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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등가의 소드마스터-281화 (281/446)

281화

오시리스 백작령에서 머무르던 제국군 절반이 시그니 산맥으로 이동했다.

황실 직속 기사단의 단원인 도리안을 비롯해 제국군을 이끌던 지휘관급 인물 다수 또한 이번 구출 작전에 동원됐다.

구출 작전이 성공한 후 혹시 적들이 시그니 산맥까지 넘어 쫓아올 것을 대비해 방어선도 새롭게 구축 중이었다.

뭐, 이런 병력 차출을 감안해도 오시리스 백작령에 상주 중인 전력은 상당한 편이었다.

레이가 따로 소식을 전했으니 루나 또한 곧 오시리스 백작령을 찾아올 게 틀림없었다.

이곳에는 세리아가 있었다.

지미, 모하메드, 그리고 울트도 있었다.

거기에 루나까지 합류한다면 레이가 나서지 않는다 해도 준 로드 급은 무난하게 가루로 만들어버릴 수 있었다.

레이도 그걸 알았기에 이동하는 병력들을 보고도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근데..."

상황이 바쁜 와중 잠깐 휴식을 취하게 된 레이는 클레멘스가 그린 그림을 감상하다 농담을 섞어 툴툴 댔다.

"미네르 걔 좀 어떻게 해보라니까?"

"하하... 노력은... 하고 있습니다만..."

"아니, 그 녀석 때문에 필립스 백작님이 밤마다 엘프에게 목줄을 채운 뒤 네 발로 걷게 해서 끌고 다닌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고 있잖아."

반 농담 반 진담으로 하는 소리였다.

필립스 백작이 엘프를 매도하며 개처럼 다루는 음습한 취향이 있다는 헛소문이 진짜로 간간이 들려오긴 했다.

오시리스 영주성의 사용인들이 네 발로 걷는 엘프를 보고 속닥거린 게 와전된 듯싶었다.

클레멘스도 할 말이 마땅치 않았던지라 어색하게 계속해서 웃었다.

그 뒤로 클레멘스는 고민이 서린 얼굴로 대화를 이어가더니 결심을 굳혔는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뭔데?"

"미네르의 귀를 회복시켜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좀 힘든 부탁이긴 한데..."

그렇다고 아예 안 될 것도 아니긴 했다.

레이의 정체는 이미 사방팔방 다 까발려진 것이나 마찬가지였고, 미네르를 보낸 마티아스 후작가와도 표면적으로는 관계를 회복했다.

지미라든가 루나와 관련된 문제 탓에 껄끄러운 부분은 남아있었으나 병적으로 미네르를 속박할 필요는 많이 줄어든 상태이긴 했다.

"가능은 해. 가능은 하지만..."

레이가 손가락을 까닥이다 그림에서 눈을 돌려 클레멘스를 마주봤다.

"예쁘게 지저귀는 날개 꺾인 새를... 굳이 치료해줄 필요가 있나? 날아가도 괜찮겠어?"

짓궂은 질문에 잠시 표정이 어두워졌던 클레멘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괜찮습니다."

"괜찮기는 무슨. 분명 후회할 텐데."

"..."

"연민 때문에 그래? 정이 많이 들었어? 아니면 그녀의 마음을 시험이라도 해보고 싶은 거야? 그녀가 보여주는 호의가 새장 속을 벗어나서도 이어질지 궁금해?"

"..."

클레멘스는 레이의 물음에 답하지 않고 조용히 자리를 지켰다.

레이는 클레멘스의 표정을 바라보다 한숨을 푹 쉬었다.

"내가 할 말은 아니네. 내가 남에게 뭐라 할 처지가 아니야."

갈피를 잡지 못해 어설픈 태도를 유지하며, 상대가 내게 계속 충실해주길 멋대로 기대하고 강요한다.

참 오래 전부터 레이는 그러한 실수를 반복하고 있었다.

가져왔던 술병을 매만진 레이가 클레멘스에게 사과했다.

"미안해. 내가 까칠하게 굴었네. 내가 실수했어."

"아뇨, 아닙니다. 그..."

"사람 마음이, 어려워. 참 어렵지."

고개를 저은 레이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미네르 건은 고민해볼게. 근데 당장은 힘들고, 이번 일 끝나고 영지로 돌아가면 그때 백작님과 상의해볼게."

"예, 감사합니다. 바쁘신데 신경쓰시게 만들어 죄송합니다."

"아니야. 내가 미안해. 그럼 난 이만 가볼게. 방어선 쪽을 한 번 들러봐야 해서. 이건 선물이니까 심심할 때 한 잔 마셔."

레이가 술병을 밀어준 뒤 클레멘스에게 손을 흔들었다.

클레멘스는 레이를 배웅한 뒤 방으로 돌아와 자기가 그린 그림을 바라보았다.

