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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등가의 소드마스터-304화 (304/446)

304화 

엄마를 보기 위해 레아를 쫓아 발걸음을 옮긴다. 

레이는 지금 이 상황이 참 어처구니가 없어 헛웃음이 자꾸 나왔다. 

한편 푸른 눈동자를 빛내는 소녀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레이와 함께 길을 걸었다. 

이 색채가 죽은 세상에서 소녀만은 유일하게 빛나 보였다. 

레이는 소녀가 알레시아를 닮아 다행이라고 홀로 중얼거렸다. 

비록 억지로 짜낸 색채일지라도, 소녀는 낙천적이고 긍정적인 사고를 잃지 않고 활기를 머금고 있었다. 

그리 길을 걷다 보니 중무장한 기사가 한 명 다가왔다. 디디에였다. 

느껴지는 기세를 보니 무난하게 그래듀에이트의 경지에 오른 모양이었다. 

"백작님께서 찾으십니다." 

"어머니가?" 

에이, 동생이랑 좀 더 떠들려고 했더니만. 

소녀가 아쉬움이 깃든 신음을 흘리고는 레이의 머리를 툭툭 두드렸다. 

"난 가보아야겠구나! 사고 치지 말고 품위를 지키고 있거라!" 

소녀는 끝까지 잔소리를 했고, 레이는 끝까지 소녀의 이름을 묻지 않았다. 

이름을 들었다가는 이 허상에 얽매일 것 같았기에... 허상은 허상으로만 남기고 싶었기에 이름을 묻지 못했다. 

소녀가 손을 흔들며 디디에와 함께 멀어졌다. 

레이는 다시 레아의 뒤에서 걸었다. 

"..." 

레이는 앞서 걷는 레아의 뒷모습을 천천히 살폈다. 

레아는 잘 생존했고, 또한 멋지고 아름답게 성장해 있었다. 

이 빌어먹을 환영이 보여주는 모습 중에 레이에게 유일하게 위안이 되어주는 요소였다. 

현실에서 레이는 레아를 생존시키기 위한 준비를 거의 다 해놓기는 했으나, 일이 계획처럼 잘 진행될 것이라고 분명히 확신할 수는 없었다. 

헌데 이리 잘 성장한 레아를 보니 허상이라는 걸 알면서도 마음이 조금 놓였다. 

"고모." 

"왜." 

"멀쩡하게 잘 살아있네요." 

"...?" 

레아가 인상을 쓰며 레이를 돌아보았다. 

레아로서는 오늘 조카의 행동이 유난히 괴팍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뚱한 표정의 레아를 바라보던 레이가 피식 웃었다. 

"다 내 아빠 덕분 아니에요?" 

"뭐가 아빠 덕분이야." 

"고모가 이렇게 멀쩡하게 잘 살아있는거요." 

"..." 

잠깐 침묵한 레아가 레이의 뺨을 꽉 쥐고 잡아당겼다. 

"그래~ 이게 다 네 아빠 덕이다. 그래서 너 뒤치다꺼리도 해주고 있잖아. 알겠니 조카야?" 

"당연히 해줘야죠." 

"어머, 왜 이리 뻔뻔하게 굴까?" 

"고모는 아빠한테 선물도 엄청 많이 받아챙겼잖아요." 

"누가 그래?" 

"엄마가요." 

"글쎄? 내가 선물을 많이 받았다고? 너무 어렸을 때라 기억이 잘 안 나네~? 너희 아빠가 맨날 의자 빼서 나 넘어뜨리고 툭하면 꿀밤 때리고 한 건 엄청 잘 기억나는데." 

"아니, 어떻게 그리 자기 유리한 것만 기억해요?" 

"너희 아빠가 나를 어지간히 괴롭혔어야지." 

레아는 그리 말하며 키득거리고는 다시 앞서 걸었다. 

레이 또한 키득거리며 레아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불쑥 물었다. 

"고모, 행복해요?" 

"..." 

레아가 제자리에 멈춰 섰다가, 여전히 웃음기가 어린 목소리로 답해주었다. 

"네가 말만 조금 더 잘 들으면 엄청 행복할걸?" 

앞서 걷던 레아가 뒤를 돌아봐 주지 않았기에 레이는 레아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레이는 씁쓸한 감정을 느끼며 레아를 따라 걸었다. 

감정을 마모시키는 붉은 하늘 아래서 숨돌릴 틈도 없이 치열한 투쟁을 이어가는 자들에게 있어... 

