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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등가의 소드마스터-308화 (308/446)

도박 (1)

308화 

레이가 제자리에 주저앉은 채 앞을 바라보았다. 

유리처럼 깨져나간 차원의 파편들이 길게 이어져 휘날리고 있었다. 

어두운 공간을 수놓은 반짝이는 차원의 파편들이 별빛과 겹쳐 보였다. 

레이를 감싸고 있던 갑주 또한 차원의 파편이 깊숙히 박혀 거의 붕괴되기 직전이었다. 

기술의 조정을 조금만 더 실수했어도 레이의 육체가 조각났을 것이다. 

이제까지 쌓아온 레이의 얄팍한 경험이 간신히 기술의 재현을 성공시켰다. 

"..." 

레이는 장막 너머까지 이어진 궤적의 끝자락으로 시선을 옮겼다. 

장막 너머에 있는 존재로부터 섬광이 스파크처럼 튀어대고 있었다. 

3차원 공간만을 인식하기 위해 진화한 인간의 시각으로는 저 너머의 존재가 정확히 어떤 형태를 취하고 있는지 인지하는 게 불가능했다. 

그래도 조금 아파보이긴 했다. 

"속이 시원하네." 

레이가 낄낄거리며 웃었다. 

물론 저 너머의 존재가 칼빵 한 번 맞았다고 뒈질 리는 없었다. 

저기 있는 것들은 그리 단순한 존재가 아니었다. 

더군다나 '원본'에 비해선 여기저기 미숙했던 레이의 검격이었기에 위력이 반감됐다. 

세계수에게 있어 오늘의 일은 기껏해야 손가락 하나를 깊게 베인 수준의 사고일지 몰랐다. 

이 자리에 선 게 하르시아였다면 다른 결과를 가져왔을지도 모르지만 레이에겐 이게 한계였다. 

그럼에도. 

어쨌든 제대로 한 방 먹이지 않았는가? 

레이가 웃음 소리를 키우며 유쾌한 감정을 숨기지 않고 드러냈다. 

레이는 저 너머에 있는 놈들이 굉장히 아니꼬왔다. 

멋대로 사람을 이 세계에 끌고 온 새끼가 가장 아니꼬왔지만, 저 너머에서 신선놀음하며 판을 벌려대는 새끼들 또한 마찬가지로 아니꼬왔다.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주체성을 지닌 한 인격으로서의 불쾌감이었다. 

레이가 하르시아의 잔재에 동조한 것은 그러한 해소되지 않은 증오가 가슴에 겹겹이 쌓여 있던 탓도 컸다. 

다만 마지막까지 기술 하나를 재현하기 위해 목숨을 걸어가며 악을 쓴 건 정신이 침식된 영향도 상당했던 것 같으나... 

이제는 좀 충동이 가라앉았다. 

"하르시아, 당신이 비원을 이뤘어야 했어." 

레이는 꽤 진지하게 그리 투덜거렸다. 

"그럼 내가 이렇게 끌려올 일도 없었잖아?" 

레이가 옆을 돌아보았다. 

하르시아의 잔재가 사람의 형상을 취해 레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레이가 투덜거려도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하르시아의 잔재는 조용히 레이를 바라보다 서서히 사그라들었다. 

"..." 

레이는 잠시 복잡한 감정을 느끼다 주먹을 말아쥐었다. 

그의 잔재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의 잔재는 분명 레이에게 계승되었다. 

레이는 과분한 짐을 떠맡은 것만 같은 기분에 착잡한 얼굴을 했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하르시아는 하르시아였고 레이는 레이였다. 이 이상 그의 잔재에게 매몰되는 것은 긍정적일 게 없었다. 

그때, 장막 너머에서부터 빛살이 터져나왔다. 

레이가 짝짝 박수를 쳐주며 감탄했다. 

"아이고, 화가 많이 나셨네. 우리 세계수께서 화가 단단히 나셨어?" 

상처를 입은 세계수는 여기저기 튀어대는 섬광을 무시하고 다시 힘을 발하려고 하고 있었다. 

존나 꼴이 받기는 했을 터다. 하찮은 필멸자에게 칼빵을 당했으니 굴욕도 그런 굴욕이 없을 터다. 

배에 구멍이 뚫렸더라도 당장 달려와서 갈갈이 찢어주고 싶겠지. 

허나 레이는 이 검게 물든 공간 속에서 평생을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었다. 

트득! 

