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홍등가의 소드마스터-307화 (307/446)

비원 (5)

307화 

레이는 고개를 들고 앞을 바라보았다. 

붉게 물든 두 눈동자에 담기는 광경은 인간이 감당키에는 여전히 너무나 비현실적이었다. 

푸른 하늘을 넘어 어두운 우주로 나아간 최초의 인간이 처음으로 태양을 가까이서 마주하게 되었을 때. 

그러한 순간에 닥쳐올 공포와, 경외와, 허무감이 레이의 의식을 무자비하게 짓눌렀다. 

그럼에도 레이는 눈을 돌리지 않았다. 몸을 웅크리지도 않았고 뒤로 물러서지도 않았다.

레이는, 시야를 가득 메워가는 섬광의 폭풍을 향해 검을 들고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누군가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면 미련하다고 힐난했을 것이다. 

추잡스럽게라도 몸을 웅크리고 뒷걸음질을 치는데 끝까지 집중했다면 이 공간을 뒤흔드는 힘의 기류를 조금이라도 흘려보낼 수 있었다. 

그럼에도 레이는 몸을 일으키고 고개를 들어 세계수의 힘에 정면으로 저항하기를 택했다. 

그건 너무나 미련한 짓거리였다. 자살행위와 무엇도 다르지 않았다. 

트득! 특! 

팔다리가 금방이라도 꺾일 것처럼 뒤틀렸다. 

빛으로 이루어진 갑주는 벌써부터 깎여나가기 시작했다. 

이대로는 얼마 버티지 못하고 휩쓸릴 게 분명했다. 

세계수의 힘에 휩쓸리고 난 이후에는 대체 어떤 상황이 닥쳐올지 레이로서는 상상할 수 없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더욱 격렬하게 저항해야만 했다. 

레이는 검의 형상을 취한 빛줄기를 휘둘렀다. 

촤악, 검의 궤적이 허공에 새겨지고, 세계수로부터 뻗어나 오던 섬광의 폭풍이 살짝 흐트러지며 빈틈이 드러났다. 

허나 그 순간은 찰나에 불과했다. 

잠시잠깐 드러난 틈을 뒤에서 너울지던 섬광의 물결이 곧장 메워버렸다. 

간신히 일으켰던 레이의 몸이 다시 휘청여댔다. 

레이는 연거푸 검을 휘둘러 보았다. 

고작해야 몇 걸음 앞을 간신히 밝혀준 검의 궤적들은 금세 의미를 잃고 사라졌다. 

"..." 

레이는 쿵쾅대는 가슴에서 역류한 공포가 목구멍을 틀어막는 걸 느끼며 끅끅댔다. 

그건 스스로를 향한 명백한 조소였다. 

검을 쥐는 감각이 어색하고 생소했다. 

발을 옮기고 자세를 잡는 과정이 어색하고 생소했다. 

자세를 잡고 허리를 비틀어 검을 휘두르는 그 모든 동작이 어색하고 생소하게 느껴졌다.

레이는 자기가 계승한 검술에 담긴 극의와 비원을 알지 못했다. 

이 검술을 레이에게 각인시킨 존재가 고의로 누락했는지, 혹은 복제에 실패했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레이가 지닌 검술은 불완전했다. 

레이에게 흘러들어온 잔재 또한 그저 잔재일 뿐이었다. 

기원조차 망각한 채 침전하던 먼 옛날의 잔재는 처음부터 끝까지 구멍투성이였다. 

레이는... 하르시아가 될 수 없었다. 

간신히 형상을 이룬 그의 잔재 또한 하르시아가 될 수 없었다. 

어떠한 기적이 찾아와도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트득! 

레이는 의미 없이 검을 휘두르다 또다시 휘청였다. 

반쯤 돌아갈 뻔한 발목을 간신히 막아세우며 허우적거렸다. 

초월적인 존재를 가까이 두고 멍청한 고집을 부린 대가를 치를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제라도 몸을 웅크리고 체력을 보존하며 뒤로 기어가야 했다. 

허나 레이는 여전히 검을 쥐고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언가가 레이에게 스며들기 시작했다. 

이루지 못한 비원을 향한 갈망만이 남은 그의 잔재가... 레이에게 스며들고 있었다. 

레이는 지금 벌어지는 현상이 정신의 침식과 크게 다를 바 없음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레이는 저항하지 않았다. 

이것이 하르시아의 검을 계승한 자가 감내해야할 최소한의 책무라 생각했기에, 흘러드는 잔재의 부르짖음을 오롯이 받아들였다. 

결함 투성이의 두 존재가 서로에게 녹아든다. 

결함 투성이의 두 존재가 서로를 마주보고 손을 뻗는다. 

