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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등가의 소드마스터-291화 (291/446)

291화

아룬델과의 전투에서 울트 또한 부상을 입었다.

다행히 아룬델의 탄환에 피격당하지는 않았으나 게네시스의 저주를 뒤집어쓴 반동 탓에 피로가 컸다.

그나마 선조로부터 유전된 육신이 워낙 강인했던 덕분에 아직까지 버티는 중이었다.

며칠 동안 치료를 받으며 충분한 휴식을 취한 울트는 아룬델과의 전투를 복기하며 강한 아쉬움을 느꼈다.

물론 울트는 아룬델과의 전투에서 최선을 다했고, 판단 착오나 치명적인 실수 같은 것도 저지르지 않았다.

울트는 의심할 여지 없이 오시리스 영주성을 지켜낸 최대 공로자 중 한 명이었다.

다만 울트는, 아룬델과의 전투에서 '발레리우스'의 부재가 매우 아쉬웠다.

단거리 공간 도약 기능을 지닌 아티펙트 '발레리우스'를 전투 때 활용할 수 있었다면 아룬델을 확실히 밀어붙일 수 있었을 것이다.

굉장히 힘들긴 했겠지만... 아룬델의 도주를 저지해 레이와 루나가 도착할 때까지 시간을 끌어볼 만도 했을 터다.

그만큼이나 발레리우스는 말도 안 되는 성능을 지닌 아티펙트였다.

자리에서 일어난 울트는 그게 아쉬워서 주변을 서성거리다 마침 길을 걸어가는 루나를 발견하고는 다가갔다.

울트는 루나와 대화를 나누는 게 묘하게 껄끄러웠지만 그래도 용기를 가져보기로 했다.

"으음... 루나."

"..."

루나가 감정이 전혀 읽히지 않는 얼굴로 울트를 돌아봤다.

울트는 어색하게 웃으며 본제를 꺼냈다.

"혹시... 발레리우스의 수리가 끝났다면 돌려받을 수 있을까?"

"..."

"어, 음... 아직 수리가 안 끝났니?"

"..."

루나의 고개가 살짝 옆으로 기울어졌다.

루나는 지금 상황이 참... 어이가 없었다.

금지된 숲까지 찾아가서 목숨을 구해줬더니 뭘 아티펙트까지 되돌려달라고 한단 말인가.

또한 울트의 아티펙트는 이미 레이의 심장 강화 재료로 대체된지 오래였다.

루나는 하고 싶은 말이 몇 개 있었지만, 그냥 짧게 답했다.

"...수리, 안 끝났어요."

루나는 그 한 마디를 남기고 바로 등을 돌렸다.

울트는 멀어지는 루나의 등을 바라보며 발레리우스를 돌려받기는 글렀다는 걸 재차 깨달았다.

눈 뜨고 강도를 당해버린 울트는 주문쟁이의 악랄함과 항의 한 번 제대로 못한 자신의 무력함에 좌절해 제자리서 몸을 떨었다.

물론 울트도 목숨을 구해준 레이와 루나에게 은혜를 입었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그래도 아까운 건 아까운 거였다.

울트는 홀로 남아 탄식을 짧게 흘렸다.

한편.

루나는 자기 숙소로 돌아와 책을 펼쳤다.

아직 해가 다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새벽 시간 때부터.

평범한 인간은 감히 상상도 못해볼 사고의 전환과 가속이 소녀의 두뇌 속에서 전개되었다.

헌데 그때 누군가가 방 문을 똑똑 두드렸다.

루나가 손가락을 까닥여 방 문을 열어주자 알레시아가 짠- 하고 나타났다.

새벽부터 찾아온 알레시아의 안색은 꽤나 초췌해 보였다.

그럼에도 밝게 웃는 얼굴로, 어기적어기적 걸으며 방 안으로 들어온 알레시아가 세상 뿌듯하게 손가락 두 개를 쫙 펼쳐 보였다.

"성공했도다!!"

"...?"

아니 진짜 성공했다고?

방에 들어가자마자 레이 살점부터 물고 늘어져 놓고는?

루나는 오랜만에 자기 예상이 완전히 빗나가서 깜짝 놀랐다.

알레시아는 어설프게 다리를 벌린 채 끙끙거리며 다가와서는 해맑게 외쳤다.

"세 번째 순번은 네가 맡도록 하여라! 근데 너는 나보다 몸집이 작으니 괜찮을지 모르겠구나아..."

"..."