마침내 기적의 시간이 끝나가며 검게 물든 공간이 쩍쩍 벌어지기 시작했다. 

레이가 여기 더 있고 싶다고 팔다리를 휘저으며 억지를 부려도 추방을 피할 수는 없었다. 

"아, 뭐, 그럼, 나는 가 볼 테니 잔뜩 화가 난 그쪽은..." 

레이가 함박웃음을 머금은 채 세계수를 향해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올렸다. 

"엿이나 까 잡수세요." 

마지막은 한국어였다. 

기적의 시간이 끝났다. 

차원 너머를 잠시 떠돌았던 세 존재가 다시 현실로 귀환했다. 

라멘타는 현실로 돌아오자마자 루나를 향해 성큼성큼 나아갔다. 

루나에게 당장 확인해 보아야 할 것이 있었다. 

허나 라멘타가 루나에게 손을 뻗기도 전에 옆에서 검이 뽑혀 나왔다. 

"이봐." 

레이가 라멘타의 목젖에 검날을 가져다대며 호흡을 골랐다. 

"나랑... 할 얘기가 많은 것 같은데 왜 그쪽을 먼저 찾아?" 

"..." 

라멘타가 레이를 향해 눈동자만 움직였다. 

검을 겨누어 오는 레이는 굉장히 피곤해보였다. 

별빛 너머를 엿보고 다시 돌아오기까지 현실의 시간으로는 잠깐이 지났을 뿐인데, 레이의 얼굴은 며칠 동안 날밤을 샌 것처럼 메말라 있었다. 

그것 외에 변화가 있다면, 레이의 눈동자 하나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단지 그뿐이었다. 

허나 라멘타는 레이의 기세가 결계에 들어서기 직전과 완전히 변해 있음을 충분히 꿰뚫어 볼 수 있었다. 

어머니의 품 안에서 라멘타는 모든 존재를 압도할 수 있었다. 

그건 여전히 변치 않는 사실이었으나, 이제 레이의 검이 자신에게 한 번은 닿을 수 있으리라는 걸 라멘타는 분명하게 인지했다. 

"..." 

라멘타가 다시 루나에게 눈동자를 돌렸다. 

라멘타는 루나가 악신과 접촉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악신이 아니더라도 초월적인 존재의 부름이 있었기에 루나 또한 경계선에 발을 들일 수 있었을 것이다. 

허나 루나에게는 그 어떤 초월적인 존재의 잔향도 느껴지지 않았다. 

세계수, 엘-람, 악신들... 그 어떤 존재의 흔적도 루나에게는 남아있지 않았다. 

악신과의 접촉이 없었다면 당장 추가적인 조치를 취할 필요는 없었다. 

라멘타가 한발 물러서자 레이가 검을 회수했다. 

"하아, 루나, 괜찮아? 결계 안에서 별일 없었어?" 

"...아무 일도 없었어요. 혼자 경계 위에 머물다가 돌아왔어요. 근데... 레이는... 괜찮아요?" 

레이의 변화를 느낀 건 루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 잠깐의 시간 동안 레이는 수척해져 있었다. 

"레이, 다쳤어요?" 

"아냐아냐, 정신적으로 피곤해서 그래. 방금 쟤들 어머니를 만났거든. 근데 대화 방식이 좀 무식하더라. 머릿속에 정보를 때려넣어대니 원." 

레이는 별 것 아니라는듯 손을 휘젓고 라멘타에게 다가섰다. 

"우리 할 이야기가 많지 않아?" 

"그래, 따라와라." 

"아 근데 라멘타, 지금부터는 제발 뜬구름 잡는 소리 좀 하지 마." 

"..." 

"맥락에 맞게, 무식한 인간인 내가 바로 알아들을 수 있는 단어를 써달라고. 내가 너희 어머니 덕분에 기분이 조금 안 좋거든? 인내심이 부족한 상태야. 그러니 좀 배려해주면 고맙겠어." 

"..." 

츠즉! 

라멘타가 경고도 없이 허공에 마법진을 그려냈다. 

레이는 잠시 긴장한 채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갔으나, 라멘타는 마법진을 자기 머리 위로 덮어씌웠다. 

츠즈즉!! 

마법진을 덮어쓴 라멘타의 외관이 변화했다. 

누가봐도 꼬맹이라 부를만한 나잇대의 모습으로 돌아간 라멘타를 보며 레이가 떨떠름하게 물었다. 

