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홍등가의 소드마스터-293화 (293/446)

293화

레이의 일행은 무사히 황도에 도착했다.

워프게이트를 통해 이동거리를 줄였기에 도착하기까지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아직까지 황도는 방위 시스템을 재편하는 작업을 진행 중이었다.

에른스트 또한 방위에 구멍이 난 황도를 수호하기 위해 자리를 지키는 중이었고 말이다.

레이는 본래 황도에 도착하자마자 빠릇빠릇하게 자기 일정을 소화할 생각이었다.

허나 예상치도 못하게, 제국의 전통적인 충성 의식을 치르느라 시간을 며칠 더 잡아먹게 되었다.

"하..."

레이는 의식을 진행하며 한숨을 삼켰다.

레이는 제국 수호 훈장 수여자였다. 그 권위는 가히 막강했다.

레이는 아직 작위조차 지니고 있지 않았지만 황족이라 해도 레이에게 정중함을 갖추어야 했다.

그리 막강한 권위를 자랑했기에, 제국 수호 훈장을 수여받은 자들은 황제에게 더욱 확실하게 고개를 숙여야 했다.

혹시라도 불가침한 황제의 권위가 감히 도전 받는 것처럼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해 말이다.

그러한 이유로, 제국 수호 훈장 수여자는 1년에 한 번 정도는 의무적으로 충성 의식을 치렀다.

그건 일종의 보여주기 식 행사에 가까웠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생략될 수 없었다.

이전에는 레이의 신분이 공표되지 않았기에 그런 형식적인 절차를 생략할 수 있었다.

허나 이제는 제국에서 이름 좀 있는 권력가들은 대부분 레이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이번 황도 방문 때는 의식을 생략할 수 없었다.

충성 의식이라 해도 아주 거창한 건 아니었다.

옛날에 모하메드가 했던 것과 유사하게, 황도의 역사적인 장소를 뺑뺑이 돌며 기도문을 읊고, 황제와 제국을 향한 충성을 반복해서 맹세하면 되었다.

레이는 의식을 치르기 전과 치른 후에 한 번씩 황제를 알현했다.

황제는 레이를 간단히 상찬했고, 따로 문책하는 시간을 가지지는 않았다.

레이는 제국의 최고위층이 사용하는 화법에 깃든 저의를 완벽히 해석할 수는 없었지만 분위기가 묘하게 날 서 있다고 느꼈다.

애당초, 레이는 이번에 걸리는 게 좀 많았다.

레이는 루나가 준 로드급을 밀어붙일 수준까지 발전했음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그렇기에 오시리스 백작령 습격 건과 관련된 보고서를 작성할 때 약간의 거짓을 덧붙였다.

그밖에도 레이는 지미의 무력 수준을 숨겼다가 이번에 들키게 되었다.

시그니 산맥 방향 방어선에 배치된 병력을 규정된 절차를 밟지 않고 운용하기도 했다.

결과는 좋았다. 결과는 좋았지만, 황제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기에는 충분한 행동들이었다.

레이는 일단 충성 의식을 전부 성의를 들여 치른 후 황제와의 알현까지 마친 뒤 황성을 나왔다.

크게 문제가 있었던 건 아니었으나 기분이 마냥 개운하지는 않았다.

*

알현을 마친 후 레이는 프리슬란 가문의 저택에 초대됐다.

레이는 저택의 가장 좋은 방 중 한 곳에서 휴식을 취하며 에른스트와 독대할 시간을 기다렸다.

황제가 드러내지 않았던 의중이 있다면 에른스트를 통해 파악할 수 있을 터였다.

"...요하나랑 데런도 한 번 봐야하는데."

전쟁이 일찍 마무리 단계에 접어든 덕분에 이지스의 학기가 끝나기도 전에 황도를 다시 찾게 되었다.

황도에 들린 김에 잘 하고 있나 만나볼 생각이었다.

"이 세계는 제대로 된 전화기가 없어 가지고..."

레이가 가볍게 혀를 찼다.

전화기 같은 게 있었다면 여기저기 자주 연락하고 살았을 것이다.

레이는 처음에 환생했을 때 문명이 미개해서 전화기가 없는 줄 알았다.

헌데 나중에 알고 보니 이 세상은 전화기를 개발해도 활용하는 게 거의 불가능했다.

이 세상 모든 곳에 깃들어 있는 마나가 전파나 전기 신호를 교란하는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짧은 거리는 괜찮은데 거리가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급격히 신호가 손상됐다.

덕분에 케이블을 깐다고 해도 값비싼 특수처리가 필요했고 장거리 이동 통신이 가능하려면 아공간이라도 매개로 사용해야 했다.

민간 보급과 대중화는 아예 불가능하다는 소리였다.