루나는 눈을 깜박이다 일단 잘했다고 알레시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알레시아는 잠깐 동안 뿌듯하게 루나의 손길을 받아들이더니, 곧 모양새가 영 좋지 않다는 걸 깨닫고 애 취급하지 말라며 루나의 손길을 탁탁 쳐냈다.

*

밤이 지나고 새벽 햇살이 비치기 시작했을 때.

레이는 침대 위에 걸터 앉아 자기 얼굴을 감싸쥐고 있었다.

레이는 전생에서 우스갯소리로 현자 타임이라 불리었던 시간을 아주 제대로 경험하고 있었다.

카렌과 몸을 겹친 건 아무리 잘 포장해도 다분히 충동적인 행위였다.

그건 레이가 이제까지 견지해왔던 결심을 완전히 위배하는 일이었다.

사실, 카렌의 옷을 헤치고 부풀어 오른 가슴에 얼굴을 묻기 직전까지도 레이는 번민했었다.

허나 부드러운 살결을 입술로 베어 무는 순간.

참고 참았던 욕정이 멋대로 쏟아져 나왔고, 그때부터는 도저히 충동을 억제할 수가 없었다.

마구잡이로 날뛰는 욕정을 레이는 카렌에게 그대로 쏟아냈다.

헌데 일을 치른 직후 알레시아가 쳐들어왔다.

알레시아는 화풀이를 끝내고는 이제 내 차례라며 드레스의 끈을 풀어냈는데... 그 시점에서 레이는 알레시아의 잠자리 요구를 거부할 명분이 마땅치 않았다.

수명 문제라도 그 자리에서 바로 고백하지 않는 이상 알레시아를 납득시킬 수 없었을 것이다.

아니, 설령 수명 문제를 고백했다고 하더라도.

당장 카렌은 그리 격렬하게 안아놓고는 알레시아는 수명 문제 때문에 관계를 맺을 수 없다?

그것도 남이 듣기엔 웃긴 소리였다.

여기서 레이가 잠자리를 거부하는 건 알레시아를 여자로 못 보겠다는 뜻이나 마찬가지였다.

알레시아가 아무리 낙천적인 성격이라 해도 그건 크나큰 상처가 될 게 분명했다.

그 때문에 레이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어버버하는 사이 알레시아가 몸을 밀착해 왔다.

한창 욕정에 취해있던 레이는 결국 될 대로 되겠지란 식으로 알레시아와도 육체적 관계를 맺게 되었다.

"..."

그냥 정신이 나갔었구나, 레이.

레이는 몇 시간 전 자신을 자책하며 콧잔등을 매만졌다.

새벽에 일어난 알레시아는 몸을 단정히 하고 방을 나갔었고, 카렌은 아직 레이 곁에 조용히 잠들어 있었다.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몸을 섞었으니 체력이 완전히 고갈되었을 수밖에 없었다.

"..."

레이는 고개를 돌려 카렌을 가만히 바라봤다.

어린 시절 침을 발라대며 집착을 드러냈던 카렌의 모습이 떠올라 괜히 웃음이 나왔다.

"하하, 하아..."

이제까지 수명 문제 때문에 더욱 깊은 관계를 맺기를 거부했었다.

그게 틀린 선택은 아니었다고 생각하지만, 거리를 두려면 제대로 두었어야 했다.

네게 완전히 마음이 없다는 걸 확실히 드러냈어야 했다.

허나 레이는 그러지 못했고, 어설픈 밀어냄은 도리어 카렌에게 더욱 큰 상처가 되어 감정을 극단으로 치닫게 만들었다.

레이의 어설픈 밀어내기에 상처를 입은 것은 비단 카렌만이 아닐 터다.

레이는 한숨을 쉬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

정말 많은 운이 따르고 루나의 도움을 받는다고 해도 레이에게 남은 시간은 10년 미만이었다.

이별은 피할 수 없고 많은 슬픔이 따를 것이다.

허나 그날의 슬픔이 두렵다고 해도 이미 한 번 맺은 관계를 끊어낼 수는 없었다.

레이는 이제는 자기 고집과 생각을 바꾸어야 함을 깨달았다.

이별이 슬프다고 해도 후회를 남기지 않을 수 있도록.

내가 사랑하고 나를 사랑해주었던 사람들이 자책하지 않을 수 있도록.

그리 생각을 바꾸고 남은 시간에 충실해야 했다.

예정된 시기가 조금 빠를 뿐, 어차피 이별이란 것은 언젠가는 찾아오는 법이었다.

