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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등가의 소드마스터-283화 (283/446)

283화

"..."

아룬델이 차갑게 표정을 굳혔다.

울트가 다가올수록, 팔뚝에서 시작된 기이한 발작이 이내 전신으로 번져나갔다.

몸은 움직일 수 있지만 그럼에도 전력의 하락을 피할 수 없다.

울트를 제압하고 거리를 벌리는 것 외에는 이 현상을 억제할 수도 없었다.

이건 기원과 관련된 저주다. 기실, 저주라고 정의하기에도 부적절했다.

"..."

어머니. 한때 그렇게 부르던 존재로부터 이어진 족쇄.

아룬델은 원색적인 증오가 담긴 눈동자로 울트를 마주 봤다.

울트는 개의치 않고 아룬델을 향해 뚜벅뚜벅 걸었다.

아룬델로부터 너울지던 검붉은 증오가 이내 날카롭게 빚어져 화살 형태가 되었다.

울트 또한 게네시스에 빛으로 이루어진 화살을 걸었다.

아룬델과 울트가 서로에게 활을 겨누고, 쏘아냈다.

*

바다 위에서 섬광이 번쩍이고 굉음이 울려 퍼졌다.

평범한 소요 사태가 아니라는 건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전쟁이 오시리스 백작령까지 번졌다.

그걸 깨닫자마자 카렌은 곧바로 레아를 챙겨 들었다.

어설프게 망설이면 절대 안 됐다.

최대한 빠르게 안전한 곳으로 달려가야 했다.

믿을 수 있는 강한 사람들이 많이 모여있는 영주성으로 가야 했다.

그곳엔 지미도 있고 기사들도 있고, 운이 좋다면 레이도 있을 것이다.

콱!

카렌은 움직임을 거추장스럽게 만드는 검까지 곧바로 집어던지고 질주하기 시작했다.

한편 해안을 경계하던 병력이 소란을 감지하고 달려왔다.

그들은 얼마 안 가 자줏빛을 검을 들고 서 있는 기사와 해안에서 맞닥트렸다.

불쾌한 기운을 대놓고 풀풀 풍기고 있었기에, 병사들은 기사가 말로만 듣던 악마 숭배자임을 쉽사리 깨달았다.

병사들은 곧장 공격을 감행했다.

허나 그것이 완전한 오판이었다는 걸 곧장 깨달았다.

촤악!

사령검을 든 기사, 베네딕트가 검을 가볍게 휘두르자 주변에 있던 모든 물체가 양단됐다.

평범한 사람들은 베네딕트가 검을 휘두르는 동작조차 보지 못했다.

"무, 물러나!!"

서로의 격차가 너무나 까마득해 대적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은 병사들이 허겁지겁 후퇴하기 시작했다.

허나 베네딕트는 자신에게 먼저 무기를 겨누었던 병력들을 놓아주지 않았다.

사람들의 비명이 울린다.

공포와 고통에 잠식된 비명 소리가 연거푸 카렌의 귓가를 때렸다.

카렌은 짠내나는 바닷바람에 뒤섞인 피비린내를 느끼며 계속해서 뛰었다.

"허억, 허억...!"

심장이 터질 듯이 박동한다.

카렌은 뒤를 돌아보고 싶은 욕구를 가까스로 억눌렀다.

꾸물거리며 고개를 치켜들려 하는 레아의 머리도 억지로 짓눌렀다.

뒤를 돌아보고 마음을 졸일 시간에 조금이라도 더 열심히 달려야 했다.

"허억, 흐읍...!"

가슴 속을 잠식한 불안이 자꾸만 호흡을 흐트러뜨린다.

카렌은 거칠어진 호흡을 다잡기 위해 품에 안고 있는 레아의 온기에 집중했다.

영주성을 향해 최선을 다해 질주한다. 나머지는 운에 맡길 수밖에 없었다.

너무나 이기적이었지만, 다른 이들이 먼저 적의 표적이 되어 시간을 벌어주기를 바라야 했다.

하지만.

이상했다.

아무리 열심히 달려봐도 비명과 피비린내가 멀어지지 않았다.

아무리 열심히 달려봐도, 여전히 머리 뒤에서 비명 소리와 피비린내가 자욱하게 번져 나오고 있었다.

도리어 더 가까워진 것 같았다.

"흐읍...!"

카렌은 질식할 것만 같은 공포 탓에 헛구역질을 하며 결국 제자리서 멈추어 섰다.

그리고 빳빳하게 굳은 목을 억지로 움직여 뒤를 돌아보았다.

"...!"

