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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등가의 소드마스터-280화 (280/446)

280화

전쟁이 시작되고 며칠 후.

현재 오시리스 백작령에 머물고 있는 지휘관급 인물이 모두 한자리에 모였다.

그동안 제국의 귀족들은 레이 덕분에 작은 방에서 머물며 숙식을 해결해야 했다.

언제 이런 대접을 받아봤나 싶었지만, 레이에게 대놓고 불만을 드러낼 수는 없었으므로 다들 겉으로는 하하호호 웃으며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다.

허나 지금 모여있는 지휘관급 인물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심각했다.

구석진 곳에 앉아있던 레이가 콧잔등을 매만지며 입을 열었다.

"일단 들어온 정보를 좀 정리하고 싶은데... 남부에서 교전이 벌어졌다고?"

"예, 그렇습니다. 허나 심각한 건 아닙니다."

제국이 루비하 왕국과 전쟁을 시작하자 마경 쪽에서도 도발을 자행했다.

그로인해 마경과 인접한 남부 국경에서 소규모 교전이 몇 차례 발생했다.

다만 신경 쓸 수준은 아니었다.

남부에는 다수의 제국군이 배치되어 있었으며, 또한 그곳은 제국의 두 번째 소드마스터가 지키고 있었다.

마경 안까지 치고 들어가서 전투를 벌였다면 모를까, 마경에서 기어나온 악마 숭배자 몇 놈을 처단하는 것쯤은 일도 아니었을 것이다.

"남부 뿐만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불순한 움직임이 몇 차례 감지되기는 했습니다만..."

루비하 왕국에서 치러지는 전쟁에 영향을 줄 수준은 아니었다.

설명을 들은 레이가 관자놀이를 툭툭 두들겼다.

"하... 그럼 결국 문제는 루비하 왕국이군."

현재 루비하 왕국에 진입한 제국군의 최우선 제거 목표는 세 명이었다.

악마 숭배자와 야합한 루비하 왕국의 현 국왕.

타라니스 가문 출신이자 쌍둥이 마탑의 수석 마법사였으며 악신의 권능이 깃든 지팡이를 소유하고 있는 악마 숭배자 '돌로레스'.

왕국제일검이었으며, 사령검의 현 주인인 악마 숭배자 '베네딕트'.

이 세 명의 제거와 악신의 유물을 확보하는 것이 제국군의 최우선 목표였다.

허나 이게 마냥 만만한 일은 아니었다.

탐욕, 혹은 불멸의 악마라 일컬어지는 존재가 내려준 축복은 언데드의 군세를 만들어냈다.

언데드의 군세만으로는 고급 병종을 대체하기 힘들었지만, 언데드의 군세가 제국과 맞닿아있는 국경선을 향해 막무가내로 진군하니 제국군도 며칠 동안 발이 묶였다.

그렇다고 쉽사리 병력을 쪼개 운용할 수는 없었다.

준 로드 급으로 평가되는 베네딕트의 존재는 제국군에게도 막대한 부담이었다.

그 덕분에 악마 숭배자들은 '약간의 시간'을 벌어내는 데 성공했으며, 그 시간을 아주 지랄맞게 썼다.

"악마 숭배자들이 왕위를 계승하거나 대체 가능한 정통성과 권력을 지닌 인물을 집중적으로 추적해 제거하고 있습니다."

"이 새끼들 전쟁에서는 이길 생각이 없군."

"예, 그래 보입니다."

"어차피 질 전쟁이니 죽기 전에 꼬장이나 잔뜩 부려놓겠다?"

악마 숭배자들은 악마와 연관된 주술을 민간에 무차별적으로 전파하고 있었다.

동시에 전쟁이 끝난 후 왕을 대체할 수 있는 인물들을 모조리 암살하는 중이었다.

이건 어차피 전쟁은 이길 수 없으니 제국을 엿 먹이겠다는 목적이 분명한 행동이었다.

전쟁이 끝난 후 루비하 왕국을 통합하고 제어할 수 있는 상징성을 지닌 인물이 모조리 죽어버리면 루비하 왕국은 계속해서 혼란이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민간에 악마 숭배와 관련된 신앙이 인위적으로 전파되어 버렸으니 혼란이 이어졌다간 악마 숭배자들이 계속 양성될 것이다.

이런 식으로 쳇바퀴가 잘못 돌아가면 최악의 경우엔 왕국이 존재했던 영토 전체를 불로 정화해야 했다.

그건 제국 입장에서도 못할 짓이었다.

"현재 제국이 확보한 루비하 왕국의 유력자가 한 명도 없나?"

