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성 (2)
311화
마경은 지옥이다.
리실로테가 남긴 환영에서 간접 체험을 해보았을 뿐이지만 레이는 확신했다.
수천 년 동안 악신의 영향력에 절여있던 대지 위다.
악신을 따르는 세력에게는 무한한 축복이, 악신을 적대하는 세력에게는 무한한 저주가 흐르는 대지였다.
수백 년 동안 침략받지 않은 마경 안에 어떤 변수가 존재할지 계산하는 것도 힘들었다.
분명한 점은, 고의로 자기 존재를 노출한 프레체스가 아무 대비도 안 해놓고 그런 도박수를 던졌을 리는 없다는 것이었다.
상황이 많이 어려웠다.
악마 숭배자가 아니라면 마경 안에서 장기간 전력 유지는 불가능했다.
마경에 전선을 형성해 몇 달씩 힘겨루기를 하며 차근차근 함정을 돌파하며 전진한다... 이런 전략은 그냥 집단 자살이었다.
'세세한 전술이야 어떻게 짜든...'
주력군이 최대한 빠르게 '표적'이 있는 지점까지 관통하듯 기동해야 한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기동이 늦어질수록 퇴로를 잃고 갇혀 죽을 확률이 급격히 치솟았다.
극악의 환경 아래 적들이 준비한 함정들을 갈아내며 밀고들어가기 위해서는 무조건 로드 급 다수가 필요했다.
하지만.
'에른스트 프리슬란... 제국의 소드마스터께서는 황도에 남는다.'
레이는 그렇게 확신했다.
이는 엘프들이 수호자 한 명을 세계수 곁에 남긴 것과 같은 이치였다.
악마숭배자 놈들이 빈집털이를 노리지 않으리라고 누가 장담하겠는가.
누군가는 제국의 황제를 수호하고, 또한 황도를 보존해야 했다.
그렇기에 설령 로얄가드 대다수가 원정대에 합류할지언정, 에른스트만은 황제의 곁에 머물 것이다.
그렇기에 알렉산데르라도 반드시 전쟁에 참여해 최전방에서 활약해주어야 했다.
'위험성이 애매해서 문제야...'
프레체스를 제거하지 못하면 무조건 인류 멸망.
끔찍한 가정이기는 하나 상황이 이랬으면 설득하기는 편했을 것이다.
허나 현 인류의 전력이라면 수많은 희생을 치르겠지만 100년 전쟁 또한 어떻게든 견뎌낼만 했다.
제국의 최고위층이 이러한 계산을 못할 리가 없었고, 그렇기에 의견 통합이 쉽지만은 않을 터다.
물론 엘프들은 예고할 것이다.
1000년 안에 우리는 멸망해버리고 말 것이라고!
하지만 인간에게 일천 년은 너무... 와닿는 수치가 아니었다.
'10년 안에 좆 될 상황에 처해도 현실 파악 제대로 못하고 헛소리하는 새끼들이 태반일 텐데, 뭘.'
레이는 전생의 기억까지 같이 떠올려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십 년도 긴데 일천 년 안에 찾아올 멸망을 막아내기 위해 힘을 보태라?
이건 인간을 설득할 수 있는 명분이 되지 못했다.
'황제 폐하라 해도 가장 앞장서서 강압적으로 전쟁을 지시하기엔 정치적 부담이 너무 크단 말이야.'
여기서 남부의 변경백, 알렉산데르의 역할이 중요해졌다.
프레체스가 부활하면 제국의 남부는 거의 다 날아갔다.
알렉산데르의 고향과 기반이 한꺼번에 소실됨을 뜻했다.
'그렇다고 이 양반이 모든 걸 잃게 되는 건 아니야. 그냥 자기 사람들 챙겨서 교단과 함께 남부를 포기하고 물러서면... 자기 세력은 어느 정도 보존할 수 있겠지.'
알렉산데르가 계산적이고 이기적인 인물이며 애향심조차 지니고 있지 않다면 먼저 나서서 마경을 공격해야한다고 목소리를 높일 이유가 적었다.
