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성 (1)
310화
레이는 머리가 시큰거렸다.
울렁거릴만큼 감정의 격류가 몰아쳐서 도리어 현실감이 없었다.
지금 몰아치는 감정이 이제까지의 발악이 의미 없지 않았음에 느끼는 기쁨인지...
혹은 어찌 발버둥을 쳤어도 일백 년의 전쟁이라는 결과는 이미 정해져 있었음에 느끼는 분노와 억함인지 잘 구분되지 않았다.
레이는 번잡하게 뒤섞여 속을 울렁이게 하는 감정의 격류를 억누르며 정신을 다잡았다.
아직 상대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한 게 아니기에 계속 약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적의 수작질에... 응하려는 이유가 뭐지?"
서로 다른 초월적인 존재의 권능을 억지로 뒤섞어 놓은 프레체스의 육신이 영구히 유지될 수는 없다.
차원이 일렬로 정렬되는 시기가 완전히 지나가면 한계에 봉착할 것이다.
그 기한이 일백 년이었고, 지금의 비악마 세력에겐 그 시기를 이겨낼 저력이 충분히 갖추어져 있었다.
그럼에도 세상의 명운까지 걸어가며 적이 벌여놓은 도박판에 뛰어들어야하는 당위성이 엘프에게 충분한가, 레이는 의구심이 들었다.
"감추어둔 목적이라도 가지고 있어?"
"이유는 두 가지야. 남부가 완전히 침식되면 어머니의 영역과 가까이 맞닿게 돼. 일백 년을 이어갈 전쟁 중에 어떤 변수가 어머니를 위협하게 될지 알 수가 없어."
"..."
"그리고, 인간은 백년대계를 운운하지만 우리에게 일백 년은 짧은 시간이야."
"...무슨 뜻이지?"
"일백 년을 이어갈 전쟁에서 승리한다 해도 이미 침식되어 마경화된 대지의 절반도 수복하기 어려울 거야. 엘-람의 종, 장담하는데... 그리되면 일천 년 안에 우리는 반드시 패배한다."
라멘타의 예측은 완전히 틀렸다.
루나가 있는 이상, 차원이 일렬로 정렬되는 시기가 다 지나가기도 전에 인류는 번져나오던 마경을 밀어버릴 수 있을 것이다.
마경은 확장되기 이전의 범위까지 축소될 것이고, 어쩌면 그보다도 더 쪼그라들지도 몰랐다.
헌데 그렇게 가정해보니, 레이는 세계수가 보여주었던 다급함이 조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어쩌면 미래에 '권능'을 창조할 수 있는 개체가 만들어낼 변화까지는 초월적인 존재라 해도 관측이 불가능한 것일 수도 있었다.
"..."
어찌되었든, 라멘타는 막대한 대가를 치러서라도 프레체스의 부활을 반드시 저지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레이 또한 내심 동의했다. 레이는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길게 남지 않은 삶을 전부 소모할 용의가 있었다.
허나 당장 겉으로 티를 내지는 않았다.
"마경에는 누구를 얼마나 보낼 계획이지?"
"나와 아퀴타스가 직접 참전할 거야."
셋밖에 안 남은 세계수의 수호자 중 둘이 직접 나선다.
그야말로 '세계의 미래'를 판돈으로 올리겠다는 의미였다.
허나 세계수의 영역 밖에서 로드 급의 전력이 되는 건 라멘타 하나였고, 아퀴타스는 그보다 조금 떨어졌다.
결국 마경을 침공해 프레체스에게 닿기 위해서는 인류의 고위 전력까지 긁어모아서 한꺼번에 밀어넣어야 했다.
"네가 지금 내게 설명한 내용들을 뒷받침할 수 있는... 증거는 충분하겠지? 그런 게 없으면 아무것도 못해."
"충분해."
"프레체스의 위치를 대략적으로 파악했다고 했어?"
"그래."
"대략?"
"대략."
"거기다가 그냥 운석이라도 떨어뜨리면 안 되나?"
루나를 드러내지 않아도 우주 지도의 데이터만 공유하면 라멘타도 충분히 빠르게 메테오를 전개하는 게 가능할 것이다.
더군다나 비악마 세력의 마법사 수백 명이 라멘타를 보조해줄 것 아닌가.
"리실로테가 남긴 데이터가 있는데..."
"리실로테가 '남긴 것'이 있다는 건 나도 들어봤어. 하지만 너도 알 텐데."
메테오로 프레체스를 요격하기에는 문제가 있었다.
일단 메테오는 굉장히 정밀한 계산을 요구하는 마법이었기에 마경 안에서 전개가 불가능했다.
금지된 숲 수준의 오염도가 낮은 지역 인근이라면 어렵게라도 전개할 수 있겠지만, 마경의 심부를 향해 비스듬히 낙하시켰다가 계산 삐끗하면 많이 곤란해졌다.
허나 진짜 문제는 따로 있었다.
