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4화
두 사람의 시선이 맞부딪쳤다.
에른스트는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으나 당혹감을 느꼈다.
옳고 그르고를 떠나 지금 모습은 영 레이답지 않았다.
필요 이상으로 감정적이고 공격적이었다.
에른스트는 레이를 가만히 바라보다 먼저 물러서 주었다.
"나는."
기세를 가라앉힌 에른스트가 굽혔던 허리를 펴며 입을 열었다.
"네가 걸어왔던 삶의 발자취를 신뢰한다. 물론, 사람은 변한다."
삶의 끝자락에 이르러 심경의 변화가 생기거나 마음이 다급해질 수도 있을 것이다.
이전보다 충동적이거나 공격적으로 변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본성과 기조만큼은 쉽사리 변질되지 않는다고, 나는 생각한다."
레이는 과거부터 항상 죽음을 가까이 두고 살아왔다.
몇 번이나 죽음을 각오하고 수명을 소모해가며 다른 이들을 위해 나섰다.
이제 와 삶의 미련이 강해졌다고 해서 본디 지키고자 했던 것보다 우선할 리 없었다.
"오해하지 말거라. 너를 겁박하는 것이 아니니. 다만 나는 네가 혼란을 원치 않을 것이라 확신한다. 너는 삶의 미련이 남았다고 해서, 자기 사람을 위험하게 만들 도박을 할 자가 아니다."
"..."
"설령 이 내가 바란다고 해도, 너는 그런 선택을 내려주지 않을 것이다."
레이는 자기가 사랑하는 이들과 자기가 추구하는 가치를 위해 기꺼이 삶을 내려놓을 수 있는 인물이었다.
그 본성과 기조가 하루아침에 변할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나는 네가 현명하게 대처하리라 믿는다. 남부 측의 도움이 필요하다면, 균형을 잘 지키며 네가 원하는 것을 얻어내리라 믿는다."
"..."
"하지만, 정치는 믿음만으로 해결될 영역이 아니다."
스스로 원치 않았다고 해도 발을 한 번 잘못 내디뎠다가 물결에 휩쓸려 떠내려가는 일이 비일비재한 곳이 정치였다.
"너 또한 그것을 모르지 않을 것이다. 너는 자기 죽음이 대부분의 정치적 문제를 해결해주리라 생각하는 것 같지만... 그래, 나 또한 동의한다."
"..."
"허나 나는 다분히 감정적인 측면에서 너의 죽음을 바라지 않는다. 또한, 죽음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조심하라는 것이었다. 남부는..."
잠시 생각에 잠겼던 에른스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이 맞다. 어차피 상대가 접촉하려 든다면, 선수를 잡고 기선을 제압하는 게 좋을 것이다."
끌려가는 모양새는 좋지 않았다.
뻗댈 수 있다면 뻗대보는 게 좋았다.
남부 측이 같이 뻗대겠다고 달려들면... 그건 에른스트가 충분히 찍어눌러 줄 수 있었다.
"네 요구를 교단에 전달하도록 하겠다. 물론 황제 폐하께도 말씀은 드려놓을 것이다."
"...감사합니다."
"레이."
에른스트가 짧게 한숨을 내쉬고는 말을 이었다.
"마음이 급해지면 실수가 늘어난다. 과거에 네가 나에게 짚어주었던 부분이다. 이런 때일수록 충분히 신중을 기울이거라."
"...주의하겠습니다."
"그래, 잘해줄 것이라 믿는다."
대화를 마치며 에른스트가 절대권역을 풀어냈다.
*
루나는 레이에게 황실의 드래곤 하트를 건네받았다.
추적 마법을 비롯한 안정 장치가 덕지덕지 붙어 있어 당장 몰래 가지고 튀는 건 불가능했다.
이걸 레아에게 이식하고, 또한 레이의 심장 강화에 이용한 것처럼 위장해야 했다.
레이의 심장 시술에는 발레리우스의 드래곤 하트가 사용될 것이다.
전반적으로 간단한 일은 아니었는데, 그래도 잘 준비하면 불가능한 수준은 아니었다.
진짜 문제는 이 모든 일이 마무리 되어도 레이의 삶을 길게 연장할 수는 없다는 부분이었다.
"..."
루나가 가만히 황도의 길거리에 서 있는데 인기척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니 요하나가 데런과 함께 환히 웃으며 다가오고 있었다.
"루나!"
요하나가 반가운 마음에 달려와 두 팔 벌려 루나를 안았다.
꽉꽉 힘을 주어 루나를 자기 품을 끌어당긴 요하나가 주변을 돌아보며 물었다.