행복이란 감정이 그리 가깝지 않으리라는 건 분명했다. 

레아를 따라 걷는 길이 레이에게 익숙했다. 

레이는 목적지가 가까워질수록 자꾸만 턱에 힘이 들어가서 자기 뺨을 매만졌다. 

주민들의 주거지로 분류되는 구역의 외곽쯤에, 조금 언덕이 진 장소 위에 익숙한 집 한 채가 홀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걸음을 멈춘 레아가 레이를 두고 먼저 정문으로 다가가 크게 외쳤다. 

"언니!! 언니 딸내미 데려왔어요!!!" 

얼마 안 가 문이 열렸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온 카렌이 레아와 먼저 인사를 나누었다. 

"왔어?" 

"응, 저기 저 지지리 말 안 듣는 언니 딸내미 잡아왔어요." 

"미안해. 고생했지?" 

"에이, 고생은 무슨, 괜찮아요." 

카렌과 레아가 대화를 나누는 사이. 

레이는 한 발 떨어져서 조용히 카렌을 바라봤다. 

카렌의 모습이... 레이에게 낯설었다. 

시간이 많이 지났기에 카렌도 나이를 먹었을 테고, 그러니 외적인 아름다움이 예전과 같지 않으리라는 건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더군다나 말 안 듣는 딸내미 키우느라 많이 바쁘지 않았겠는가. 

그러니까 레이는, 카렌의 얼굴에 주름 몇 줄이 생겨난 것쯤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허나 레이가 느끼는 '낯섦'은 노화의 문제가 아니었다. 

카렌은 정말... 정말 많이 피곤해 보였다. 

그녀가 지녔던 아름다운 눈동자는 오랜 시간 밤잠을 설친 사람처럼 반쯤 충혈된 채 탁하게 변색되어 있었다. 

그녀의 살갗은 여전히 눈처럼 새하얬으나 거칠어진 피부는 뼈마디 위에 가까이 붙어 핏줄을 드러내고 있었다. 

많이 말랐다. 정말 많이 말랐다. 

그 탓인지 인상도 많이 변했다. 바라보고 있는 게 괴로울 만큼, 그렇게나 많이 변했다. 

레이가 굳어있는 동안, 카렌은 레아를 마주 보며 웃음 지었다. 

억지로 만들어낸 웃음이 주름을 따라 번져나가며 입꼬리를 휘게 했다. 

카렌이 보여주는 그 웃음이 레이에게는 생소했다. 

지워지지 않는 낯섦 속에서, 다행히도 그녀의 목소리 만큼은 레이의 기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정말 고마워." 

카렌은 거듭해서 레아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닌듯, 많이 미안해하기도 했다. 

레아가 부담스러워하기에 사과를 멈춘 카렌은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 

푸르름을 잃어버린 붉은 하늘은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을 좀 먹히는 것만 같았다. 

지붕 아래의 공간만이 카렌에게 안락함을 느끼게 해주었다. 

어두운 공간 속에 있다보면 과거의 그림자에 취해감을 느꼈으나, 그럼에도 붉은 하늘 아래에서보다는 안정을 느낄 수 있었다. 

카렌은 붉은 하늘로부터 눈을 돌린 후 레이에게 다가왔다. 

"우리 딸, 자꾸 엄마랑 고모 속 썩일 거야?" 

카렌이 레이의 뺨을 이리저리 매만졌다. 

나이가 어렸을 때, 레이는 간간이 카렌의 뺨을 이렇게 매만지며 타박을 하고는 했다. 

"혼자 위험한 곳은 다니지 마. 특히 산맥 가까이는 가지 말고. 오늘도 엄청 위험했다며. 고모 아니었으면 어쩔 뻔했어?" 

"..." 

잔소리를 이어가던 카렌을, 레이는 천천히 끌어안았다. 

레이가 안겨오자 카렌이 깜짝 놀라 물었다. 

"어머... 웬일이야, 우리 딸?" 

"왜 아직도..." 

대체 왜 아직도. 

"여기 있어요...?" 

이곳은 레이가 살던 집이다. 

공간도 넓고 가구도 다양하게 있었다. 

허나 그건 레이가 벨라와 함께 살던 어릴 적의 기준으로 그렇다는 이야기였다. 

필립스 백작령 안에서도 여기보다 훨씬 시설이 좋은 자택은 얼마든지 구할 수 있었다. 

더군다나 여기 집은 사람이 많은 주거지와 어설프게 떨어져 있어 생활하기 불편한 점도 꽤 있었다. 

근데 대체 왜... 

