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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등가의 소드마스터-302화 (302/446)

원망 (2)

302화 

"여기는 지옥이야." 

차갑게 굳은 여인의 목소리에는. 

오랜 시간 마모되어 형태를 잃은 괴로움의 찌꺼기들이 덕지덕지 묻어나왔다. 

"레이가 내게 남긴 것은 고통 뿐이야. 레이에게 나는 쓸만한 도구였을 뿐일 텐데, 나는 그날의 온기를 애정으로 착각했어." 

갈곳을 잃은 공허한 원망은 아무리 뱉어내도 해소되지 않는다. 

레이는 여인을 보며 혼란에 가득 휩싸인 채로 입술을 달싹였다. 

그래, 우리 관계의 시작은 분명 순수하지 못했다. 내가 너를 도구로 보았다는 힐난을 마냥 부정할 수가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함께 추억을 쌓아가며 서로에게 가족이 되어주었다. 

설령 이 세상이 구원받아 너의 존재가 도구로써 가치를 잃는다고 해도... 

나는 너의 재능을 꽃피워주고 싶었다. 

네게 기회를 주고, 또한 스스로 미래를 개척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주고 싶었다. 

나는 네가 행복하길 바랐다. 

나는 결코 너의 고통을 바라지 않았다. 

나는 단 한 번도 이런 미래를 원치 않았다. 

이런... 이런 미래를... 이런 미래를 나는... 

"..." 

레이가 주변을 다시 돌아보았다. 

이 풍경이 허상과 다를 게 없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허상이 보여주는 것이 과연 진실된 미래인가? 그럴 리가 없다. 

이러한 미래가 찾아온다는 것을 레이는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었다. 

악신의 세력들이 준비한 수많은 수작을 레이는 무위로 되돌렸다. 

본래의 역사 속에서 제국은 방해 받지 않고 궐기한 악신의 세력들을 상대로도 일방적으로 밀리지 않았다. 

그렇기에 현 시점에서 인류의 힘은 분명 악신의 세력을 찍어 누를 수 있어야만 했다. 

이리 악신의 세력을 상대로 인류의 명운을 걸고 총력전을 펼쳐야만 하는 미래는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았다. 

허상은 단지 허상일 뿐이다. 

허상이 보여주는 거짓된 미래에 심력을 쏟을 필요 없다고... 레이는 단정하지 못했다. 

레이는 본디 이 세상에 찾아왔을 '진짜 미래'를 읽지 못했으니까, 그래서 허상이 보여주는 미래가 거짓되었다고 확신을 가질 수가 없었다. 

번민과 혼란 속에서 가슴에 맴도는 이야기는 목소리가 되지 못했다. 

레이가 입술만 달싹이고 있는 동안, 여인은 괴상하게 뒤틀려있던 입꼬리를 다시 제자리로 돌렸다. 

영원히 해소되지 못할 공허한 감정의 토로 뒤에 남는 건 극심한 탈력과 우울 뿐이다. 

깊고깊은 감정의 낭떠러지 앞에 서면 여인은 항상 그 아래로 몸을 던지고 싶어했고, 또한 항상 그리하지 못했다. 

"...미안." 

언제나 똑같은 패턴이다. 

투정을 부린 것에 대한 짧은 사과. 

그리고 자기 세뇌와 다를 바 없는 중얼거림. 

"괜찮아. 이제... 괜찮으니까. 전부 괜찮아." 

저 멀리 병영처럼 생긴 건물들이 보인다. 

여인은 그리로 향하며 자기 품에 있던 목걸이를 뺨에 대고 만지작거렸다. 

레이는 여인이 지니고 있는 목걸이가 아주 낯설지가 않았다. 

푸른 보석이 아름답게 빛나는 목걸이. 푸른 보석. 저 보석의 이름이 분명... 아쿠아닉스. 

"..." 

계속해서 고민한 끝에 레이는 과거의 기억을 떠올렸다. 

옛날 오시리스 백작령에 들렀을 때... 그때 클레멘스의 상단을 삥뜯어서 장신구를 몇 개 챙겼었다. 

그 장신구 중 하나를 적당히 골라 요하나에게 건넸었다. 

차마 '선물했다'는 표현을 쓰기가 염치 없었다. 

정성들인 포장 따위도 없이 그냥 툭 건넸던 물건이니까. 

요하나는 그 목걸이를 레이 앞에서 몇 번 차고다니더니 언제부턴가 차고 다니지 않았다.

목걸이가 마음에 들지 않은 걸까. 아니면 혹시 잃어버리기라도 한 걸까. 

한 번쯤 먼저 물어볼만도 했건만, 요하나가 별말 없자 레이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다가 목걸이의 존재 자체를 잊어버렸다. 

그래, 바로 그 목걸이였다. 

레이가 존재조차 망각해서 다시 떠올리기 위해 한참을 낑낑거려야 했던 바로 그 목걸이를 여인은 여전히 손에 쥐고 있었다. 

"..." 

레이는 말 없이 신음을 흘렸다. 

가슴이 답답했다. 

