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3화
빡!
레이는 손이 가는 대로 레아의 대가리부터 후려쳤다.
지극히 척수반사적인 반응에 가까웠는데, 일단 후려치고 나니 기분이 매우 상쾌해졌다.
이 개 같은 환영 속에 발을 들인 후 레이는 처음으로 흐뭇하게 웃었다.
한편 대가리를 얻어맞은 레아는 이 상황을 받아들이기 위해 정말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인형처럼 굳은 채 눈만 깜박이던 레아는, 흐뭇하게 웃는 레이를 보고 마침내 상황을 이해했다.
이번엔 레아가 레이의 대가리를 후려쳤다.
뻐억!
"...?"
머리가 띵~ 울리는 걸 느끼며, 레이는 방금 전 레아처럼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내가 지금 맞은 건가? 누구한테? 레아한테? 레아가 내 대가리를 후려쳤다고? 그게 말이 되나?
"..."
너무나 큰 정신적 충격 탓에 비틀대며 방황하던 레이가... 간신히 정신을 붙들고 상황을 이해했다.
그리고 곧장 손을 뻗었다.
퍽퍽!!
한 대 맞았으니 두 번 때렸다.
레이가 후려치는 방향에 따라 레아의 머리가 좌우로 흔들렸다.
레아가 좌우로 흔들리는 시야를 느끼며 감탄했다.
세 번. 도합 세 번이다.
방금 전 맞은 것까지 더해 도합 세 번이나 머리를 얻어맞았다.
그 충격적인 사실에 레아가 활짝 웃었다가, 무섭게 정색했다.
"야 이 미친년아!!!!!"
콱!!
레아가 번개처럼 손을 뻗어 레이의 머리카락을 한 움큼 움켜쥐었다.
그리고는, 사정없이 팔을 흔들어대기 시작했다.
"너 진짜 미쳤냐?!!"
레아가 힘을 주는 대로 레이의 머리가 이리저리 마구마구 흔들렸다.
머리카락이 쥐어뜯길 때까지 제대로 반응도 못한 레이가 뒤늦게 저항하려 했다.
"악...! 아악!! 이, 이거 안 놔?!!"
"안 놓으면 어쩔 건데?!!"
"크악...!! 이런 배은망덕한 년이 지금 뭐 하는...!!"
"배은망덕?!! 이 미친년이 지금 누구보고 배은망덕하대?!!"
레아가 한손으로는 레이의 머리카락을 쥐어뜯어가며 다른 한 손으로는 레이를 쥐어패기 시작했다.
레이는 정말 사력을 다해 레아에게 저항했다.
허나 몸뚱이가 도저히 레이의 마음처럼 따라주지가 않았다.
결국 레이는 머리카락을 쥐어뜯기며 일방적으로 처맞게 되었다.
"악! 아악!"
두들겨 맞는 것보다도 머리카락을 쥐어뜯기는 고통이 너무나 생소해서 충격이 컸다.
비명을 질러대던 레이가 끝내 레아의 손목을 붙들고 비굴하게 소리쳤다.
"야!! 야 잠깐만!! 머리카락만 좀 놔 봐!!"
"야? 야아~? 이게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아니 좀 놔보라고!!!"
"이게 어디서 큰소리야!!!"
"아악!!!"
레이는 부질 없는 반항을 이어간 탓에 레아에게 한참 더 머리를 쥐어뜯겨야 했다.
*
"..."
레이는 레아에게 목덜미 부근의 옷깃을 붙잡힌 채 질질 끌려가는 중이었다.
조금 전까지 이어지던 레아의 폭력 행위는 레이가 잘못했다고 존댓말로 빌고 나서야 중단되었다.
'니미 시발...'
자괴감 탓에 손발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 모든 게 허상이라고 마음을 다잡으려 해도 정신적인 충격이 가시지가 않았다.
이건 정말이지 끔찍한 악몽이었다. 현실로 돌아간다 해도, 간간이 오늘의 악몽을 다시 꾸게 될 것이 분명했다.
레아에게 쥐어터지는 꿈을 몇 번이고 몇 번이고...
"..."
레이는 축 처진 채 질질 끌려가다 불쑥 입을 열었다.
"고모."
"왜."
"..."
레아를 '고모'라 부르려니까 온몸이 덜덜 떨리며 발작이 오는 것과 별개로.
레아가 진짜로 '고모'라면 이 육체와는 족보 상으로 3촌 관계에 해당한다는 뜻이었다.
레이에게 자식이 생긴다면, 그 자식 또한 레아를 고모라 부르게 될 것이다.
"..."
레이가 자기 머리카락을 가져와 살폈다.
붉은 색의 머리카락이 어째 살갑게 느껴졌다.
허리 위의 가슴은 꽤 크게 부풀어 있었다.
