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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등가의 소드마스터-289화 (289/446)

289화

엘프가 찾아왔다.

엘프들 중엔 세계수의 품을 떠나 인간들과 엮여 살아가는 부류도 존재했다.

허나 이번에 레이를 찾아온 엘프는 제국 황실에 정식으로 신분 확인과 체류 허가를 받은 자였다.

일종의 외교관 신분으로 레이를 찾아왔다는 뜻이었다.

레이는 악마 숭배자 습격 탓에 아직 오시리스 백작령 상황이 난잡한 가운데 굳이 찾아와 사람을 오라 가라 하는 엘프가 괜히 마음에 안 들었다.

레이는 엘프를 만나러 가는 길에 울트를 만나 물었다.

"울트, 같이 갈래요? 게네시스 챙겨서."

"..."

울트는 얘가 지금 진심으로 하는 소리인가 싶어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레이는 울트가 탐탁지 않아 하는 것 같자 잠깐 고민했다.

"뭐, 그냥 미네르를 데려갈까요?"

"..."

어이 귀쟁아, 인간에게 길들여져 네 발로 기어다니는 동족을 보아라, 으하하하.

울트는 제국에 그닥 열성적으로 충성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제국과 엘프의 관계가 걱정되어 고개를 저었다.

"그냥 혼자 가십시오."

보는 눈들도 있었기에 말투는 정중했다.

울트가 반대하자 레이는 떫어 보이는 표정으로 혀를 끌끌 차고는 홀로 접견실을 찾았다.

접견실로 들어가자 처음 보는 엘프가 고고하게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엘프답게 용모가 빼어나긴 했다. 그런데 좀 어려 보였다.

키가 작거나 젖살이 덜 빠졌다거나 그런 건 아니었지만.

레이는 이전에 노화한 수호자급 엘프를 만난 뒤로 엘프가 풍기는 기운에 따라 나이가 대략적으로 짐작이 갔다.

레이가 시종의 안내를 받아 맞은편에 앉자 엘프가 그제야 입을 열었다.

"네가 레이라는 인간인가?"

시작부터 말투가 참 시건방졌다.

인간 사회에서 살아가는 엘프들은 저리 시건방진 태도를 보이는 엘프를 향해 흔히 '세계수 물이 덜 빠졌다'고 표현하고는 했다.

불경한 표현이긴 했는데, 애초에 인간들과 섞여 사는 엘프들은 고향을 그리 사랑하지는 않았다.

레이는 피식 웃으며 상대에게 물었다.

"그쪽은 어떻게 부르면 되지?"

"라파엘라."

"그래... 뭐, 라파엘라."

여기까지 오는 길에 난장판이 된 오시리스 백작령도 보았을 것이다.

형식적인 유감 표현 정도는 해주는 게 예의일 텐데, 엘프에게 거기까지 바라는 건 사치인듯 싶었다.

"그래서, 여기까지 무슨 일로 찾아왔지?"

"수호자의 초대를 받아놓고 미적거리고 있다고 들었다."

"미적거려?"

"그래. 그래서 널 데리러 왔다."

"음... 길잡이였어? 근데 이상하네. 처음 초대할 때는 찾아오든 말든 크게 관심도 없어 보이더니... 왜 갑자기 이리 똥줄 타는 것처럼 굴어?"

라파엘라의 눈살이 대번 찌푸려졌다.

연기는 아닌 듯했다. 레이가 이전에 만났던 수호자 급 엘프에 비해 라파엘라는 확실히 감정 표현이 명료하고 솔직했다.

"인간. 그것도 길어봤자 반백 년도 못 살았을 어린 놈이 건방이 지나치구나. 네 나이가 서른은 되었느냐? 그 짧은 경험과 지혜로 감히 누구의 의도를 재단하려 하는가."

"..."

접견실을 지키며 조용히 레이와 라파엘라의 대화를 듣던 사람들이 몸을 움찔 떨었다.

만약 레이가 조금이라도 불쾌한 감정을 내비쳤다면, 아마 곧장 검을 뽑아 라파엘라를 겨누었을 것이다.

허나 레이는 아주 태연한 태도로 대꾸했다.

"오해가 있는 것 같군."

"오해가 있다?"

"그래. 물론... 내가 '인간식 나이'로는 스무 살이긴 해."

"...인간식?"

"응. 하지만 '엘프식 나이'로 치환하면... 대략 300살 정도 되겠군."

"...?"

"이해가 안 돼? 인간이 평균 70년쯤 사는데 너희는 한 1000년 산다며. 그러니까 엘프식 나이로 따지면 내 나이가 대략 300살 정도 되지."

"..."

저건 또 무슨 참신한 개소리지?

라파엘라가 잠시 혼란에 빠져 귀를 쫑긋거리는데 레이가 의자에 등을 기대며 거만하게 말을 이었다.

