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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등가의 소드마스터-297화 (297/446)

297화

레이가 세계수를 향해 출발하기 전 마지막 점검을 마쳤다.

레이와 함께 세계수의 영역을 찾아갈 일행의 숫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제국의 사절단이라 하기에는 부끄러운 수준이었는데, 겉보기에 사절단의 숫자가 초라한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일단 세계수의 영역 안에서 살아가는 엘프와의 접촉은 기본적으로 대외비 형식을 유지했다.

간혹 사절단을 아주 화려하게 꾸며 잔뜩 보내면 엘프들은 도리어 껄끄러워하며 '숲' 안으로 출입을 허가해주지 않았다.

그렇기에 사절단 무리의 규모를 늘려봤자 괜히 제국만 골치가 아파졌다.

더군다나 이번 방문이 제국의 입장에서는 명확한 의미나 목적을 지니고 진행하는 것도 아니었으니 굳이 시끄럽게 만들 필요가 없었다.

물론 레이가 대표로 움직이는 만큼 소수나마 고위 전력을 파견해 레이를 돕도록 했다.

그중에는 로얄가드도 한 명 포함되어 있었으니 겉으로는 레이를 충분히 예우해준 것이었다.

"어디..."

조용히 워프게이트로 움직이는 마차 안에서 레이가 지도를 살폈다.

세계수를 중심으로 한 일정 반경 안에서는 워프 계열 마법이 불가능했다.

이러한 현상은 마경에서도 일어났는데, 초월적인 존재의 영향력이 원인이라 추측됐다.

오직 극소수의 객체만이 초월적인 존재의 영향력 아래에서 공간을 비틀고 통로를 만드는 것을 허락받았다.

역사를 뒤져보면 아주 예외적인 경우도 존재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라니아에 진입해서 이쪽 경로로 이동해서..."

그라니아는 사막이 시작되는 경계선 쯤에 위치한 제국의 도시였다.

수백 년전에는 훨씬 더 싱그러웠다는데, 지금은 모래바람만 열심히 불어대는 도시였다.

거기에 제국의 워프게이트가 있었으니 세계수를 찾아가는 시간을 크게 단축시킬 수 있었다.

"...어이, 라파엘라."

레이가 맞은편에 앉아있는 라파엘라를 귀쟁이가 아닌 이름으로 부르며 어깨를 으쓱였다.

"이제 그만 기분 좀 풀지? 그리 원하던 어머니 품으로 돌아가고 있잖아."

"..."

"이 정도면 나도 네 사정 맞춰 발빠르게 움직여준거야."

"..."

라파엘라는 대꾸도 안 하고 말랑말랑한 재질의 무언가를 품에서 꺼내 귓구멍에 집어넣기 시작했다.

귓구멍을 막은 라파엘라가 잘 적응이 안 되는 듯 귀를 꿈틀거렸다.

아무래도 사막 모래를 막는 용도의 귀마개 같았는데, 레이는 그 모습을 보고 썩 진지하게 물었다.

"거 귀쟁이가 귓구멍을 막으면 제대로 걸어다닐 수는 있나?"

"입 다물어라, 부산물."

"귓구멍을 막아도 목소리는 잘 들리나 보네. 근데 대체 인간을 왜 '부산물'이라고 불러? 혹시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

"..."

라파엘라는 아예 대꾸도 안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마차 안을 빠져나갔다.

레이는 끌끌 혀를 차다 자기 명치 부근을 매만졌다. 불룩 튀어나온 촉감이 느껴졌다. 드래곤 하트였다.

현재 루나가 건네준 발레리우스의 드래곤 하트는 레이의 명치 부근에 고정되어 있었다.

벌써 드래곤 하트를 체내에 이식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루나가 드래곤 하트와 레이의 마나가 어떻게 반응하는지 데이터를 쌓기 위해 잠시 육신에 접촉해 놓기를 요구했다.

레이는 옷 위로 드래곤 하트를 툭툭 두드리다 티티에 관해 떠올리고는 괜히 한숨을 한 번 내쉬었다.

