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홍등가의 소드마스터-284화 (284/446)

284화

루나는 하늘에 서서 카렌을 지켜봤다.

루나는 카렌이 레아를 버리고 도망쳐주기를 원했다.

아무것도 못 본 척, 아무것도 모른 척하고 그냥 떠나주기를 바랐다.

적의 목적이 레아를 죽이는 것이든 납치하는 것이든 상관없었다.

오늘 카렌은 혼란 속에서 레아를 잃어버렸을 뿐이다.

오늘 레아는 혼란 속에서 헤매다 전투에 휘말려 목숨을 잃었을 뿐이다.

카렌이 도망쳐준다면, 루나가 얼마든지 그리 만들 수 있었다.

그건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허나 카렌은 레아를 포기하지 않았다.

이대로는 목숨을 잃을 것이라 자각했음에도 불구하고 레아를 놓지 못했다.

종국에는 상처 입고 무너져서 처절하게 땅을 기어가면서도 끝끝내 레아를 감쌌다.

대체 어째서, 왜 그렇게까지 하지?

단지 레아를 향한 연민과 죄책감과 책임감 때문에?

아니, 아닐 것이다.

카렌은 좋은 사람이었지만 남의 아이를 위해 자기 목숨을 희생할 만큼의 바보는 아니었다.

헌데 대체 카렌이 왜 저렇게까지 하는지...

루나 또한 알고는 있었다.

카렌이 레아를 포기하지 못하는 것은 결국 레이 때문이었다.

비록 레이가 심심찮게 레아를 놀리고, 괴롭히고, 꾸중하며 레아를 울려대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레이는 항상 레아를 우선했고, 겉으로나마 레아에게 애정을 표해주었다.

그것이 비록 벨라를 기쁘게 하기 위한 연기였을지라도 레이는 자기 역할에 충실했다.

카렌은 그러한 레이의 모습을 가까이서 겪었기에, 레이가 애정하는 레아를 끝끝내 포기하지 못했다.

"..."

레아를 지키지 못했다고 레이에게 미움 받는 게 두려워서였을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었던 것일까.

거기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카렌의 선택은 루나에게 레이의 선택을 또다시 상기시켰다.

레이는 벨라의 아이를 지키겠다고 선택했다.

벨라의 아이를 지키기 위해 막대한 대가를 치러야 된다는 걸 모르지 않았지만, 레이는 레아의 편에 섰다.

루나는 언제나 레이의 선택을 존중했다.

허나 대체 언제까지... 레이가 레아를 위해 자기 살점을 깎아 먹는 모습을 두고 봐야 하는가.

레아로 인해 레이는 너무나 많은 선택지를 포기했고, 또한 너무나 손쉽게 남은 삶을 희생하기를 자처했다.

그 모습을 대체 언제까지 응원해야 하는가.

이제, 이제는 그만하고 싶었다.

그렇기에 루나는 카렌이 부디 레아를 포기해주기를 바랐다.

허나 카렌은 레아를 끝끝내 포기하지 못했다.

죽음을 앞두고도 카렌은 희생을 자처하며 레아를 먼저 보냈다.

루나는 그 모든 상황이 끔찍했다.

마음 한편으론, 숨이 멎은 카렌을 레이에게 끌고 가 그 빌어먹을 아이 한 명을 위해 대체 얼마나 더 큰 희생을 치러야 만족할 것이냐고 따져 묻고 싶었다.

허나 루나는 그러지 못했다.

카렌 또한 루나의 소중한 친우였다.

카각!

결국.

루나가 지면에 발을 디뎠다.

베네딕트가 가볍게 휘두른 검이 루나가 생성한 장막에 가로막혔다.

루나는 지면에 발을 디딘 후 가장 먼저 레아가 달려나간 방향을 향해 손을 뻗었다.

"..."

어쩌면 카렌에게 너무 무거운 역할을 맡긴 것일지도 몰랐다.

그녀가 앞으로 지녀야 할 죄책감을 너무 간과한 것일지도 몰랐다.

카렌에게 너무 과한 부담을 전가한 것이라면, 루나는 카렌 대신 그 부담까지 떠안아줄 수 있었다.

더는 남에게 미루지 말자. 레이의 삶을 갉아먹는 저것을 내 손으로 직접...

"..."

루나는 망설였다.

망설임 끝에 결국 섬광이 아른거리던 손아귀를 움켜쥐지 못하였다.

루나의 표정이 서글프게 일그러졌다.

우리는 결국 버려야 할 것을 제때 버리지 못하였다.

누군가를 사랑했고 누군가를 존중했기에 결단을 내려야 할 때 결단을 내리지 못하였다.

우리는 과연 그 순간과 그 순간의 결정들을 앞으로 다가올 고난 속에서 후회하지 않을 수 있을까.

후회할 것이다. 분명 후회하겠지만.

그럼에도 당신을 사랑하고 존중했기에.