"몇 있지만 국왕 역할을 맡기기엔 부족함이 많다고 합니다. 더욱이 악마 숭배자들이 막대한 손실까지 감수하며 '사냥'을 진행하고 있어, 보호가 어렵습니다."

"미리 제국 쪽으로 몸을 뺀 놈들은 없었나?"

"전쟁이 끝나자마자 세력을 이끌고 영향력을 넓혀야 되었으니... 루비하 왕국을 벗어나 제국에 완전히 몸을 의탁하는 건 다들 거부했었습니다."

"그럼 이제 남은 녀석이... 이 친구들이군."

"예, 루비하 왕국의 2왕자와 호룸 백작입니다."

나머지는 다 제거되었다고 봐도 무방했다.

"이 둘을 되도록 무사히 구출해서 확보해야 합니다."

귀족 중 한 명이 일어서서 벽에 걸린 지도로 지휘봉을 가져갔다.

"보고에 의하면 악마 숭배자들이 무리한 암살을 진행하는 사이 제국군은 왕국 영토를 해방시키며 빠르게 진군했습니다."

이제 악마 숭배자들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루비하 왕국의 영토는 1/4도 남지 않았다.

언뜻 보기에 악마 숭배자들은 패퇴를 거듭하는 것처럼 보였다.

"물론 이들이 패퇴하고 있는 건 맞습니다만..."

악마 숭배자들은 전쟁이 끝나기 전 2왕자와 호룸 백작까지 제거하려 들고 있었다.

지도 앞에 선 귀족이 지휘봉을 옮겼다.

현재 제국군은 악마 숭배자들을 포위한 채 추격하고 있었다.

악마 숭배자들은, 남아있는 세력의 대부분을 끌어모아 2왕자와 호룸 백작을 포위한 채 추격하고 있었고 말이다.

그리고, 현재 2왕자 호룸 백작은 아직 포위망이 제대로 구축되지 않은 시그니 산맥 방향으로 도주하는 중이었다.

"왕국의 레인저와 협력해 되도록 이 두 사람을 구출해 확보하라는 명령이 내려왔습니다."

왕국의 레인저와 합류할 제국의 지원병력이 필요했다.

제국의 지원병력은 레인저와 합류해 시그니 산맥을 넘은 뒤 두 사람의 퇴로를 확보해 구출해야 했다.

그 뒤에 제국의 본대가 당도하면 악마 숭배자 세력을 앞뒤로 싸먹어 완전히 제거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두 사람을 굳이 구출하지 않아도 악마 숭배자 세력은 제거되겠지만, 장기적인 미래를 생각하면 두 사람을 구출하는 게 이로웠다.

"지금 당장 시그니 산맥 쪽으로 병력을 지원할 수 있는 곳이..."

"이곳밖에 없겠군."

"예, 그렇습니다."

"..."

레이가 뒷목을 매만졌다.

제국 상부의 명령은 합당했다.

작전만 성공하면 적의 훼방질을 분쇄함과 동시에 추후 루비하 왕국을 이끌 권력층에게 은혜를 입혀 더욱 수월하게 제어할 수 있게 된다.

당장 시그니 산맥에 지원 병력을 파견하려면 오시리스 백작령에 머물고 있던 병력이 움직여야 한다는 것도 전부 옳은 말이었다.

허나 레이 입장에서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적의 핵심 주력이 우회해서 제국을 공격할 위험이 없다고 자신할 수 있나? 그 표적이 오시리스 백작령이 될 가능성이 없다고 자신할 수 있나?"

준 로드 급이 섞인 병력이라면 극소수만 우회해도 극히 위험했다.

레이가 그 점을 지적하자 옆에서 대화를 듣던 오시리스 백작은 내심 안심했다.

여기서 오시리스 백작이 내 영지에서 병력 좀 빼지 말라고 외쳤다간 사방에서 눈초리만 받았을 것이다.

허나 레이에게 감히 불경한 태도를 취할 미친놈은 이곳에 없었다.

오시리스 백작은 처음으로 레이가 든든해져서 웃음을 삼켰다.

한편 제국군 내에서 작전 장교로 활동하는 귀족이 침음을 흘리고는 레이에게 답했다.

"개전 이전부터 루비하 왕국의 모든 항구를 집중적으로 감시했습니다. 허나 이상 징후를 발견하지는 못했습니다."

대규모 병력이 해상으로 움직였다면 반드시 발각되었을 것이다.

"또한, 강화된 언데드가 지속적으로 숫자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는 적의 주력이 루비하 왕국에 위치하고 있다는 방증입니다."

악신의 축복을 매개하는 사도 급 객체가 루비하 왕국을 벗어났다면 되살아난 사체들 또한 더는 힘을 유지하지 못했을 터다.

