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홍등가의 소드마스터-288화 (288/446)

288화

레이가 영주성에 도착했을 때.

상황이 예상보다는 좋지 못했다.

여기저기 전투의 흔적이 새겨져 있었고 사상자의 숫자도 만만치 않았다.

허나 악신의 사도와 정면에서 맞부딪쳤다는 걸 고려하면 피해는 근소한 편에 속했다.

운이 좋았다, 그리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게네시스가 아룬델의 움직임을 제약하지 못했다면 더 막대한 희생을 치러야 했음이 분명했다.

본래는 엑스퍼트 급 기사조차 무차별적으로 소모되었을 전투를 울트가 반전시켰다.

제대로 발목이 붙들린 아룬델은 영주성 정문조차 뚫어내지 못하고 도리어 밀려났다.

그리 시간이 끌린 끝에, 해안가에서 막대한 마나의 파동과 함께 뿔고래와의 연결까지 끊어졌음을 감지한 아룬델은 결국 도주를 택했다.

빌어먹을 제국놈들의 저력에 압도된 아룬델은 어쭙잖은 저주나 내뱉고 그리 도주했다.

몸을 숨긴 채 물러나는 아룬델을 오시리스 백작령의 병력들은 뒤쫓지 못했다.

추적 자체의 난도가 너무 높기도 했고 어지간한 병력만으로는 아룬델과 맞닥트렸을 때 전멸이었다.

지원군이 우르르 몰려오면 모를까, 당장은 움직일 수 없었다.

결과적으로, 레이가 영주성에 도착했을 때 아룬델은 도주했고 제국군은 사상자를 수습하고 있었다.

"뭐해, 움직여."

"예, 알겠습니다."

레이와 대동한 치료사들이 레이의 눈짓을 받고 빠르게 부상자들을 향해 달려갔다.

출혈이 심한 부상자 중에는 세리아도 있었다.

레이와 눈이 마주친 세리아는 깨져나간 갑주 위로 흐르는 피를 대충 털어내고는 자리에서 일어서려 했다.

물론 치료사가 억지로 다시 끌어다 앉혔다.

호들갑을 떨 만큼 치명적인 부상은 아니었지만 피를 너무 흘리면 목숨이 위험한 건 그래듀에이트라 해도 마찬가지였다.

세리아가 치료를 받으며 레이를 돌아봤다.

"조카, 괜찮아? 안 다쳤어?"

"예예, 고모. 저는 멀쩡하니까 걱정 말고 가만히 치료 좀 받으세요."

"한 병 부으면 돼. 포션."

"피 계속 흐르는데 그냥 앉아서 치료 받으시라니까요."

레이가 가만히 좀 있으라고 세리아에게 손짓하는 사이 가까운 곳에 누워있던 매튜가 죽는 소리를 냈다.

"꺼으어억!"

"엄살 좀 적당히 부려요, 매튜."

레이는 나이를 먹을수록 진중함이 떨어져 가는 매튜를 뚱한 표정으로 쳐다봤다.

물론 왼쪽 어깨가 통째로 분질러지다시피 한 매튜는 결코 엄살을 떠는 게 어니었다.

매튜는 끙끙거리며 치료사에게 어깨를 맡기면서도 두눈을 부릅뜨고 되뇌었다.

"귀족 노릇도 제대로 못해봤는데 여기서 죽을 수는 없다...! 작위를 물려줄 후계는 만들고 죽어야 된단 말이다...!"

"예예, 당연히 그러셔야죠."

레이는 가볍게 웃어주고 말았다.

그렇게 레이가 주변을 돌며 상황을 살피는 사이.

레아는 벨라를 찾아가 꽉 안긴 후 빼애액 울어대기 시작했다.

벨라는 경황이 없는 와중에도 레아를 달래서 울음을 그치게 하기 위해 애썼다.

시간이 좀 더 지나자 방어선에서 차출된 병력이 오시리스 백작령에 도착했다.

그들은 오시리스 백작령의 상황을 직접 보고 꽤나 기겁했다.

지원병력이 도착한 덕분에 아룬델의 추적도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레이는 그들에게 난장판이 된 오시리스 백작령의 정비를 도우라고 하면서도, 아룬델의 추적 작업 또한 개시하라고 명령했다.

아룬델을 붙잡지는 못하더라도 게네시스 같은 물건을 매개체로 해서 탐지 마법을 전개한다면 대략적인 이동 경로까지는 알아낼 수는 있을 터다.

"빠르게 움직여."

레이는 방어선에 있던 병력을 차출해 운용하는 것에 대해 더는 부담을 느끼지 않았다.

루비하 왕국에 있던 최고 전력 중 하나인 베네딕트와 악신의 사도인 아룬델이 이번 기습에 참여했다.