꽤 오랜 시간 동안... 클레멘스는 그림 속에서 아름답게 웃고 있는 엘프에게서 눈을 돌리지 못했다.

*

레이는 수백 년만에 출현한 제국 수호 훈장 수여자였다.

그동안 베일에 감싸여 있다가 정체가 드러났으니 관심은 폭발적이었다.

물론 그러한 관심을 함부로 드러내는 자들은 적었으나, 다들 뒤에선 레이에 관해 알아보기 위해 난리였다.

그러다보니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고용된 사람들이 오시리스 백작령에 한가득 모이게 되었다.

동종업계 사람들이 워낙 많은 탓에 거리를 지나가다보면 비슷한 일을 하는 사람들끼리 눈싸움을 잠깐 하고 빗겨가는 모습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정보를 수집하는 사람들은 대놓고 레이와 가까운 이들을 미행하거나 그러지는 않았다.

그랬다간 목이 달아나기 십상이었다.

허나 비슷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 워낙 많다보니 서로 정보를 몇 번 교환하기만 하면 레이와 가까운 지인들의 동선쯤은 손쉽게 파악 가능했다.

그리 정보를 수집하는 이들 중엔 제국을 적대하는 세력의 첩자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은 자신이 누구에게 고용되었는 지도 모르고 정보를 수집해 보내는 경우가 많았다.

레이에 관해 모두가 관심이 많았던 터라 도리어 레이에 관한 정보를 요구하는 이들을 향한 경계심이 낮아지고 있었다.

그 덕분에 아룬델은 레이의 지인과 지인들의 동선을 상당히 빠르고 정확하게 전달받을 수 있었다.

"음... 우리가 우선해야 할 목표는 레아라는 아이와 벨라라는 여자야."

레이와 가장 가까운 인물들이라고 판단되기도 했고, 가진 무력이 없어 제압하고 통제하기도 편했다.

"으음... 근데 상황이 참... 쿠뮤쿠뮤해?"

쿠뮤는 엘프들이 주로 사용하는 욕설이었고, 쿠뮤쿠뮤는 기분이 매우 언짢을 때 엘프들이 사용하는 쌍욕이었다.

아룬델에게 있어 지금 상황은 참으로 쿠뮤쿠뮤했다.

이번 작전의 최대 변수는 다름 아닌 레이가 가족을 향해 품고 있는 애정의 정도였다.

레이가 가족을 크게 아끼지 않는다면 이번 도박은 무조건 실패였다.

이번 도박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레이가 가족을 정말로 많이 소중하게 여겨야 했다.

만약 레이가 가족을 자기 목숨보다 소중하게 여긴다면, 납치가 성공하는 순간 레이의 가족들은 가장 단단한 방패가 되어 아룬델을 지켜줄 터였다.

물론 아룬델은 레이가 거기까지 가족을 우선하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단순한 미끼 역할만 해줄 수 있다 해도 감지덕지였다.

"빠르게 표적을 확보해서 엘-람의 사도를 해안으로 끌어들일 수 있도록 하자고."

뿔고래는 악신의 축복을 오랜 시간 먹여키운 마물이었다.

미리부터 준비한 만큼 레이를 끌어들일 수만 있다면 레이를 압도할 수 있는 가장 완벽한 필드를 바다 위에 세워줄 것이다.

그리 인내의 시간이 지나.

"자... 기회가 왔네."

오시리스 백작령의 근해에 잠수해 있는 뿔고래 안에서 거의 실시간으로 정보를 받아보던 아룬델이 미소를 머금었다.

인질을 확보하기 아주 적절한 기회가 드디어 포착됐다.

시간이 무한하지 않으니, 이제 결단을 내려야 했다.

"해보자고."

촤아악-

잠수해 있던 뿔고래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편, 해안을 시야 한 켠에 둔 채 책을 읽고 있던 마법사가 이상을 감지했다.

현재 오시리스 백작령 해안에는 얇게나마 결계가 전개되어 있었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만 만약을 위해 한시적으로 전개되어 있던 감지 결계였다.

그 결계에 거대한 에너지 덩어리가 잡혔다.

마법사가 이상을 감지하고 다급히 육안으로 해안을 확인했으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잠깐의 고민 끝에 마법사는 해수면 아래에서 무언가가 다가오고 있음을 깨달았다.

"환장하겠군."

오시리스 백작령 전체에 전투를 대비하라는 경고가 빠르게 전달되기 시작했다.

허나 그 경고가 모두에게 전달되기도 전에 뿔이 달린 거대한 고래가 해수면에서 치솟았다.

*

바다 구경하러 가자.

레아의 부탁에 카렌이 주섬주섬 짐을 챙겼다.

만약을 위해 허리에 검을 패용한 카렌이 한숨을 삼켰다.