자기 가슴을 더듬거린 레이가 콧잔등을 강하게 말아쥐었다.
별로 달갑지 않은 가능성이 떠올라 머리가 지끈거렸다.
'하, 아무리 허상이라 해도 참...'
유쾌할 수가 없는 경험이었다.
레이가 심각한 얼굴로 콧잔등을 말아쥐고 있던 그때.
가까운 곳에서 해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또 혼난 것이냐?"
해맑은 목소리를 듣고 레아가 발걸음을 멈추었고, 끌려가던 레이 또한 동시에 정지했다.
레이가 옆을 돌아보았다.
장난기 가득한 웃음을 머금은 예쁜 소녀가, 레이를 향해 사뿐사뿐 다가오고 있었다.
검은 머리카락을 풍성하게 기른 소녀의 푸른 눈동자에는 활기가 가득했다.
"그만 철 좀 들으라고 내 누누이 말하지 않았더냐! 이제는 너 또한 품위를 갖추어야할 나이니라! 언제까지 어린애처럼 굴 것이냐?"
그리 말하며 소녀는 우쭐한 표정을 지었다.
레이는 소녀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자기 쪽으로 손짓했다.
"야, 일로 와 봐."
"어찌 손짓으로 나를 오라가라 할 수 있단 말이냐...!"
소녀는 경악하는 시늉을 하면서도 거리를 좁혔고, 거리를 좁히면서도 툴툴댔다.
"그리고 나를 '언니'라 부르라고 몇 번을 이야기하였는데 아직까지 그리 낮춰 부르느냐."
"네가 왜 언니야?"
"내가 이틀 먼저 태어나지 않았더냐."
"이틀 가지고 유세 부리는 거야?"
"꼬우면 나보다 먼저 세상 밖으로 기어나오지 그랬느냐? 배 속에서 꾸물거리다 늦은 네가 잘못한 것이니라."
품위 품위 노래를 부르면서도 단어 선택이 묘하게 저렴했다.
레이는 두 손을 뻗어 가까이 다가온 소녀의 뺨을 천천히 주물거렸다.
말투부터 시작해서 밉지 않은 뻔뻔함으로 무장한 게 참 누구 생각이 많이 나게 하는 소녀였다.
레이는 자기가 지금 어떤 얼굴로 소녀의 뺨을 주물거리고 있을까, 잘 예상이 가지 않았다.
"...너 근데 왜 이렇게 차림새가 거지 같냐?"
레이의 폭언에 충격을 받은 소녀가 두 눈을 크게 떴다.
"이거 비싼 드레스이니라!"
"썩 비싸 보이지는 않는데."
피식 웃은 레이가, 가슴을 꾹 누르는 알 수 없는 압박을 이겨내며 다시 입을 열었다.
"너, 알레시아 딸이냐?"
"어디 백작님 존함을 함부로 부르는 것이냐!"
알레시아가 짐짓 화난 표정으로 레이의 머리를 콩 두드렸다.
콩, 그 작은 울림 탓에 레이는 멀미가 났다.
이 모든 게 허상이라 몇 번이나 되새겨도, 그럼에도... 끔찍했다.
뭐라 형용키도 힘든 참담함이 자꾸만 표정을 뒤틀리게 해서, 레이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정신적 피로가 치솟는 느낌이라 잠깐은 휴식이 필요했다.
얼굴을 가리고 입을 다문 레이를 보고 삐쳤다고 생각한 레아가 다시 레이를 질질 끌고 길을 걸었다.
소녀는 콧노래를 작게 흥얼거리며 레아와 레이의 뒤를 따라 걸었다.
레이는, 자기 얼굴을 꾹꾹 눌러 억지로 주름을 없앤 후 숨을 몰아쉬었다.
"...야."
"언니라고 부르거라!"
"야 인마."
"...!"
언니한테 인마라니!
큰 충격을 받고 잠시 흐물거리던 소녀는 끌려가고 있는 레이를 퍽퍽 걷어찼다.
레이는 힘이 거의 들어가지 않은 소녀의 발길질에 얻어맞으며 생각했다.
이것 참 대단한 불효군. 아니, 해준 것도 없을 텐데 불효 운운하는 것도 병신 같은 소리 아닌가?
그걸 고민하던 레이가 확인 차 물었다.
"야, 너 아빠 없냐?"
"...뭐라 하였느냐?"
"너 아빠 없냐고."
"어째 남의 아빠 찾듯이 말하는구나?"
소녀는 진짜로 어이가 없었는지 입을 반쯤 벌린 채 헛움음을 터뜨리며 레이를 조금 더 강하게 걷어찼다.
"왜 갑자기 아버지 이야기를 하는지 모르겠구나."
"..."
"뭐... 하여튼 자부심을 가지거라. 우리 아버지는 인류의 역사에 길이 남을 영웅이셨다!"