"그러니 나이를 가지고 무시하면 곤란해. 너는 나이가 200살쯤 되나? 그러면 인간식 나이로 치환하면 기껏해야 한 열다섯 살쯤 되겠군."

"...?"

"한창 귀여울 때네. 원한다면 날 레이 오빠라고 불러도 좋아."

"...?"

혹시 미친 새끼인가?

라파엘라가 그런 감정을 담아 쳐다보자 레이가 웃는 낯으로 중얼거렸다.

"뭘 야려, 귀쟁이 년아."

*

엘프와의 기싸움은 성황리에 끝났다.

주변 사람들이 중간에 끼어 레이와 라파엘라를 뜯어말리느라 시간을 다 보냈다는 의미였다.

레이는 엘프를 상대하기가 매우 귀찮았다.

적어도 수백 년 이상 사는 놈들이니 수십 년을 살아가는 인간을 깔보는 게 아예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었지만.

어쨌든 꼬운 건 꼬운 거였고 받아주면 끝이 없을 게 뻔했다.

접견실을 나와 창문을 바라보니 눈이 오고 있었다.

전쟁이라는 걸 겨울철에 한다는 게 말 그대로 참 좆 같은 일이었다.

오시리스 백작령에선 습격을 막아낸 이후 주민들 얼어 죽지 않게 단도리 하고 박살 난 구역 복구하느라 다들 개고생 중이었다.

날씨가 조금만 따뜻했어도 고생이 절반은 줄었을 것이다.

그래도, 다행히 전쟁은 마무리 단계로 접어들고 있었다.

적의 주력은 섬멸되었다.

확보하고자 했던 왕국의 요인들도 성공적으로 확보했다.

이제 전쟁은 악마 숭배자 잔당을 색출하고 소탕하는 단계로 접어들었다.

그 이후 제국은 루비하 왕국을 안정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나라 하나를 뒤집어엎은 다음 안정시키는 게 정말 쉬운 일은 아니었다.

레이로서는 제국과 손을 잡은 왕국의 권력자들이 헛짓거리하지 않고 충분히 유능하길 바라야만 했다.

"..."

레이가 잠시 멍하니 서서 창밖에서 휘날리는 눈발을 구경하고 있는데, 갑주를 입은 템플러 한 명이 다가왔다.

간단히 예를 갖춘 템플러가 입을 열었다.

"전해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음, 뭔데?"

"카렌 양이 깨어났습니다."

"..."

레이가 말없이 미간을 문지르더니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었다.

참, 다행이었다.

*

레이는 소식을 듣자마자 바로 카렌을 찾아갔다.

레이가 카렌이 머물던 병실 문을 열었을 때, 카렌은 침대 위에 걸터앉아있었다.

레이의 예상보다 카렌은 복장도 단정했고 머릿결도 정돈되어 있었다.

아무래도 의식을 차리고 난 후 시간이 좀 지난 것 같았다.

레이는 괜히 자기 시간을 뺏은 엘프를 속으로 욕하며 카렌에게 다가갔다.

"카렌."

레이가 이름을 부르자 카렌이 천천히 레이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카렌이 무사히 살아 움직인다.

카렌의 붉은 눈동자에서는 평소와 같은 생기가 느껴졌다.

레이는 자기 눈으로 그 모습을 확인하고 나서 재차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카렌이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누구...세요?"

"..."

레이의 표정이 그대로 얼어붙었다.

병실 안의 공기가 급격히 가라앉으며 침묵이 이어졌다.

레이가 두 눈을 부릅뜬 채 입술을 달싹이고 있는데, 카렌이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장난이야."

"야!!!!!!!"

고함을 내지른 레이가 간만에 제대로 혈압이 차올라 뒷목을 쥐었다.

"아오...!"

심호흡을 하며 간신히 혈압을 가라앉힌 레이가 끙끙거리며 걸어가 카렌의 맞은편에 의자를 가져와 앉았다.

혼수 상태에 빠졌다가 일어난 만큼 카렌의 안색이 그리 좋아 보이진 않았다.

레이는 지쳐 보이는 카렌을 살피며 물었다.

"몸은 괜찮아? 어디 아픈 곳 없어?"

"응... 괜찮아."

고개를 끄덕인 카렌이 입가에 억지로 웃음을 그리며 중얼거렸다.

"나... 안 죽었구나. 살아있네."

"아니... 카렌..."

레이는 카렌에게 대체 왜 그렇게까지 했냐고 따지고 싶었지만 결국 말끝을 흐렸다.

전투가 마무리 되고 레아가 빽빽 울면서 상황을 설명해주었기에 레이도 카렌이 어쩌다 목숨을 잃을 뻔했는지 다 알고 있었다.

카렌은 레아를 지키려다 목숨을 잃을 뻔했다.