기적 같은 에너지원으로만 보였던 마나의 폐해라고 부를만도 했다.

레이는 참 웃긴 세상이라고 중얼거리며 손가락을 딱딱 튕기며 시간을 보냈다.

얼마 안 가 시종이 찾아와 레이를 접견실로 안내했다.

에른스트가 접견실에서 레이를 환대해주었다.

레이는 에른스트와 오시리스 백작령에서 있었던 습격에 관해 먼저 대화를 나누었다.

"...해서, 오메가 시리즈로 마무리 지었습니다."

"몸은 괜찮느냐?"

"예, 그 베네딕트란 놈의 멍청한 고집 덕분에, 전투는 어렵지 않았습니다."

레이는 광기에 취한 베네딕트가 마법을 베어내겠다고 설치다 자멸했다고 설명했다.

물론 그건 사실이었지만, 레이는 베네딕트가 초월의 경지에 발끝을 잠시 들이밀었다는 내용은 누락시켰다.

에른스트는 잠시 가만히 레이를 바라보다 화제를 돌렸다.

"세계수의 초대를 받았다고 전해들었다. 어찌할 생각이냐."

"뭐... 초대해주었으니 한 번 찾아가볼까 생각 중입니다. 아, 그리고 후작님, 제게 하사된 황실의 드래곤 하트를 가져가 살펴도 되겠습니까?"

"원하는 대로 해도 된다. 허나 황도 밖으로 반출은 불가하다."

"예, 잘 알고 있습니다. 시술을 진행하기 전에 몇 가지 검증이 필요해서 그렇습니다."

"그래, 알겠다."

그 뒤로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레이는 에른스트가 본제를 꺼내기를 가만히 기다렸다.

에른스트는 홀로 생각에 잠겨있는 듯하더니, 이윽고 레이를 다시 마주보았다.

"레이."

"예."

"무언가 숨기고 있는 것이 더 있느냐."

"..."

공기가 찰나 간에 차갑게 가라앉았다.

허나 레이는 곧바로 웃음을 머금은 채 넉살을 떨었다.

"이번 일로 밑천이 다 털렸네요. 웬만하면 보이고 싶지 않았는데..."

지미에 관한 이야기였다.

옛날에 용병 일이나 하다가 레이 덕분에 천운으로 작위를 건졌다고 화자되는 남자가 그만큼 고강한 경지를 이룩했을지 과연 누가 예상할 수 있겠는가.

그렇기에 레이는 정말로, 지미의 전력은 되도록노출시키고 싶지 않았었다.

에른스트는 레이가 너스레를 떠는 걸 가만히 지켜보다, 허리를 살짝 앞으로 숙였다.

"레이."

절대권역이 전개되며 주변에 혹시 있을 지도 모르는 시선을 배제했다.

에른스트의 절대권역은 레이에게 그 어떤 위압도 가하지 않았으나, 그 존재 자체가 이미 하나의 경이이자 공포였다.

"레이, 잘 듣거라."

"후작님의 말씀은 항상 경청하고 있습니다."

레이가 웃는 얼굴로 찻잔을 들어 홀짝였다.

에른스트는 황금색 눈동자로 레이를 직시하며 확언했다.

"나는, 너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레이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고, 에른스트의 눈동자에는 점점 더 절대자의 기백이 깃들어갔다.

"누군가는 허황된 기적을 바란다 하겠으나, 네 존재부터가 이미 허황되었다."

"..."

"그러니 미리 포기하지 말거라. 언제가 찾아올 기적을 대비하거라. 나는 네가 그리 해주길 바란다."

"..."

우회적으로 돌려 말하긴 했으나, 결국 황제 신경 좀 적당히 긁으란 소리였다.

이건 레이가 세운 공적과는 완전히 별개의 문제였다.

레이는 이제까지 꼬투리가 잡히고도 남을 만한 선 타기를 꽤 자주했고, 그걸 분명히 인지하고 있었다.

자잘한 절차를 무시하고 움직였던 횟수를 일일이 따지면 가뿐하게 수십 번은 될 것이다.

그럼에도 레이가 그리 행동한 건 자신이 시한부 신세였기 때문이었다.

황제로서는 얼마 못가 죽을 레이와 굳이 자잘한 사안 때문에 충돌해서 긁어 부스럼을 만들 이유가 없었다.

레이의 전략이 틀리지는 않았다.

허나 기적이 일어나 레이의 수명이 갑자기 길게 연장된다면, 그때부터는 서로 많이 불편해질 수밖에 없었다.

에른스트는 바로 그 점을 지적하며 미리 황제의 환심을 얻어두라 말하고 있었다.

공적을 세우는 것과 환심을 사는 것은 많이 다른 문제였으니까 말이다.

"..."