카렌은 순간 소스라치게 놀라 뒷걸음질을 쳤다.

카렌과 멀지 않은 거리에, 자줏빛 검을 든 악마 숭배자가 서 있었다.

악마 숭배자는 처음 해안가에서 스치듯이 보았을 때보다 가까워지지도 멀어지지도 않은 채 그곳에 서 있었다.

그 악마 숭배자는 정확히 카렌과 레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스윽

자줏빛 검을 든 악마 숭배자가 뒷걸음질 치는 카렌을 향해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카렌은 그게 공격의 전조인 줄 알고 반사적으로 몸을 굴릴 준비를 했다.

허나 공격이 아니었다.

악마 숭배자는 카렌을 향해 손가락을 들어 몇 번 까닥이고 말았다.

악마 숭배자가 대체 무엇을 원해서 손가락을 까닥였는지...

카렌은 직감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악마 숭배자는 카렌에게 관심이 없었다. 저자는 단지 레아를 원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건 그냥 카렌의 바람일지도 몰랐다.

카렌은 이런 곳에서 도망치다가 검에 베여 죽고 싶지 않았다.

레아를 포기하고 살아남을 수 있다면 카렌은 그렇게라도 살아남고 싶었다.

카렌은 정말로 여기서 이렇게 죽고 싶지 않았다.

"..."

레아를 붙들고 있던 카렌의 손아귀가 헐거워졌다.

레아는 카렌의 손아귀가 헐거워지자 별생각 없이 카렌을 더 꽉 붙잡았다.

조금만, 조금만 힘을 준다면 카렌은 손쉽게 레아를 떨어뜨려 놓을 수 있었다.

이대로 레아를 버리고 도망가자.

영주성으로 돌아가서 레이를 만나자.

그 뒤에는...

오늘의 일을 용서받을 수 있을까?

"흐읍, 흡..."

결국 카렌은, 레아를 자기 품에서 놓지 못하고 울었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이 카렌에게 남은 마지막 기회이자 희망일지 몰랐다.

당장이라도 레아를 던져두고 도망가는 게 옳은 선택일지 몰랐다.

하지만 카렌은, 서글프게 울먹이며 다시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흑... 흐윽...!"

힘을 주어서 레아를 꼭 끌어안은 카렌이 몸을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레아는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고 카렌에게만 의지한 채 눈을 감았다.

헌데.

달려나가던 카렌의 몸이 얼마 못 가 크게 휘청였다.

휘청거리며 잠시 느려졌던 카렌은 간신히 균형을 잡고 다시 다리를 움직였다.

카렌의 품에 안겨있던 레아는 카렌이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카렌이 울고 있으니 레아 또한 덩달아 슬프고 불안해졌다.

레아는 카렌에게 울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언니 힘내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레아가 목소리를 내기 위해 몸을 꾸물거렸다.

헌데 카렌이 또다시 크게 휘청였다.

카렌은 이번에는 균형을 잡지 못하고 레아를 품에 안은 채 땅을 뒹굴었다.

옆으로 주욱 미끄러진 카렌의 몸이 돌에 걸려 덜컥 멈추었다.

레아는 땅이 축축해져 오는 걸 느꼈다.

사방에 자욱하던 쇠 냄새가 카렌에게서도 풍겼다.

화들짝 놀란 레아가 카렌의 얼굴을 더듬거리는데 카렌이 레아를 품에 끌어안고는 땅을 기었다.

지익지익, 다리를 끌어가며 바로 옆에 있는 부서진 골목까지 기어간 카렌이 힘겹게 호흡을 내뱉었다.

더는 몸에 제대로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아윽... 으윽..."

카렌은 어떻게든 몸을 더 움직여보려다, 더는 안 된다는 걸 깨달았다.

제자리서 꿈틀거리다 간신히 허리만 일으킨 카렌이 품에 안고 있던 레아의 얼굴을 매만졌다.

피투성이가 된 카렌의 손가락 탓에 레아의 뺨도 붉게 물들었다.

카렌은 레아를 보며 끓어오르는 감정을 주체못하고 이를 악문 채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흡, 흐읍..."

마음이, 아팠다.

이것밖에 할 수 없고, 이런 길을 선택해야 했음이 참 아프게 다가왔다.

이런 바보 같은 결말이 자신에게 있어 최선이었다는 게 카렌은 끔찍했다.

"흐으, 흐어엉..."

과거가 그립다.

어렸을 때 카렌은... 자기가 엄청 잘난 줄 알았다.

나중에 어른이 되면 당연히 레이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될 수 있을 줄 알았다. 레이에게 소중하고 특별하고 유일한 사람이 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래서 카렌은 레이를 향한 독점욕을 숨기지 않았다.