"지금... 뭘 한 거지?" 

"잠시 과거의 인격과 형태를 덧붙여 넣었어." 

"...별 게 다 되는군, 대마법사님. 조금 공손해지고 싶은 기분이 들어." 

"대화를 나누기에는 이쪽이 더 편할 거야. 네 입장에서는 말이지. 이제 됐지? 가자." 

"아, 잠깐만." 

레이가 눈살을 찌푸린 채 자기 옷자락을 툭툭 두들겼다. 

"계속 보고 있기 좀 불편한데, 옷 좀 입어주면 안 되겠어?" 

"원한다면." 

라멘타가 허공으로 손을 뻗어 커다란 로브를 하나 꺼내 대충 몸을 덮었다. 

몸뚱이가 작아진 덕분에 로브 자락이 질질 끌렸다. 

레이는 거기까지 참견할 생각은 없었으므로 루나와 함께 라멘타에게 다가갔다. 

시야가 몇 번 휙휙 변한 끝에 레이와 루나는 라멘타와 함께 지상으로 나올 수 있었다. 

"..." 

하늘이 어두웠다. 

어두운 하늘은 반으로 갈라져서 그 사이로 햇빛을 쏟아내고 있었다. 

지평선 너머로 시선을 돌리자 서서히 본래의 색과 모습을 찾아가고 있는 하늘이 보였다.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수복은 되어가고 있는 모양이었다. 

레이와 루나가 하늘을 바라보는 사이 라멘타는 혼자서 입을 달싹이고 있었다. 

현재 벌어진 사태에 대한 대처를 거리가 떨어져있는 엘프들에게 명령하는 중인듯 싶었다. 

레이는 좀 더 가까이 다가가 라멘타가 중얼거리는 내용을 엿들었다. 

현재 어머니의 축복이 약해졌으니 결계를 보강할 인원을 보내라는 이야기를 라멘타는 하고 있었다. 

"하루이틀은 모래 바람이 불겠어." 

그리 중얼거리는 라멘타에게 레이가 대놓고 물었다. 

"크게 개의치 않은군. 너무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 주는 거 아니야?" 

"엘-람의 종, 네가 관계되어 있다는 걸 모르지는 않아. 하지만 그 영역 인근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내가 관여할 게 아니야. 관여할 수도 없고 말이야." 

라멘타는 저 현상을 레이가 직접 일으켰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세상 그 누구도 그런 가정을 떠올리지 못할 것이다. 

다만 세계수가 엘-람의 종과 접촉했고, 그 이후 어떤 문제가 생겨 엘-람과의 직간접적인 충돌이 발생한 것은 아닌가 추측하고 있기는 했다. 

그리고 거기서부터는 필멸자들이 개입할 영역이 아니었다. 

레이는 라멘타가 하고자하는 말을 알아듣고 잠시 고민했다. 

라멘타는 과연 세계수가 레이에게 수작을 부릴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을까? 

레이는 당연히 라멘타 또한 알고 있었으리라 생각했는데, 지금 말하는 걸 들어보니 몰랐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어 보였다. 

허나 정답이 무엇이든 라멘타는 세계수가 부리는 수족 중 하나였다. 

그래서 레이는 짧게 빈정댔다. 

"어머니가 다치셔서 마음이 아프시겠어?" 

"과거의 인격을 흉내내고 있는 것뿐이지만 내가 이 모습을 하고 있을 때는 필요 없는 도발은 자제하기를 권할게." 

"뭐, 주의하지." 

"그리고 어머니께서 크게 상하신 곳 없이 무사하길 기도해야 하는 건 인간도 마찬가지 아니야?" 

"..." 

"어머니께서 지상에 내리신 축복을 거둬가시면 인간이 가장 먼저 극심한 피해를 감내해야 할 텐데." 

"...그래, 같이 기도해야겠네." 

"다행히 지상에 내린 축복까지 거둬가셔야할 만큼 깊게 상하신 건 아닌 것 같아. 기뻐하도록 해." 

"아이 좋아. 아이 행복해." 

레이가 무표정한 얼굴로 어깨를 한번 들썩였다. 

그후, 지상에 있는 건물 내부로 안내받은 레이가 거대한 탁자를 가운데 두고 라멘타와 마주 앉았다. 

루나는 레이 곁에 조용히 앉아서 자리를 지켰다. 

아직 하늘이 어두워 건물 안에도 그림자가 짙었다. 