카렌은 아직 엑스퍼트의 경지에 이르지 못했다.

신성력까지 모조리 끌어낸다면 그럭저럭 엑스퍼트 급 퍼포먼스가 가능하겠지만, 어쨌든 카렌은 아직 엑스퍼트가 아니었다.

만약 카렌이 계속해서 검만 갈고닦았다면 벌써 엑스퍼트의 경지에 닿았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허나 카렌은 여기저기 눈을 돌렸다.

검술도 단련해보고 마법도 공부해보고 신학도 공부해보고...

그건 카렌 나름의 희망을 찾기 위한 몸부림이었으나, 결국 카렌은 실패했다.

카렌은 다방면에 우수한 재능을 타고났지만 어느 하나에 특출나지는 못했다.

이제는 카렌도 그걸 확실히 알고 있었다.

"...갈까, 레아?"

"응!!"

벨라에게는 허락을 받아놨다.

벨라는 곤란해하면서도 레아가 계속해서 고집을 부리자 결국 카렌의 호의에 고마워하며 레아를 부탁했다.

"바다! 바다 간다! 바다!"

레아는 방방 뛰어대다가 또 쪼르르 달려가 카렌에게 안겼다.

레아는 카렌에게 딱 붙어 짱 큰 찌찌를 쪼물락거리다가, 이내 안겨 있는 채로는 목이 뒤로 꺾이게 되어 불편하다는 걸 깨닫고 다시 땅으로 내려왔다.

카렌은 레아를 쫓아가며 가슴의 답답함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카렌은 레아가 참... 부러웠다.

벨라의 딸인 레아는 레이와의 유대를 끊고 싶어도 끊어내지 못할 것이다. 그건 레아의 운명이었다.

그러한 운명이, 카렌은 부럽게 느껴졌다.

거리를 계속 걷자 이내 강한 바다 내음과 함께 수평선이 보이기 시작했다.

푸른 바다와 푸른 하늘이 겹쳐 만들어낸 길고 긴 선이 카렌의 눈동자에 담겼다.

요하나가 몇 년 전 카렌에게 자랑했던 풍경이었다.

카렌은 레이가 먼저 바닷가를 구경시켜주겠다고 찾아오길 기다렸다.

삐친 티를 내지 않았다면 레이는 진즉 그랬을 것이다.

카렌도 그걸 모르지는 않았지만 그냥 마음이 좀 울적해졌다.

그때, 해안가 뒤에 있던 언덕에서 대기하고 있던 병사들이 저들끼리 고함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그러다 얼마 가지 않아, 모래사장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뿔이 달린 거대한 고래가 해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카렌 언니, 저기 괴물...!!"

레아는 그냥 깜짝 놀라 카렌의 팔목을 쥐었다.

그 직후 카렌은 레아를 안아 들고 뛰기 시작했다.

하늘이 번쩍인다.

해안가에서 경계를 서던 마법사가 발현한 마법이 떨어져 내렸다.

그와 동시에 굉음이 울려 퍼졌다.

뿔고래로부터 터져 나온 거대한 파동이 마법을 상쇄시키며 발생한 소리였다.

귓가를 때리는 굉음에 소스라치게 놀란 레아가 카렌을 꽉 붙잡았다.

카렌은 계속 뛰었다.

한편 뿔고래로부터 솟구친 자줏빛 섬광이 해안가에 떨어져 내렸다.

이제 막 도망치기 시작했던 사람들은 자줏빛 섬광에 맞닿자마자 거품처럼 터져 나갔다.

사령검을 든 기사가 해안가에 발을 내디뎠다.

표적이 코앞에 있었다.

*

푸르게 물든 천공 위에서.

은색으로 빛나는 눈동자를 지닌 소녀가 지상을 내려다보았다.

뿔고래가 바다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악신의 기운이 서려있는 존재들이 오시리스 백작령에 발을 디딘다.

그리고, 그들 중 가장 강대한 기운을 지닌 존재 중 하나가 레아를 안아 들고 있는 카렌을 쫓았다.

소녀는 카렌과 레아를 향해 손을 뻗었다.

일단 두 사람을 안전한 곳까지 옮겨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허나 소녀의 손아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끝까지 쫓지 못했다.

"..."

도중에 멈춰선 손아귀가 가늘게 떨렸다.

망설임이 인다. 망설임 탓에 제자리서 방황하던 손아귀에서 이내 힘이 빠졌다.

소녀는 여전히 천공 위에서 지상을 내려다보며 조용히 읊조렸다.

"...카렌."

도망가.

"그 아이를 놓고, 도망가."

있잖아 카렌, 그 아이는...

"레이를 병들게 하는 족쇄야."

그러니까.

아무것도 못 본 척하고 그 아이를 놓고 도망가.

나도, 못 본 척할 테니까.

외면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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