엄청 대단한 비극을 감내해야 한다는 듯 몸을 웅크리고 끙끙거릴 필요는 없었다.

알레시아처럼, 레이는 좀 더 마음을 가볍게 먹고 낙관적으로 상황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어쩌면 킹갓엠페러 루나님의 도움으로 빌빌거리면서도 수십 년 버틸 수 있을 지도 모르잖는가.

"..."

결심을 다시 내린 레이가 나신으로 잠들어 있는 카렌의 몸을 무의식적으로 훑었다.

그리고 반사적으로 카렌의 가슴을 움켜쥐어보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자기 뺨을 찰싹 쳤다.

*

세리아는 자기 부상을 레이에게 알리지 않으려 했다.

세리아의 의도 대로 일이 진행됐다면 참으로 가슴 답답하게 만드는 전개가 펼쳐졌을 게 분명했다.

허나 세리아를 진단한 치료사들은 세리아의 상태를 곧장 레이에게 일러바쳤다.

그도 그럴게... 치료사들 입장에선 세리아 눈치를 보느라 레이에게 미움 살만한 일을 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객관적으로 레이는 세리아보다도 급이 까마득히 높았다.

뭐 대단한 정치적 이유라도 있지 않은 이상 레이의 의사가 무조건 우선이었다.

덕분에 나의 부상을 알리지 말라는 세리아의 의견은 묵살되었고 레이는 세리아의 소식을 전해 들을 수 있었다.

"..."

세리아가 자기를 진료봤던 치료사를 지긋이 노려봤다.

치료사가 슬금슬금 세리아의 시선을 피하고 있자 레이가 한숨을 푹 쉬었다.

"아니아니, 고모, 자꾸 고집 부리지 말고 상처 한 번 보여주세요."

"괜찮아. 다 나았어. 상처."

"아, 예예, 알겠으니까 빨리 보여줘요."

레이가 재촉하자 세리아가 짐짓 화난 얼굴을 했다.

"조카가 고모 자꾸 귀찮게 해."

"고모, 지금 고모께서 조카를 귀찮게 하고 계시는 겁니다."

투닥거린 끝에 레이는 결국 세리아의 상처를 직접 살펴볼 수 있었다.

권능을 사용해 세리아의 상처를 살핀 레이가 인상을 찌푸렸다.

확실히 일반적인 상처가 아니었다.

상처를 기점으로 기이한 힘이 세리아의 육신을 침식해 범위를 넓히려 하고 있었다.

'악신의 권능 따위로 이루어진 저주인가...'

다행인 점은 역시나 세리아를 해치기엔 위력이 약하다는 점이었다.

애초에 저런 저주 계열은 제거하기가 굉장히 까다로운 경우가 많은 대신 위력 자체는 크게 치명적이지 않았다.

세리아라면 이런 저주를 달고도 수십 년은 거뜬히 버틸 수 있었다.

주변 조력이 있다면 저주의 영향을 아주 극미하게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어디까지나 세리아 같은 강자를 기준으로 했을 때 그렇다는 이야기였다.

"...원래 고모에게 사용할 생각은 아니었던 것 같네요."

정황과 증상을 종합했을 때 이건 증오의 사도인 아룬델이 스스로가 매개가 되어 부여한 저주일 것이라 추측됐다.

아룬델을 잡아죽이면 해주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저를... 다급하게 만들기 위해 준비하지 않았나... 싶네요."

예컨대, 아룬델이 이 저주를 벨라에게 사용했다면.

강인하지 못한 벨라의 육체로는 몇 시간도 버티기 힘들었을 것이다.

상황이 그리 되면 레이는 함정이라는 걸 알면서도 아룬델을 쫓아 불리한 전장 위에 몸을 내던질 수밖에 없었다.

허나 계획이 틀어지며, 결국 아룬델은 앞을 막아서는 세리아에게 저주를 새겨놓고 도주했다.

'하, 시발.'

다행히 저주는 세리아를 해치지 못했고, 시간은 많았다.

아룬델을 놓쳤다고 하더라도 저주를 없애거나 저주의 영향을 상쇄시킬 수 있는 방법은 제국에서 찾아낼 수 있을 터다.

레이는 안심하는 한편 세리아에게 미안해서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자 세리아가 손을 뻗어 레이의 뺨을 양손으로 붙잡고서 쭉쭉 늘렸다.