합당하고 분명한 이득이 보장되지 않는 이상 굳이 먼저 나서지 않을 것이다.
'그럼 망하는 거지.'
여론을 수렴하기 위해서는...
제국 남부의 구심점인 알렉산데르가 남부를 지키기 위한 결사의 항전을 준비해야한다고 강력하게 '먼저' 주장해야 했다.
니들이 안 도와주면 우리끼리라도 마경에 꼬라박겠다고, 거의 그 정도 수준으로 빠른 시일 내에 주장해야 했다.
이 조건이 선행되지 않으면 인류가 반년 안에 의견을 통합해서 마경을 침공 하는 건 어림도 없었다.
가지고 있는 땅덩어리를 모조리 소실하게 될 남부의 권력자들부터가 전쟁에 부정적인데 여론을 어떻게 움직이겠는가.
'시간이 충분했으면 물밑으로 정치적 거래 같은 걸 진행해서 알렉산데르나 신성 교단과 적당한 합의점을 찾고 그림을 예쁘게 그려볼 수도 있었겠지만...'
물밑 협상을 제대로 진행할 여유가 없었다.
기껏해야 구두 계약 정도나 가능할 것이다.
알렉산데르가 먼저 적극적으로 마경 침공 주장에 힘을 실어주면 황실은 전쟁이 마무리된 후 특정 사안에 관한 편의를 봐주겠다...
딱 이 정도 수준의 구두 계약 한계였다.
'결국 알렉산데르 입장에서는 뒤통수 맞을 각오까지 하고 손해보는 짓을 해야한다는 건데.'
물론 이번 사안이 알렉산데르에게 명성이나 영향력을 증대시킬 결정적인 기회로 작용할 수도 있었으나.
그럼에도 최소한의 애향심과 선의, 그리고 황실을 향한 신뢰가 있어야 그런 선택이 가능할 것이다.
레이는 알렉산데르가 이제까지 쌓은 공적이 완전한 위선이 아니기를 바라며 다시 입을 열었다.
"뭐... 쉽사리 속내를 말씀해주시진 않을 테니, 저는 추기경께서 부디 따뜻한 마음을 품고 계시길 바라겠습니다."
알렉산데르가 듣기에는 참 앞뒤 없는 이야기였다.
헌데 레이는 또 황당한 소리를 했다.
"제가 황도에 귀환한 후 제 고모님을 바로 교황청으로 보낼 테니 저주 문제를 해결해주시길 바랍니다."
"...교황청은 두 분을 함께 초대하였소. 기왕이면..."
"알렉산데르 님, 저한테 빚진 거 있잖습니까."
"..."
참 생뚱 맞은 소리였는데, 또 무슨 얘기를 하려는지 감이 안 잡히는 건 아니었다.
레이가 어깨를 한 번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황위 계승 때 장난질 좀 치시려다 마족 놈 농감에 얽혀가지고 다 같이 좆 될 뻔 했잖습니까. 그거 일 커지기 전에 자기 팔다리 분질러가며 틀어막고 대충 덮고 넘어가자고 한 게 누구인지 아실 텐데요."
"..."
"그거 말고도 깐깐하게 따질 거 찾으면 몇 개 더 있기는 한데, 어쨌든 은연 중에 도움드렸던 게 작지는 않습니다. 그거 굳이 남들 앞에서 생색내지 않을 테니까 우리 고모님 치료만 좀 잘 부탁드립니다."
알렉산데르는 레이의 태도 변화에 어떻게 대처해야하나 바로 감을 잡기가 힘들었다.
가까운 거리에 로드 급까지 존재했으니 상황 판단하기가 참 어려웠다.
그런 알렉산데르에게 레이가 한숨을 푹 쉬며 피곤한 기색을 드러냈다.
"제가 교단을 무시하려는 게 아니고, 왔다갔다 낭비할 시간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가는 길에 엘프에게 들어보십쇼. 이해하실 겁니다."
"...심각한 사안이오?"
"하나만 유념하십시오. 정치적으로 간 보며 의견 조율할 시간이 없어요. 혹시 남부를 지키실 생각이 있으시면 대외적으로 강하게 의견 표명을 해주십쇼. 그래야 저도 도와드립니다. 저는 반드시 '들이박자는 쪽'이라서."