"마경은 수천 년 동안 악신의 영향력에 침식당하며 이제는 거의 공간적으로 괴리되었어."
마경 밖에서 공간적으로 괴리된 마경으로 폭격을 가해도 큰 피해를 입히긴 힘들다.
단순한 물리력은 거의 대부분 튕겨나온다고 봐야 했다.
그러한 조건이 갖추어지지 않았다면 마경이 악마 숭배자들의 무적의 요새이자 요람이라 불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메테오라고 해도 위력의 한계는 있어."
운석의 지름이 클수록 초장거리 게이트의 크기도 키워야 한다.
게이트 크기를 조금 키울 때마다 소비되는 마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또한 운석과 행성의 상대속도가 크게 차이날수록 마법의 실패 확률도 치솟았다.
"설령 괴리된 공간을 찢어내고 프레체스를 소멸시킬 수 있는 위력을 지닌 운석을 떨어뜨릴 수 있다해도..."
그 정도 위력이라면 대륙도 같이 조각났다.
메테오를 전개해 마경에 피해를 입히고 밀고 들어가는 전략은 구사할만 했지만, 결국엔 프레체스를 타격하기 위해서는 병력이 안으로 진입해야 했다.
레이는 라멘타의 설명을 곱씹다가 다시 물었다.
"마경 내부에서 장기전은 절대 불가능해. 대략적인 위치 정보만 가지고 헤맬 수는 없다고. 프레체스의 정확한 위치 정보를 확보할 수 있어?"
"그래. 프레체스를 향할 가장 확실한 나침반이 되어줄 존재가 나타났잖아."
"뭐?"
"엘-람의 종. 네가 품고 있는 뚜렷한 엘-람의 잔향이 있으니, 근원적으로 동일한 기운을 품고 있는 프레체스를 추적할 마법을 준비하는 건 어렵지 않아."
"그래, 그렇다면..."
"레이."
갑작스레 루나가 끼어들었다.
레이가 돌아보자 당혹에 가득 휩싸여 있는 루나의 은색 눈동자가 보였다.
"지금 무슨 얘기를 하는 거예요?"
"..."
"그 몸으로 마경에 가겠다고요?"
"루나, 일단 저쪽 이야기를 좀 들어보고..."
"레이...!"
"루나."
레이는 루나의 뺨에 손을 가져다 대며 잠시 입술을 꾹 씹었다.
루나는 언제나 레이의 의지와 선택을 존중해주었고 이번에도 분명 그리해줄 터였다.
허나 레이에 의해 강요된 선택이 루나의 마음에 분명 상처를 주리라는 걸, 이제는 레이도 모르지 않았다.
그렇기에 레이는 차마 드러낼 수 없는 죄책감과 미안함을 가득 품고서도 고집을 꺾지 않았다.
"일단, 이야기 좀 들어볼게."
"..."
"잠깐만 기다려줘."
레이는 말없이 자신을 바라보는 은색 눈동자에서 강렬한 분노와 원망의 감정을 느꼈다.
레이는 억지로 그 감정의 덩어리를 못본 척 외면하며 라멘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전쟁 준비 기간이 너무 짧아."
프레체스가 부활하기 전 마경을 침공하려면 전쟁 준비 기간은 많이 잡아도 5개월이었다.
악마 숭배자의 준동이 관측된 후 시간이 좀 지났기에 제국을 비롯한 대부분의 국가가 군사 전력을 정비해놓긴 했지만 그래도 5개월은 너무 짧았다.
"오합지졸 모아서 마경에다가 꼬라박자고?"
"시간이 없어 방문을 재촉했거늘 느긋하게 움직였잖아, 엘-람의 종."
라멘타의 비아냥에 레이도 딱히 반문하기가 마땅치 않아 헛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마경의 침공을 적극적으로 주장해도 흐지부지 되어버릴 확률이 9할은 될 거야."
"우리로서는 너를 믿어볼 수밖에. 어머니께서 보여주신 미래를 경험한 자는 네가 유일해. 부디 책임감을 가져주길 바랄게."
라멘타가 그리 말하며 반투명한 나뭇잎으로 이루어진 병을 하나 레이에게 건넸다.
레이가 안에 들은 액체를 찰랑이며 라멘타를 향해 두 눈을 깜박였다.
"뭐야?"
"어머니의 눈물을 한 번 걸러내 모은 액체야. 너희 인간 또한 어머니의 대지 위에서 태어난 생명이니, 효력이 있을 거야."
작용기전은 다르지만 포션과 비슷한 효력을 지닌다고 설명해준 라멘타가 한마디 덧붙였다.
"목숨이 위급하거나, 그러한 결과를 초래한 중상을 입었을 때 사용하도록 해."
"이해했어."
레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병을 따고 곧장 액체를 들이켰다.
꿀꺽꿀꺽, 레이는 단번에 병 안에 들어있던 액체를 비워냈다.