레이가 손가락으로 찻잔을 툭툭 두드렸다.

에른스트의 조언은 레이를 위한 것이기도 했지만...

또한 레이보다는 제국을 우선해 하는 조언이기도 했다.

레이는 꽤 오랫동안 찻잔을 툭툭 두드리다 입을 열었다.

"고모... 세리아 알슈테인 경의 저주에 관한 문제는 어찌 되었습니까? 완치할 수 있습니까?"

"...아직 분석을 진행 중이라 한다. 명확한 답을 얻기 위해서는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할 것이다."

"말씀을 들어보니 황실이 가용할 수 있는 인력으로는 완치를 장담하기 힘든가 보군요."

해결할 수 있는 저주였다면 이미 답이 나왔을 것이다.

아직까지도 분석을 진행 중이란 건 능력이 모자라다는 소리였다.

"본래 '저주'에 관한 연구 쪽은 교단이 훨씬 앞서있기는 했지요."

오랜 세월 동안 남부는 마경의 악마 숭배자들을 막아내며 데이터를 축적했다.

교단은 그 데이터와, 그 데이터를 사용한 연구 결과들을 순순히 다 공유해주지는 않았다.

그게 다 그들의 밥줄이었으니까.

황실이 아무리 대단하다 해도 그쪽 분야는 교단에 비해 확실히 뒤처졌다.

"고모의 몸 상태에 대해선 남부 친구들도 이미 다 알고 있겠고... 곧 도움을 주겠다며 저와 접촉하려 들겠네요."

레이를 낚아낼 만한 좋은 미끼가 등장하지 않았는가.

레이가 피식 웃었다.

"후작님께선 별로 내키지 않으시겠습니다."

"..."

레이가 남부와 가까워져봤자 에른스트에게는 이득이 될 게 없었다.

그걸 알고 있었지만 레이는 솔직하게 말했다.

"그래도 고모의 치료에 교단의 도움이 필요하다면, 손을 빌릴 생각입니다. 음..."

레이가 이마를 긁적이다 말을 이었다.

"어차피 교단에서 저를 낚기 위해 사람을 보낼 텐데, 후작님께 부탁 하나 드려도 되겠습니까?"

"...말해보거라."

"어차피 사람 보낼 거면 안소니우스를 보내라고 그쪽에 연락을 넣어주시겠습니까? 그 친구가 그나마 좀... 중앙과도 가까운 인물이지 않습니까?"

정확히는 누구와도 친분을 쌓지 않는 고독한 늑대에 가까운 인물이었지만, 어쨌든.

"눈치는 좀 덜 보일 것 같네요."

"네가 무엇을 원하는지 안다. 다만 교단과의 접촉은 신중해야 한다."

"예, 그 때문에 안소니우스를 불러달라 부탁드렸습니다."

안소니우스는 자기가 만든 파벌도 없고 정치적 개입 같은 것에도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던 인물이었기에 레이 말대로 괜찮은 선택이긴 했다.

에른스트가 고민 끝에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 이해했다. 헌데... 그들이 너를 찾는다면, 남부로 직접 가볼 생각이더냐."

"하하."

레이가 재차 피식 웃더니 천천히 표정을 굳혔다.

적당히 돌려 말하는 에른스트의 화법이 그리 싫은 것은 아니었지만, 이번에는 좀 성질이 났다.

그에 더해서 레이는 자기 계획의 실현과 세리아를 위해서라도 이번에는 기싸움을 좀 해주어야할 필요를 느꼈다.

그래서 감정을 일부 드러냈다.

"왜요, 껄끄러우십니까. 제가 남부에 발을 들이는 게."

"레이."

"죽을 때가 가까워지자, 죽음이 너무나 두려워진 제가, 어떻게든 목숨줄을 붙잡아볼 요량으로 신성 교단에 기웃거리려 하는 건 아닐까 의심되십니까."

혹은.

"공포에 질린 탓에 판단력을 잃고, 목숨을 구해주겠다는 교단의 허황된 유혹에 혹해서 놀아나진 않을까 걱정되십니까."

"레이, 답지 않게 흥분한 것 같구나. 진정하거라."

"음... 후작님. 후작님께선 혹시라도 제가 남부와 붙어먹는 일이 생길까 염려가 상당하신 것 같습니다만... 어... 만약에 말입니다."

레이가 비스듬히 기울여 두었던 시선을 다시 에른스트에게로 옮겼다.

"후작님께서 말씀하신 허황된 기적을... 혹시라도 그들이 제게 선물해줄 수 있다면."

어둡게 가라앉은 눈동자와 황금빛이 너울지는 눈동자가 허공에서 부딪쳤다.

"그때가 되어서도 후작님은 제게 기적이 찾아오길 바라실 겁니까."

거래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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