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5화
"...성검은 내게 반응하지 않았다."
안소니우스는 확인차 레이에게 그리 강조했다.
하이템플러의 직위에 오른 뒤, 안소니우스는 관례대로 성검을 한 번 더 손에 쥐어보았다.
허나 안소니우스는 성검이 뽑힐 것이라 조금도 기대하지 않았고, 실제로 성검은 안소니우스에게 반응하지 않았다.
레이는 안소니우스가 무엇을 묻고자 하는지 파악하고, 짧게 답했다.
"응. 나도 잘 알아."
안소니우스가 할 수 없는 것을 해줄 수 있었기에 거래라는 개념이 성립되었다.
레이는 성검에 관한 최상위 권한을 지니고 있었다.
성검을 뽑아내 사용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타인에게 자신의 권한을 일부 양도하거나 귀속시킬 수도 있었다.
물론 아무에게나 쥐어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다만 하이템플러인 안소니우스라면 충분히 부합하는 '자격'을 지닌 자였다.
레이가 안소니우스에게 양도한 권한은 레이가 죽고 나서도 유지될 것이다.
레이와 대등한 권한을 지닌 자가 개입하지 않는 이상 안소니우스에게 성검을 일방적으로 강탈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안소니우스는, 여전히 담담해 보이는 레이를 응시하다 뒤틀렸던 자세를 고쳐 앉았다.
안소니우스는 레이가 정말 성검을 건네줄 능력이 있는 것인지 굳이 캐묻지 않았다.
어차피 당장 확인할 수 있는 사안도 아니었고, 또한 레이의 이야기는 나름대로 설득력이 있었다.
안소니우스는 인간을 불신했으나 레이의 존재가 상리를 벗어나 있다는 걸 부정하는 건 아니었다.
레이가 성검을 뽑아내지 못한다면 대체 누가 성검의 주인이 될 자격을 증명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 측면에서 레이의 제안이 마냥 허황되게 생각되지는 않았다.
지금 당장 안소니우스가 확인해야 할 건 다른 것이었다.
"이 거래는 황제 폐하께 허가를 받은 사안인가?"
"그럴 리가."
레이가 피식 웃었다.
새로운 권력의 출현을 이전의 권력이 환영할 리가 없다.
안소니우스는 템플러답게 몸뚱이가 아주 튼튼해서 오래 살 예정이었고, 정상에 가까운 재능을 타고났으며, 이제는 명성도 얻었다.
거기에 성검까지 더해진다면 그 누구도 안소니우스를 쉽사리 아래로 두기 힘들었다.
만약 성검의 주인이 된 안소니우스가 신성 교단의 완전한 독립과 같은 급진적이고 민감한 사안을 지지하고 나선다면 황실 입장에선 상황이 매우 매우 껄끄러워졌다.
그렇기에 황실은, 안소니우스가 성검의 주인이 되는 것을 결코 원치 않을 것이다.
물론 교단도, 안소니우스가 성검을 차지하는 걸 그리 반기지 않을 터다.
이전에도 교단은 안소니우스를 통제하기 힘들어 했다.
안소니우스는 과거에도 현재에도 교단에서는 아웃사이더에 가까웠으며, 그렇기에 교단은 근 몇 달간 안소니우스의 명성이 오르는 걸 마냥 달가워하지 못했다.
헌데 지금도 제어가 제대로 안 되는 안소니우스가 성검까지 얻는다?
그리 되는 순간 교단의 고위층은 안소니우스의 통제를 완전히 포기해야 했다.
"다들 겉으로는 성검의 새로운 주인을 환대하며 회유하려 들겠지만, 내심은 많이 다르겠지."
레이가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며 조소했다.
"이건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할 거래야. 발각되는 순간 제지하려 들 거야. 그렇기에 이 거래는... 너와, 나의 거래가 되어야 해."
"...미움 받는 역할을 내가 맡으란 이야기군."
"너는 미움 받는 건 익숙하잖아? 개의치도 않고."
레이는 썩 진지하게 그리 되묻고는 어깨를 으쓱였다.
"네가 성검의 주인이 된다면... 교단의 고위층들은 네 누이의 입을 빌려 탐욕을 드러내기도 할 거야. 누이의 입을 빌려 특정 논제를 밀어붙여, 너를 움직이려고도 하겠지."
"..."
"그런데 안소니우스, 네 누이가 정녕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나는 네가 구별할 수 있으리라 생각해."
"..."
안소니우스는 레이의 물음에 답하지 않았다.