라멘타가 순간 얼이 빠진 얼굴로 그 장면을 바라보다 입술을 달싹였다.
"위급한 상황...에 쓰라고 말했어."
"어, 알아, 지금 위급해. 너희 어머니랑 한바탕 하고 나왔잖아?"
아직도 갈라져 나간 하늘은 조금씩 수복되어가는 중이었다.
딱히 더 고장날 곳이 없어서 티가 안 날 뿐이지 저만한 결과를 필멸자의 육신으로 만들어 놓고 몸뚱이가 완전히 무사하진 않았다.
마경에 들어가게 되면 한 병 더 내어달라고 덧붙인 레이가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다시 앉았다.
"하나만 더 물어보자."
"...그래."
"프레체스를 제거하면 레시나의 문제도 해결되나?"
"...게네시스는 우리에게 있어 아주 뜻깊은 신물이야. 프레체스만 아니었다면 그런 식으로 소모할 신물이 아니었어. 그래, 프레체스가 제거되면 레시나 또한 해방될 거야. 허나 껍데기밖에 남지 않은 그 아이에게 그게 과연 구원일까?"
"..."
레이는 잠깐 고민해야 했다.
라멘타는 분명 불필요한 도발을 자제하라고 했었다.
세계수가 극히 분노한 상황에서 세계수와 감정적으로 연결된 라멘타를 도발해서 얻을 게 없었다.
그럼에도 레이는 결국 한 마디 했다.
"뭘 이제 와서 걱정하는 척을 하고 지랄이야 지랄은."
레이를 가만히 바라보다 피식 웃은 라멘타가 답했다.
"만약 그때가 오면 우리 귀염둥이를 잘 부탁할게. 돌려줄 생각이 없다면 말이야."
*
레이가 거점 도시 리프로 귀환했다.
레이가 너무 빠르게 귀환하자 리프에서 레이를 기다리던 제국의 사절단은 당황했다.
아직 황실의 증원이 리프에 도착하지 않았다.
제국의 변경백 알렉산데르와 레이가 정면에서 무력으로 충돌할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알렉산데르를 견제하기 위해 황실이 보낸 증원이 도착하고 난 다음에 레이가 귀환하기를 바랐었고, 넌지시 레이에게 귀띔까지 했었다.
헌데 레이가 조언을 무시하고 빠르게 귀환해버렸으니 입맛이 조금 썼다.
한편.
저 멀리서부터 레이의 귀환을 확인한 알렉산데르 또한 내심 당황하고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레이는 상당수의 엘프와 함께 리프로 다가오고 있었는데, 동행하는 엘프들의 기세가 만만하지 않았다.
아니, 고작 '만만하지 않다'고 수식할 수준이 아니었다.
어처구니 없게도 저중에 로드 급이 포함되어 있었다.
상황이 이리되니 알렉산데르는 레이가 자신을 제치기 위해 엘프를 끌어들였나 진지하게 의심해볼 수밖에 없었다.
말도 안 되는 수준의 가정이긴 했는데 상황이 그랬다.
그리고, 레이는 리프에 들어서자마자 모든 이들을 뒤로 물리고 알렉산데르에게 다가갔다.
"긴히 나눠야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주변의 귀를 막아주실 수 있겠습니까?"
"..."
절대권역을 전개해달라는 뜻이었다.
그건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었기에 알렉산데르는 레이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레이의 부탁을 들어주며, 겉으로는 조금도 드러내지 않았으나 큰 충격을 느끼고 있었다.
레이가 이루어낸 경지와 업적이 나이에 비해 너무나 경악스러운 수준이라는 건 알렉산데르도 이미 알고 있었고, 또한 인정하고 있었다.
허나 아무리 공간검을 익혔다고 해도 레이가 근접한 거리에서 알렉산데르에게 유효한 상해를 입히는 것은 굉장히 힘든 일이었다.
소드마스터란 그런 존재였다.
허나 찰나의 순간 알렉산데르는 레이에게서 스산함을 느꼈다.
레이가 알렉산데르에게 고의로 살기 같은 것을 발산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초월을 이룬 소드마스터의 감각이 가까이 선 존재의 위험성을 간파했을 뿐이었다.
알렉산데르는 어처구니가 없어 입꼬리를 한 번 실룩였다.
직전에 느꼈던 스산함이 착각일 리 없다. 그렇다면 첫 만남 때 레이가 고의로 자기 역량을 숨긴 걸까? 그게 말이나 되는 이야기인가?
알렉산데르가 순수하게 충격을 곱씹고 있는 가운데, 레이가 입을 열었다.
"시간이 없어 정치적 수사를 생략하겠으니 양해 바랍니다."
"...?"
"알렉산데르님께서 드높은 경지와 공적과 걸맞은 야망을 지니셨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만."
"허허..."
"과연 그에 준하는 애향심 또한 지니고 계실런지요."
만약 그러하지 못하다면 마경에 들이박는 건 불가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