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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등가의 소드마스터-290화 (290/446)

290화

나를 안아줘.

카렌의 애원은 레이에게 이제껏 없었던 감정의 격류를 일으켰다.

그 감정의 정체가 자책인지 분노인지 그도 아니면 단순한 정욕인지 레이도 알 수 없었다.

다만, 레이는 더는 머리를 헤집어대는 욕구를 제어할 수가 없었다.

레이는 카렌의 손길을 거부하지 않고 입을 맞춘 후, 그대로 고개를 숙여 카렌의 목덜미를 입술로 베어 물었다.

언제나 여기까지였다.

카렌이 그토록 원했음에도 레이는 항상 이 선을 넘어주지 않았다.

카렌은 이번에도 그럴까봐 두려웠다.

헌데...

카렌의 목덜미를 탐하던 레이의 입술이 처음으로 그 아래를 침범해갔다.

"...!"

카렌은 레이의 거칠어진 호흡이 쇄골을 따라 미끄러지는 것을 느끼고 몸을 잔뜩 긴장시켰다.

이내 목덜미 아래에서 부풀어오른 살갗에 입을 맞추는 소리가 들려왔다.

카렌은 기대와 두려움, 그리고 부끄러움 따위의 감정이 뒤섞인 탄성을 내지르며 몸을 떨었다.

레이는 카렌의 살결과 체향을 탐하며 카렌의 몸을 가리고 있는 옷을 우악스럽게 벗겨 내기 시작했다.

옷을 고정시켜주던 끈 몇 가닥이 거친 손길에 의해 끊어지며 감춰져 있던 하얀 속살이 드러났다.

레이의 숨결이 배꼽 아래로 향한다.

카렌은 레이가 허리 아래를 더듬는 걸 느끼고 긴장이 가득한 기색으로 엉덩이를 살짝 들어주었다.

이윽고 레이는 카렌의 몸을 가리고 있던 대부분의 옷가지를 벗겨냈다.

레이는 나신을 드러낸 카렌을 끌어당겨 다시 입술을 탐했다.

카렌은 레이가 이끄는 대로 입을 맞추다가 아랫배에서 생소한 열기를 느꼈다.

무언가 간질간질한 감각이 온몸을 타고 번지더니, 아랫배에서부터 묵직한 고통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하으... 윽..."

막연하게만 상상해왔던 순간은 마냥 감미롭지는 않았다.

카렌은 아랫배를 짓누르는 압박감을 견디지 못하고 반사적으로 허리를 뒤틀었다.

힘이 잔뜩 들어간 채 오므라든 카렌의 발가락이 침대보를 길게 긁어냈다.

허나 레이는 카렌을 배려해주지 않았다.

자꾸만 자세가 뒤틀리자 레이는 한 손으로 카렌의 골반을 잡아눌러 억지로 고정시킨 후 허리를 앞으로 밀어넣었다.

두 사람의 몸이 천천히 밀착해간다.

"아... 으... 하윽...!"

카렌이 힘겨운 신음을 토해내며 레이의 허리와 침대보를 꽉 움켜쥐었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한편.

알레시아는 레이와 카렌이 함께 있는 방 앞에 도착해 있었다.

루나의 도움을 받아 기척을 차단한 알레시아는 두 귀를 활짝 열었다.

알레시아의 바람 정령이 방 내부의 소리를 증폭시켜 들려준 덕분에...

방 안의 소리가 귓가를 꽝꽝 울릴 만큼 아주아주 잘 들렸다.

알레시아는 순간 혈압이 올라 끙끙댔다.

"저, 저젓, 저저 승냥이 같은 것이...! 은혜로 모르는 승냥이 같은 것이...!"

영지 예산 써가며 먹여주고 재워주고 길러줬더니 나의 기사를 가로채 가!

순번만 지키라고 그리 당부를 했거늘 이리 뒤통수를 쳐!

"으으으...!"

부들부들 떨며 억울함을 토해내던 알레시아는 앓는 소리를 내며 축 처지더니 금세 사고를 긍정적으로 전환했다.

"그래도 나의 기사가 그곳이 불구는 아닌 것 같아 다행이로구나!"

알레시아는 진심으로 안도했다.

레이가 자꾸 시답잖은 태도로 여자 관계를 회피하길래 진짜 그쪽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닌가 의심도 했었다.

허나 방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들어보니 그쪽도 뭐 크게 하자 없이 작동하는듯 싶었다.

"괘씸하기는 하나, 그래도 이번만은 카렌을 용서해주도록 하겠도다!"