레아를 감싸다가 대신 상처를 입었고, 마지막 순간에는 레아를 먼저 보내고 홀로 남아 죽음을 기다렸었다.

루나가 제때 개입하지 않았다면 분명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

레이는 카렌에게 많이 미안했고, 또한 심란했다.

레이는 카렌에게 왜 그렇게까지 레아를 위해 희생했느냐고 따져 묻고 싶은 충동이 일었지만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그건 죽다 살아난 카렌에게 할 말이 아니었다.

또한, 레아는 레이에게 '반드시 필요한 사람'이었다.

벨라가 행복하게 삶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레아라는 존재가 반드시 필요했다.

그와 더불어...

레이가 비록 레아를 친동생처럼 사랑할 수는 없었지만, 레아에게 어떠한 정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레아는 똘똘하고 귀여운 아이였으며 레이를 오빠라고 잘 따랐다.

그런 아이를 레이는 마냥 미워할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레이는 카렌에게 왜 레아를 포기하지 못했느냐고 물을 수는 없었다.

"카렌... 앞으로는... 앞으로는... 네 몸을 좀 더 소중히 해줘."

레이가 결국 그리 돌려 말하자 카렌이 고개를 저었다.

"어쩔 수 없었어."

"나도 알아. 나도 아는데..."

"레아는 레이에게 소중한 사람이니까."

"물론 레아도 소중하지만..."

"나는 레이에게 레아 만큼 소중한 사람은 아니잖아. 그래서 어쩔 수 없었어."

"..."

레이는 카렌이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는건가 싶어 잠깐 카렌의 말을 곱씹었다.

"...카렌, 그게 무슨 말이야?"

"..."

카렌은 자기가 지금 유치하고 유아적인 집착을 그릇된 방식으로 내보이고 있다는 걸 자각하고 있었다.

이리 보기 흉하게 속내를 드러내봤자 레이에게 호감을 끌어낼 수 없으리란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허나 카렌은 더는 자기 감정을 숨길 수가 없었다.

죽음을 각오하고 눈을 감았다가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때 카렌은 기쁨보다도 공허함을 먼저 느꼈다.

더는 실낱같은 희망을 붙들고 레이가 나를 떠나지는 않을까 불안에 떨기는 싫었다.

이제는 그 괴롭고 끔찍했던 나날들을 그만 놓아주고 싶었다.

"레이... 나한테 막 일부러 잘해줄 필요 없어."

카렌은 되도록 덤덤하게 말하려고 애썼다.

허나 벌써부터 눈시울이 붉어져서 자꾸만 눈물이 맺히려 했다.

카렌은 흐려지는 시야를 닦아가며 꾸역꾸역 하려던 말을 이어갔다.

"나도 알고 있어. 나는 레이에게 어울리지 않아. 나는 레이에게 필요한 사람이 될 수 없어. 지금까지 레이에게 제대로 도움이 되지도 않았어. 항상 부담만 됐지."

"카렌, 잠깐..."

"내가 사라져도 레이는 괜찮을 거야. 처음부터 없었어도, 아무 문제 없었을 거야."

"카렌...!"

"나를 대신할 사람은 세상에 얼마든지 넘쳐날 테니까. 나도 알아. 그러니까, 그러니까 레이... 이제 그만..."

카렌을 말을 끝마치지 못했다.

자리에서 일어선 레이가 카렌에게 입을 맞춰왔고, 그대로 둘은 침대 위로 넘어져서 입술을 탐했다.

몸싸움을 하는 것처럼 서로 거칠게 몸을 치대며 한참을 타액을 섞은 후, 레이가 입을 떼며 충혈된 눈으로 카렌을 노려봤다.

"카렌. 잘 들어."

"..."

"나는, 네가 필요해."

"...그 말이 거짓말이라도 좋으니까, 레이."

카렌이 가득 고여있던 눈물을 침대 자락으로 떨어뜨리며, 레이의 뺨을 붙잡았다.

"제발 나를 안아줘."

*

"?"

몇몇 귀족들과 식사 약속이 잡혀 식당으로 가던 알레시아가 흠칫 놀라 자리에서 멈춰 섰다.

알레시아의 머리카락 몇 가닥이 제멋대로 떠올라 파닥거리고 있었다.

비상! 비상! 비사아아앙!

알레시아 레이더로 역대급 비상상황을 감지한 알레시아가 얼른 등을 돌리고 후다닥 뛰어갔다.

헌데 다다다다 뛰어가던 알레시아는 얼마 못 가 방해꾼과 딱 마주치고 말았다.

루나가 알레시아의 앞을 가로막았다.

알레시아가 적의를 드러내며 루나에게 으르르 거렸다.

그러자 루나가 어디 사람한테 입질이냐고 알레시아의 이마를 살짝 때렸다.

딱!

"아얏!"

순번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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