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2화
제국은 루비하 왕국의 2왕자와 호룸 백작의 구출 작전을 시작했다.
적들이 2왕자와 호룸 백작을 쫓아 꾸역꾸역 시그니 산맥을 넘어올 가능성을 대비해 방어선도 새롭게 하나 구축했다.
시그니 산맥 인근에 구축된 방어선은 얇고 길었지만, 적의 위치만 파악되면 제국군 본대와 함께 움직여 적을 포위하고 괴멸시킬 수 있었다.
방어선에 잠시 들른 레이는 방어선에서 대기하던 지휘관급 귀족과 잠시 대화를 나누었다.
대화에 이렇다 할 알맹이는 없었다.
애초에 레이는 현 상황을 두 눈으로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 잠깐 들른 것일 뿐이었다.
헌데 얼마 가지 못해 방어선 지휘부에서 큰 소리가 났다.
"오시리스 백작령이 악마 숭배자로 보이는 세력에게 습격당했다는 연락이 들어왔습니다!"
"적의 규모는?"
"부정확합니다. 병력을 지원해달라는 요청입니다."
"적의 규모를 알아야 우리도 움직이지!!"
지휘부에서 새어나오는 고함 소리를 듣던 레이가 표정을 굳혔다.
이번 기습이 미리 계획된 것이었다고 하면 적들이 노릴 만한 표적은 그리 많지 않았다.
"이봐, 지휘관."
"아, 예, 말씀하십시오."
"나는 먼저 움직이겠다. 너는 방어선에 배치된 병력 절반을 차출해서 오시리스 백작령으로 합류해."
"그건..."
"책임은 내가 진다. 말대꾸하지 말고 시키는 대로 해."
"...알겠습니다."
*
습격 사태가 발생했다.
습격이 알려지자 현재 오시리스 백작령에 남아 있는 고급 전력 대다수가 영주성으로 집결하기 시작했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습격이었고, 또한 습격자의 정확한 목적이 파악되지 않았다.
함부로 전력을 분산해서 혼란을 자처하는 것보다는 지휘 체계를 재정비한 후 적의 전력과 목적을 파악하는 게 우선이었다.
지미 또한 폭음을 듣고 곧바로 영주성으로 향했다.
헌데 영주성에 다다랐을 때 벨라가 지미의 팔을 잡아왔다.
"지미, 잠깐만요...!"
"벨라, 일단 레아 챙겨서 영주성 안에 가만히 있어."
"레아가 바다에 갔어요...!!"
"...뭐라고?"
"바다를 구경하겠다고 카렌과 함께 갔어요! 제가 말렸어야 했는데...!"
지미는 머리가 복잡해졌다.
현재 해안가는 최전선이나 마찬가지였다.
카렌이 검을 다룰 줄은 안다지만, 지금은 완전무장한 기사가 붙어있다고 해도 무사하리라 장담하기 힘들었다.
"이런..."
운이 좋아 두 사람이 무사했다고 치자.
허나 지미가 당장 해안가로 달려간다 해도 그 드넓은 해안가 인근에서 두 사람을 바로 찾아내기는 힘들었다.
엇갈릴 확률이 훨씬 높았다.
상황이 굉장히 심각하다는 걸 알아챈 지미가 바로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표정을 굳혔다.
헌데 그때, 인근에서 굉음이 터졌다.
콰앙!!!
*
츠즉!
아룬델이 몸을 은신한 채 오시리스 백작령의 땅을 밟았다.
아룬델은 이전에 황도 습격 사건 때 퇴각했던 병력을 일부 동원해 오시리스 백작령에 풀어놓았다.
그들은 손에 닿는 곳을 무작위로 습격하며 오시리스 백작령에 혼란을 가중시키는 중이었다.
"아직... 시간은 여유롭네."
아룬델은 레이가 방어선으로 향했다는 정보를 듣고 습격을 시작했다.
오시리스 백작령과 방어선까지의 거리가 그리 멀지는 않았으나, 그래도 몇 분만에 왕복할 수 있는 거리는 아니었다.
아룬델은 레이가 돌아오기 전에 벨라를 확보해야 했다.
다만 아룬델은 벨라의 확보보다도 더 우선해야 할 일이 있었다.
레이가 자리를 비웠을 때, 오시리스 백작령의 주력을 제거해야 했다.
오시리스 백작령에 남아있는 전력만으로는 아룬델을 어찌할 수 없겠지만, 레이가 합류한다면 그들은 충분히 아룬델을 귀찮게 만들 수 있었다.
그러니 아직 레이가 합류하지 않았을 때 오시리스 백작령의 주력을 괴멸시켜야 했다.
어차피 '레아'는 이미 확보된 것이나 마찬가지이니, '벨라'까지 확보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레이를 지원할 병력을 미리 뭉개는 게 먼저였다.
그렇기에 아룬델은 도심 한복판에서 은신을 해제했다.
"날뛰어 볼까."