뭐, 카렌이 나의 기사와 먼저 붙어먹는 게 굉장히 아니꼽긴 했지만!

다르게 생각하면 여자와의 관계를 끔찍하게 멀리하던 레이를 결국 카렌이 이끌어내는데 성공한 것이었다.

카렌이 길을 터주었으니 이제 알레시아도 그 길을 따라 달리기만 하면 되었다.

"카렌의 그 비효율적인 젖가슴이 드디어 제 역할을 하였구나!"

물론!

알레시아에게도 자존심이란 게 있었다.

알레시아에게 아직까지 남아있는 자존심이 있다는 게 루나에게는 굉장히 놀라운 일이긴 했지만...

어쨌든 알레시아에게도 자존심이란 게 있었다.

'첫 번째'는 카렌에게 양보해줄 수 있었다.

허나 두 번째 세 번째까지 양보해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툭툭!

알레시아가 루나를 보며 자기 가슴을 두드렸다.

그러더니 손가락 두 개를 들어서 루나에게 보여주었다.

"다음은 내 차례이니라!"

지금 침대 위에서 뒹굴거리는 카렌을 방해하지는 않겠지만 내가 무조건 두 번째 순번이다, 이건 절대 양보 못 한다, 뭐 그런 뜻이 함축되어 있는 발언이었다.

"..."

꼴값을 떠는 알레시아를 보고 루나가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레시아는 자기를 바라보는 루나의 눈동자에 미약하게나마 측은함이 섞여 있다는 걸 깨닫고 괜히 주먹을 뻗었다.

물론 맞추지는 못했다.

알레시아가 루나에게 괜히 화풀이를 하는 사이.

고통 탓에 억눌려 있던 카렌의 신음에서 서서히 달뜬 감정이 묻어나오기 시작했다.

*

레이는 카렌을 품었다.

망설이지도 멈추지도 않았다.

거친 호흡과 신음이 방 안을 가득히 메웠다.

서로를 그리 탐하면서도, 연인과의 달짝지근한 대화 같은 것은 단 한 번도 들려오지 않았다.

이건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남녀 간의 육체적 교류가 아니었다.

이건... 어긋나버린 감정의 갈등이, 욕정이 뒤섞인 채 육체의 부딪침으로 옮겨 갔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레이와 카렌은 서로에게 강한 애정을 느꼈다.

몸을 맞대고 있는 상대가 너무나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뜨겁게 격양되었던 감정들.

오랜 시간 쌓여왔던 울분들.

차마 내비치지 못한 마음의 상처들.

그 모든 것들이 부딪치고 부딪친 끝에 끈적하게 녹아내려 형태를 잃어간다.

어느새 두 사람은 본래 품었던 격정을 뒤로 미루고 서로의 육체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카렌은 단단하고 각져 있는 레이의 몸에 매달렸고, 레이는 부드럽고 풍만한 카렌의 살결을 움켜쥐었다.

눈을 감으면 항상 마음을 번민케 했던 모든 것들이 뇌리를 울리는 욕정에 잠시 뒤덮였다.

그리고, 그 격정의 시간도 끝이 찾아왔다.

새하얀 살결을 탐하며 계속해서 붉은 자욱을 남기던 레이가 결국 신음을 토해내며 움직임을 멈추었다.

카렌은 레이에게 안겨 가만히 몸을 떨었다.

요동치던 두 사람의 육체가 침대 위로 쓰러졌다.

그제야 레이와 카렌은 서로의 얼굴을 다시 찬찬히 살펴볼 수 있었다.

레이는 카렌의 뺨을 매만졌다.

카렌은 여전히 우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열락, 기쁨, 슬픔, 고통... 과연 카렌에게 울음을 자아내게 한 감정이 무엇인지 레이는 알 수가 없었다.

"카렌..."

레이는 눈물 자국이 남아있는 카렌의 눈가를 닦아준 후 다시 카렌과 입을 맞추었다.

그 일련의 행위는 다분히 충동적이었다. 레이도 그걸 알았다.

허나 맞닿아 있는 육신에서 느껴지는 축축한 열기가 다시 몸을 달구며 서서히 이성을 밀어냈다.

레이의 눈빛에서 열망을 읽어낸 카렌이 풀렸던 허리에 억지로 힘을 주었다.

헌데 그때.

벌컥!!

방문이 호쾌하게 열렸다.

완전히 활짝 열려버린 방문 너머에서 알레시아가 아주 위풍당당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나! 의! 기! 사! 여!"

"...?"

깜짝 놀라 그대로 굳어버렸던 레이가 허겁지겁 카렌의 몸 위에서 내려왔다.

