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2화
전쟁이 마무리 단계로 접어든 후.
필립스 백작은 오시리스 백작령에서 그만 자리를 비켜주기로 결정했다.
원래는 겨울이 끝날 때까지만이라도 오시리스 백작령에 머물 계획이었다.
허나 예기치 못한 습격이 찾아왔다.
방어에 성공하긴 했지만 오시리스 백작령도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당장 집을 잃은 주민들이 머물 숙소도 부족했고 복구 작업을 하려면 물자도 쏟아부어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계속 빵만 축내고 있는 것도 못할 짓이었다.
물론, 겨울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주민들을 데리고 필립스 백작령으로 돌아가 영지를 재활성화 시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다만 사람을 보내 확인한 결과 필립스 백작령이 비교적 온존히 보존되어 있어 근심을 덜어낼 수 있었다.
일단 영주성이 무사했고 크게 약탈당한 곳도 없었다.
몇몇 좀도둑이 결계에 침입했다가 질식사하기는 했지만, 그거야 시체만 치우면 될 일이었다.
오시리스 백작령을 떠나기 며칠 전부터 필립스 백작은 여기저기 인사하러 다니기 바빴다.
특히 오시리스 백작과는 오랜 시간 독대하며 장기적인 협력을 약속했다.
어차피 이웃 사이인데 서로 돕고 살아야 했다.
레이는 레이 대로 오시리스 백작령에서 만났던 인연들과 한 번씩 인사를 나누었다.
플로리아는 레이와 옛날 이야기를 나누며 즐겁게 웃다가 이제는 진짜 남편 좀 찾아 데려와야 겠다고 한탄했다.
레이는 낄낄 웃으며 혹시 개인적인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해달라고 말했다.
그리 정신 없는 시간이 지나가는 동안 카렌은 또 은근히 레이와 거리를 두고 있었다.
감정이 상했거나 그런 것은 아니었고, 그냥 어색하고 부끄러워서 레이 얼굴 보기가 왠지 어려웠다.
레이는 카렌의 행동을 보며 괜히 자기 뺨을 매만졌다.
원래는 정사를 치르고 나서 대화 같은 게 좀 필요했었다.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사랑도 속삭이고 남아있던 감정도 해소하고... 뭐, 그런 절차가 필요했었다.
헌데 잠자리에 알레시아가 불쑥 난입해 버렸다.
덕분에 그날의 정사는 약간의 불완전 연소 상태로 마무리되었다.
어쨌든, 카렌이 괜히 낯부끄러워하며 레이를 어떻게 대해야하나 헤매는 사이 알레시아는...
"나의 기사여!!"
아주 기세등등했다.
알레시아는 귀족 중에선 자기가 가장 먼저 레이를 선점했다는 것에 만족해하며 히죽거리고 돌아다녔다.
더는 흐물흐물 알레시아가 아니라 기세등등 알레시아였다.
"..."
레이는 방방 뛰어오는 알레시아를 쳐다보다 내가 쟤랑 어떻게 잤나 싶어 잠깐 심란해졌다.
아, 물론 알레시아는 충분히 여성적인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조금만 꾸며도 알레시아는 화사하고 아름다운 귀족 아가씨가 되어 남들의 눈길을 끌고는 했다.
다만 레이에게 있어 알레시아는 말괄량이 동생 같은 이미지였다.
맨정신이었다면 알레시아에게 선뜻 손을 뻗기 힘들었을 것이다.
허나 알레시아는 그야말로 귀신 같은 타이밍에 러쉬를 들어왔다.
당시 욕정에 취해있던 레이는 막무가내로 밀고 들어오는 알레시아의 러쉬에 대처하지 못하고 일을 치르고 말았다.
"..."
레이가 괜히 자기 눈두덩이를 꾹꾹 눌렀다.
알레시아는 그런 레이에게 승리의 미소를 머금은 채 다가와 조잘대더니 은근히 몸을 치대고는 자기 할 일을 하러 갔다.
레이는 멀어지는 알레시아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웃음을 터뜨렸다.