레이에게 침을 발라대며 유치한 영역 표시를 해놓고 우쭐하고는 했다.

허나 시간이 지날수록.

카렌은 자기가 생각보다 별 볼 일 없는 사람이라는 걸 깨달아 갔다.

내가 레이 곁에 서기에는 너무나 열약한 존재임을 자각할 때마다 카렌은 소극적으로 변해갔다.

그래도 언젠가는.

레이 곁에 설 수 있기를 희망했다.

기적처럼 그런 날이 찾아온다면 그때서야 억눌러왔던 마음을 표현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허나 그건 이루어질 수 없는 망상이었다.

"아흐, 흐읍, 흑..."

레이에게 있어 카렌이란 존재는 옛 추억을 버리지 못해 곁에 두는 미련의 덩어리일 뿐이었다.

공유하고 있는 어린 시절의 추억을 제외하면 카렌이란 존재는 얼마든지 대체될 수 있을 것이다.

카렌은 그런 현실을 직시하기가 참 싫었다.

카렌은 참 오랫동안 내가 레이에게 유일하고 특별하고 소중한 존재일 거라며 자신을 속이려 했다. 허나 이제 그것도 한계였다.

"레아..."

찬찬히 뜯어보면...

레아의 얼굴은 은근히 레이와 닮아있는 부분이 많았다.

그건 레이와의 끊기지 않을 유대를 증명하는 상징이었다.

레이의 진짜 가족.

레이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혈육의 아이.

나와는 다른, 레이에게 진정으로 특별한 존재.

"...레아, 일어서."

사람의 본성은 변하지 않는다.

카렌은 어릴 때부터 독점욕과 소유욕이 강했다.

그래서 카렌은 레이에게 유일하고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게 정녕 불가능한 일이라면, 하다못해 레이에게 유일하고 특별하게 기억되기를 바랐다.

그렇게라도 카렌은 레이에게 자기 존재를 새겨넣고 싶었다.

"빨리 일어서서... 달려."

레이.

당신이 가장 아끼고 사랑할 아이를 위해 내가 죽는다면.

당신은 먼 훗날이 되어서도 날 떠올리며 그리워해 줄까.

분명 레이라면 그리 해줄 것이라고.

카렌은 그렇게 믿기로 했다.

"가. 빨리 가. 오빠에게 가면 돼. 알겠지?"

"어, 언니..."

"어서 뛰어. 어서!"

주춤거리던 레아가 카렌의 호통에 등을 돌렸다.

그리고 엉엉 울며 뛰어나가기 시작했다.

레아의 뒷모습을 보며, 카렌은 핏물을 뒤집어쓴 채 끅끅거리며 오열하다가 허리춤을 매만졌다.

검은 처음 도망칠 때 버렸다.

카렌은 손에 잡히는 대로 주먹만한 돌을 움켜쥐었다.

인기척이 느껴진다.

카렌은 눈물 탓에 흐릿해진 시야 너머로 인기척을 향해 돌을 던졌다.

얼마 나아가지 못한 돌멩이는 베네딕트의 발 앞에서 멈추어 섰다.

베네딕트는 덤덤하게 검을 들어올렸다.

카렌은 추위 속에서 두 눈을 감았다.

베네딕트가 검을 내리긋고, 그 궤적을 짙푸른 장막이 가로막았다.

카각!!

은색 눈동자를 지닌 소녀가 베네딕트의 앞을 막아섰다.

베네딕트는 이미 방해를 받을 줄 알았다는 듯, 한발 물러서며 자세를 바꾸고는 검을 전력으로 내리그었다.

베네딕트.

왕국제일검이라 불릴 만한 빛나는 재능을 타고난 검사.

그의 검격엔 오랜 시간 계승되고 발전해 온 투쟁의 역사가 오롯이 담겨 있었다.

먼 옛날, 지성체들은 차마 대적할 수 없는 존재로부터 삶을 이어가기 위해 날붙이를 들었다.

더욱 강대하고 단단하고 거대한 존재를 극복하기 위해 날붙이를 갈았다.

그렇기에 검의 역사는 약자가 강자를 죽이기 위한 투쟁의 역사이자 극복의 역사였다.

그 역사를 이어받은 베네딕트의 검격은 해일조차 찢어낼 수 있는 예리함을 지니고 있었다.

허나 루나는 조금의 동요도 내비치지 않았다.

오랜 역사를 거쳐 완성된 기교 또한.

결국 압도적인 힘 앞에서 짓뭉개졌다.

외면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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