레이가 떠날 준비를 하는 사절단과 엘프들을 향해 손끝을 향했다.
이만 대화를 끝내고 돌아가자는 레이의 손짓에 알렉산데르는 절대권역을 해제하려다 물었다.
"무슨 사안인지 간단하게라도 설명해주겠소?
"5년 안에 대륙 절반이 박살날 예정입니다. 둘 중 하나 선택하시면 돼요. 남부를 버리고 측근들과 새살림을 차리시거나, 겉은 번지르르한 원대한 대의를 위해 앞장서서 마경에 머리를 들이밀거나."
*
레이가 황도로 복귀하였다.
레이는 아주 간단하게 황제에게 보고를 올리고 황성에서 물러났다.
프레체스에 관한 사안을 황제와 고위 귀족들에게 설명하고 납득시키는 것은 레이와 동행한 엘프들이 할 일이었다.
알렉산데르는 남부로 돌아갔고, 소수의 엘프가 교황청에 직접 이번 사안을 설명하기 위해 알렉산데르와 동행했다.
그 외에도 대륙에 존재하는 각각의 국가에 엘프의 사절단이 찾아갔다.
대륙의 절반 가까이가 오염될 것이며, 일백 년에 이르는 전쟁이 시작될 것이라는 예측은 모두에게 엄청난 충격을 줄 것이다.
헌데 그렇다고 마경에 총공세를 취하자는 주장이 쉽사리 받아들여질 리는 없었다.
모두가 레이처럼 붉은 하늘 아래 곪아가는 우울과 좌절을 보았다면 마음이 바뀌었을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사람의 정신머리는 직접 겪지 못한 일에 대해선 안일한 법이었다.
"길게 잡아도 한 달은 못줄 것 같은데."
한 달 이후에도 의견 통합이 안 되고 황제가 굉장히 강경하게 나서지 않는다면 그냥 글렀다고 봐야했다.
마경 침공 작전에 관한 논의는 흐지부지 넘어가고 일백 년의 전쟁을 어찌 대비해야 하는가 논의를 시작할 터다.
만약 그리된다면 레이도 더는 고집 부리지 않고 환영 속에서 보았던 루나의 조언을 따를 생각이었다.
"..."
차라리 일이 잘 풀리지 않아 침공 계획이 무산되기를...
무심코 그런 생각을 품었던 레이가 인상을 찌푸리며 자기 미간을 매만졌다.
며칠 전 루나의 은색 눈동자에서 읽어냈던 강렬한 원망과 분노의 감정이 레이의 심란함을 부추겼다.
허나 레이로서도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환영이 보여준 미래에서 레이는 결국 오래 살지 못하고 죽었다.
붉은 하늘을 막아내기 위해 몸을 더 혹사한 것이 아님에도 그리 되었다.
너무 당연한 미래이긴 했는데...
환영이 보여준 미래에서 자기가 이미 죽고 없음을 확인했을 때 레이는 잠시 평정을 유지하지 못했었다.
그래, 사람의 정신머리는 직접 겪지 못한 일에 대해서는 안일한 법이었으까, 예상했던 결과와 맞닥트렸음에도 레이는 동요했었다.
어쨌든.
레이에게 남은 시간이 많지 않았다.
애정하는 이들을 붉은 하늘 아래에서 평생 지켜줄 수는 없다.
그렇기에 레이는 벌써 모든 걸 포기하고 멈춰설 수 없었다.
"하아."
레이가 불쾌한 사색을 벗어나기 위해 한숨을 푹 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마침 요하나와 데런이 큰길에서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두 사람은 휴가 기간이 시작됐음에도 혹시 레이가 일찍 귀환할까 싶어 잠시 황도에 머물고 있었는데, 덕분에 이렇게 얼굴을 보게 되었다.
반갑게 인사를 나눈 후.
데런이 레이를 마주보며 물었다.
"형님, 눈동자 하나가 엄청 빨간데요?"
"아... 다친 건 아니고, 시력을 강화해보려고 마나 좀 이리저리 운용하다 잠깐 이렇게 됐어."
