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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등가의 소드마스터-301화 (301/446)

301화 

"여기까지 나는 왜 부르셨습니까?" 

일렁이는 색채 너머의 존재를 향해 레이는 폼을 잡으며 시건방을 떨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곧장 자기 행동을 후회했다. 

저 너머에 있는 것은 현실에서 마주하는 게 불가능한 초월적인 존재의 근원이다. 

인간은 저것들과 정상적인 소통이 불가능했다. 

소통이란 개념 자체가 인간과는 완전히 달랐다. 

그렇다고 저것들이 친절하게 인간 수준에 맞춰 소통을 진행해줄 놈들도 아니었다. 

"아, 잠깐, 잠깐만." 

레이는 잠깐 기다리라며 썩 추하게 손을 흔들어댔다. 

허나 색채 너머의 존재는 레이의 바람을 들어주지 않았다. 

검게 물든 공간에 덧칠되어가던 색채가 점점 더 번져 나오며 레이에게 다가왔다. 

레이는 속으로 욕설을 중얼거리며 자기 발목 아래가 색채로 뒤덮이는 모습을 지켜봤다. 

"...!" 

시야가 난잡하게 녹아내렸다. 

동시에 인지할 수 있는 모든 감각이 왜곡되어 아지랑이처럼 넘실거렸다. 

레이는 흐트러지려는 정신을 안쪽으로 집중하여 혼돈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레이는 지금 쪽배를 타고 폭풍우를 만난 뱃사람과 다를 게 없었다. 

무언가를 제대로 사고할 겨를도 없이 일단 폭풍우가 잦아들 때까지 버텨야 했다. 

그리 버티고 버틴 끝에, 레이는 몸을 비틀거렸다. 

"흐..." 

몸을 비틀거렸다는 게 느껴졌다는 건 감각이 좀 안정되었다는 뜻이었다. 

몽롱한 부유감 탓에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으나 레이는 억지로 눈을 떴다. 

앞이 빙글빙글 돌았기에 레이는 마른 세수를 한 번 했다. 

"크으..." 

반쯤 찢겨나가 있던 장갑이 얼굴을 쭉 긁었다. 

양팔을 움직이려 했는데 얼굴에 닿는 건 손바닥 하나다. 

레이가 자기 어깨를 내려다보니 왼팔은 또 언제 뜯겨나가고 없었다. 

"외팔이?" 

아직까지 욱씬거리는 꼴을 보니 뜯겨나간 지 그리 오래된 것 같지는 않았다. 

고통을 이겨내고 고개를 든다. 몽롱한 부유감은 여전했지만 그래도 눈동자에 초점이 제대로 잡혔다. 

"뭐야...?" 

눈에 보이는 풍경이 모조리 생소했다. 

이곳이 대체 어디인지 알 수는 없었으나, 그래도 한 가지 사실은 쉽사리 깨달을 수 있었다. 

이곳은 전쟁터였다. 꽤 오랜 시간 격전이 이어졌다고 생각되는, 그런 전쟁터였다. 

"..." 

레이가 고개를 위로 들었다. 

하늘이 붉었다. 저 위에 보이는 태양을 보니 노을이 내려앉을 시간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하늘과 구름이 붉었다. 

공기는 묘하게 불쾌하고 뜨거웠다. 

마경...에 비견될 정도는 아니었으나. 

이곳은 결코 인류를 위한 축복이 서려 있는 대지 위는 아니었다. 

레이는 자기 품을 뒤져보다 포션 한 병을 찾아서 꺼냈다. 

"아오, 진짜..." 

의식이 몽롱하게 흩어지려는 와중에도 고통은 꽤 뚜렷하게 느껴졌다. 

레이는 자기가 지금 느끼는 감각이 거짓임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기분은 더러웠다. 

짜증스럽게 뜨끈한 포션을 입에 털어넣자 그래도 좀 고통이 나아졌다. 

"어디..." 

레이가 지면에 널브러져 있는 수많은 사체들을 살펴보았다. 

사체마다 부패의 정도가 조금씩 달랐다. 끊임 없이 전투가 벌어졌다는 방증이었다. 

부패가 많이 진행된 사체는 대부분에 불에 타서 형태를 잃고 반쯤 잿가루가 되어 있었다. 

일정 주기마다 전쟁터를 아예 뜨겁게 구워버리는 모양이었다. 

전염병 예방 목적도 있었을 터고, 어쩌면 다른 사악한 수작을 방지하기 위한 대비책일지도 몰랐다. 

"누구랑 누가 싸운 거야?" 

슬슬 몽롱한 부유감도 좀 익숙해진 레이가 사체 몇 개를 뒤져보았다. 