그리고, 공허하게 남아있던 서로의 여백을 덧칠하고 보완해가기 시작했다. 

레이는 뒤틀리던 몸의 관절을 억지로 잡아 끌며 또다시 검을 휘둘렀다. 

촤악, 검의 궤적이 조금 더 멀리까지 뻗어나갔다. 그리고 너울지는 섬광의 폭풍에 휩쓸려 사라졌다. 

레이는 계속해서 검을 휘둘렀다. 

검의 궤적이 뻗어나가는 거리가 조금씩 더 늘어나는 것 같기도 했다. 

허나 무의미한 성과였다. 

아무리 열심히 검을 휘둘러도 레이는 단 한 걸음도 더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지금 이 짓거리가 대양 한가운데서 바다를 가르겠다고 나뭇가지를 흔드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레이가 헛짓거리를 이어가는 동안 섬광의 폭풍은 더욱 강맹해져 이제는 정말로 레이를 집어삼키려 하고 있었다. 

레이는 끅끅 웃어대며 자신과 뒤섞여 가는 그의 잔재를 돌아보았다. 

결함 투성이의 두 존재는 서로의 여백을 보완하려 했으나 그리하고도 여전히 수많은 여백이 남아있었다. 

결국은 이게 우리 한계인 것일까. 

레이가 그리 묻자 그의 잔재는 광활한 여백 너머를 향해 손가락을 가리켰다. 

의식 속에서, 레이는 그의 잔재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그의 잔재가 가리키는 방향의 끝에 무언가가 존재하고 있음은 분명했다. 

허나 거기까지 찾아가기 위한 길목과 방법은 대부분 소실되어 끊겨있었다. 

그럼에도 레이는 그의 잔재가 가리키는 방향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이건 너무나도 위험한 줄타기였다. 

눈을 감고 낭떠러지가 가득한 산길을 오르는 것보다도 어리석고 무모한 도박이었다. 

헌데도 왜 이렇게까지 아집을 부리며 걸음을 멈추지 않는가. 

그러한 의문이 피어올랐을 때. 

레이는 답했다. 

우리는 증명해야할 책무가 있다. 

그의 비원이 허황되지도 그릇되지도 않았음을 증명해야할 책무가 우리에게 남아 있었다. 

으드드득! 

레이는 무너졌던 자세를 바로잡고, 또한 세심하게 교정해나갔다. 

그의 잔재는 육체 안에서 불균일하게 몰아치던 마나의 흐름을 가라앉히고 새롭게 정제하기 시작했다. 

레이의 의식은 계속해서 그의 잔재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비어있던 여백을 억지로 채워넣고 간신히 급조한 지지대를 이어붙이며 그리 계속해서 나아가고 있었다. 

남은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았다. 

세계수로부터 몰아치는 섬광의 폭풍이 레이의 목을 움켜쥐기 직전이었다. 

이제는 무언가를 해야만 했다. 

레이는 마지막으로 천천히 호흡을 고르고, 한 자루의 검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 

찰나의 순간 고요한 침묵이 찾아왔다. 

레이를 둘러싼 자그마한 반경 안에 진입했던 마나의 기류가 일시에 정지했다. 

그 찰나의 순간에 레이는, 그의 잔재가 가리켰던 목적지에 간신히 도달해 있었다. 

너무나도 위태했던 여정 끝에 도착한 마지막 장소에는 이루지 못한 그의 비원이 잠들어 있었다. 

그의 비원은 한 자루 검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그것의 본질은... 단 한 자루의 검으로 행해지는 하르시아의 궁극기. 

레이는 침묵하고 있는 검의 형상을 향해 천천히 손을 뻗었다. 

레이는 자신이 감당 못할 선택지를 고르려 한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저 검의 형상 안에 존재하는 것은 결코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저 검의 형상 안에 존재하는 결과물을 얻기 위해서는 헤아릴 수 없이 수많은 기반이 정교하게 맞물려 길을 열어주어야 했다. 

본디 그러한 과정을 거쳐야만 이 장소에 도달할 수 있었다. 

허나 레이는 너무나도 많은 과정을 대부분 생략한 끝에 간신히 이 장소에 발을 들였다. 

지금 레이가 쌓은 미약한 기반으로는 저 검의 형상 안에 존재하는 결과물을 감내할 수 없었다. 

'기회는...' 

단 한 번. 

검의 형상 안에 담긴 기술을 재현할 기회는 오직 단 한 번이었다. 

실패는 자멸을 의미했다. 

사소한 실수라도 한 번 발생하면 레이는 그 자리에서 산산이 바스러져서 잔해조차 남길 수 없게 될 것이다. 

레이의 손아귀가 검의 형상을 앞에 두고 잠시 망설였다. 