가슴이 너무 답답해서, 이대로 있다간 질식할 것만 같았다. 

"요하나...!" 

거칠게 호흡을 내쉬던 레이가 결국 충동을 억누르지 못하고 여인을 불렀다. 

허나 여인은 차갑게 선을 그었다. 

"괜찮아. 괜찮다고 했잖아. 그러니까, 아무 이야기도 하지 마." 

여인은 위로를 바라지 않았다. 

허울 뿐인 위로는 여인에게 다시 낭떠러지만 돌아보게 만들었다. 

여인은 목걸이를 손에 쥔 채 억지로 다른 것을 생각하려 했다. 

방황 끝에 억지로 새로운 화제를 떠올린 여인이 입을 열었다. 

"아... 근데... 혹시 새로운 연락은 없어? 오래됐잖아." 

"...연락?" 

"어. 연락. 마지막 연락이 벌써... 얼마나 됐지? 기억이 잘 안 나네." 

"누구 연락을... 말하는 거야?" 

"누구긴 누구야, 당연히..." 

문득 말을 멈춘 여인이 자리에서 멈춰섰다. 

그리고 레이를 향해 서서히 돌아섰다. 

"너..." 

제대로 인식할 틈도 없이 분위기가 반전된다. 

스산한 공기가 살을 에워싸는 것 같더니 삽시간에 거칠게 다듬어진 살기가 레이를 향해 쏟아져 내렸다. 

여인의 품에서 검이 뽑혀 나온다. 

"너, 데런 맞아?" 

"요하나, 나는...!!!" 

레이는 다시 한 번 충동을 이겨내지 못하고 고함을 내질렀다. 

허나 하고자 했던 말을 미처 끝마치기도 전에 풍경이 뒤틀렸다. 

형체를 잃고 녹아내린 풍경이 이리저리 뒤섞이다 이내 새로운 풍경을 만들어냈다. 

갑작스러운 변화에 감각이 교란되며 균형이 잡히지 않았다. 

앞으로 넘어지며 무릎을 꿇은 레이는 몸을 일으켜세우기 위해 땅을 더듬거리며 연거푸 외쳤다. 

"요하, 요하나...! 요하나, 나는 절대 너를...!!" 

일어서다 넘어지길 몇 번이나 반복한 끝에 다시 두 다리로 균형을 잡을 수 있었다. 

허나 레이가 주변을 돌아보았을 때, 이미 요하나는 그곳에 있지 않았다. 

레이 앞에 펼쳐져 있는 건 조금 전과 전혀 다른 풍경이었다. 

레이는 닿지 못한 손아귀를 허공으로 뻗어보다, 이내 주저앉았다. 

"요하나..." 

환영은 계속해서 다른 풍경을 보여주었다. 

레이는 알지 못하는 장소에서 알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 휘청이길 반복했다. 

허나 풍경을 바꿔끼워도 변치 않는 게 몇 가지 존재했다. 

일단 불쾌하기 짝이 없는 몽롱한 부유감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또한 어딜 가든 하늘이 붉었고, 대지는 삭막하기 그지 없었다. 

환영이 보여준 풍경 중에서는 전장과 동떨어져 있다고 생각되는 장소도 존재했으나, 황폐하긴 마찬가지였다. 

"하..." 

레이가 헛웃음을 흘렸다. 

차라리 사람이 살지 않는 버려진 곳을 보여주었다면 기분이 나았을 것이다. 

유적 탐사라도 한다 치고 돌아다니며 운치라도 즐겨보려 했을 터다. 

허나 이제까지 경험한 모든 풍경에서는 아직 사람이 살아가고 있었다. 

그 덕분에 무거운 공기가 계속해서 어깨를 짓누르는 것만 같아 레이는 갈수록 마음이 지쳤다. 

"하아..." 

레이는 억지로 몸을 일으켜 세운 후 지나가는 사람을 아무나 불렀다. 

"이봐." 

"...왜?" 

"이 '전쟁'이 언제 끝날까?" 

레이의 물음에 남자가 실소를 터뜨렸다. 

한참을 끅끅거린 남자가 자기 머리를 툭툭 두드렸다. 

"또 이상한 거 주워먹고 실성했냐?" 

"언제 끝날 거 같냐니까." 

"하! 언젠가는 끝나겠지." 

그런데. 

"우리 죽기 전에는 안 끝나." 

화악!! 

풍경이 다시 바뀌었다. 

풍경이 바뀔 때마다 기분이 매우 더럽긴 했으나 그래도 적응은 좀 되었다. 

"..." 

레이가 지친 기색으로 숨을 내쉬었다. 

언제까지 이 빌어먹을 환영이 반복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레이에게 반항할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레이는 자기 정신이 버티는 선까지는 환영을 계속해서 경험해볼 생각이었다. 

이 환영이 단지 허상일 뿐인지, 아니면 정말 미래라도 예지하고 있는 지는 알 수 없었다. 

세계수가 대체 어떤 목적을 지니고 이리 사람을 피곤하게 하는 지도 알 수 없었다. 

그리 아무것도 몰랐기에. 