이러거나 저러거나 알레시아도 레이에게 참 많이 힘이 되어준 존재였다.
잡생각을 떨쳐낸 레이는 영지로 귀환할 준비를 하는 필립스 백작령 주민들을 찾아갔다.
다음날 출발해야했기에 다들 짐을 챙기느라 부산스러웠다.
레이가 주민들을 지켜보는데, 엘프가 다가왔다. 라파엘라였다.
"부산물."
라파엘라는 저번에 한바탕 한 이후로 레이를 부산물이라 불렀다.
물론 레이도 라파엘라를 귀쟁이라 부르고 있기는 했다.
"왜, 귀쟁이."
"대체 언제 '어머니의 품'으로 출발할 생각이지?"
"필립스 백작령으로 귀환했다가, 황도에 한 번 들렀다가, 여유가 생기면 한 번 찾아가보지, 뭐."
"시간이 없다고 했다."
"거 수백 년씩 사는 귀쟁이들은 넘쳐나는 게 시간 아니었나?"
"멍청한 부산물들 중 특히 멍청한 부산물아, 일의 선후 쯤은 제대로 분별할 줄 알거라."
"아이고, 귀쟁이들은 똑똑해봤자 얼마나 똑똑하다고."
레이는 그리 말하며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이번에 선물로 받은 물건 중에 마법으로 보관되고 있던 과일 상자도 있었는데, 거기서 사과 하나를 꺼내 주머니에 넣어놨었던 참이었다.
사과를 손에 쥔 레이는 저 멀리서 비틀거리며 걸어가던 엘프를 불렀다.
"야!! 미네르!!"
"?"
"받아!!"
레이가 사과를 휙 던졌다.
미네르는 머리 위로 날아오는 사과를 보고 별 생각 없이 두 팔과 두 다리를 이용해 몸을 펄쩍 띄우더니, 평소처럼 입으로 사과를 콱 붙잡고 착지했다.
와삭와삭
사과를 씹어본 미네르는 한겨울의 사과가 예상보다 훨씬 신선하다는 걸 깨닫고 환히 웃으며 다시 자기 갈 길을 갔다.
레이가 흐뭇하게 웃었다.
"훈련이 참 잘 됐어."
"..."
잠시 뒤.
인근을 순찰하던 기사들이 레이와 라파엘라를 뜯어말리기 위해 죄다 몰려오게 되었다.
*
필립스 백작령으로의 귀환은 큰 사고 없이 무사하게 끝났다.
주민 모두가 영지를 재활성화시키기 위해 다들 부산스럽게 돌아다녔다.
레이는 집 앞에서 익숙한 풍경을 바라보며 웃음을 머금었다.
몇 가지 일만 더 끝내고 쫓기듯 살았던 시간을 마무리 짓자고 마음 먹게 되니 은퇴한 이후의 삶이 기대가 되었다.
그래도 레이는 빠르게 마음을 다잡았다. 벌써부터 표정이 풀려 헤실 거릴 수는 없었다.
'황도는 루나와 고모와 동행하기로 하고...'
떠나기 전에 필립스 백작령의 안전을 한 번 점검해야 했다.
다행히 루비하 왕국의 레인저 부대는 전력을 거의 온존한 채 큰 마찰 없이 제국과 협력 중이었다.
아룬델의 추적은 계속 진행되고 있었는데, 계속해서 멀리 이동하고 있다고 파악되고 있었다.
당장은 문제될 게 없어 보였지만 레이의 약점을 잡고자 하는 세력이 언제 또 수작을 부려올지 몰랐다.
이제는 필립스 백작령의 전력도 거의 다 드러난 상태였으니, 마냥 안심할 수는 없었다.
'결국 도움을 좀 받아야겠네.'
루나도 자리를 비우는 이상 필립스 백작령에 추가적인 병력 파견을 황제나 에른스트에게 요청해야 할 듯 싶었다.
"해주겠지, 뭐.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진 말자."
