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화
레이는 루나와 함께 나신의 엘프를 따라 걸었다.
조용히 따라 걷고 있자니 눈 둘 곳만 애매해지는 기분이라 레이가 입을 열었다.
"당신도 수호자인가?"
"크게 다르지 않다."
무시하지 않고 대답을 해주기에 레이가 다른 것을 물었다.
"수호자라 불리는 존재가 하나는 아닌 것으로 아는데, 당신을 어찌 부르면 되지?"
"라멘타."
"음, 라멘타..."
레이가 '라멘타'가 과연 이름일지 아니면 직위 같은 것을 칭하는 단어일지 고민해보던 찰나.
시야가 삽시간에 또 확 변했다.
"...!"
레이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자 방금까지 서 있던 장소가 저 멀리 보였다.
그야말로 순간이동이었다.
레이는 헛웃음이 터지려는 걸 억지로 참았다.
적어도 세계수의 영역 안에서는 라멘타에게 대적하는 게 불가능에 가깝지 않을까 생각됐다.
본 실력만 해도 로드 급에 필적하는 것 같은데 세계수의 축복까지 품고 있으니 그야말로 존재 자체가 마법 같았다.
톡!
라멘타는 녹지 한가운데 자리한 깊숙하고 거대한 구멍을 향해 발을 내디뎠다.
낭떠러지 아래로 향하려던 라멘타의 몸을 얽혀있던 나무 줄기 같은 것이 나타나 받쳐주었다.
레이와 루나 또한 라멘타를 따라 얽혀있는 나무 줄기 위에 올라탔다.
그러자 나무 줄기가 지하를 향해 천천히 내려가기 시작했다.
지하에도 엘프들의 도시가 존재했다.
사실 지상보다도 지하가 엘프들의 주 거주지였다.
세계수의 뿌리와 가까운 지하가 지상에 비해 축복이 더 충만했기 때문이다.
"하..."
계속해서 지하로 내려가고 있음에도 여전히 햇살이 가득했다.
레이는 이 신비한 풍경을 찬찬히 감상하다 본래의 역사에서 이곳 또한 불탔음을 상기했다.
울트가 악신의 사도로 각성했다 해도 홀로 이곳을 불태울 수는 없었을 터다.
울트가 마침표를 찍었을 뿐, 이 풍경이 종말을 맞이하기까지 참 많은 비극과 고통이 뒤따랐을 것이다.
레이는 살짝 싱숭생숭한 감정을 느끼고는 고개를 한 번 저었다.
"근데 라멘타. 지금 어디로 향하는 거지?"
"엘-람의 종이여. 그대는 별빛 너머를 엿보게 될 것이다."
"그, 좀 더 자세히 설명해주면 고맙겠는데."
레이가 떫은 기색을 드러내려 했으나 그보다 먼저 발판 역할을 하던 나무 줄기가 크게 부풀어 올랐다.
휘릭!
부풀어 오른 나무 줄기가 꽃봉오리 형태로 닫히며 레이와 루나, 그리고 라멘타를 집어삼켰다.
시야가 차단된 레이는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인 채 상황을 지켜봤다.
그리고 잠시 뒤, 닫혀있던 나무 줄기가 쩍 벌어지며 레이를 지면에 내려놓았다.
레이가 주변을 살폈다.
헌데 그 잠깐 사이에 풍경이 또 완전히 변해 있었다.
'여기는 뭐하는 곳이야...?'
레이가 발을 디딘 곳은 자그마한 원형의 공간이었다.
공간의 중심에는 작은 분수대처럼 보이는 건축물이 반쯤 물에 잠겨 있었다.
그리고 분수대 중앙에서부터, 복잡한 글자를 새겨넣은 것처럼 보이는 흠집이 빼곡하게 번져나가고 있었다.
중앙에서 시작된 흠집은 쭉쭉 뻗어나와 벽을 타고 계속해서 올라갔다.
레이가 벽에 새겨진 흠집을 쫓아 고개를 위로 들어 올렸으나, 벽이 워낙 높게 솟아있어 천장이 보이지가 않았다.