"오, 혹시 바라만 봐도 적을 속박하는 능력이 생겼다거나, 아님 선이 보인다던가..."
"넌 그걸 아직도 기억하냐?"
꼬맹이 시절에 애들 읽어줄 동화책이 부족해서 아이디어가 떠오르는 대로 대충 이어붙인 이야기를 몇 번 들려줬는데, 데런은 아직도 기억하는 모양이었다.
데런이 옛날 생각이 났는지 히죽이며 중얼거렸다.
"그때 형님 이야기 듣고 개안하겠다고 이상한 짓 하다가 혼나지 않았어요?"
"모닥불 두 시간 넘게 바라보고 있다가 머리카락 태워먹고 안구 화상을 입었었나..."
레이는 데런과 같이 낄낄 거리고는 요하나를 돌아보았다.
"요하나, 너 혹시 내가 오시리스 백작령에서 줬던 목걸이 아직 가지고 다니냐? 아쿠아닉스 그거."
"...?!"
레이 얼굴 봐서 반갑다고 웃던 요하나가 예상치 못한 질문에 흠칫 놀라 표정을 굳혔다.
그야... 요하나는 그 목걸이를 잃어버리지 않도록 잘 보관하고 있기는 했지만, 레이에게 그 사실을 썩 들키고 싶지는 않았다.
레이가 적당히 골라 하나 툭 던져준 장신구였다.
그 뒤로는 요하나가 차고 다니든 말든 관심도 거의 가져주지 않았고 말이다.
요하나는 자존심 때문에라도 레이가 대충 던져준 물건을 애지중지 여긴 것처럼 보이고 싶지 않았다.
"갑자기 그건 왜 물어...? 잠깐만... 어디다 넣어놓고 까먹은 것 같은데... 그래도 잃어버리진 않았을 거야!"
찾아보면 찾을 수는 있을 것이다.
그리 뒷말을 덧붙이며 샐쭉한 표정을 짓는 요하나를 보며 레이는 뒷목을 긁었다.
"요하나, 내가 널 가족으로서 많이 아끼고 사랑하는 거 알지?"
갑작스러운 시비에 요하나의 표정이 더욱 샐쭉해졌다.
굳이 '가족으로서'라는 수식을 꼭 덧붙여야 되나? 선을 긋는 것도 아니고.
물론 레이는 선을 그을 의도로 덧붙인 수식이 맞았다.
"멍하니 있다가 너 목걸이 줬을 때가 생각났는데, 이제 와서 곱씹어보니까 섭섭했겠다 싶더라고. 서랍에 있던 거 적당히 쥐어 줬잖아."
"...그랬나? 딱히 섭섭하거나 그런 거...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안 그랬어, 응."
진짜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그 섭섭한 감정 아직까지 아주 잘 기억하고 있었다.
이 섭섭한 감정이 시간이 지나도 희석이 안 되는 이유가 요하나 입장에서는 아주 골 때렸다.
옛날에, 레이가 여행을 갔다온 선물로 카렌에게는 목걸이를 주고 요하나에게는 검 한 자루를 준 적이 있었다.
카렌은 레이에게 선물받은 목걸이를 자주 착용하고 다녔다. 거기까지는 아무 문제 없었다.
다만 레이는, 카렌이 장기간 목걸이를 착용하다가 하루 벗었을 때에 오늘 목걸이 어디갔냐고 웃는 얼굴로 참견하고는 했다.
그게 그냥 일상이었다.
그런 모습을 자주 접했던 요하나는, 레이에게 목걸이를 건네 받은 후 기회가 될 때 레이 앞에서 목걸이를 걸었다 안 걸었다 해보았다.
맨날 걸고 다니던 목걸이 오늘은 어디다 두고 왔어?
그 말 한 마디만 해주었으면 딱히 섭섭한 감정 없이 좋은 기억만 남길 수 있을 터였다.
근데 레이는 요하나가 목걸이를 걸고 있든 말든 반응이 없었다.
약간 마음이 상한 요하나는 목걸이를 걸었다 안 걸었다 하는 주기를 계속 바꿔보았다.