그때, 한 걸음 떨어져 있던 그의 잔재가 다가와서 레이와 손을 겹쳐왔다. 

잠시 웃음을 머금고 혀를 차낸 레이가 의식 속에서 검의 형상을 움켜 쥐었다. 

그리고, 전장 위로 의식을 되돌리며 저 너머에 있는 세계수를 향해 마지막으로 자세를 조정했다. 

실패하면 죽는다. 

그의 비원이 담긴 검의 궤적을 단 한 번의 실수도 없이 재현해야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멍청한 짓거리였다. 

"하르시아." 

그럼에도 두 결함 덩어리는... 

"당신을, 추모하며." 

서로의 지지대가 되어 걸음을 내딛고 검을 움직였다. 

임무를 완수하고 어머니의 품으로 복귀한 라파엘라는 아늑함을 느꼈다. 

레이를 데려오라는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인간 세상으로 나갔다가 참 이런저런 모욕을 많이 당했다. 

임무를 수행하는 기간 동안 겪은 모욕을 돌이켜보고 있자니 화가 들끓었지만 라파엘라는 꾹 참았다. 

고작 모욕을 당했다고 투덜대며 짜증을 내는 것은 의젓하지 못한 행위였다. 라파엘라는 자신이 충분히 의젓한 성격이라고 생각했다. 

휴식을 취하기 전에 일단 보고부터 해야했다. 

꽤나 중요했던 사안인지라 수호자급 엘프에게 직접 보고를 해야했다. 

라파엘라가 보고를 위해 찾아오자 이전에 레이와 직접 접촉했었던 세계수의 수호자, 아퀴타스가 잠시 자리를 옮기자며 일어섰다. 

라파엘라는 아퀴타스에게 직접 보고를 올리게 된 것이 은근히 뿌듯하여 쫄래쫄래 따라갔다. 

허나 아퀴타스는 얼마 가지 않아 엘프들의 거리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마찬가지로 발을 멈춘 라파엘라가 귀를 쫑긋거리다가 어딘가 위화감을 느꼈다. 

"...?" 

슬그머니 눈을 돌려보던 라파엘라가 자기 발 아래를 보고 깜짝 놀라 물러섰다. 

"어...?" 

어머니 품 안에서는 그림자가 거의 지지 않는다. 

어머니의 축복이 모든 방향에서 엘프들을 비춰주기 때문이었다. 

헌데 라파엘라의 발 아래에는 꽤나 짙은 그림자가 생겨 있었다. 

비단 라파엘라의 발밑만이 아니었다. 

거리를 다니던 모두의 발아래 그림자가 생겨나 있었다. 

아주 자그마한 이변에 라파엘라는 귀를 쫑긋거리며 아퀴타스를 돌아보았다. 

헌데 그 순간. 

라파엘라의 머리 위로 급격히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라파엘라는 곧바로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이제까지는 언제나 고개를 들면 어머니의 푸른 가지와 잎사귀가 라파엘라를 맞아주었다. 

허나 라파엘라가 고개를 들었을 때 하늘은 그저 어둡게만 물들어 있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은 어두운 하늘에서는 어머니의 축복조차 느껴지지가 않았다. 

완연한 어둠 아래 선 라파엘라가 당혹을 숨기지 못하고 뒷걸음질 치다 엉덩방아를 찧으려던 찰나. 

저 어둠 너머에서부터. 

한 줄기의 궤적이 새겨지기 시작했다. 

지평선 너머에서 시작된 한 줄기의 궤적은 다시 지평선을 넘어갈 때까지 길게 이어졌다.

궤적이 가르고 지나간 어둠의 틈으로부터 빛이 새어나와 머리 위를 비추었다. 

양단되듯 나뉘어진 어둠을 바라보며. 

하늘이... 갈라졌다고... 누군가가 그리 읊조렸다. 

이 한순간 모두가 같은 풍경을 보며 모두가 같은 생각을 품었다. 

주춤거리던 라파엘라는 뒤늦게 어둠의 틈 너머로 비치는 광경이 어머니의 품을 벗어났을 때 보았던 진짜 하늘임을 깨달았다. 

어둠의 틈 사이로 햇살이 새어나와 지상을 비춰주고 있었다. 

이윽고 자그마한 빛 알갱이가 눈처럼 대지 위에 떨어져 내렸다. 

쌓이지 않고 사라져가는 빛 알갱이의 정체가 바스러진 세계수의 나뭇잎임을 눈치챈 엘프는 비교적 소수였다. 

이 경이롭고 공포스러운 기현상을 마주하며 대부분의 엘프가 대체 어찌 반응해야할지도 모르고 굳어있는 가운데. 

아퀴타스가 무감정한 얼굴로 조용히 읊조렸다. 

"모래 바람이 불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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