"레이는?"
"...오늘 갑자기 중요한 일정이 잡혀서 못 왔어. 며칠만 더 기다려달라고 전해달래."
"그래...?"
요하나는 잠시 실망한 기색을 내비치다 표정을 풀었다.
어쨌든 루나와도 오랜 만의 만남이었고, 며칠 안에 레이 얼굴도 다시 볼 수 있을 터였다.
"루나, 맛있는 거 먹으러 갈래?"
"응. 근데... 요하나."
"응?"
"향수는 한 번만 뿌려도 돼."
거리가 멀었을 때는 향기도 은은하고 괜찮았는데 품에 안기니 향기가 좀 과했다.
루나의 타박에 요하나의 얼굴이 붉어졌다.
평소보다 신경쓴다고 머리카락 외에도 여기저기 뿌렸다가 용량을 과하게 써버렸다.
샐쭉해진 요하나가 괜히 루나의 뺨을 위아래로 비비고는 한 발 떨어졌다.
*
안소니우스는 교단 내부에서 평판이 많이 갈리는 편이었다.
남과 협력하거나 어울리기를 멀리하는 탓에 뒷말이 자주 나왔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젊은 나이에 실력 하나로 하이템플러의 자리를 얻었으니, 그 재능은 모두가 인정했다.
아무리 낮게 잡아도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성직자 중 정상급 재능을 지녔으리라는 평가에는 이견이 없었다.
그리고, 안소니우스는 얼마 전 황도에서의 전투에서 활약하며 명성이 정말 많이 올랐다.
황도가 털렸다는 사실을 덜 부각하기 위해 황실이 영웅 만들기에 앞장서기도 했고, 또한 안소니우스의 활약도 실제로 대단했다.
그날 안소니우스는 홀로 군단의 역할을 수행하며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그후 안소니우스는 곧바로 남부의 교황청으로 떠나, 마경 쪽의 전선에도 참여해 잠깐 활약했다.
이제 안소니우스는 대외적으로도 교단을 대표하는 하이템플러 중 한 명이 되었다.
헌데 그리 명성이 오른 안소니우스가 다른 이의 부름을 받고 황도를 다시 찾았다.
안소니우스는 본래 황도에 가보라는 교단의 요청을 거부할까 고민하다가, 자신을 부른 게 레이라는 것을 알고 결국 요청을 수락했다.
"또 보는군."
안소니우스 딴에는 꽤나 살갑게 먼저 인사했다.
말 짧은 거야 신을 섬기는 성직자이니 황제에게 말고는 건방 좀 떠는 게 정석이긴 했다.
레이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찾아와줘서 고마워."
"혈육의 이야기는 들었다."
안소니우스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레이도 굳이 영양가도 없는 이야기를 떠들고 싶지는 않았다.
"정확히 어떤 이야기를 들었는데?"
"악신의 저주를 해결할 방법이 마땅치 않아 곤란해하고 있다고, 위에서는 그리 이야기하더군."
"맞아, 사실이야."
"교단은 너를 혈육과 함께 교황청에 동행시키길 원하고 있다. 너를 '초대'하고 싶다고 전해달라 하더군."
안소니우스는 교단과 제삼자인 것처럼 말을 하고 있었다.
레이는 잠깐 고민하다 안소니우스에게 물었다.
"저주의 영구적 해결이 가능해?"
"확답할 수는 없다. 같은 급의 저주라면 위력이 약할수록 해주가 까다로운데 네 혈육의 저주는 위력이 그리 강하지 않다고 들었다."
"흠..."
"해주가 힘들다고 해도 저주의 영향을 완전히 상쇄시킬 수는 있다. 성녀님께서 축성을 돕는다면, 자그마한 장신구 하나에도 그러한 기능을 부여할 수 있다."
"그럼 그 성녀님의 성물을 품에 가지고 다녀야겠네."
"환부에 삽입하는 것도 방법이다. 충분히 검증된 시술이기에 안정성은 확실하다. 다만..."
안소니우스가 방패를 내려놓고 의자에 앉으며 말을 이었다.
"고위급 저주를 해주하거나, 저주의 영향을 정확히 상쇄시킬 수 있는 성물을 제조하는 건 극소수만 가능하다. 교단의 도움이 필요하기는 할 거다."
"이야, 안 그런 것처럼 굴더니 또 은근히 교단에 처신 잘하라고 압박주네?"
"사실만 나열했을 뿐이다."
"농담이야, 농담."
낄낄 웃으며 손을 휘젓는 레이에게 안소니우스가 물었다.
"내 추측이지만, 시간이 급한 일은 아니지 않나?"
