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7화
공간을 단절시키던 방벽이 벗겨진다.
방벽 안에 보관되어 있던 반물질이 대기 중에 노출됐다.
대기를 구성하는 성분 절대다수가 반물질과 반응 가능한 입자였다.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베네딕트가 미처 대응할 새도 없이 쌍소멸 현상이 발생했다.
입자와 반입자가 만나 질량이 소실된다.
소실된 질량은 온전히 에너지로 치환됐다.
감마선 형태로 발산된 에너지가 일대를 섬광으로 뒤덮었다.
새하얀 구체가 찰나간 생성되어 대기를 태워내다가 충격파를 발생시켰다.
바다가 일순 움푹 파이며 일대가 진공상태로 변한다.
그 직후 밀려 나갔던 대기가 진공으로 변한 공간으로 밀어닥치며 흡사 버섯처럼 생긴 거대한 구름을 만들어냈다.
버섯구름은 멀리서도 보일 만큼 높이높이 치솟았다.
"..."
빛을 대부분 차폐하는 방벽 뒤에 서서 폭발의 여파를 지켜보던 루나가 입을 달싹였다.
"레이."
"응."
"돌아가요. 혼자서도 괜찮아요."
갑주 형태의 아티펙트를 완전히 전개해 몸을 감싼 레이가 어느새 루나에게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루나는 여전히 시선을 버섯구름에 향한 채 말을 이었다.
"카렌이 다쳤어요. 돌아가서 카렌을 도와줘요."
큰 상처는 지혈해놓고 떠나긴 했지만 오래 방치되면 위험하긴 마찬가지였다.
본래 루나의 계획대로라면 레이가 오기 전에, 또한 카렌이 더 위험해지기 전에 전투를 끝냈어야 했다.
허나 베네딕트가 참 끈질기게 발악한 덕에 계획이 틀어졌다.
루나는 카렌의 이야기를 하면 레이를 설득할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이번에도 예상이 빗나갔다.
"오는 길에 확인했어. 카렌은 지금 치료받고 있어. 네가 구해준 거지? 고마워."
"..."
루나는 잠시 동안 말없이 인상만 썼다.
레이는 루나가 부상 없이 무사한지 훑어보고는 버섯구름을 돌아보았다.
"상대는? 혹시 사령검의 주인이야?"
"...네, 사령검을 쥐고 있었어요."
"베네딕트란 놈이겠네. 루비하 왕국에 있는 줄 알았더니..."
"..."
"저 폭발은... 저번에 말해주었던... 반물질을 사용한 거야?"
"네, 맞아요."
"그럼 아직 죽지는 않았겠네, 저놈."
"..."
쌍소멸 현상으로 인해 발생된 에너지는 마나가 포함되지 않은 순수한 빛에너지에 가까웠다.
반물질의 질량이 0.5g만 되어도 레이의 전생에서 '핵무기'라 불리던 병기와 대등한 위력을 자랑하긴 했지만...
그 핵무기의 위력이라는 게 애초에 그리 강력하다고 단정 짓기가 어려웠다.
준수한 위력의 핵무기를 폭발시켰음에도 200미터가량 떨어진 전차를 증발시키긴커녕 전차 장갑에도 유의미한 피해를 주지 못했다는 실험 자료가 꽤나 많았다.
에너지를 한 방향으로 집약시키는 게 불가능한 병기였기에 싸구려 소형 로켓 병기보다도 핵무기는 관통력이 떨어지고는 했다.
더군다나 이 세상에서 마나를 다루는 존재들은 단순 물리력에 상당히 강한 저항성을 지니고 있었다.
단순 물리력에 한해서는 베네딕트가 구현할 수 있는 방호력이 전함의 장갑을 웃돈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물론 반물질의 쌍소멸 현상이 코앞에서 발생했다면 죽었어야 정상이긴 했다.
허나 과거에 사령검의 육체 수복 능력을 직접 확인했던 레이는 베네딕트의 목숨줄이 아직 붙어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루나 또한 레이의 추측을 부정하지 않았다.
촤악!
레이가 검을 뽑아내며 앞으로 나섰다.
베네딕트는 이곳에서 확실히 죽여야 했다.
그리고 베네딕트를 확실히 죽이려면, 칼로 몸뚱이를 몇 번 썰어주기는 해야했다.
그걸 루나에게 맡기기에는 너무 위험했다.
"잠깐 다녀올게."
"...레이, 나 혼자 할 수 있어요."