흡사 천공까지 치솟은 탑 안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레이가 꽤 흥미롭게 벽면을 구경하고 있는데, 라멘타가 입을 열었다.
"중앙에 가서 서라."
"가서 서면?"
"가서 서면 된다."
"막무가내로 그러지 말고 뭘 하려는 건지 설명 좀 해주면 고맙겠는데."
"중앙에 가서 서라. 별빛 너머에서 어머니께서 그대를 마중하실 것이다."
"하아..."
레이는 일단 해독 권능을 활성화해 사방에 새겨진 무수한 흠집을 바라보았다.
이 흠집들 또한 마법 술식의 일종일 테고, 어지간한 마법 술식은 권능을 통해 간단한 용도 쯤은 파악 가능했다.
허나 레이는 해독 권능을 활성화하자마자 머리가 지끈거려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아이씨... 안 되네.'
술식의 수준이 너무 고등해 권능을 사용했음에도 충분한 정보를 얻기 전에 머리에 과부하가 왔다.
기껏 얻어낸 정보라고 해봐야 결계 계열의 마법을 펼치기 위한 술식이라는 것.
잠시 고민하던 레이는 혀를 한 번 차고는 공간의 중앙을 향해 걸었다.
'어차피 코어를 활성화하기만 해도 결계 계열 마법은 거의 다 뭉개버릴 수 있으니...'
너무 겁먹을 필요는 없다.
그리 생각하며 레이가 움직이자 루나 또한 레이를 따라 공간의 중앙으로 향했다.
레이는 라멘타가 루나를 제지할 줄 알았으나, 의외로 라멘타는 루나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루나와 나란히 중앙에 선 레이가 라멘타에게 물었다.
"이렇게 둘이 함께 서 있어도 되는 건가?"
"부름 받지 않은 자는 자연히 배제될 것이다."
츠즈즈즉!
이번에도 경고 없이 변화가 찾아왔다.
갑작스레 라멘타의 피부가 수백 번 난도질한 것처럼 깊게 갈라지더니 핏물을 쏟아냈다.
그와 동시에 바닥과 벽면을 뒤덮고 있는 무수한 흠집들에서 빛이 스며 나오기 시작했다.
직후.
레이는 기이한 부유감과 함께 시야가 어두워짐을 느꼈다.
"..."
레이가 사라졌다.
그리고, 라멘타는 홀로 남았다.
시선을 돌리면, 바닥과 벽면에 새겨져 있던 흠집을 따라 조각조각 깨져나가 형태를 잃은 공간이 너울지고 있었다.
마법을 발현한 반동 탓에 발생한 차원 붕괴 현상이었다.
승천의 의식.
이 마법은 그리 칭해지고 있었다.
별빛 너머의 초월적인 존재와 찰나의 순간이나마 소통을 가능케 만드는 이 마법은 필멸자가 감히 도전해서는 안 되는 영역을 침범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라멘타라 하더라도 쉽사리 감당할 수 있는 마법이 아니었다.
"..."
오랜 시간 심혈을 기울여 준비해야하는 마법을 인간을 위해 소모했다.
그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다만... 지금 라멘타는 '홀로' 남아 있었다.
레이의 존재가 라멘타에게 감지되지 않았다. 그건 당연했다.
레이는 어머니의 부름을 받고 별빛 너머로 향하는 경계선에 발을 들였다.
헌데.
루나의 존재 또한 라멘타에게 감지되지 않았다.
본래 부름을 받지 못한 루나는 라멘타와 함께 이 영역을 유영하고 있어야 했다.
허나 루나가 감지되지 않는다는 건, 루나 또한 경계선에 발을 들였다는 의미였다.
"..."
필멸자가 홀로 그 경계선에 발을 들일 수는 없다.
루나는 부름을 받았다. 어머니의 부름을... 레이와 함께 받은 것일까.
그게 아니라면... 대체...
*
레이는 검게 물든 공간 속에서 의식을 차렸다.
분명 생소한 공간이라 생각했는데 무언가 익숙했다.
레이는 이내 나쁜 기억이 떠올라 척수 반사적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이 공간은, 레이가 환생하기 직전에 초월적인 존재와의 만남을 가졌던 바로 그 순간을 닮아있었다.