"어어, 맞아. 단기간에 치명적으로 작용하는 저주는 아니니까. 질질 짜며 교단에 매달릴 만큼 급한 일은 아니야."
레이는 자기 뒷머리를 긁적이고는 고개를 들어 안소니우스와 마주 봤다.
"사실 고모 이야기는 남들 보여줄 핑계였고, 너와 할 이야기가 있어서 불렀어."
"어떤 이야기지?"
"일단 하나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남부의 변경백... 제국의 방패라 불리시는 분은 어떤 인물이야?"
"호인이다. 겉으로는 그런 흉내를 내지."
참 시니컬하기 짝이 없는 안소니우스의 답변을 듣고 레이가 재차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그런 흉내를 낸다?"
"과하게 해석할 필요는 없다. 겉과 속이 다르지 않은 인간이 있나?"
"하아... 안소니우스, 너는 참 믿음에 있어 신실하지 못해. 항상 적대적이지."
그는 불신자였다.
안소니우스는 그냥 사람 자체를 좋아하지 않았고, 때문에 마음을 주는 일도 없었다.
타고난 본성에 더해 어린 시절의 경험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다.
"레이. 나를 비꼬기 위해 이 자리에 불렀나?"
그리 말하는 안소니우스의 목소리는 평이했다.
누이를 제외하면 마음의 문을 닫아놓은 안소니우스였기에, 도리어 상대의 불쾌한 언행을 마주해도 감정의 동요가 없다시피 했다.
레이는 그런 안소니우스를 바라보다 자조했다.
레이와 안소니우스가 쌓아올린 유대는 없다시피 했다. 둘은 말 그대로 남남이었다.
허나 아이러니하게도, 레이는 유대가 깊은 다른 이들보다 안소니우스를 신뢰했다.
안소니우스가 종국을 맞이할 때까지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 대략적으로나마 알고 있었기에, 레이는 안소니우스에게 먼저 손을 내밀 수 있었다.
"너와 거래를 원한다. 그래서 불렀어."
"거래?"
"기적에는 대가가 따른다. 알고 있지?"
앞뒤 없는 질문에 잠시 침묵한 안소니우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고 있다."
아니.
안소니우스는 기적에 따르는 대가가 무엇인지 조금도 알지 못했다.
레이는 입 안에 맴도는 말을 억지로 흐트러뜨렸다.
그리고는 호흡을 가라앉히며 자기 가슴을 가리켰다.
"나는 수많은 기적을 이루었고, 대가 또한 치렀어."
"..."
"난 앞으로 얼마 못 살아."
레이는 참 담담하게 고백을 이어갔다.
"내 육체는 망가졌고, 회복할 수 있는 임계점은 한참 전에 넘었어. 가만히 있어도 금방 죽을 거야. 열심히 치료를 받는다고 해도 기껏해야 몇 년이 한계겠지."
안소니우스는 잠시 레이가 하는 말의 진위와 진의를 고민해보다가 물었다.
"수명을 연장하기 위해 교단과의 거래를 원하는 건가?"
"안소니우스, 나는 너와 거래를 원한다고 했어."
레이가 소파에 등을 기대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나는 오래 살 생각 없어."
레이는 이제... 자기 역할이 다해감을 느꼈다.
역할이 다하고 나면 레이는 무대 위에서 물러나야 했다.
레이는 본디 존재하지 말아야 할 이레귤러였기에, 떠나야 할 때 떠나야 했다.
그게 이 세상과 이 세상을 살아갈 이들을 위하는 길이었다.
이별은 슬프고 아프겠지만, 이별이 항상 비극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레이는 욕심을 부리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대신에 레이는, 남은 시간 동안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이별이 너무 아쉽지는 않도록 노력하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니... 나와 거래를 하자."
"무슨 거래를 원하는 거지?"
"안소니우스. 너를, 이 시대의 유일무이한 성검의 주인으로 만들어주겠다."
"...?"
순간 당혹감을 숨기지 못한 안소니우스가 앉은 자세를 뒤척였다.
레이는, 여전히 덤덤하게 거래의 내용을 입에 담았다.
"내가 너에게 줄 수 있는 건 침해할 수 없는 상징성과 정점에 비견되는 힘이다."
"..."
"그 대가로 너는, 내가 떠난 뒤에도 이 세상을 살아갈 네 누이와 나의 사람들, 또한 다른 평범한 모든 이들을 위해."
레이가 거칠게 다듬어진 의지가 깃든 눈으로 안소니우스를 마주봤다.
"제국의 갈등과 분열을 억누를 중재자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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