"왜 아직도 여기 있어요?" 

의미를 알기 힘든 레이의 질문에, 카렌은 레이를 마주 안아주며 미소 지었다. 

"엄마는 여기서 우리 딸 기다리고 있었지." 

"..." 

레이는 말 없이 카렌을 끌어안은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끓어오르는 감정이 목소리가 되지 못했기에, 한참을 그냥 그렇게 서 있었다. 

카렌은 조용히 레이를 마주 안고 있다가 레이의 어깨가 가늘게 떨리는 걸 느끼고 깜짝 놀라 물었다. 

"우리 딸, 울어?" 

아니 얘가 갑자기 왜 훌쩍이려 하지? 

사춘기의 감수성이라는 건 부모 입장에서 참 따라잡기 벅찬 존재였다. 

그 와중에 레아는 슬금슬금 카렌과 레이의 눈치를 보았다. 

'어... 내가 아까 너무 심하게 팼나?' 

그래서 우는 건가? 

레아는 매우 당황했다. 

아까 좀 작정하고 패긴 했다. 

그런데 조카가 먼저 레아의 대가리를 후려치지 않았던가? 

물론 피할 수는 있었는데, 설마 진짜 때릴까 싶어 지켜봤었다. 

그러다 조카가 레아의 머리를 세 번이나 후려쳤고, 그 뒤로 레아는 작정하고 조카를 쥐어팼다. 

되돌아보니 좀 과하게 쥐어팬 것 같기도 하고? 

괜히 마음이 찔린 레아가 쭈물거리며 눈치를 보다가, 슬그머니 다가와 레이의 옷 뒤에 묻은 흙먼지를 탈탈 털어냈다. 

레아가 그러거나 말거나 레이는 한참을 카렌에게 안겨있다가 숨을 크게 내쉬며 떨어졌다. 

"잠깐 나갔다 올게요." 

"또?!" 

"고모랑 같이 다녀올게요." 

레이는 그리 말하고 곧장 등을 돌렸다. 

여기가 허상이라 아무리 되뇌고 되뇌어도 요동치는 감정이 제대로 통제되지가 않았다. 

한편 카렌이 멋대로 걸어가는 레이를 쫓아가려는 걸 레아가 말렸다. 

"언니, 내가 잠깐 같이 갔다 올게요." 

"하지만..." 

"들어가 있어요. 나 다녀오면 식사나 한 끼 차려줘요." 

레아가 거듭 설득하자 카렌은 미안한 기색을 가득 내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는 화가 났다. 

물론 계속 화가 나 있기는 했는데, 지금은 정말 통제하기가 힘들었다. 

허상, 허상, 허상, 허상... 허상이란 단어를 몇 번이나 반복해서 중얼거려도 끈적한 불쾌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고모, 내 아빠 어디서 죽었어요?" 

레아는 이 녀석이 사춘기가 참 지독하게 왔구나 속으로 중얼거리며 답해주었다. 

"너희 집에서 돌아가셨잖아." 

"아, 진짜 이해가 안 되네." 

집에서 죽었다는 건 어디 나돌아다니다 제대로 대비도 못 하고 급사했다는 건 아니란 소리였다. 

근데 대체 어떻게 이런 미래가 찾아올 수 있지? 결코 납득할 수가 없었다. 

레이가 자기 얼굴을 꽉 누른 채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데 익숙한 톤의 목소리가 들렸다. 

"또 고모한테 잡혀왔냐?" 

"...지미." 

얼굴에 흉터가 가득한 지미가 혀를 끌끌 찼다. 

"누굴 닮아서 말을 그리 안 들을까? 어, 그래, 애비 닮아 그렇겠지. 나도 잘 알아. 그놈을 누가 키웠는데. 아주 애비를 똑닮았어." 

지미가 자문자답하며 레이의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었다. 

"몸 조심 좀 해. 너희 엄마가 너만 보며 살아가는데, 응? 그리고 다쳐서 너한테 좋을 게 뭐 있냐? 병상에 누워있으면 행복해?" 

"...지미는 왜 여기 있어요?" 

"왜? 할애비는 여기 있으면 안 되냐?" 

"아니... 지미는 영지 있잖아요. 왜 거기 안 있고 여기 있어요?" 

"영지는 거기 있고, 손녀들은 여기 있고." 

지미는 어깨를 한 번 으쓱이며 그리 답했다. 

레이는 눈을 깜박이다 정색하고 물었다. 

"지미, 이번 한 번만,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고 그냥 내 질문에 답해줘요." 