누이가 정치적 논제에 관해 어떤 입장과 열망을 지니고 있는지 안소니우스도 확답할 수는 없었다.
다만 안소니우스의 누이는 먼 옛날부터 갈등과 다툼을 싫어했다.
천성부터가 그러해서 열악한 환경에 내던져져서도 품성이 변하지 못했다.
또한... 누이의 의견과 별개로, 제국의 내부 갈등이 심화된다면 누이에게도 해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건 레이의 의견이 분명히 옳았다.
과거와 현재를 교차해서 돌아보던 안소니우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가, 중재자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나?"
"세력이 없는 개인이 쥘 수 있는 실권에는 분명 한계가 있지. 하지만 성검의 주인이라는 상징성이 있다면... 굳이 네 등을 받쳐줄 파벌이 필요할까? 그것도 교단 안에서?"
그 독보적인 상징성과 무력을 앞세운다면 안소니우스는 쉽사리 팔라딘의 자리에 올라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것이다.
대체 누가 그 흐름을 막아낼 수 있겠는가.
"네가 성검의 주인이 되는 순간, 팔라딘의 자리는 약속된 것이나 다름 없어."
"..."
안소니우스는 레이의 주장을 부정하지 않았다.
이야기가 마무리되는 것 같자 레이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 거래, 받아들이겠다는 걸로 생각해도 되지?"
"..."
"일 벌이기 전에 준비해야 할 게 있다면 미리 잘 준비해 놔."
"헌데... 성검을 어떻게 내게 건네주겠다는 거지? 시기는?"
"그냥 뽑을 수 있게 해줄게. 가서 당기면 뽑힐 거야. 근데 지금 당장 일을 벌이는 건 안 좋을 거 같고..."
신화의 한 장면처럼, 안소니우스의 존재감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그때 뽑는 게 좋았다.
설령 앞으로 그런 기회가 찾아오지 않는다고 해도 당장 성검을 뽑아내는 건 그리 현명한 판단이 아니었다.
"웬만하면 업적도 더 쌓고, 명성도 더 올린 다음에 뽑자. 성검 뽑는 순간 주변에서 온갖 압박과 견제가 쏟아질 텐데 그전에 최대한 토대를 다져놓는 게 좋잖아?"
전부 맞는 말이었다.
레이는 참 쉽고 간단하게 제국과 교단을 뒤집어 놓을 이야기를 마쳤다.
안소니우스는 평온해보이는 레이의 모습에서 강한 의아함을 느꼈다.
새어나가면 굉장히 곤란해질 정보와 이야기를 레이는 안소니우스에게 우수수 쏟아냈다.
이건 레이 입장에서는 매우 위험한 도박이나 마찬가지였다.
당장은 안소니우스가 레이와 손을 잡는다고 해도 성검을 얻고 나서 또 배신을 할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그럼에도 레이는 처음부터 끝까지 덤덤했고, 안소니우스에게 무언가 주의를 준 것도 아니었다.
"...레이."
"응, 뭐 더 궁금한 거 있어?"
"너는, 나를 신뢰하나?"
"음... 네가 걸어왔던 삶의 발자취를 신뢰하지."
레이는 에른스트에게 들었던 말을 안소니우스에게 반복하며 피식 웃었다.
"내게는 남은 시간이 많지 않아. 완벽성에 집착하다가는 아무것도 하지 못할 거야."
그건 레이가 스스로에게 건네는 질책이었다.
완벽한 행복, 완벽한 사랑, 완벽한 가정, 그런 것을 이루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기에 어설프게 거리만 두다 결국 시간만 허비하고 사랑하는 이들에게 상처를 주지 않았던가.
"그래서 나는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믿음을 가지려고 해."
"..."
"안소니우스, 나는 너를 믿어. 내가 부탁할 역할을 잘 수행해줄 것이라고, 믿고 있어."
"..."
안소니우스는 레이의 말을 곱씹다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근데... 네 혈육에 관한 문제는 어찌할 거지?"
"교단에 바로 찾아가진 않을 거야. 시간적인 여유도 있고, 정치적인 문제도 있어서."
쉽게 말해 한 번 튕기겠다는 소리였다.
이건 레이가 에른스트의 조언을 받아들여 결정한 사안이었다.
교단이 불렀다고 바로 달려간다면 황제의 기분이 언짢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일단 교단의 초대를 뒤로 미루고 세계수부터 찾아가볼 생각이었다.