아룬델은 참 당당히도 영주성을 향해 일직선으로 걸었다.
중갑을 착용한 채 뛰어다니던 기사 한 명이 아룬델을 돌아봤다.
갑자기 강렬한 기운을 풍기는 엘프가 나타났으니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넌 누구냐."
"음, 나쁜놈이야."
콰앙!!!!
기사가 미처 대응하기도 전에 막대한 에너지의 파동이 기사를 덮쳤다.
저 멀리 날아가 영주성에 처박히는 기사를 보며 아룬델이 미소를 머금었다.
근 수백 년 동안 '연결'이 약화된 탓에 아룬델 또한 평범한 마족처럼 마경의 심부 안에서만 전성기의 전력을 낼 수 있었다.
허나... 이제 다시 그분의 존재감이 가까운 곳에서 느껴진다.
이제는, 마경 밖에서도 아룬델은 전성기에 근접할 수 있었다.
"자, 아이들아."
아룬델이 발을 내딛으며 손가락을 튕겼다.
"너희가 두려워했던 악신의 사도가 돌아왔다."
콰가가강!!!
제대로 된 형태도 갖추진 못한 에너지의 파동이 주변의 건물을 부수어냈다.
가루가 된 자재가 혼잡하게 흩날리던 찰나.
붉은 광선이 아룬델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촤악!!!
아룬델은 광선이 그려내는 궤적에서 가뿐하게 벗어났다.
허공을 밝고 선 아룬델을 향해 사방에서 아티펙트의 공격이 빗발쳤다.
동시에 세리아가 나타나 검을 내리그었다.
쩌엉!!!
아룬델이 붉은 막을 생성해 세리아의 일격을 막아냈다.
허나 안심할 수는 없었다.
아룬델을 향해 적의를 드러내는 자는 세리아 한 명만이 아니었다.
오시리스 백작가 영주성에 모여있던 고위 전력들이 쏟아져 나와 아룬델을 합공하기 시작했다.
쾅!! 카가가각!!
아룬델을 향해 쏟아지는 공세는 꽤나 매서웠다.
검강이 선명하게 발현된 모하메드의 검을 막아내며 아룬델이 한발 물러섰다.
"아... 예상 이상이야."
이들이 레이와 함께 싸웠다면 꽤나 애먹게 했을 것이다.
아룬델은 그 점을 인정하며 귀찮은 기색을 내비쳤다.
곧 레이를 사냥해야 하는데 여기서 너무 힘을 빼는 것도 손해보는 일이었다.
"쉽게 가는 게 좋겠어."
짝짝, 아룬델이 박수를 쳤다.
직후 아룬델에게 무기를 겨눈 채 지면을 밝고 있던 자들의 육신이 땅으로 푹 꺼졌다.
첨벙!
악신의 권능이 지면을 밀어내고 차올라 근방에 있던 모두의 육신을 집어삼켰다.
권능에 삼켜진 이들의 시야가 일그러진다.
아룬델이 모시는 악신은 세간에 증오의 악마, 혹은 투쟁의 악마라 칭해지고는 했다.
역사에 기록되지도 못한 오랜 시간 동안 이어져 온 지성체들의 투쟁.
그 투쟁의 기원이 되었던 감정들.
혐오, 분노, 원망, 질시, 그리고... 증오.
증오의 악마가 만들어낸 권능의 물결이 인간의 육신을 집어삼키고, 그들의 감정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
세리아는 시야를 뒤덮은 환영 너머에서 에반의 뒷모습을 보았다.
세리아의 기억 속에서, 에반은 항상 세리아가 안심할 수 있도록 따뜻하게 웃고 있었다.
허나 환영 속에서 에반은 괴성을 내지르고 있었다.
괴성을 내지르며 누군가의 머리를 도끼로 쪼개고 쪼개 곤죽으로 만들고 있었다.
그리고 끊임없이 증오가 서린 말을 되뇌며 누군가를 원망하고 저주하고 있었다.
"..."
모하메드는 환영 속에서 화려한 갑주를 입고 있었다.
언젠가 보았던 로얄가드 만큼이나 화려한 갑주를 입고 귀족들의 인사를 받고 있었다.
허나 화려한 갑주는 점점 더 말라 비틀어져 바스러지기 시작했다.
갑주도, 보검도, 도심 아래 있는 거대한 저택도 바스러졌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모하메드는 어느 샌가 허름한 민가 밖에 없는 깡촌 위에 발을 디디고 있었다.
그곳에서 모하메드는, 더욱 화려하고 명예롭던 미래를 꿈꾸던 어린 날의 모하메드와 만났다.
"..."
아룬델이 악신의 권능을 받아 펼친 결계는 지성체의 이성을 잠식하고 감정을 폭주시켰다.
결계 속에 인간을 빠뜨린다 해도 유의미한 육체적 피해를 줄 수는 없었지만, 정신을 망가뜨리는 것만으로도 효과는 충분했다.