어차피 저쪽도 레이 유통기한 짧은 거 상정하고 유하게 대하며 자잘한 부탁은 들어주고 있었다.
레이도 그거 믿고 간간이 선을 넘었다 돌아왔다 하고 있었고 말이다.
레이는 찬 공기를 한껏 들이마시고는 집 안으로 들어왔다.
레이의 침대 위에 걸터앉아 있던 카렌이 조금 어색하게 물었다.
"또... 떠나는 거야?"
"황도에 좀 들러야 해."
"음... 그렇구나. 황도에..."
카렌이 풀이 죽은 얼굴로 말끝을 흘렸다.
그러자 레이가 카렌의 바로 옆에 걸터앉으며 카렌의 뺨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입맞춤이 이어진 후, 레이가 카렌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물었다.
"이번에도 기다려줄 거지? 여기, 이곳에서."
"..."
카렌은 잠깐 당황한 기색을 내비치다, 이내 눈시울을 붉히며 미소지었다.
"응. 계속 계속... 기다리고 있을 거야."
더는 그 기다림이 마냥 괴롭지는 않으리라고 속삭인 카렌이 레이 위로 올라타듯 안기며 입술을 맞추었다.
레이는 키스를 이어가며 자연스레 카렌의 상의를 벗겨갔다.
카렌은 막상 레이에게 자기 속살을 또 보여줄 순간이 되자 갑자기 얼굴이 화끈거렸다.
첫경험 때는 워낙 격정에 휩싸인 채 관계를 이어갔던 탓에 인식하지 못했던 부끄러움이 이제야 가득 몰려오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카렌은 억지로 부끄러움을 밀어넣으며 레이의 허리 아래로 과감하게 손을 뻗어 보았다.
점점 더 공기가 뜨거워졌다.
아직 나신을 제대로 드러내지 않았음에도 밀착한 서로의 몸에서 열기가 강하게 느껴졌다.
그때 인기척이 집밖에서 들려왔다.
레이는 또 알레시아가 찾아왔겠거니 하고 자포자기한 채 카렌의 엉덩이를 자기 품으로 더 가까이 밀착시켰다.
인기척이 가까워졌지만 레이는 카렌의 살결을 탐하는데 집중했다.
그러다 문이 벌컥 열렸고, 레이는 카렌의 어깨 너머로 세리아와 눈이 딱 마주쳤다.
"..."
"..."
레이는 그대로 굳었다.
세리아 또한 크게 충격을 받은듯 입을 반쯤 벌린 채 눈을 깜박였다.
레이는 부디 세리아가 그대로 문을 닫고 다시 떠나주길 바랐다.
허나 세리아는 아예 집안으로 발을 들이고는 짐짓 엄한 얼굴을 했다.
"조카."
"...네."
"안 돼. 벌써부터 그러면. 그런 건 좀 더 크고 나서 해야 해."
"...고모, 제 나이가 벌써 스물입니다."
"조카는 아직 아가야."
"..."
둘의 대화를 듣던 카렌이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인 채 몸을 빼려고 했다.
허나 레이는 옆으로 비키려는 카렌을 꽉 붙잡았다.
여기서 카렌이 비키면 레이는 세리아에게 자기 몰골을 고스란히 보여줘야 했다.
레이는 카렌을 방패로 삼은 채 세리아에게 빌듯이 부탁했다.
"고모, 제발 잠깐만 나갔다 들어와 주시면 안 될까요?"
"알겠어."
다행히도 세리아는 레이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레이는 세리아가 문을 닫고 나가주자 카렌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는 앓는 소리를 냈다.
*
시간이 계속 흘러.
레이는 빠르게 황도로 떠날 준비를 마쳤다.
레이에게 남은 시간이 그리 넉넉하지 않은 만큼 마냥 여유를 부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일단 루나와 세리아가 동행하고, 임무를 받은 라파엘라 또한 어쩔 수 없이 레이를 따라가게 되었다.
레이는 떠나기 전 지미의 사무실에서 대화를 나누었다.
"저 없는 동안, 잘 부탁드릴게요."