"만약에 내가 교단과 사이가 너무 틀어져서 우리 고모가 제대로 된 치료를 못 받게 되면... 나중에 성검 뽑은 다음에 우리 고모 좀 부탁할게. 이 정도 부탁은 들어줄 거지?"
"그래, 그건 어렵지 않다."
"뭐... 좋아. 해야할 이야기는 다 끝난 것 같네. 멀리까지 오느라 고생했어. 잘 들어가."
"알겠다. 그대가 가는 길에 엘-람의 축복이 함께하길 기도드리지."
"아냐아냐, 그러지 마. 이미 너무 충만해서 문제인 것 같아."
레이가 손사래를 쳤다.
*
"그 꼬맹이가 제국의 영웅이 되어 돌아왔군!"
제플린이 아틀리에 밖으로 나와 환히 웃으며 레이를 맞아주었다.
레이가 활짝 웃는 얼굴로 물었다.
"말이 짧네?"
"..."
제플린이 벌레 씹은 얼굴을 했다.
레이가 낄낄 웃으며 제플린과 함께 아틀리에 안으로 들어갔다.
레이는 일단 오메가 시리즈를 제플린에게 건넸다.
제플린의 오메가 시리즈의 상태를 점검하며 이 검으로 누구를 베었는지 물었다.
레이는 사양 않고 베네딕트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흠..."
레이의 이야기를 들은 제플린은 살짝 불만족스럽다는 기색을 내비쳤다.
타락한 왕국제일검. 뭐, 꽤 대단한 상대였기는 했지만 제플린이 기대했던 수준에는 살짝 못 미쳤다.
물론 베네딕트가 초월의 경지에 발끝이라고 걸쳤다는 알았다면 또 마음이 달라졌겠지만, 레이는 베네딕트를 그저 광인이라 설명했었다.
"아쉽군. 기대 이하야."
제플린이 대놓고 그리 말했다.
제플린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 레이는 그냥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제플린의 성격이 이리 뒤틀려있지 않았다면 레이와 첫만남 때 그 값비싼 검을 내어주지도 않았을 것이다.
"다음에는 좀 더 대단한 놈을 골라볼게요. 근데 그거 더 쓸 수 있어요?"
"처음 설계대로 크랙이 예쁘게 갔어. 검으로써 성능이 떨어지진 않았을 텐데."
"뭐, 당장은 쓰는데 문제가 없어보이긴 하더군요."
"아직 강도를 유지 중이야. 앞으로 한 번은 더 기술을 사용할 수 있겠어. 휘두르고 나면 깨질 것 같지만."
검사를 끝낸 뒤 제플린이 검을 돌려주었다.
레이는 그 후 아티펙트에 관한 이야기를 제플린과 나누며 아틀리에 밖으로 나왔다.
약속 시간이 거의 다 되었다. 마침 저 너머에서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레이는 제플린과 인사를 나누었다.
"이 검에 멋진 이름을 장식할 수 있는 놈을 한번 잘 찾아보겠습니다."
"기대하지."
제플린은 레이가 지닌 오메가 시리즈가 마음에 안 든다고 했으나, 그 검이 제플린의 최고 역작 중 하나임은 분명했다.
제플린은 자신을 실망시키지 말라고 당부하며 아틀리에 안으로 돌아갔다.
레이는 요하나와 데런을 향해 다시 고개를 돌렸다.
데런은 곧장 '형님!'을 외치며 반가움을 표했고, 요하나는 아직까지 어떤 텐션과 톤으로 인사를 건네야 할지 고민 중이었다.
헌데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던 레이가 와다다 달려오기 시작했다.
예상치 못한 레이의 움직임에 데런과 요하나가 반응도 못하고 멀거니 서 있는데, 달려온 레이가 곧장 요하나의 허리를 붙잡아 올려 자기 품에 와락 안았다.
요하나가 깜짝 놀라 발버둥을 쳤다.
"아! 아! 뭔데!"
"잘 지냈지?"
"이, 이것 좀 놓고 말해!"
레이는 버둥거리는 요하나에게 풍겨오는 간질간질한 향수 냄새를 느끼며 잠깐 눈가를 좁혔다.
"살은 안 찐 것 같은데, 근육량이 늘어서 그런가, 못 본 사이 좀 무거워졌다?"
"나한테는 맨날 이상한 소리만 해!"
요하나가 짜증내며 무릎으로 레이의 복부를 퍽퍽 두드렸고 레이는 낄낄거리며 요하나를 붙잡고 버텼다.
접촉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