증오의 감정에 매몰된 자들이 어찌 서로 합을 맞추고 전투를 이어갈 수 있겠는가.
환영이 끝나고 다시 현실로 돌아왔을 때.
그들은 손쉬운 사냥감으로 변모해 저들끼리 칼을 들이대고 괴성을 질러댈 터였다.
헌데...
저벅
누군가가 검은 물결을 갈라내고 다시 지면을 밟았다.
아룬델이 길쭉한 귀를 위아래로 까닥거리며 환영을 찢어낸 자를 돌아봤다.
환영을 도중에 찢어냈다고 해도 가슴 속을 헤집어대는 감정의 격류 탓에 제정신을 유지하기는 힘들 터다. 분명 그러할 텐데...
"너는 왜... 멀쩡하지?"
참 없어 보였지만, 아룬델은 그리 물을 수밖에 없었다.
환영을 찢어내고 지면에 발을 디딘 남자의 표정은 여전히 너무나도 평온해 보였다.
그건 연기 따위가 아니었다. 연기 따위로는 악신의 환영으로 인해 얻은 동요를 감출 수 있을 리 없었다.
남자의 표정은, 마치 맑은 거울과 고요한 물을 보는 듯했다.
환영을 찢고 나온 지미가, 검을 다시 쥐며 답했다.
"악신의 사도니 뭐니 해도... 네가 보여준 환영의 불쾌감은 레이의 깐족거림보다 수준 이하더군."
뭔 개소리야.
아룬델은 굉장히 따져 묻고 싶었다.
허나 그보다 앞서 지미가 지면을 꾹 밟았다.
정결하게 정제된 마나가 지면을 타고 흐르며 악신의 권능으로 이루어진 환영의 늪을 옆으로 밀어냈다.
"크흡...!!"
"커억...!!"
환영에서 벗어난 자들이 다들 다급하게 감정을 추슬렀다.
지미가 발산하는 정결한 마나의 파동이 감정을 추스르는데 도움을 주었다.
츠윽-
지미가 검강을 발현해 아룬델을 겨누었다.
정신을 차린 모두가 지미를 따라 다시 아룬델에게 적의를 드러냈다.
아룬델은 파닥이던 귀를 뚝 멈추었다.
좀 편하게 가자고 권능을 사용했는데 어째 바뀐 게 없었다.
마음이 상한 아룬델이 인상을 찌푸렸다.
"짜증나게."
쩌억!!!!
"?!"
지미가 아룬델이 대충 휘두른 주먹을 맞고 뒤로 튕겨져나갔다.
그 광경을 보고 세리아가 하늘에 떠 있는 아티펙트로 아룬델을 조준했다.
아룬델은 지면으로 손을 뻗었다.
검붉은 구멍이 생성되며 심연의 촉수가 그 안에서 모습을 드러내 나무 줄기처럼 서로 얽혔다.
아룬델은 검붉은 촉수의 다발을 활처럼 쥐고 당겼다.
직후.
파가가가각!!!!!
광선을 쏘아내려던 세리아의 아티펙트들이 허공에서 모조리 가루로 변했다.
검기에 한두 번 요격당해도 기능을 유지 가능하도록 제작된 아티펙트였으나 아룬델이 쏘아낸 검붉은 탄환에 형체도 유지하지 못했다.
다음 순간 아룬델은 앞을 막아서는 성기사를 신경질적으로 걷어찼다.
콰득!!!!
축복이 서려 막강한 방어력을 자랑하는 성기사의 갑주가 굉음과 함께 찌그러졌다.
각혈하며 하늘로 떠올랐던 성기사가 저 멀리 추락했다.
아룬델.
오랜 시간 존재해왔던 증오의 사도.
비록 그의 능력이 암습에 특화되어 있기는 했지만...
정면에 나선다고 해도 아룬델의 전력은 세간에서 '준 로드급'이라 평가받는 이들을 상회했다.
극소수밖에 되지 않는 사도라는 존재가 어찌하여 인류의 역사에 공포로 아로새겨졌는가.
그건 단지 사도라는 존재가 마경의 안과 밖을 가리지 않고 끔찍하게 막강했기 때문이었다.
어지간한 전력으로는 애초에 막아낼 수 없는 존재였다.
아룬델이 걸어가는 방향으로 길이 뻥뻥 뚫렸다.
최소 준 로드급이라 평가받는 이가 중심이 되지 않는다면 아룬델을 막아세울 수 없었다.
예기치 못했던 막대한 격차에 사람들의 표정에 좌절과 공포가 내려앉았다.
아룬델은 거슬리는 것들을 계속해서 찢어죽이려 했다.
하지만.
트득!
"...?"
아룬델이 의아한 표정으로 자기 팔을 내려다보았다.
팔뚝의 핏줄이 갑작스레 울긋불긋하게 올라오고 있었다.
울트가 다가오며 입을 열었다.
"이게 네게도 영향을 끼치나 보군."
울트가 게네시스에서 피어오른 저주를 뒤집어썼다.
외면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