"이번에 그쪽 문제도 해결할 수 있게 잘 풀렸으면 좋겠네."

티티. 본디 레시나라 불렸던 그녀는 저주를 해결한다 해도 이미 손상된 기억을 되찾을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먼 과거에 대마법사 리실로테는 레시나를 위해 안배를 하나 남겨두었다.

아직 정신이 무너지기 전 레시나의 기억을 데이터로 남겨 보관해둔 것이다.

언젠가 레시나가 저주에서 벗어났을 때, 그 기억을 전해줄 역할을 아프텔에게 부여했다.

비록 모든 기억을 완벽히 전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고, 기억을 보관한 뒤로 살아갔던 세월은 대부분 공백으로 남겠지만.

그럼에도 레시나의 정체성을 전해줄 수 있도록 그리 안배를 남겼다.

리실로테와 레시나는 정말 이 안배가 빛을 발한 순간이 찾아올 것이라고 조금도 기대하지 않았다.

레이도 오직 레시나를 위해 굳이 악을 써가며 기적을 이뤄줄 생각은 없었다.

뭐, 그렇다고 해도.

"기왕이면..."

해피엔딩을 바라기는 했다.

*

레이의 일행은 워프게이트를 통해 그라니아에 도착했다.

도시의 관리자 역할을 하고 있다는 피넬이라는 자가 가볍게 레이의 일행을 반겨주었다.

간간이 제국이 엘프들과 소통하기 위해 보낸 사절을 안내하는 건 피넬에게도 익숙한 일이었다.

사절단의 구성원이 누구인지 피넬은 알지 못했고, 궁금해하지도 않았다.

피넬의 역할은 간단했다. 그냥 실수하지 않고 적당히 예의 차리며 안내할 사안만 정확하게 안내하면 되었다.

"따라오십시오."

피넬의 안내를 받아 잠시 길을 걸으며 레이는 불어오는 모래 바람을 느꼈다.

사막 외곽에 위치한 도시임에도 벌써부터 모래 바람이 꽤 거칠게 휘날렸다.

피넬은 약간은 껄렁함이 느껴지는 어투로 레이의 일행에게 주의를 주었다.

"안쪽으로 진입하면 바람이 더 거칠어지다 숲이 보일 때쯤 다시 가라앉을 겁니다. 알아서들 잘하시겠지만 맨눈으로 모래바람 오래 맞으시면 안 됩니다."

"충고 고맙군. 근데 지금 어디로 가는거지?"

"아... 그라니아는 처음 오십니까?"

"맞아."

"실례했군요. 이동하실 때 쓰실 수단을 안내드리려고 합니다. 마차를 끌어 사막을 건널 수는 없으니까요."

제국에 존재하는 이동수단 중에는 마도공학으로 제작된 차량 또한 존재했다.

근데 기본적으로 효율이 떨어졌고, 모래바람이 불어닥치는데다 세계수의 영향력까지 강하게 작용하는 이 지역에서는 고장나기 일수였다.

"그러니 걸어가실 게 아니라면 그냥 저 녀석들을 데려가는 게 마음에 편하실 겁니다."

피넬이 안내한 곳에는 마른 코뿔소를 닮은 덩치 큰 동물이 무리지어 묶여 있었다.

생긴 건 희한했는데 성격은 순한건지 피넬은 마른 코뿔소처럼 생긴 동물을 가볍게 두들기며 설명을 이었다.

"들어는 보셨겠지만 므우라는 동물입니다. 사막에서 이만큼 믿음직한 녀석들이 또 없습니다."

"뭐, 그럼 튼실한 놈들로 좀 부탁하지."

"여부가 있겠습니까."

그후 레이는 간단히 그라니아를 안내받았다.

도시가 작지는 않았지만 크기에 비해 활기는 영 부족했다.

도시 외곽 쪽에는 버려진 건물도 몇 있는 것 같았다.

사막화가 진행되며 생활 환경이 나빠져서 유동 인구가 조금씩 줄어든 결과였다.

그라니아의 환경이 사람이 못 살 수준은 아니었지만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음은 분명했다.