시그니 산맥 방향의 움직임이 양동이었다는 뜻이었다.

오시리스 백작령을 기습하기 위해 전력을 낭비했으니 시그니 산맥 방향에서 움직이던 악마숭배자들은 금방 정리될 것이다.

혹시나 루비하 왕국의 악마 숭배자들이 시그니 산맥을 뚫고 넘어올까봐 전개한 방어선 또한 유지할 필요가 거의 사라졌다.

레이는 이곳저곳 연기가 솟아오르는 오시리스 백작령을 돌아보며 한숨을 푹 쉬었다.

루나와 오메가 시리즈 덕분에 육신을 혹사하는 것은 면했지만 정신적으로 좀 피로했다.

*

오시리스 백작은 죽을 맛이었다.

이번 습격 사태로 인해 인명과 재물 손실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일단 항구부터가 반파되어버렸다.

항구 재건만 해도 상당한 시간이 필요한 일이었다.

당장 기적 같은 수를 쓰지 않는다면 재정적으로 파산하다시피 할 것이다.

영지가 아예 망하지는 않겠지만 고생길이 아주 뚜렷했다.

심란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오시리스 백작에게 레이가 입을 열었다.

"이번 일은 미안하게 되었습니다."

아직 조사 중이라지만 악마 숭배자들이 왜 굳이 소수 정예로 오시리스 백작령을 급습했는지 다들 예상하고 있었다.

레이가 아니었다면 그들이 오시리스 백작령에서 무엇을 얻겠다고 그런 도박을 감행했겠는가.

결국 레이의 존재 때문에 오시리스 백작령이 타겟이 된 꼴이었다.

당연히 오시리스 백작은 레이에게 감정이 좋을 수가 없었으나, 그럼에도 곧장 표정을 환하게 바꾸었다.

"아닙니다. 무슨 말씀을 그리 하십니까."

상황이 참 거지 같긴 했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상대가 제국의 수호자인데.

또한 이번에 오시리스 백작은 레이의 무력을 간접적으로나마 확인했다.

그야말로 명불허전이라 칭할만했다.

낙뢰가 내려치고 섬광이 빗발치며 해일이 넘실거리는 전장에서 레이는 큰 부상도 없이 생환했다.

심지어 목숨만 건져서 돌아온 것도 아니었다.

레이는 사령검의 주인이자 과거 왕국제일검으로 불리었던 베네딕트까지 척살하는데 성공했다.

전투 과정까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결과만 놓고 보아도 과연 수백 년만에 제국 수호 훈장을 수여받은 영웅이라 할만했다.

게다가 레이는 아직 믿을 수 없을 만큼 젊었다.

얼마나 오래 강력한 권력을 행사할지도 모르는데 영지에 피해를 끼친 원흉이라고 적대감을 드러내서 좋을 게 하나도 없었다.

그렇기에 오시리스 백작은 웃음을 머금었다.

"저로서는 제국의 수호자를 돕게 되어 영광이었습니다."

"너무 조심스러워하실 필요 없습니다. 뭐... 이번에 백작님께 끼친 손해는 배상할 수 있도록 손 써보겠습니다."

"큼... 혹시 마물의 사체는 확인하셨습니까?"

뿔고래의 사체를 말하는 것이었다.

전투의 여파로 인해 결국 숨이 끊어졌던 뿔고래는 파도를 타고 해안으로 밀려왔다.

크기도 어마무시했고 사체에 아직 악신의 기운도 남아있었기에 접근을 통제한 채 마법사들이 달라불어 이것저것 확인하는 중이었다.

레이가 모래사장을 가득 메우고 있던 뿔고래의 부풀어오른 사체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귀찮은 놈이었지요. 악마의 기운을 토해내 일대를 침식시켜 마경처럼 만들더군요. 덕분에 베네딕트 그놈은 몇 번이나 조각나서도 다시 살아나서 달려들더군요."

"오, 이런... 참... 헌데 레이 님, 베네딕트는..."

"죽었습니다. 확실하게. 사령검을 회수하지 못해 아쉽긴 합니다만."

레이가 그리 말하며 책상 위에 두었던 자그마한 날붙이를 쥐고 흔들었다.

날붙이에는 악신의 기운이 가득 깃들어 너울지고 있었다.

날붙이의 정체는 사령검의 파편이었다.

파편의 크기는 작았지만 안에 담긴 기운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옆에서 두 사람을 지켜보던 템플러가 안절부절했다.

레이는 몇 번 더 파편을 흔들었다가 템플러에게 돌려주었다.

템플러는 신성한 기운이 가득한 철제 상자에 파편을 봉인하고서 뒤로 물러났다.