레이는 남들 앞에서 볼이 늘어나 어브어브 거리면서도 세리아의 손길을 피하지 않았다.

*

세리아의 상처를 살핀 후.

레이는 해안가에 홀로 나와 파도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상황을... 정리해 보자면...'

레이가 이제 반드시 해결해야할 일은 두 가지였다.

레아의 심장에 황실의 드래곤 하트를 이식하는 것.

세리아의 저주를 영구적으로 해결하는 것.

'일단 황도에 한 번 들러야 될 것 같네.'

루나와 함께해야 했다.

황도의 방위 시스템과 황실의 드래곤 하트를 루나가 두 눈으로 확인하고 분석을 마쳐야 레아의 드래곤 하트 이식 계획을 완성시킬 수 있었다.

계획만 완성된다면 동생한테 황도 나들이 좀 시켜준다고 데려가서 일을 끝낼 수 있었다.

더해서 레이는 황제에게 세리아의 저주 문제 해결에 적극적으로 협조해주기를 요청할 생각이었다.

그게 그리 대단한 부탁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진짜 답이 안 나오면 남부에 있는 교단 쪽과 접촉해보긴 해야 했는데...

어쨌든, 그밖에 부차적인 문제도 몇 개 더 남아있긴 했다.

울트와 티티의 문제라든가, 마경의 확장 문제라든가, 타락한 드래곤에 관한 문제라든가...

하지만.

레이가 그 문제를 전부 해결하려고 강박을 가질 필요는 없었다.

"나름 할 만큼 했어. 진짜로."

레이는 이 세상이 어떤 과정을 거쳐 멸망했는지는 모른다.

허나 제국을 중심으로 한 인류가 하루 아침에 무너지지 않았다는 건 알고 있었다.

불알친구 놈이 보았던 '소설'의 분량이 더럽게 많았던 것에서 알 수 있듯, 원래의 역사에서 제국은 꽤 끈질기게 버텼다.

이는 악신을 숭배하는 세력이 제국을 일방적으로 압도하지는 못했다는 뜻이었다.

"내가 없었다고 해도 열세이긴 하지만 나름 비등하게 전쟁을 이어갔단 말이지?"

그리고, 레이가 미래를 바꾸었다.

"개처럼 구르며 조져놓은 악마 숭배자 놈들 수작이 몇 개인데..."

이제는.

인류가 확실한 우위를 지니고 있다고 확신해도 될 것이다.

죽기 전 세계수를 한 번 만나볼 생각이긴 했지만, 레아의 문제만 해결되면 언제든 여정을 멈추어도 괜찮지 않나 싶었다.

남은 삶은 필립스 백작령 인근에서 조용히 살아가다 마무리할 수 있다면...

"괜찮은 삶이었다고... 자찬해도 되겠지."

그때쯤이면 루나는 로드 급, 혹은 그 이상의 경지에 올라 남은 이들을 지켜봐 줄 것이다.

요하나도 제국과 황실의 핵심 전력으로 떠오르며 힘이 되어줄 것이다.

그밖에도 레이와 인연을 맺었던 많은 사람들이 서로에게 버팀목이 되어줄 것이다.

"당장 마음에 걸리는 건..."

제국의 내부 분열.

좀 비약적인 사고일 수 있기는 하나...

레이의 활약으로 인해 세상이 지나치게 안정된 탓에 도리어 내부 갈등이 심화할 수도 있었다.

본래 역사적으로 '강대한 적'의 존재는 내부를 통합시켰다.

반대로, 외부의 위협이 제거되어 위기감이 떨어지면 다들 딴 생각을 품기 시작하며 거대한 균열이 발생하고는 했다.

"중앙과 남부의 갈등이 많이 신경 쓰이는데..."

황실이 주축이 되는 중앙.

교단과 변경백이 주축이 되는 남부.

평화의 시기가 찾아와도 두 세력의 갈등을 억제하고 중재해줄 적임자가 필요했다.

"..."

너울지는 파도를 조금 더 바라보던 레이는, 결심을 굳히고 등을 돌렸다.

"안소니우스를 만나봐야겠네."

교단의 하이템플러이자 성녀의 혈육인 안소니우스.

그와 이야기를 나누고, 한 가지 '거래'를 성사시켜야만 했다.

꼭, 성사시켜야 했다.

레이는 안소니우스와의 거래가 분명...

자신이 떠난 후에도 이 세상을 살아갈 사람들을 위한 마지막 안배가 되어줄 것이라고 믿었다.

거래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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