라멘타가 밝은 구체를 하나 천장으로 띄우며 입을 열었다. 

"레시나를 보호하고 있다며?" 

예상 못한 첫마디에 레이가 눈살을 찌푸렸다. 

"갑자기 레시나는 왜?" 

"이 모습을 하고 있으니 옛생각이 나서." 

"..." 

"귀여웠어, 레시나는. 인간의 표현을 빌리자면 철이 덜 들었다고 해야 하나..." 

"내가 듣기에 그리 유쾌한 이야기는 아닌데." 

레이가 정색하자 라멘타가 아쉬워했다. 

"음, 그래. 다른 이야기를 할까? 엘-람의 종, 그거 알아? 엘-람은 먼 옛날부터 다소 무리한 수를 두기를 좋아했어." 

"뭐?" 

"당장의 결과는 좋아도 매번 뒤처리를 할 일이 생겼어. 그럴 때마다 막대한 희생이 뒤따랐어." 

"그게 지금부터 나누어야할 본제와 관련이 있는 이야기야?" 

"아주 관련이 깊지. 미래를 봤어?" 

"그래. 환영 덩어리를 봤지." 

"어머니께서 무리를 많이 하셨네." 

"처음부터 환영 덩어리나 보여주려고 나를 부른 거야?" 

"아니. 처음 너를 초대했을 때는 이럴 계획이 아니었어. 그런데 상황이 변했어. 네가 인류 사회에서 지닌 상징성도 많이 달라졌지. 그래서 너를 재촉할 동족을 보낸 거야." 

"그만 뜬구름 잡고 알아들을 수 있게 설명해." 

"이 세상에 수많은 세력이 있지만, 오랜 세월 동안 악마와 비악마 세력으로 이분화되어 전쟁을 벌였어." 

"근데?" 

"커다란 전투에서 압도적으로 승리하고 공작을 벌여 상대 세력의 주요 전력을 제거한다면 이 전쟁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할 수 있겠지." 

"..." 

"근데 그게 이 전쟁의 본질은 아니야. 엘-람의 종, 이 전쟁의 본질이 뭐지?" 

"...땅따먹기." 

레이의 대답에 라멘타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생소한 표현이지만 이 전쟁의 본질을 잘 대변해주는 것 같네. 그래, 이건 영역 싸움이야." 

비악마 세력이 마경을 정화할 방법이 없는 이상 마경을 침략한다 해도 병력만 날려먹는 꼴이었다. 

이건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는데, 악마 숭배자들이 잠깐 인간이 살아가는 지역을 정복한다고 해도 그곳을 마경화하는데 실패하면 금방 물러나야 했다. 

간간이 악마 숭배자가 마경 밖에서도 상당한 전력을 끌어낼 수 있는 시기가 찾아오기도 하지만 한계는 있었다. 

"..." 

이 전쟁의 본질은 땅따먹기다. 

레이가 생각하기에 그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마나로 신체를 강화할 수 있는 잘 단련된 정예병 서른에게 칼 한 자루만 쥐어주고, 마찬가지로 칼 한 자루만 쥐고 있는 엑스퍼트 급 기사 한 명과 대결시키면 누가 승리할까. 

엑스퍼트 급 기사가 치고빠지기만 잘 하면 혼자 정예병 서른을 도륙낼 수 있었다. 

물론 정예병이 무장과 조합을 제대로 갖추고 덤벼들면 상황이 그리 풀리지는 않겠지만, 어쨌든 두 존재 사이의 전력 차는 확실했다. 

헌데 외부에서는 정예병 급 전력을 지닌 마족이 마경 안에서는 엑스퍼트 급 무력을 발휘한다. 

외부에서 엑스퍼트 급 무력을 지닌 마족은 마경 안에서 부족하게나마 그래듀에이트 급과 대적 가능했다. 

아주 단순하게 따져서 그 정도였고, 세세한 조건까지 파고 들면 안과 밖에서의 전력 차이는 더 벌어졌다. 

라멘타가 잠시 생각에 잠긴 레이를 바라보다 다시 입을 열었다. 

"자꾸 뜬구름 잡지 말라고 하니 중점을 먼저 얘기하자면, 곧 대륙 절반이 마경화될 거야."

"뜬금 없이 뭔 헛소..." 

레이는 말을 하다말고 입술을 깨문 후 다시 물었다. 

"원인은?" 

"드래곤."

도박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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