카렌도 뒤늦게 자기 옷을 찾아 침대 위를 두리번거렸다.

허나 카렌의 옷가지는 이미 반쯤 뜯어져서 침대 밖으로 내던져진지 오래였다.

알레시아는 그꼴을 보고 참... 여러 감정이 휘몰아쳤지만.

그럼에도 아주 온화한 웃음을 머금은 채 성큼성큼 레이에게 다가갔다.

"좋은 시간을 보냈나보구나! 나! 의! 기! 사! 여!"

"아, 아니..."

레이가 주춤거리는 사이 알레시아는 거의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레이는 이 세상에 환생한 후 처음으로 알레시아에게 약간의 공포를 느꼈다.

알레시아는 마침내 침대에 도달해 레이와 카렌이 침대보에 남겨놓은 흔적들을 쭉 살폈다.

알레시아는 웬만하면 차분함을 유지하려 했지만.

막상 방에 들어와 두 사람을 마주하고 나니 당연히 뚜껑이 열렸다.

"나의 기사여!"

"?!"

콰득!!

물렸다.

레이가 기겁했다.

"야야야!!! 잠깐만!!!"

"그리 즈읏느아(좋았느냐)?! 즈읏으(좋았어)?!"

알레시아가 레이를 물고 늘어지기 시작했다.

레이는 알레시아를 떼어내기 위해 낑낑댔고 카렌은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라했다.

루나는 방문 너머에서 그꼴을 잠시 바라보다 문을 닫아주고 등을 돌렸다.

"..."

루나는 레이의 선택과 욕구를 존중했다.

또한 레이가 자기 삶에 좀 더 집착을 가져주길 원했다.

그렇기에 어떤 단계를 밟았든, 레이가 카렌을 품었다는 것에 만족했다.

아, 물론.

루나는 알레시아 또한 나름 존중하고 응원했다.

알레시아가 요상한 직감을 내세워 자꾸 훼방을 놓으려고 하길래 제지했을 뿐이었다.

루나는 레이와 알레시아의 관계 또한 잘 진전되기를 바랐다.

레이와 깊은 관계를 맺은 사람들이 늘어나서, 레이가 자기 삶을 좀 더 소중히 하게 된다면... 그걸로 충분했다.

다만 알레시아가 날뛰는 모습을 보니 과연 원하는 것을 쟁취할 수 있을까 좀 의심이 가긴 했다.

*

"으음..."

치료사가 곤란해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치료사 앞에는 세리아가 상의를 거의 탈의한 채 앉아있었다.

잠깐 생각에 잠겨있던 치료사가 세리아의 상처를 막고 있던 거즈를 떼어냈다.

그러자 쇄골 쯤에 위치한 상처에서 곧장 핏물이 주르륵 떨어져 내렸다.

엄청 대단한 출혈은 아니었다.

허나 문제가 있었다.

"벌써 며칠째 출혈이 멈추지 않는군요."

"..."

그 정도는 세리아도 보면 알 수 있었다.

세리아는 아룬델과 전투에서 이곳저곳 부상을 입었다.

허나 치명적인 수준의 부상은 피했다.

몸에 입은 부상보다는 아티펙트 손실 쪽이 뼈아팠다.

헌데, 부상 회복을 위해 며칠 동안 휴식을 취하며 치료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쇄골 밑의 상처가 아물기는커녕 계속 벌어져서 피가 멎지를 않았다.

결코 평범한 상처는 아니었다.

"이건... 저주 쪽으로 분류해야겠군요."

"못 해? 여기서 치료?"

"좀 더 정밀한 검사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신성력을 사용해도 해결이 되지 않으니..."

그나마 이런 부상을 입은 자가 세리아여서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었다.

평범한 민간인이 이런 상처... 혹은 저주에 당했다면 출혈을 어떻게든 최소화한다 해도 체력적으로 버텨주지 못했을 것이다.

허나 세리아는 높은 경지에 이른 강인한 기사였다.

피가 계속 샌다고 해도 일상생활쯤은 무리 없이 이어갈 수 있었다. 당장 목숨이 위험한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전투 수행에는 지장이 클 테고, 장기적으로 몸이 쇠약해지는 건 피할 수 없었다.

"되도록... 빠르게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지금은 멀쩡하다고 해도 시간이 지나 상처가 악화되기라도 한다면 세리아라고 해도 안전을 장담할 수 없었다.

치료사들이 출혈을 최대한 막아내며 차도를 관찰하는 사이, 해결법을 찾아야 했다.

세리아는 인상을 찌푸리며 흘러내리는 피를 손으로 닦아냈다.

순번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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