"알고 있어. 그래도 위험하잖아. 그리고... 저놈을 혹시라도 놓치면 안 되고 말이야."
더군다나 시간이 너무 오래 끌리면 사람들이 찾아올 터다.
레이는 아직 루나의 전력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으면 싶었다.
레이는 걱정하지 말라며 루나의 어깨를 살짝 두드려 주고는 갑주의 추력을 이용해 앞으로 비행했다.
루나는 레이를 재차 말리려다가, 레이가 고집을 꺾지 않으리란 것을 알고서 눈가를 찌푸렸다.
"...레이."
"정말 괜찮으니까 표정 풀어."
레이는 그리 말하고서 버섯구름 안으로 진입했다.
아직 대기가 이글거리고 있었지만 갑주의 방호력을 뚫을 정도는 아니었다.
당연히 시야는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허나 레이는 그 안에서 쉽사리 베네딕트의 위치를 특정했다.
풍기는 기운이 워낙 거칠고 섬뜩해서 모를 수가 없었다.
레이는 곧장 갑주의 동력을 추력으로 전환해 베네딕트를 향해 가속했다.
베네딕트가 다가오는 레이에게 반응했다.
콰앙!!!
서로의 검격이 충돌했다.
검격이 충돌한 후폭풍으로 인해 주변의 증기가 단숨에 밀려났다.
시야를 확보한 레이가 베네딕트의 몰골을 보고 피식 웃었다.
"꼴이 말이 아니군. 아, 소리가 들리기는 하나?"
베네딕트의 육신은 반쯤 재가 되어 흩날리고 내리고 있었다.
베네딕트는 턱이 타들어 가 통째로 떨어져 나가고, 혀가 불타서 사라진 입으로 쇠를 긁는듯한 괴성을 내질렀다.
만약, 베네딕트의 무장이 완벽한 상태였다면...
단 한 번 정도는 루나의 반물질 공격을 갑주를 소모해서 버텨낼 수 있을 지도 몰랐다.
허나 베네딕트는 그 전에 이미 루나와의 전투에서 너무 많은 것을 소모했다.
사령검을 제외한 대부분의 무장을 상실한 상태였기에 육신을 조금도 지켜내지 못했다.
"카으악...!!"
거의 다 타들어간 사체 꼴을 한 베네딕트가 발악하듯 사령검을 휘둘렀다.
레이는 사령검을 막아내며 속이 뒤틀리는 것을 느꼈다.
소드마스터의 상징인 절대권역.
그 현상이 베네딕트를 중심으로 펼쳐지고 있었다.
에른스트가 펼쳤던 것에 비하면 한참 모자라서 절대권역이라 칭하기에도 부끄러운 수준이었지만.
그럼에도 위협적이었다.
일대의 마나가 베네딕트를 중심으로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인간의 몸으로 하나의 세상을 이루는 초월이 시작된다.
레이의 검을 감싸고 있던 검강이 잠시 흔들렸다.
레이가 장비하고 있던 아티펙트 또한 동력 공급에 이상이 생겨 추력이 떨어졌다.
"하..."
레이는 앓는 소리를 내면서도 피식 웃었다.
루나가 아니었으면 고생을 많이 했을 것이다.
반쪽짜리 소드마스터 정도는 잡아 죽일 수 있었겠지만 목숨을 걸고 전력을 다해야 간신히 가능했을 것이다.
허나 지금 베네딕트의 몸뚱이는 거의 다 타들어가 삐걱거리고 있었다.
루나가 만들어준 기회였다.
베네딕트가 회복하기 전에 단번에 끝내야 했다.
"아니면 루나한테 또 혼나."
레이는 그리 중얼거리며 두 자루의 검을 교차해서 휘둘렀다.
베네딕트는 사라진 시야 속에서 남아 있는 감각을 날카롭게 세워 레이의 검격을 쫓았다.
미약하게나마 초월의 경지에 발을 디딘 덕분에 오감을 벗어난 인지력이 레이가 자아내는 검의 궤적을 읽어냈다.
카드드득!!!
삽시간에 서로를 향한 다섯 번의 검격이 맞물린다.
베네딕트는 잿가루가 휘날리는 육체로도 어떻게든 레이의 공격을 상쇄해냈다.
시간이 지날수록 유리해지는 것은 베네딕트였다.
베네딕트는 어떻게든 육체가 재구성될 수 있는 시간을 버텨내려 했다.
헌데 그 찰나.
레이가 휘두르던 검에서 '검신'이 사라졌다.