파편에서 너울지던 강렬했던 기운 탓에 몸을 살짝 떤 오시리스 백작은 진심으로 레이에게 찬사를 보냈다.

"이번에도 정말 대단한 공적을 세우셨습니다. 레이 님의 존함은 제국 역사에 새겨져 결코 잊히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요, 뭐... 또 공적을 세우기는 했죠."

오시리스 백작의 찬사가 빈말이 아님을 알기에 레이는 착잡함을 느꼈다.

레이는 굵직한 공적을 너무 많이 세웠다.

안 그래도 아슬아슬한데 이번에 의도치 않게 공적을 또 쌓아버렸다.

나라를 새로 세울 게 아니라면 너무 과한 공적도 독이었다.

상황이 이쯤되니 레이도 황제 쪽 눈치가 꽤 보였다.

몸뚱이가 시한부인 덕분에 권력과는 한발 물러서서 상당히 자유롭게 움직이고 있었지만, 황제도 레이가 아예 안 껄끄러울 수는 없었다.

더군다나... 레이가 고분고분하게 가진 패를 다 까놓고 살랑거리는 스타일도 아니었다.

루나를 비롯해 지미의 경지 또한 숨기고 있지 않았던가.

뭐, 막강한 권세를 지닌 가문이 은밀히 다룰 수 있는 강력한 수하를 한두 명 감춰두는 것은 일반적인 일이었으나, 황제 입장에서 유쾌할 리는 없었다.

"하..."

레이는 괜히 앓는 소리를 냈다.

황제가 수명도 얼마 남지 않은 레이를 굳이 자잘한 사안 때문에 건드려 긁어 부스럼을 만들지는 않을 터다.

거꾸로 보자면, 레이의 수명이 멀쩡했다면 황제 또한 트집을 잡을 건 전부 잡아왔을 것이다.

"..."

레이는 자기 처세에 대해 한 번 더 깊이 고민해볼 필요성을 느꼈다.

1년 뒤이든 10년 뒤이든 자신이 죽고 난 다음까지 고려해서 말이다.

그후 레이는 오시리스 백작과 대화를 마저 나눈 뒤 자리에서 일어섰다.

접견실에서 나온 레이가 복도를 걷자 복도에서 마주친 자들이 다들 무릎을 굽히며 깍듯하게 예를 갖추었다.

그들 중엔 서임 받은 기사도 있었고 고위 마법사도 있었으며 권세가에 몸을 담고 있는 귀족 또한 있었다.

그들 모두가 레이에게 먼저 예를 갖추었고 또한 함부로 고개를 들지 않았다.

레이는 그로부터 얻어지는 알량한 쾌락을 곱씹으며 자기에게 배정된 방을 찾아 들어갔다.

방에 들어가서 창문을 가린 레이가 구석을 바라보고 섰다.

"..."

아직 카렌은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몸의 상처는 많이 회복되었는데, 어째 의식이 돌아오지 않았다.

레이는 다시 한 번 카렌에게 가볼까 고민하다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레이의 시선은 여전히 방의 구석을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레이의 시선이 향하는 곳에, 어느 샌가 검신이 일부 부서진 사령검이 꽂혀 있었다.

"..."

사령검은 주인을 잃었다.

그건 말 그대로의 의미였다.

악신의 사도도 죽어 사라졌고, 사령검을 쥐었던 마지막 주인도 소멸했다.

현재 사령검에 압도적인 제어력을 발할 수 있는 존재는 이 세상에 남지 않았다.

탐욕의 악신이 너무 이른 시점에 축복을 남용했기에 한동안은 사도에 비견되는 존재 또한 다시 출현하지 못할 터다.

사령검은 새로운 주인과의 만남을 기다리듯 완전히 침묵했다.

"..."

레이가 사령검을 사용할 수는 없었다.

악신과 계약이라도 하지 않는 이상 말이다.

물론 레이는, 이제까지 해왔던 일들을 무위로 돌리는 악신과의 계약 따위는 고려하지 않았다.

그러니 그냥 사령검을 템플러에게 인도하고 봉인 절차를 진행하기를 요청했으면 되었다.

하지만...

레이는 사령검을 회수했다는 사실을 숨겼다.

만약의 만약을 위한 '선택지'를... 외면하지 못했기에.

"..."

레이가 무겁게 가라앉은 눈으로 사령검을 바라보다 손을 뻗었다.

사령검의 기능이 대부분 정지하기는 했지만, 당장 사령검을 손에 쥐고 있는 레이는 '수납' 정도는 가능했다.

사령검이 어두운 방의 그림자 속으로 푹 꺼졌다.

바깥의 기척을 느꼈던 레이가 노크 소리가 들리기 전에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지?"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어떤 손님?"

"엘프입니다."

"이 상황에서 엘프라."

레이는 조소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순번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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