"어떤 질문?" 

"내 아빠 죽고 나서 제국에서 내전이라도 있었어요? 아니면 인류를 분열시켜서 전력을 크게 소모하게 만든 다른 사건이라도 있었어요?" 

"흠... 자잘한 갈등 같은 거야 많았지만, 그리 거창하게 표장할 만한 사건은 없었던 것 같은데." 

"근데 대체 왜...! 인류가 총력전을 하고 있죠? 대체 어디서부터 누가 잘못했기에? 저 붉은 하늘은 또 뭐고?" 

"음, 갑자기 왜 그런 걸 묻는지 모르겠다만... 내 생각에는 누구도 잘못하지 않았어. 우리 모두 최선을 다했지." 

"그게 무슨 개소리야!!" 

레이는 결국 솟구쳐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고함을 토해냈다. 

딱딱해진 분위기 속에서 거칠게 호흡을 내쉬던 레이가 자기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다른 것을 물었다. 

"벨라... 벨라는 지금 어디 있어요." 

"..." 

"..." 

갑작스러운 레이의 고함 탓에 직전까지 떨떠름해하고 있던 지미와 레아가 동시에 표정을 굳혔다. 

그 반응을 보고, 레이 또한 무언가를 직감했다. 

아냐. 아냐, 그럴 리가. 

레이가 이 환영 속에서 벨라를 먼저 찾지 않은 것은 레아가 무사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당연하게도 벨라 또한 무사하리라 여겼다. 

그런데 지금 이 반응은 뭐야? 

레이가 두 눈을 충혈시킨 채 지미의 어깨를 잡았다. 

"지미, 벨라 어디 있어요. 당장 대답...!!" 

따져물으려던 찰나에 풍경이 뒤틀렸다. 

"이번 빌어먹을...!!!" 

레이가 욕설을 토해내며 허우적거렸지만 이미 뒤틀리기 시작한 풍경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이내 레이는 새롭게 뒤바뀐 풍경에서 털썩 넘어졌다. 

지미와의 만남 이후에도 서로 다른 환영이 이어졌다. 

감정이 널뛰어댔지만 그럼에도 레이는 포기하지 않고 이를 악 물고 버텼다. 

어차피 이 모든 것은 허상일 뿐이라는, 그러한 자기 설득이 버팀목이 되었다. 

"흐으..." 

지미와의 만남 이후 세 번 더 풍경이 바뀌었다. 

레이는 풍경이 바뀔 때마다 찾아오는 어지럼증 탓에 벽에 등을 기댔다. 

"하아..." 

등을 기댈 수 있는 벽이 느껴지는 걸 보면 실외가 아닌 실내인 모양이었다. 

자, 이번엔 또 어디에 떨어진 걸까. 레이가 고개를 가볍게 저으며 눈을 다시 떴다. 

그리고 레이는, 차갑게 가라앉은 은색 눈동자를 마주 볼 수 있었다. 

"루나...!" 

알아보지 못할 수가 없다. 

비록 외견은 많이 성숙해져 있었으나, 루나의 그 은색 눈동자만큼은 레이의 뇌리에 깊이 각인되어 있었다. 

당황한 기색이 가득한 레이를 향해 루나가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야." 

"..." 

레이는 눈앞의 루나 또한 허상일 것이라고 확신하기는 했다. 

허나 레이는 정신적으로 너무나도 지쳐 있었다. 

정말 간신히 의지를 붙들고 있는 상황에서, 정신적으로도 능력적으로도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의 형상이 눈앞에 나타났다. 

숨을 몰아쉬던 레이가 결국 충동을 참지 못하고 토로했다. 

"루나...! 나, 나 레이야. 나 레이라고." 

"...당신이, 레이라고요?" 

"어, 어! 믿기 힘들겠지만, 그... 나는 과거에서 왔어." 

루나는, 정신나간 소리를 들은 것치고는 굉장히 담담하게 되물었다. 

"과거라면... 언제요?" 

"그... 오시리스 백작령. 사령검을 쥔 녀석이 백작령을 습격했잖아. 베네딕트였나? 어, 그 녀석을 소멸시키고 루비하 왕국이랑 전쟁 끝나고 나서 얼마 안 됐어." 

"..." 

이야기를 듣던 루나가 조용히 웃음을 머금었다. 

감정을 알아차리기 힘든, 참 작위적인 웃음이었다. 

웃음을 머금은 채 레이를 가만히 바라보던 루나가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 장난에 어울려줄게요, 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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