베네딕트는 일순 강한 섬뜩함을 느끼고 레이가 그려냈던 궤적을 향해 사령검을 전력으로 휘둘렀다.
허나 사령검에는 아무것도 걸려들지 않았다.
오메가 시리즈.
제플린이 완성시킨 역작에 깃든 숨겨진 기능이 발현됐다.
하르콘 합금으로 이루어진 검신이 일순 아공간에 진입했다.
아공간에 진입하며 차원반발을 버티지 못한 검신이 뒤틀리고, 검신이 손상되며 발생한 에너지가 단숨에 추력으로 전환됐다.
으드득!!
일그러진 공간 너머로 오메가 시리즈의 검신이 다시 모습을 드러낸다.
아공간을 거치며 초가속된 검격이 베네딕트의 상체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촤아아악!!!
기교 따위 담기지 않은 힘과 속도만으로 이루어진 일격.
이미 육신이 바스러져 가던 베네딕트는 그 일격을 견뎌낼 수단이 없었다.
베네딕트의 상체가 갈라져 나갔다.
핏물 대신 잿가루가 레이를 향해 흩날렸다.
"치사하게 굴어 미안하군. 요즘 몸이 안 좋아서, 장비 도움 좀 받았어."
레이는 그리 말하며 곧장 반대쪽 검을 휘둘러 사령검을 쥐고 있던 베네딕트의 손목까지 잘라냈다.
직후 레이는 허공에 떠오른 사령검을 자기 손으로 움켜쥐었다.
트드드득!!!
막대한 반발이 레이의 손아귀에서 터져나왔다.
허나 레이는 코어의 마나를 쏟아부어 사령검을 침묵시켰다.
사령검이 침묵하자 레이는 곧장 갑주의 추력을 끌어올려 뒤로 물러났다.
루나는 레이가 물러나는 즉시 베네딕트를 향해 고화력 마법을 폭우처럼 쏟아부었다.
몸이 양단되고 사령검이란 매개체까지 강탈당한 베네딕트는 더는 공격에 저항할 수 없었다.
---!!
섬광 속에서 베네딕트의 육신이 소멸해간다.
그가 마지막에 어떤 후회와 격정을 울부짖었을지는 누구도 알 수 없었다.
시야를 밝히는 화염 덩어리를 바라보며 레이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도, 루나에게 약속한 대로 무리하지 않고 전투를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
레이는 루나와 함께 해안가로 복귀했다.
반물질의 쌍소멸 현상으로 인해 충격파가 발생해 먼 거리에 있던 해안가도 파도에 휩쓸려 상태가 영 좋지 못했다.
뭐, 그렇다 해도 파도에 휩쓸려 죽은 사람은 없을 터다.
시체가 몇 구 쓸려갔을 수는 있겠지만 말이다.
레이는 가장 먼저 카렌과 레아를 찾았다.
레아는 다가오는 레이를 발견하고선 또 울음을 터뜨리며 와다다 뛰어오다 거하게 미끄러졌다.
레이는 미끄러지는 레아를 얼른 잡아 안아주며 치료사에게 다가갔다.
"카렌은?"
"아, 그, 무사합니다. 아직 일어나지는 못했습니다만..."
어쨌든 목숨에 지장은 없다는 소리였다.
레이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우에에엥, 히끅 히끅.
카렌이 무사히 숨을 쉬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나자 그제야 레아의 울음 소리가 조금 더 선명하게 들렸다.
레이는 레아의 등을 두드려주며 감정이 복잡해졌다.
태생부터 목숨을 부지하기 힘든 불운한 운명을 타고난 아이가 참 측은했고, 한편으로는 갈 곳 없는 짜증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마음을 두드렸다.
레이는 재차 한숨을 내쉬며, 오늘만은 진짜 오빠처럼 레아를 꼭 안아주며 눈물을 대신 닦아주었다.
레아가 레이의 온기를 느끼고 안심해서 더 왱왱거렸다.
루나는 한 발 떨어져서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봤다.
루나는 카렌과 레이의 선택을 외면하지 못했고, 그렇기에 미래에 다가올 위협을 외면하게 되었다.
이 선택이 너무나 많은 대가를 치르게 하지 않기 위해, 루나는 더욱 노력해야 했다.
"...레이."
"아... 그래. 그만 움직이자."
레이가 레아를 안은 채로 영주성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오시리스 백작령에 상주하는 주력이 저곳에 모여있었기에 크게 걱정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빠르게 확인은 해봐야 했다.
곧 칼가가 레이의 일행을 태우고 영주성으로 비행했다.
외면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