피넬도 자기 도시에 그리 정은 안 가는지 적당히 성의 없게 그라니아를 안내한 후 레이에게 물었다.

"며칠 휴식을 취하고 출발하실 겁니까?"

"아니, 준비되는 대로 경로 정하고 움직이도록 할게."

이 경로를 정할 때도 살짝 의견 충돌이 있었다.

라파엘라는 아주 단호하게 세계수의 숲까지 최단거리로 쭉 움직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더는 낭비할 시간이 없다."

"아니, 라파엘라."

레이가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일직선으로 가도 돼. 근데 숲에 도착하면, 우리 일행들 전부 다 숲 안으로 들여보내 줄 거야?"

"불허한다. 초대를 받은 건 너 한 명이다."

"그래, 초대해서 찾아온 손님한테 이리 싸가지 없게 구는 건 둘째치고, 어쨌든 우르르 몰려가면 너희들이 안 받아줬잖아."

"..."

"그럼 내가 숲으로 들어간 사이 일행들이 밖에서 대기해야 하는데, 사막 한가운데서 기다릴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 그렇다고 그라니아까지 왕복하기엔 거리가 꽤 멀고."

옆에서 대화를 듣던 피넬이 슬쩍 끼어들었다.

"그런 이유로, 이전의 사절단들은 여기 거점 도시들을 활용했습니다."

사막 너머에도 사람 사는 마을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그중에서 몇몇 크기가 크고 안정된 마을들은 거점 도시라 불렸다.

거점 도시라 해봤자 약간 큰 마을 수준이었지만, 그래도 사막의 '거점' 역할은 분명하게 했다.

"이전의 사절단들은 호그라는 거점도시를 거쳐 여기 리프라는 거점 도시에서 대기했습니다."

피넬이 지도 위의 도시를 툭툭 번갈아 가리켰다.

리프라는 거점 도시는 엘프의 숲과 상당히 가까운 거리에 위치해 있었다.

라파엘라는 더는 자기 주장을 고집하기 힘들다는 걸 알아채고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물러섰다.

레이는 지도를 챙기며 일행을 돌아봤다.

"빠르게 출발할까?"

"아, 근데 잠시만..."

피넬이 레이를 따로 불러 목소리를 낮춘 채 속삭였다.

"혹시 모르니 사람 조심하십시오."

"무슨 말이야?"

"저 안쪽도 제국의 영향권이라고는 하나 시선이 잘 미치는 곳은 아니잖습니까."

"그거야 당연한 소리기는 한데... 그래도 설마 겁도 없이 우리를 등쳐먹으려고 들겠어?"

"에이에이, 미리 연락까지 해두었는데 그런 멍청한 짓거리를 하지는 않을 겁니다."

제국의 사절단을 건드린다?

아무리 고립된 곳에서 생활한다 해도 그토록 눈치가 없지는 않았다.

도리어 제국의 사절단이 찾아오면 아주 설설 기며 협조를 하는 게 그들이었다.

그렇기에 제국도 거점 도시에 관한 나쁜 소문이 가끔씩 들려와도 굳이 들쑤시지 않았다.

"다만 괜한 문제를 피하시려면 신분을 먼저 확실히 밝히시는 걸 권유드립니다."

"이해했어. 충고 고마워."

*

모래폭풍이 계속해서 불었다.

평범한 신체를 가진 인간이 버티기엔 꽤나 거쎈 모래폭풍이었다.

허나 레이와 함께한 소수의 마법사들이 마법으로 적당히 바람막이를 만들어내자 공기가 아주 쾌적해졌다.

레이의 일행을 태운 므우 또한 모래 폭풍을 맞지 않게 되어 신났는지 빠른 속도로 사막을 나아갔다.

덩치 큰 므우가 신나서 쿵쿵쿵 모래를 밟으며 뛰어다니다보니 그 유명한 '샌드웜'이 반응했다.

마물...이라 분류하기에는 학계에서 논쟁이 좀 있기는 하지만, 어쨌든 샌드웜은 사막에서 서식하는 마물 중 가장 유명한 생명체였다.

