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홍등가의 소드마스터-279화 (279/446)

279화

"음..."

쓸모가 없다.

그 말을 듣고 로필렌은 투명한 벽 너머를 다시 살폈다.

벽 너머에는, 아직 살아있는 실험체에게 기이한 에너지를 공급해주는 물건이 하나 떠다니고 있었다.

부러진 대거의 형상을 하고 있는 그 물건이 '악마의 유물'이라 칭해질만한 수준의 병기라는 걸 로필렌은 어렵지 않게 파악했다.

저 유물이 이미 사체가 되었어야할 실험체를 아직까지 생존시키고 있었다.

겉보기에 악마의 유물은 꽤나 획기적인 성능을 보여주고 있었다.

허나 정신머리가 비교적 정상적으로 박혀 있는 마법사들이 악마의 힘을 취급하지 않는 것은 다 이유가 있었다.

악마의 축복을 활용하는 흑마법사조차 그 힘을 체내에 받아들이는 건 꺼리는 부류가 많았다.

뭐, 그런 것과 별개로.

레이는 어떤 형태로든 악마의 힘을 사용하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레이가 병적으로 그러한 행위를 적대하리란 걸 로필렌은 확신했다.

그리고, 루나 또한 그러한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애초에 루나도 악마의 힘을 직접적으로 활용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다만 악마가 숭배자들에게 부여하는 그 괴이한 회복력이 대체 어떠한 메커니즘을 거쳐 이루어지는지 확인하려 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메커니즘을 모방할 수 있다면, 레이를 완전히 회복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연구 결과 악마의 힘은 쓸모가 없었다.

전장에서 루나는 축복을 받은 악마 숭배자들이 결손된 신체를 급속히 회복하는 것을 몇 번이나 보았다.

허나 그 현상의 본질은 연구해보니, 악마 숭배자들의 육체 수복은 회복이라기보단 '대체' 혹은 '침식'에 가까웠다.

본래 있던 것을 원래대로 되돌리는 것이 아니다.

비어버린 공간을 '다른 것'으로 채워내는 것 뿐이었다.

그렇기에 그 현상은 회복이 아니라 침식이라 불러야 마땅했다.

정상급 성직자가 발하는 신성력이 악마의 축복보다 극적인 효과를 발하지 못하는 건 신성력이 열등하기 때문이 아니었다.

만약 신성력이 악마의 축복처럼 대상의 본질을 침식하고 오염시키는 매커니즘을 지녔었다면 훨씬 빠른 육체 수복이 가능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악마의 권능 따위는 루나에게 쓸모가 없었다.

루나가 지키고자 하는 것은 레이였지, 레이의 형체를 뒤집어쓴 껍데기가 아니었다.

"...이 실험은 폐기할 거야."

"현명한 판단이십니다."

루나의 설명을 들은 로필렌은 내심 안심했다.

루나가 계속해서 악마의 힘을 탐구하겠다고 나섰다면 로필렌도 입장이 많이 곤란해질 뻔했다.

루나와 레이 사이에서 줄타기를 했어야 하지 않은가.

화륵!!

루나가 자리에서 일어나 실험실을 등졌을 때, 방벽 너머에서 화염이 피어올랐다.

로필렌이 잿더미로 변해가는 실험실 안의 흔적들을 바라보며 환히 웃었다.

"역시 태우는 게 깔끔하네요! 고열로 태우고 녹여버리면 저게 원래 무엇이었는지 누가 알겠습니까. 음, 아주 깔끔해요."

"..."

루나는 로필렌의 그 말이 괜히 신경에 거슬렸다.

오래 전에, 죽어 있던 루나의 부모 또한 루나가 피워낸 불꽃에 휘말려 검은 재로 변해 흩날렸다.

굳이 그 순간의 광경을 떠올리고자 했던 적은 없다.

허나 흩날려 사라졌던 그날의 잿가루는 여전히 루나의 기억 속에 선명히 새겨져 있었다.

그날의 기억이 아직까지 자신의 행동에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러한 의문에 루나는 가치를 두지는 않았다.

"..."

지금 중요한 건 레이에 관한 문제였다.

레이의 심장에 사용해야할 시술은 충분히 검증했다.

레이가 지닌 코어의 특성이 워낙 독특해서 다시 손을 좀 봐야겠지만, 이제는 더 이상 생체를 가지고 실험을 진행해야할 필요는 없었다.

허나 레이의 심장을 강화한다 해도 혈관이 문제였다.