전부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더군다나 황명 아니던가. 단순히 조금 불안하다는 이유로 병력의 움직임을 막아 세울 수는 없었다.

이 점을 알고 있던 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아, 그럼 이제 병력을 나누고 편제를 다시 짜야겠군."

*

뿔이 달린 거대한 고래가 파도를 갈라내고 나아간다.

그 고래의 끈적한 살덩이 안에서 아룬델이 조소했다.

"귀한 수단을 써먹게 만드네."

이리 강력하고 전략적 가치가 있는 마물은 몇 존재하지 않았다.

함부로 노출되면 안 될 귀중한 수단이 이번 일에 동원되게 되었다.

아룬델은 어두운 살덩이 속에서 사령검의 주인, 베네딕트를 돌아봤다.

"돌로레스 만큼이나 원색적인 증오를 지닌 자를 또 언제 접해봤는지..."

"..."

"그녀는 우리 쪽에 더 어울렸을지도 모르겠어."

타라니스 가문 출신의 돌로레스가 지니고 있던 엘-람을 향한 증오는 아룬델조차 감탄하게 할 만큼 깊고 짙었다.

엘-람이 세상에 내린 신성력 탓에 시작된 차별의 역사를 돌로레스는 가문으로부터 고스란히 전해 받았다.

그렇기에 그녀는 희생을 자처하며 엘-람의 사도를 분지를 수 있기를 원했다.

그것이 엘-람을 향한 복수가 되리라고, 돌로레스는 그리 여겼다.

현재 루비하 왕국에서 언데드의 군단이 유지되고 있는 것은 오롯이 그녀가 자기 존재를 바쳐 악신의 권능을 강화시켰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사령검의 주인이 루비하 왕국을 벗어나서도 강력한 언데드의 군세가 지속해서 유지될 수 있었다.

물론, 오래 가지는 않을 터다.

"이미 돌이킬 수는 없으니 기도하자. 이 도박이 잘 들어맞기를 말이야."

"..."

"과묵한 건 좋지만 실수하지는 마. 용모는 잘 기억해두었지?"

레이가 특히 신경을 쓴다고 밝혀진 자들의 용모들.

그들 중엔 레이가 작위를 선물해주었다는 인물도 있었고, 양모와 동생도 있었다.

"죽이지는 마. 불리한 전장으로 유도해야 하니까."

판단력을 흐리게 만들 수 있는 인질이 얼마나 효과가 있을까 불확실하긴 했다.

허나 운이 좋다면 레이를 홀로 해안으로 끌어들여 죽일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그게 실패하면...

"직접 마경으로 찾아올 수밖에 없게 만들어주자고."

*

오시리스 백작령이 다시 번잡해졌다.

병력을 나눈 뒤 만약의 상황을 대비해 병력을 새롭게 배치하느라 귀족들은 정신없이 움직여 댔다.

허나 피난민들과 오시리스 백작령 주민들은 여전히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오시리스 백작령에 배치된 병력들이 시그니 산맥으로 움직이든 말든 대다수의 평민들에겐 크게 와 닿는 게 없었다.

레아 또한 평소와 같이 해맑은 얼굴로 사탕을 빨다가 카렌을 찾아갔다.

레아는 카렌을 찾아가며 괜히 혼자서 씩씩댔다.

요즘 아빠가 다시 바빠져서 놀아주지를 않았다.

아빠가 바빠지니 엄마 또한 멀리 외출하는 건 안 된다며 레아를 숙소에 붙잡아두고 있었다.

레아는 억울하고 답답했다.

레아는 그날 보았던 엄청나게 큰 호수를 다시 한번 구경하고 싶었다. 하얗게 빛나던 부드러운 모래도 다시 밟아보고 싶었고 말이다.

그래서 레아는 카렌을 찾아가 팔을 툭툭 두드렸다.

"언니! 카렌 언니!"

"응, 레아. 언니는 왜 찾아왔어?"

카렌이 잔잔하게 웃으며 레아를 들어 앉아주었다.

레아는 짱 큰 찌찌를 조물거리며 카렌에게 찡찡댔다.

"레아 바다 보고 싶어! 바다! 언니가 데려다 줘!"

"음... 바다? 레아, 레이랑... 오빠랑 같이 가는 건 어때?"

"오빠 바빠! 아빠도 바빠!"

"...그래, 오빠는 바쁘지."

카렌은 약간의 음울함이 뒤섞인 얼굴로 레아를 바라보다 다시 활짝 웃어주었다.

"그럼 언니랑 같이 바다 보러 갈까?"

"응!"

혹시라도 카렌의 마음이 다시 바뀔까 싶어 레아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외면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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