땅이 이리저리 진동하기 시작했다.

므우들은 뒤늦게 너무 까불었음을 깨닫고 바짝 굳었다.

그 와중 레이는 상당히 흥미진진해하며 샌드웜의 출현을 기다렸다.

이윽고, 사람 하나는 쉽사리 삼켜버릴 수 있는 모래 벌레가 폭발하듯 솟아올랐다.

"오...!"

레이는 조금 신났다.

샌드웜과 조우한 후 잡아먹혔다가 내장을 뚫고 나온다든가, 내장을 뚫고 나왔더니 지하 던전을 발견했다든가, 아주 심심찮게 쓰이는 클리셰 아니던가.

레이는 아주 잠깐 그런 망상을 떠올렸으나, 다음 순간 조각난 채 불이 붙은 샌드웜의 살덩이들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

소수이지만 제국의 엘리트들이 포진해있는데 마물이 이빨을 들어낼 틈이라도 생기겠는가.

너무나도 당연한 결과에 레이는 살짝 풀이 죽었다.

로망이 살짝 부족한 대신 사막을 전진하는 속도는 매우 빨랐다.

그렇기에 레이의 일행은 호그를 들르지 않고 곧장 리프로 향하기로 했다.

라파엘라도 인간들이 늦장을 부리지 않고 빠르게 전진하자 기분이 흡족한듯 했다.

다만 모래바람에 잠깐씩 노출될때마다 커다란 귀에 모래알이 묻어 간지러운지 쉴새 없이 귀를 파닥거렸다.

그렇게 길잡이와 마법의 도움을 번갈아 받아가며 레이의 일행들은 문제 없이 리프 인근에 도달할 수 있었다.

"..."

헌데 저 멀리 거점 도시 리프가 보일 때쯤 레이가 요하나에게 선물 받은 마스크를 벗었다.

"잠깐 마법 좀 정지해봐."

마법사들이 레이의 명령에 따라 바람막을 걷어냈다.

그쯤되니 감각이 민감한 자들은 다들 모래바람에 사람 피냄새가 미약하게 섞여 있음을 알아챌 수 있었다.

이 거리에서 이 정도 혈향이 느껴지려면 사람 한둘 죽은 걸로는 부족했다.

"하아, 유혈사태라도 있었나?"

제국의 영향권 안이라고 해도 사실 이 근방의 거점 도시들은 야생의 땅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어떤 연유로 다툼이 크게 번져 사람이 다수 죽었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너무 걱정하실 필요는 없을 겁니다."

레이의 곁을 지키던 로얄가드가 담담하게 자기 의견을 밝혔다.

지들끼리 치고받고 싸웠다고 해도 제국의 사절단 앞에서는 어련히 고개를 숙일 것이다.

레이도 로얄가드의 의견에 동의했기에 잠깐 투덜거리고 말았다.

그리고 거점 도시의 입구에 도착했을 때.

레이의 일행을 가장 처음 맞이해준 건 누군가의 잘려나간 목이었다.

다들 별 생각 없이 잘려나간 목을 지나치려 했다.

헌데 몇몇 기사가 발걸음을 옮기려다 말고 순간 움직임을 멈추었다.

"...?"

강렬한 위화감... 혹은 섬뜩함에 가까운 떨림이 등줄기를 거칠게 타고올랐다.

수십년의 세월 동안 칼을 갈아온 자의 직감이 자그마한 단서를 놓치지 않고 경고를 보낸다.

모래가 뒤섞여 있었음에도 잘려나간 목의 절단면이 괴이할 만큼 서늘하게 느껴졌다.

거점 도시 안에서는 여전히 피냄새가 짙었다.

그때, 모래 바람이 휘날리는 도시 안쪽에서 검은 인영이 하나 나타났다.

로얄가드가 인기척을 확인하고 반사적으로 검을 뽑으려 했다.

헌데 레이가 손을 뻗어 로얄가드의 검 자루를 눌렀다.

"기다려."

"...!"

"함부로 깔작대다가... 목 날아가겠다."

접촉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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