전사자가 입고 있는 복식 중에는 잘 모르는 문양도 많이 새겨져 있었으나, 그중에는 제국과 관계된 문양도 자주 찾아볼 수 있었다. 

악마 숭배자 특유의 거북한 기운을 풍기는 사체들도 심심찮게 보였다. 

레이는 주변을 더 두리번거리다가 제국의 문양이 새겨진 갑주를 입고 돌아다니는 남자를 발견했다. 

남자는 부러진 검을 버리고 주변 사체에서 쓸만한 무기를 찾아 챙기고 있었다. 

레이가 무거운 몸을 끌고 남자에게 다가가며 물었다. 

"이봐. 여기는 어디야?" 

"...뭐?" 

"여기가 어디냐고." 

"여기가, 어디냐고?" 

"그래." 

"아니 병신아, 팔 병신이 되더니 머리까지 병신이 됐냐?" 

"머리가 좀 띵한 거 보니까 멀쩡하지는 않은 것 같네." 

"아이고... 욕을 먹어도 반응이 시원찮은 거 보니 보통 일이 아니구먼. 정신 차리셔. 죽어도 칼 맞아 죽겠다고 하셨잖아?" 

"아... 그래?" 

레이가 하나 남은 팔로 자기 머리를 긁적거리고는 다시 주변을 돌아보았다. 

"여기가... 마경은 아닌 것 같은데." 

이전에 알리모에서 경험했던 금지된 숲의 심부만 해도 여기보다 환경이 훨씬 나빴다. 

이 정도면 기껏해야 금지된 숲 외곽쯤 되는 수준이었다. 

다만 특이한 점이 하나 있었는데, 인근의 기류가 계속해서 뒤틀리며 침식이 강해졌다 약해졌다를 반복하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거대한 존재가 끊임없이 힘 싸움을 하는 듯한 모양새였다. 

한편 남자는 자꾸 헛소리를 하는 레이를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맛이 가셨군." 

"아... 뭐, 금방 괜찮아질 거야." 

"여기가 밀리면 좆 된다는 것만 알아둬. 침식이 더 번져서 저 뒤에 남은 곡창지대까지 오염되면... 아직 남은 인간들 중에서도 셋 중 하나는 굶어 뒈진다니까." 

"그래서 이리 격전지가 되었나 봐." 

"그래, 그러니 다음 전투까지만 버티다 원하던 대로 장렬히 뒈지시라고." 

"전선이 완전히 고착화된거야? 밀고 들어가지도 못하고 버티는 게 고작이야?" 

"밀고 들어가서 우리가 얻을 게 뭐야? 환경만 마경에 더 가까워져서 손실만 미친듯이 늘어나는데." 

"아하. 이미 침식된 대지를 정화할 방법이 마땅치 않은가 보군." 

"윗분들이 답을 찾을 때까지 버텨야지. 그전에 우리는 뒈지겠지만." 

남자가 레이에게 다가와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수습하고 있을 테니 가서 지휘관이나 만나보십쇼. 멍청한 소리 그만하고 정신 좀 차리시고요." 

"아... 그래. 고마워. 근데 지휘관이 어디 계시는데?" 

"저쯤에 계실 겁니다. 평소처럼 잘 달래서 모셔오십쇼." 

레이는 남자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걸어갔다. 

하늘은 붉었고, 썩은 내가 일대를 안개처럼 뒤덮어 숨쉬기를 괴롭게 했다. 

레이는 그동안 적지 않은 경험을 쌓았지만 이리 수많은 사체가 널브러진 전쟁터를 겪어보지는 못했다. 

전쟁터를 거니는 것은 결코 유쾌한 경험은 아니었다. 

허나 이 모든 게 환영임을 알고 있는 레이는 마음이 그리 무겁지는 않았다. 

혈흔이 딱딱하게 굳어 흙처럼 밟히는 대지를 걸어간 끝에 레이는 전장 끝자락에 홀로 서 있는 누군가를 발견할 수 있었다. 

꽤나 강력한 에너지를 품고 있는 아티펙트로 전신을 무장한 기사였다. 

레이가 일부러 인기척을 크게 내며 다가가니 상대가 등을 돌렸다. 

레이는 별생각 없이 상대를 바라보다 덜컥 걸음을 멈추었다. 

상대는 성숙한 여인이었다. 얼어붙은 날붙이처럼 베일 듯한 냉기를 가득 머금은 여인이었다. 

레이가 무심코 한발 물러서며 당혹이 가득 서린 신음을 흘렸다. 

비록 과거의 앳된 모습은 조금도 남아있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알아보지 못할 수가 없었다. 

레이는 혼란을 억누르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요하나?" 

"날 그렇게 부르지..." 