"그래, 뭐... 그런데 나는 황도에 가보지 않아도 괜찮겠어?"
저번 일로 지미의 경지가 외부에 드러났다.
본래라면 지미는 모하메드가 했듯이 황성을 곧장 찾아가야 했었다.
물론 그건 가진 배경이 부족했을 때 이야기였다.
"걱정 말아요. 그 정도는 제 선에서 무마 가능해요."
"그럼 다행이다만..."
"이번 일 끝나면 제가 직접 지미 영지로 모셔다 드릴게요. 매번 미안하지만 한 번만 더 부탁할게요."
"그래, 알았어. 너도... 몸 조심해라."
"네, 지미. 항상 고마워요. 정말로요."
레이는 지미와 대화를 끝내고 레아를 찾았다.
레아는 오시리스 백작령에서의 경험이 트라우마로 남은 것인지 요즘 절대 혼자 돌아다니려 하지 않았다.
간간이 악몽을 꾸고 빽빽 울기도 하였다.
그래도 트라우마가 심각한 수준은 아니어서 점점 안정되어가고 있었다.
더해서 요즘 레아는 카렌을 찾는 일이 많아졌다.
카렌에게 많이 고맙고 미안한 모양이었다.
오늘도 카렌의 가슴에 달라붙어 있는 레아를 데려온 레이가 의자를 툭툭 두드렸다.
"여기 앉아봐."
"..."
레아가 의자에 앉으려 했고, 레이는 의자를 뺐다.
물론 레아는 미리부터 경계하고 있었기에 다리를 굽히던 도중 넘어지지 않고 멈출 수 있었다.
레아가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는데 레이가 레아에게 딱밤을 날렸다.
딱!
"악!"
쿵, 하고 엉덩방아를 찧은 레아가 빼애애애액 울음을 터뜨렸다.
레이는 권능으로 레아의 몸을 살폈다.
레아는 최근 열이 좀 많아졌다.
용혈의 농도가 점점 더 짙어진다.
그래도 다행히 아직 몸을 해칠 수준은 아니었다.
레이는 레아의 몸 상태를 확인하고는 여전히 빼애액 울고 있는 레아에에 물었다.
"이번에는 어떤 선물을 사왔으면 좋겠어?"
"선물!"
곧장 울음을 그친 레아가 희희낙락거리며 오빠에게 어떤 선물을 부탁할지 흥얼거리며 고민하기 시작했다.
레이는 밝게 웃는 레아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
레이가 필립스 백작령을 떠났다.
레이가 자리를 비우는 건 이제는 다들 익숙한 일이었다.
레이는 따뜻한 배웅을 받고 떠났고, 필립스 백작령에 남은 사람들은 다시 일상을 영위했다.
아직 시그니 산맥에는 눈이 쌓인 흔적이 남아있었다.
쌀쌀한 날씨 속에서 따뜻하게 옷을 입은 알레시아는 평소처럼 필립스 백작과 식사를 시작했다.
헌데 식사를 하던 알레시아는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나이프를 내려놓더니 갑자기 자기 입을 가렸다.
"우읍!"
참 인위적인 헛구역질 소리였다.
알레시아는 그리 헛구역질을 몇 번 하고는 속이 안 좋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속이 안 좋다고는 하는데, 식당을 떠나는 알레시아의 표정이 참 싱글벙글했다.
일단 속이 안 좋다는 건 거짓말임이 틀림 없었다.
"..."
식당에 홀로 남은 필립스 백작은 들고 있던 포크를 내려놓았다.
우리 딸아이는 나이가 몇인데 왜 아직까지도 철이 좀 덜 든 것 같을까.
필립스 백작은 괜히 마음이 깝깝해져 고개를 짧게 저었다.
허나 필립스 백작은 딸아이 덕분에 앞으로 더욱 깝깝한 감정을 느낄 예정이었다.
그 깝깝함은 말하자면... 고점을 찍었을 때 익절에 실패한 투자자의 심정을 닮아있었다.
거래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