"진짜 시발..."
불알친구 놈 대신 자신을 끌고 왔던 그 멍청한 새끼와의 만남이 떠오르자 욕설이 줄줄 쏟아졌다.
허나 레이는 욕설을 내뱉으면서도 자신이 정말 입으로 욕설을 내뱉고 있는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끝없는 부유감이 몸과 정신을 잠식하고 있었다.
잠깐만 집중을 잃어도 자신의 존재가 낱낱이 흩어질 것만 같은 공포가 어둠과 함께 찾아왔다.
"..."
레이는 해독 권능이라도 사용해볼까 고민했으나, 직감적으로 그래서는 안 된다는 걸 깨닫고 포기했다.
"정신 차려."
자꾸만 크기를 키워가는 공포를 억누르며 마음을 다잡는다.
시간 감각이 왜곡되며 쉽사리 동요를 일으켰으나 레이는 무너지지 않았다.
주먹을 쥐고 자리에서 일어선다.
레이가 그러한 움직임을 강하게 상상하며 의지를 날카롭게 세웠을 때.
드디어 레이는 어둠 속에서 형상을 갖출 수 있었다.
"후우..."
형상을 갖춘 레이가 힘을 주어 일어섰다.
그때 어둠 속에서 자그마한 빛덩이가 레이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화악!
"저건 또 뭐야?"
레이는 표정을 구기면서도 빛덩이를 피하지 않고 손을 뻗었다.
그렇게 떨어져 내리는 빛덩이를 움켜쥔 직후.
대충 치대놓은 반죽 뭉치와 다를 게 없는 정보의 덩어리가 레이의 뇌리에 흘러들었다.
"...!!"
인간이 읽을 수 있도록 정제되지 않은 정보의 덩어리는 독이다.
삽시간에 머릿속이 난잡하게 흐트러지며 의식이 뚝뚝 끊기기 시작했다.
허나 레이는 이런 경험이 처음이 아니었다.
환생 직전 초월적인 존재가 억지로 정보를 박아넣을 때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그렇기에 레이는 침착하게 두통을 이겨내며 머릿속 반죽 뭉치에서 순차적으로 정보를 풀어내기 위해 노력했다.
시간이 지나 머릿속 반죽 뭉치가 서책의 형상으로 변화했을 때, 레이가 책의 첫 장을 넘겼다.
그러자 레이의 눈앞에 붉은 대지가 펼쳐졌다.
"...!"
태초에.
용암이 흐르는 붉은 대지 위로 위대한 존재가 찾아왔다.
위대한 존재는 스스로 자양분이 되어 용암이 흐르던 붉은 대지 위에 생명이 태어날 기반을 만들었다.
위대한 존재는 자기 살점을 조각내서 대지 위에 뿌리내렸으며, 이윽고 그 살점은 거대한 나무의 형상을 취한 채 영향력을 넓혀갔다.
푸르게 변해가는 대지 위에서 수많은 생명이 새롭게 태어났다.
대부분의 대지를 푸르게 물들이고 난 후.
위대한 존재는 이 대지 위에서 자신의 대리인을 자처할 수 있는 가장 완벽한 생물을 창조하려 했다.
"엘프..."
아름다운 외관. 긴 수명. 강인한 육체. 고결한 정신.
그 모든 것을 갖춘 태초의 엘프는... 세계수로부터 태어났다.
"인간을... 부산물이라 부르는 이유가 있었군."
수많은 인간형 아종의 분화를 유도해 얻어낸 정수의 결과가 바로 엘프였다.
세계수로부터 태어난 엘프는 홀로 자신의 분신을 빚어냈다.
그 분신들부터는 정상적인 생식을 통해 개체수를 불렸다.
엘프는 본래 마나를 육체에 머금는 것이 허락된 유일한 종족이었다.
허나 엘프조차도 맨손으로 두꺼운 강철을 우그러뜨리는 괴력을 지닐 수는 없었다.
위대한 존재는 조화와 균형을 사랑했기에 한 개체가 지나친 힘을 지닐 수 없도록 환경을 강제했다.
그렇게 수많은 종족이 각자의 문명을 이루고 감정의 교류를 이어갔다.