여인은 거칠게 갈라진 입술을 달싹이다, 이내 고개를 저었다. 

다시 등을 돌린 여인은 생기가 사라져가는 전장의 황폐한 풍경을 눈에 담은 채 침묵했다. 

항상 요하나가 레이에게 보여주던 그 덜 여문 감정의 기류들은, 더는 여인에게서 찾아볼 수 없었다. 

레이는 여인에게 어떻게 말을 걸어야하나 망설이다 일단 조용히 자리를 지켰다. 

애매한 시간 감각 속에서 여인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레이는 이것이 환영임을 재차 상기하며 결국 먼저 입을 열었다. 

"그... 요하나. 돌아가야 하지 않아...?" 

"돌아가면, 돌아가면 어쩔 건데?" 

"아니, 그래도..." 

"돌아가면, 돌아갔다가 내일도 다시 이곳을 찾겠지." 

여인은 주변을 한 번 돌아보고는 레이를 향해 한발 다가섰다. 

"이 황폐한 풍경을 매일 같이. 매일 매일 같은 풍경을 반복하고 반복하고." 

"..." 

"그렇게 또 하루하루, 하루하루. 검을 휘두르고, 사람이 죽고, 검을 휘두르고, 사람이 죽고." 

"..." 

"네가 죽어도, 또 다음 날 검을 휘두르고, 다른 누군가가 죽어도, 또 다음 날 검을 휘두르고." 

"..." 

"전장에서 도망쳐도, 어딜 가도 붉게 물든 하늘과 황폐한 대지가 나를 기다려." 

차갑게 실소한 여인이 자기 뺨을 움켜쥐었다. 

"정말... 정말... 레이는... 우리에게 끔찍한 주박을 씌웠어." 

"요하나, 그게 무슨...!"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허망한 슬픔을 억누르며 일어나. 그리고 같은 풍경 아래 검을 들어. 이제 희열이라는 감정이 내게는 생소해." 

마음에 새겨진 상처는 아물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흉터가 남아, 드문드문 괴로운 감정을 치솟게 하겠지만, 그럼에도 치유할 수 있는 존재였다. 

허나 이 삭막하고 끝이 보이지 않는 전장은... 

마음에 깊게 새겨진 여인의 상처를 썩어 문드러지게 해서 그대로 굳게 만들었다. 

"바보 같아." 

여인이 등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레이는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뒤늦게 여인을 따라 걸었다. 

하늘이 붉었음에도 여인의 안색은 차갑게 식어있어 냉기가 느껴졌다. 

"삶이 내게는 고통스럽기만 해. 이런 삶을 살고 싶지는 않았어. 이럴 바에 그날 손을 잡지 않고 혼자 얼어죽는 게 나았어." 

의미 없는 삶이다. 

타고난 재능 덕분에 의지와 상관 없이 검은 나날이 날카로워지며 초월의 영역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지만, 단 한 번도 그것에 기쁨을 느낄 수가 없었다. 

검을 휘두르는 것은 그저 감정의 토로였고, 붉은 하늘과 끈적한 핏물은 항상 끔찍한 현실을 다시 일깨웠다. 

그럼에도 여인은 스스로 삶을 끊지 못했다. 

죽음이 두렵다, 뭐 그 따위의 이유는 아니었다. 

단지, 다만... 레이가 남긴 마지막 바람을 외면하지 못하고, 레이가 바라던 자리에서 레이가 바라던 모습으로, 그냥 그렇게 레이의 바람을 연기하며 과거를 되새길 뿐이었다. 

이딴 건 삶이 아니야. 

과거부터 그리 생각했는지, 아니면 전장에서 살아가며 정신이 미쳐버려 그리 생각하게 되었는지 알 수는 없었다. 

다만 여인은... 

"레이가, 원망스러워." 

그가 나를 구원했다고 여긴 적이 있었다. 

그가 나를 지옥에서 꺼내 행복을 선물했다고 믿었던 적이 있었다. 

그에게 무한히 의지했고, 그를 많이 사랑했다. 

평범한 환경에서 성장한 게 아니었기에 그를 향한 사랑의 감정이 복합적으로 꼬여버려 많이 헤매게 되었지만. 

그것이 부모를 향한 사랑이든, 이성을 향한 사랑이든, 동경에 가까운 사랑이든, 아니면 다른 무엇이든. 

여인이 그를 세상에서 가장 많이 사랑했음은 틀림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레이는 나를 구원한 게 아니야." 

너무나 흐릿해진 아름다웠던 기억을 떠올리며 여인이 입꼬리를 괴상하게 뒤틀었다. 

"레이는 내게서 안식을 빼앗고, 나를 지옥에 빠트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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