훗날에 후회하리란 걸 알면서도 우리는 그릇된 선택을 한다.

트드득!

베네딕트가 제대로 휘두른 검이 장막을 바스러뜨렸다.

이대로 있다가는 카렌과 함께 몸이 양단될 것이다.

루나는 자기 손아귀에 막대한 마나를 응축시켜 검처럼 길게 뽑아내고는 횡으로 휘둘렀다.

마나의 응집체를 휘두르는 루나의 자세는 어설프기 짝이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경지 높은 검사들은 자존심 때문에 정면 대결을 고집하고는 했다.

베네딕트 또한 다르지 않았다.

무식하게 응집된 힘의 덩어리를 자신이 오랜 세월 갈고닦은 예리함으로 베어낼 수 있으리라 여기고 서로의 궤적을 충돌시켰다.

쩌엉!!!

굉음과 함께 강력한 풍압이 발생해 주변을 휩쓸었다.

베네딕트는 지면을 굴렀다.

루나가 발현한 마나의 응집체를 절단내지 못하고 튕겨져나간 베네딕트는 찢어졌다 아물기 시작하는 자기 손아귀를 바라봤다.

한편, 루나는 의식을 잃은 카렌의 뺨을 한 번 쓰다듬어주고는 일그러져있던 표정을 얼굴에서 지워냈다.

"카렌... 레이 곁에는 그 아이보다 네가 필요해."

그러니까, 앞으로는 네 자신을 더 소중히 여겨.

그렇게 카렌에게 속삭여준 루나가 베네딕트를 돌아봤다.

카렌의 신체 위로 푸른 장막이 덧씌워져 간다.

그와 동시에 루나가 베네딕트를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베네딕트는 검을 내지르려다 움직임을 멈추었다.

무언가... 이상했다.

무언가 겪어보지 못한 것이 찾아오고 있었다.

쿠웅...!

대기가 요동치기 시작한다.

루나는 걸음을 내딛으며 숨겨두었던 서클을 순차적으로 해방시켰다.

현재 오시리스 백작령에 머물고 있는 제국군 주력은 전부 영주성으로 집결하는 중이었다.

근방의 민간인과 병사들은 대부분 베네딕트의 손에 죽었다.

소수나마 살아있긴 할 테지만, 그들도 곧 사라질 터다.

목격자는 남지 않는다.

그렇기에 루나는 베네딕트 앞에서 전력을 드러냈다.

츠즉!

네 개의 서클이 루나의 심장을 중심으로 회전한다.

그와 동시에 하늘과 땅에 흐르고 있던 거대한 규모의 마나가 루나의 서클과 공명해 개변되었다.

일순 하늘이 어두워지고, 천공에서부터 집약된 마나의 덩어리들이 뇌전이 되어 지상에 내리꽂혔다.

콰가가가가가강!!!!!

쏟아져 내리는 뇌전의 폭우가 일대를 통째로 증발시키기 시작했다.

사방에서 섬광과 불꽃이 터져나오며 시야를 시뻘겋게 물들여 갔다.

이건 정형화된 마법 같은 게 아니다.

단지, 숨겨왔던 서클의 영향력을 최대로 끌어낸 탓에 뒤따른 '반동'일 뿐이었다.

숨겨왔던 서클을 드러냈을 뿐이었지만, 그녀는 마치 세상의 중심에 홀로 선 것처럼 무정한 눈으로 베네딕트를 내려보고 있었다.

번쩍이는 시야 속에서.

"너는."

베네딕트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대체 누구냐."

*

쫘악!!!

울트가 허리를 뒤틂과 동시에.

아룬델이 쏘아낸 탄환이 울트의 코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 후폭풍만으로 울트는 지면에 처박히다시피 했다.

울트가 쏘아냈던 화살은 아룬델의 탄환에 맞부딪쳐 흔적도 없이 박살났다.

울트는 곧장 몸을 일으켜 세우며 미간을 찌푸렸다.

게네시스가 신화적인 무기이기는 하나, 울트가 저주까지 뒤집어써 가며 게네시스에서 끌어올 수 있는 힘은 어디까지나 일부였다.

불완전한 게네시스를 쥐었다고 사도를 상대로 힘 싸움이 될 리 없었다.

"사라져라."

아룬델은 검붉은 증오로 이루어진 탄환을 연달아 쏘아냈다.

그 직후 굉음이 모두의 귓가를 미친듯이 때려댔다.

아룬델의 탄환 하나하나에 거대한 절벽을 관통하고 붕괴시킬 수 있는 힘이 담겨 있었다.

준수한 실력을 지닌 성기사가 10년 넘게 축성 작업을 한 갑주가 탄환 한 발에 가루가 되어 흩날릴 지경이었다.

저 정신나간 관통력을 지닌 탄환을 제대로 방어할 방법이 없었다.

