교단의 금서까지 찾아 읽을 만큼 종교에 열성적이지는 않았을 뿐이었다. 

어쨌든 교단의 고위 성직자들은 어떻게 해야 피해를 최소화해서 이주가 가능할까 열심히 토론했다. 

교단의 피해를 최소화해야 백년 뒤의 미래까지 대비할 수 있었다. 

"마경의 확장이 시작되기 전에 봉인된 유물들을 우선적으로 옮겨야 합니다. 결코 늦어지면 안 됩니다." 

"곧 교황청을 신설한 적합한 부지의 후보군이 추려질 테니, 잠시만 기다려보시지요." 

"성녀 또한 새로이 추대해야 합니다. 아무래도..." 

"제가 성녀 후보 중에 적합한 인물을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아직까지 교황청은 공식적인 입장을 밝히지는 않았다. 

허나 굳이 공식적인 입장을 밝히지 않아도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마경 원정에 관한 논의는 좌절될 것이다. 

그럼 그때 물밑에서 논의가 이루어지던 교황청 이주 문제를 외부에 공론화시키면 되었다. 

"..." 

며칠 동안 회의장에서 자리를 지키던 알렉산데르가 눈살을 찌푸렸다. 

이들의 논의에서는 신도들과 신민들의 안위를 어찌 보호해야하는가는 뒷순위로 밀려 있었다. 

반드시 우선해야 할 것을 우선하고 있는 것은 맞았다만. 

그래도 가만히 듣는 입장에서 기분이 유쾌하지는 않았다. 

결국 알렉산데르가 의자에서 일어나며 짧게 선언했다. 

"나는 동의할 수 없소." 

"알렉산데르 추기경,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나는, 남부를 포기할 수 없습니다. 남부는 나의 고향이오 나의 사람들이 삶을 영위하는 공간이니." 

알렉산데르의 발언에 마음 깊이 감동한 사람은 회의장에 몇 없었다. 

심지어 추기경 한 명은 무언가를 눈치챘는지 대놓고 한숨까지 쉬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알렉산데르는 뻔뻔하게 등을 돌리고 회의장을 빠져나갔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