레이는 일단 버티면서 얻을 수 있는 것을 최대한 얻으려 했다. 

"아으..." 

가위눌린 것처럼 몸이 무거웠다. 

레이가 억지로 몸을 일으켜 자기 손바닥을 살폈다. 

비교적 작고 하얀 것을 보니 남자의 것 같지는 않았다. 

고개를 숙이자 붉은 머리카락이 아래로 내려와 뒤로 넘겼다. 

"어디 보자..." 

레이가 주변을 둘러보다 눈살을 찌푸렸다. 

레이는 숲 한가운데 서 있었는데, 묘하게 풍경이 익숙했다. 

하늘은 붉었고 숲의 기운은 변질되어 기분을 불쾌하게 만들었으나, 그럼에도 어딘가 그리운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계속해서 주변을 살피던 레이가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시발 진짜..." 

웃음기 어린 욕설을 중얼거리며 레이가 가까이 있는 비석을 향해 걸었다. 

꽤 값이 나가는 청강석으로 만들어진 비석이었는데, 그 정체는 다름 아닌... 

"제국의 영웅, 다비드 님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며!" 

암흑정령사 로커스트를 토벌하는 공적을 세웠으나 그만 목숨을 잃고 만 다비드의 추모비였다. 

"가지가지한다, 진짜." 

어처구니가 없어 실소를 터뜨린 레이가 추모비의 단 위에 엉덩이를 붙였다. 

"그럼... 저쪽이 필립스 백작령이겠네." 

레이가 천천히 방향을 잡아보고 있는데 가까운 곳의 풀숲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소리가 난 곳으로 눈을 돌린 레이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아이고, 저 좆 같은 돼지 새끼." 

와일드호그였다. 

레이의 기억에 비해 덩치가 훨씬 커진 것만 빼면 참 익숙한 마물이었다. 

레이는 혹시 자기 감각이 이상한가 싶어 추모비와 와일드호그의 크기를 비교해봤는데, 역시나 평범한 와일드호그에 비해 덩치가 훨씬 컸다. 

레이가 씩씩 거리는 와일드호그를 향해 손짓했다. 

"눈치 보지 말고 들어와, 돼지 새끼야." 

솔직히 저놈 돌진을 피할 수 있을까 의문이긴 했지만, 저게 가란다고 갈 놈이 아니었다. 

이내 와일드호그가 쾅쾅쾅 돌진해왔다. 

레이가 피할 준비를 하는데, 저 위에서 사람 하나가 떨어져내렸다. 

콰앙!!! 

굉음과 함께 흙이 사방으로 터져나왔다. 

그와 동시에 두 동강이 난 와일드호그가 데굴데굴 굴러갔다. 

레이가 덤덤하게 굴러가는 와일드호그를 구경하는데, 투구를 쓰고 있던 기사가 빽 소리쳤다. 

"야!!!!!" 

목소리를 들어보니 젊은 여자다. 

여자가 계속해서 소리쳤다. 

"내가!! 막 혼자서 쏘다니지 말라고 했지!!! 어!! 위험하게 막!!" 

아이고, 그러셨나요. 거참 죄송하게 되었수다. 

레이가 그런 말을 속으로 중얼거리며 빤히 바라보고 있자 여자는 더더욱 속이 터지는 듯 했다. 

"야!! 뭘 잘했다고 그렇게 빤히 쳐다봐!!" 

"..." 

"잘못했어 안 했어?!" 

"..." 

"야!!! 대답 안 해?!!" 

"..." 

"아 저거 사춘기 때문에 미치겠네!!! 누굴 닮아서 어!!! 안 그래도 너희 엄마 힘든데 자꾸 이럴 거야!!!" 

투덜투덜 짜증짜증. 

한참을 그리 감정을 토로하던 여자가 투구를 벗었다. 

검게 염색된 머리카락. 그리고, 묘한 기운을 품은 붉은 눈동자. 

"네가 그러면 안 되는 거야, 응?! 아무리 사춘기라도...!" 

여자는 계속해서 쫑알쫑알 잔소리를 이어갔다. 

분명 본적 없는 생소한 여자였다. 

그런데 레이는 가슴 깊숙이에서 강렬한 띠꺼움이 치솟아오르는 걸 느꼈다. 

여자는 여전히 잔소리를 진행 중이었다. 

"내가 진짜 너 때문에 어?! 맨날맨날..." 

"야." 

레이가 '야'라고 부르자 여자가 잔소리를 뚝 그치고 두 눈을 크게 떴다. 

그런 여자를 향해 레이가 눈살을 찌푸린 채 물었다. 

"너 설마 레아냐?" 

"...하, 하하... 하...!" 

혈압이 오르는 지 뒷목을 잡은 여자가 레이를 향해 뚜벅뚜벅 다가왔다. 

"야? 야아? 야아아?! 너 지금 고모한테 그게 무슨 말버릇이야?!" 

고모? 

레이는 그런 호칭에 의문을 가지기도 전에, 일단 손이 가는 대로 레아의 대가리부터 후려쳤다.

비원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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