허나 울트는 저주를 뒤집어쓴 채 아룬델과 거리를 좁히며 제국군에게 소리쳤다.

"가까이 붙어!!!"

안 그래도 다들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거리가 벌어지면 저 탄환에 일방적으로 얻어맞아야 했다.

날붙이를 든 자들이 이를 악물고 아룬델의 틈을 파고들었다.

본래라면 웬만한 기사들은 목숨을 걸고 달려들어도 강력한 신체 능력을 지닌 아룬델에게 일방적으로 농락당했을 것이다.

허나 게네시스로부터 뻗어나온 저주가 아룬델의 신체를 뒤틀어 기능을 크게 떨어뜨렸다.

으드득!

"...!"

근육이 꼬여대며 움직임을 늦춘다.

아룬델은 이 빌어먹을 현상을 중화시키기 위해 악신의 힘을 끌어올렸으나 저 게네시스의 영향 만큼은 상쇄되지가 않았다.

머뭇거리는 아룬델을 향해 마법사들이 준비된 마법을 전개했다.

쿠웅-!

흘러내린 지면이 아룬델의 다리를 묶고 막대한 압력이 머리 위에서 떨어져 내려 허리를 굽히게 만든다.

제대로 힘을 못 쓰는 아룬델을 향해 기사들이 쏟아져 들어갔다.

그꼴을 보며 아룬델이 재차 분노했다.

"이 빌어먹을 '부산물'들이...!!!"

인간.

어머니가 자아낸 부산물.

하자 투성이의 열등 생물.

그건 아주 오랜 시간 악신의 사도로 존속했음에도 아룬델이 떨치지 못한 태생의 관념이었다.

그러한 엘프로서의 관념이 아룬델에게 남아있었기에 게네시스 또한 아룬델에게 영향을 끼쳤다.

아룬델은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하고, 그저 체내에 담아두었던 악신의 권능을 폭발적으로 토해냈다.

허나 그것만으로 충분히 효과적이었다.

악신의 권능이 주변을 침식하며 마법을 잠시 무력화시켰고, 아룬델은 그 틈에 탄환을 마법사들을 향해 발사했다.

템플러들이 기를 써도 제대로 된 방어에 실패했던 탄환이었다.

퍼억!!!!

저격 당한 마법사들의 머리가 삽시간에 터져나갔다.

그꼴을 보고 기사들이 악에 받친 채로 아룬델에게 들러붙었다.

다 같이 도주할 게 아니면 지금 당장은 이 방법밖에 없었다.

사방에서 휘둘러지는 날붙이를 아룬델이 활을 휘둘러 상쇄시켰다.

카가가가각!!!

게네시스가 아니었다면 아룬델의 발길질 한 방에 엑스퍼트급 기사들이 허리가 짓뭉개져 튕겨져나갔을 것이다.

허나 게네시스의 영향 덕분에 버겁게나마 아룬델과의 근접전이 성립되었다.

물론 대등한 전투가 가능해진 것은 아니었다.

쩌억!

검을 찔러넣으려던 기사가 아룬델이 휘두른 활에 얻어맞고 한참을 굴러 벽에 처박혔다.

죽거나 무력화되는 제국군은 착실하게 늘고 있었다.

허나 아룬델의 예상보다 시간이 말도 안 되게 끌리고 있었다.

당장 어떻게든 도주했다가 원거리에서 저격을 진행하면 이들 모두를 무너뜨릴 수도 있겠지만, 그랬다간 원군이 올 터다.

준 로드 급을 상회한다고 알려진 제국의 수호자가 합류하면 확실히 목이 날아가는 건 아룬델이었다.

'좋지 않아.'

예상 밖의 변수가 너무 치명적으로 작용했다.

이랬다간 아무것도 제대로 못하고 후퇴해야할 지도 몰랐다.

아룬델의 머릿속이 복잡해진 그때.

콰가가가가가강!!!!!

천공에서부터 쏟아져 내린 뇌전이 해안가 쪽 일대를 뒤덮었다.

상당한 거리가 떨어져 있었지만 아룬델조차 몸이 저릿할 만큼 막대한 마나의 폭풍이 저 너머에서 미친듯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제국군과 아룬델 모두가 식겁해서 잠깐 몸을 굳혔다.

찰나 간 침묵이 흐른 후.

오시리스 백작가를 모시는 기사 한 명이 울분에 차서 아룬델에게 소리쳤다.

"네 이노옴!!!!! 대체 우리 영지에서 무슨 수작을 벌이는 거냐!!!"

"...?"

뭐야, 저거 너희들이 벌인 일 아니었어?

순간 그렇게 되물을 뻔한 아룬델이 상황 파악을 위해 눈동자를 굴리다 지미와 눈이 마주쳤다.

지미가 남몰래 손가락을 들어 자기 목을 슥 그었다.

대충 너 좆 됐다는 뜻이었다.

외면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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