생명의 노래가 나날이 더 넘쳐흘렀고, 결국 그 잔향이...
별빛 너머에 닿았다.
위대한 존재가 왔던 별빛 너머에서.
위대한 존재보다 더욱 강대한 존재들이 시선을 돌렸다.
그들이 이 세상에 영향을 끼치기 시작하며 모든 것이 변질되었다.
"하...!"
레이가 실소했다.
세상이 변질되기 전 위대한 존재는 오직 하나였다.
그렇기에, 인간들에게 엘-람이라 칭해지며 숭배받는 존재 또한 세계수의 입장에서 침략자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세계수는 엘-람의 영향력이 거대해져 가는 것을 방조해야 했다.
그리 하지 않았다면 세계는 이미 종말을 맞이했을 테니까.
"아이고, 이제 보니 우리 큰 나무께서 깡패 새끼들한테 안방까지 탈탈 털려가지고 이리 세상 끄트머리에서 씩씩대고 계셨던 거구먼."
행패도 이런 행패가 없었다.
"기껏 가꾼 정원이 남의 놀이터로 쓰이고 있어 속이 많이 쓰리겠습니다?"
아마 존나게 쓰릴 것이다.
근데 그거야, 어디까지나 세계수 사정이었다.
레이는 행성 하나를 테라포밍할 수 있는 힘을 지닌 존재의 사정을 굳이 동정하거나 공감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레이는 인상을 찌푸린 채 앞을 바라보았다.
검게만 물들어 있던 공간에 새로운 색채가 덧칠되기 시작했다.
레이는 색채가 칠해지는 풍경 너머가 공허하지 않음을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그 너머에 있는 존재를 정확하게 인식할 수는 없었다.
존재로서의 격이 너무나 달랐기에 벌어지는 현상이었다.
레이는 빙글빙글 돌아대는 시야 탓에 눈두덩이를 꾹 누르며 물었다.
"투덜거리기 위해 나를 부른 건 아닐 것 같고, 여기까지 나는 왜 부르셨습니까?"
*
루나는 검게 물든 공간 속에 서있었다.
라멘타의 마법은 본래는 인식조차 못할 저 드높은 상위 영역과의 경계를 흐릿하게 만들어 주었다.
루나는 잠시 냉정을 잃을 만큼 강한 충격을 받았다.
루나가 인식하고, 또한 정의하고 있던 '우주'의 범위가 지금 이 순간 급격히 확장되고 있었다.
고작 인간 나부랭이가 필멸자에게 허락되지 않은 영역에 발을 들인 것도 모자라...
천부적인 직관만으로 감히 이 영역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지금 이 단 한 번의 경험이, 어쩌면 루나가 수십 년 넘게 겪어야 했던 방황을 단축시켰다.
"..."
루나는 맹렬하게 사고를 회전시키는 중에도 두려움의 감정을 느꼈다.
현실 차원에서 온전히 투영조차 못 하는 초월적인 존재들이 저 흐릿해진 경계 너머에 실존했다.
저 너머의 존재들과 찰나의 간접적인 교류조차 인간의 정신을 뒤흔들어 놓기는 충분했다.
루나는 철저히 냉정함을 유지하며 만약의 상황을 대비했다.
"..."
시간이.
"..."
흘러서.
라멘타가 이루어낸 위대한 기적이 짧은 수명을 다했다.
마지막까지 이 경계선에 루나를 불러낸 존재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검게 물든 공간이 조금씩 깨져나가며 그 너머에서 빛이 새어나왔다.
이제는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었다.
루나는 출구를 향해 걸음을 내딛다가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경계 너머의 영역은 달 없는 밤의 망망대해처럼 여전히 어둡고 잔잔했다.
루나는 끝까지 경계를 늦추지 않은 채 남은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저 어두운 별빛 너머에서.
본래 있어야 할 곳으로 되돌아가는 소녀의 뒷모습을 한 여인이 지켜보고 있었다.
푸른 머리카락을 풀어 헤친 채, 한 쌍의 은색 눈동자로 소녀를 지켜보던 여인은...
이내 별빛과 함께 어둠 속으로 사그라졌다.
원망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