"근데 영웅의 딸내미께서 왜 이리 거지 같이 입고 다니실까."
"비싼 드레스라고 하지 않았느냐!"
소녀의 항변에 탁한 목소리로 낄낄 웃은 레이가 다른 것을 물었다.
"너희 어머니께서는 만수무강하시냐?"
"일이 많아 매일 아침 흐물거리고 계시느니라!"
"..."
"그래도 우리 어머니 만큼 우리 영지를 잘 이끌어주실 영주님이 세상에 또 어디 계시겠느냐!"
"..."
레이는 한숨을 푹 내쉬며 눈을 돌렸다.
어느새 필립스 백작령의 주거지에 가까이 도달해 있었다.
레이가 낑낑거리며 몸을 일으키려 하자 레아가 옷깃을 놓아주었다.
레이는 두 눈으로 필립스 백작령을 천천히 살폈다.
'정말... 돌아버리겠네.'
직전까지 환영에서 보았던 풍경들은 레이에게 잘 와닿지 않았다.
똥통을 보았다고 해도, 거기가 본디 남의 집 안방이었는지 뒷간이었는지 알지 못한다면 똥통은 그냥 똥통이었다. 충격을 받는다고 해도 무던하게 넘길 수 있었다.
허나 필립스 백작령은 레이에게 가장 익숙한 장소이자 풍경이었다.
그 때문에 극심한 변화가 바로 체감이 되었다.
"황폐하고... 또 왜 이렇게 영지가 가난해 보여?"
레이의 중얼거림을 듣던 소녀가 이번에는 진짜로 짜증을 냈다.
"우리 영지 정도면 형편이 정말 좋은 편이니라. 백작님이 현상을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시는데 자꾸 그리 말하느냐?"
"..."
레이는 말 없이 앞으로 걸었다.
전대륙에 걸친 물자 부족 사태는 그렇다고 치고, 거리를 다니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하나 같이 우울함이 내려앉아 있었다.
생기가 거의 느껴지지 않았고 웃는 이들이 적었다.
레이는 그 원인을 찾아 고개를 들었다.
붉은 하늘. 저게 바로 그 원인이었다.
저 불쾌한 하늘은 사람의 정신을 곪게 했다.
"..."
마음의 상처라는 것은 분명 치유될 수 있다.
그리고,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선 좋은 환경이 필요했다.
푸른 하늘, 맑은 공기, 그리고 신선한 바람을 느끼며 길을 거닐기만 해도 사람은 마음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다.
오랜 인연들, 혹은 새롭게 만난 인연들과 함께 맛있는 식사를 하며 떠들썩하게 웃는 것만으로도 사람은 마음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며 즐거운 경험을 새롭게 쌓아간다면.
과거의 아픔과 상처들은 어느 샌가 흐릿하게 변해 딱지가 앉는 법이었다.
그 치유의 시작이 바로 '푸른 하늘'이었다.
"..."
붉은 하늘. 가라앉은 공기. 불쾌한 바람.
마음에 새겨진 상처를 지우지 못하게 하고, 도리어 곪게 만드는 저주.
이런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들은 아무리 초인 같은 의지를 지녔다고 해도 매일매일 정신이 갈려나갈 수밖에 없다.
"...고모."
레이가 뒤를 돌아 레아를 바라봤다.
"전쟁이 있었나요?"
"...전쟁이야 지금 하고 있잖아?"
"이 전쟁 이전에, 제국에서 내전이 있었나요? 아니면 다른 문제가 있었나요?"
"...뭐?"
레아는 레이가 묻고자하는 것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레이는 레아의 붉은 눈동자를 바라보다 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을 푹 쉬었다.
"우리 엄마는 지금 어디 있어요?"
*
세계수.
현실에서 그리 칭해지는 위대한 존재가 레이를 바라보았다.
물론, 위대한 존재에게 있어 '바라본다'는 행위가 필멸자들의 것과 동치하지는 않았다.
레이가 지금 겪고 있는 풍경을 세계수가 동일하게 체험할 수는 없었다.
다만 세계수는 자신이 원하는 장소와 시간대에 가깝게 레이를 인도해줄 수는 있었다.
헌데 레이를 인도해주던 세계수가 무언가... '이상'을 감지했다.
레이는 엘-람의 사도다.
이제까지의 사도와 형태는 조금 다를지라도 그것만은 분명했다.
레이에게서는 엘-람의 잔향이 뚜렷하게 느껴졌다.
헌데...
헌데 대체 왜...
제약을 찾을 수가 없지?
사도라는 존재에 제약은 필수불가결했다.
헌데 제약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그렇다면...
지금 이 경계 너머에 발을 걸쳤을 때.
새롭게 제약을 씌우는 것도 가능했다.
비원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