오래 걸었다가 하루 안 걸어보기도 하고 그 반대도 해보고...
근데 아무리 주기를 바꿔가며 레이 앞에서 알짱거려도 레이는 목걸이에 대해 언급해주지 않았다.
향수 냄새보다 땀 냄새가 어울리니마니 뭐 그딴 소리나 지껄여댔다.
결국 요하나는 혼자서 화를 삭이며 한달 넘게 목걸이를 주머니에 넣고 다녔다.
아니 그쯤 했으면 '혹시 목걸이 잃어버렸냐'고 한 마디 정도는 해줄만 하지 않은가?
그리 시간이 흘러, 목걸이를 주머니에 넣고 다닌지 40일 째 되어서 요하나는 간신히 레이에게 목걸이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정확히는 요하나 옆에 앉아있던 카렌에게 오늘은 목걸이 어디갔냐고 레이가 물어보는 걸 엿들을 수 있었다.
그 이후로!
요하나는 자기 목걸이를 되도록 보관만 했다.
그 뒤로도 레이와 카렌이 목걸이에 관해 가볍게 희희덕 거리는 장면을 접할 수 있었다.
덕분에 섭섭함을 좀 잊으려 할 때마다 그 장면을 보고 내상이 도져가지고 섭섭함을 아주 생생하게 간직할 수 있었다.
이제는 각인이 아주 단단히 되어서 시간 지나도 희석이 될 수 있을까 의문이었다.
근데 이걸 티 내는 것도 좀 없어 보이지 않은가?
감정적으로 섭섭한 것과 별개로 레이가 참 많은 걸 챙겨주었다는 걸 요하나가 모르지도 않았고 말이다.
목걸이는 레이가 진짜 아무 생각 없이 남는 거 대충 던져주고 까먹은 것 같았지만.
그래도 레이는 요하나에게 선물해준 아티펙트는 매번 자세히 살피며 기능 이상 따위가 없는지 확인해 주었다.
그거면 됐지, 뭐.
어쨌든 요하나는 의연한 척 하려고 했고, 레이도 최대한 담담하게 말했다.
"갑자기 좀 미안해지더라."
"뭐래. 이제 와서?"
평소처럼 적당히 퉁명스레 대꾸하는 요하나를 향해 레이가 새로 구매한 목걸이가 들어 있는 보관함을 꺼내들었다.
"내가 실수했으니까 만회는 해야겠다 싶어서. 그때 기분 나빴으면 내가 미안해."
"..."
반짝이는 자그마한 보석들로 장식되어 있는 목걸이 보관함이었다.
보관함 안에 들어 있는 목걸이가 값비싼 명품이든 싸구려든 간에, 어쨌든 '선물'로써 충분한 성의가 느껴지는 보관함이었다.
입을 삐죽 내민 요하나가 보관함을 건네 받으며 대꾸했다.
"갑자기 왜 이래?"
"싫어?"
"아니, 응, 고마워."
요하나는 함을 열어보지도 않고 그냥 바로 자기 품 속에 넣어버렸다.
함을 열어서 안에 있는 물건까지 확인하면 괜히 감정이 좀... 올라올 것 같았다.
요하나는 코를 훌쩍이고 싶은 충동을 억지로 참아내며 대수롭지 않게 웃었다.
허나 그때 이미 요하나의 눈가에는 물기가 많이 새어 나와있었다.
"우냐?"
그리 묻는 레이의 목소리에는 조금의 장난기도 어려있지 않았다.
툭, 요하나는 힘이 안 들어간 주먹으로 레이의 어깨를 쳤다.
그냥 좀... 모른 척하고 넘어가주면 좋으련만.
진짜 남들 보기에는 별 것도 아닌 걸로 질질 짜면 너무 꼴보기 싫을 것 같아 참으려고 했지만...
결국 눈물이 번져나와 땅으로 뚝뚝 떨어졌다.
요하나는 고개를 숙인 채 괜히 레이의 앞가슴을 툭툭 쳤다.
섭섭함이 가득 녹아있는 투정을 레이는 가만히 받아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