온몸에 복잡하게 뿌리내리고 있는 혈관은 구조가 너무 복잡해서 일일이 보강하는 게 불가능했다.

이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는 루나에게도 아직 막막했다.

"..."

루나는 답답함을 숨긴 채 실험실 밖으로 발을 내디뎠다.

로필렌이 루나를 따라 걸으며 보고했다.

"아,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연구소 밖으로 나가자 결계 너머로 열 명 남짓 되는 레인저가 대기하고 있었다.

그들 중엔 레인저의 단장 로베리도 있었다.

루나가 결계 밖으로 나오자 로베리가 바로 본제를 꺼냈다.

"그만 산맥에서 나가주었으면 좋겠군."

"..."

"나는, 네게 문제가 생겨 우리가 제국놈들에게 추궁받게 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루나의 눈가가 좁아졌다.

로베리가 단순히 꼬장질을 하기 위해 찾아온 것이 아니라면, 로베리는 지금 시그니 산맥에서 전투가 발생할 수 있음을 경고하고 있었다.

*

전쟁이 시작되기 전부터.

루비하 왕국의 상황은 비관적이었다.

왕국의 악마 숭배자 세력이 너무 겉으로 드러나 버린 게 가장 큰 문제였다.

악마 숭배자들은 본디 낮은 곳에서부터 암약해 뿌리부터 차근차근 집단을 잠식해야 했다.

만약 충분한 준비 없이 악마 숭배자 세력이 겉으로 노출되어 버리면 배척받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 루비하 왕국이 딱 그 꼴이었다.

왕국의 많은 권력자들이 왕실이 악마 숭배자들과 야합했음을 명분으로 들어 왕실과 거리를 두었다.

이는 왕국의 권력자들이 정말로 왕실에 분노했다기보다는 제국의 눈치를 보느라 발생한 사태였다.

루비하 왕국과 제국의 체급 차이는 아이와 어른보다도 끔찍했다.

또한 제국은 루비하 왕국보다도 훨씬 단합되어 있었으며 강맹했다.

이런 상황에서 굳이 왕실 편을 들어봤자 얻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차라리 제국이 왕실을 밀어버리는 걸 지켜본 후 남아있는 걸 주워먹는 게, 왕국의 귀족들에게도 이득이었다.

그러다보니 루비하 왕국은 제국과 전쟁이 시작되기도 전에 내전 사태에 빠졌다.

내전에서 왕실은 수월하게 주도권을 잡았다.

사도라 칭해질 수준의 악마숭배자들의 무위를 견뎌낼 수 있는 세력이 왕국 내에서 극소수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왕실은 무력으로 왕국의 통제권을 잡아갔고, 내전에서 죽어나가는 자들은 계속해서 늘어났다.

왕국민들이 혼란에 휩싸여 죽음의 공포에 잠식될수록 악신의 영향력은 더욱 거대해져 갔다.

악마숭배자들은 그 틈을 타 왕국민들이 자의로 악마를 떠받들 수 있도록 유도했다.

허나 이런 수작들 또한 본래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선에서 알음알음 진행했어야 했다.

다른 세력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낮은 곳에서부터 조금씩 파고들어 영향력을 넓혔어야 했다.

지금처럼 대놓고 수작질을 부려봤자 큰 효용 없는 반항에 불과했다.

제국 황도를 습격해 제국의 움직임을 봉쇄해 시간을 벌었다면 조금은 상황이 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마저도 실패했다.

도리어 제국은 분노했고, 모든 정황을 파악한 제국은 확실하게 악마 숭배자들을 처단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왕국의 악마 숭배자들에게 있어 더 없이 절망스러운 상황이었다.

이 와중 루비하 왕국의 국왕은 하루의 대부분을 침소에서 머물며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그는 늙었고, 죽음이 두려웠다.

죽음을 벗어나 불멸을 원하였다.

이제는 특정 사안을 제대로 판단한 이성조차 거의 남지 않은 늙은 왕은 가까워진 죽음을 앞두고 기도를 올리는 데 열중했다.

그는 이제 단지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하루의 대부분이 비어있는 왕좌의 곁은, 사령검을 쥔 기사와 자줏빛 지팡이를 소유한 마법사가 차지했다.

그리고 그들을 향해, 엘프 한 명이 다가왔다.

아룬델이라 칭해지는 그 엘프는 프레체스를 대신해 그들과 접촉한 자였다.

"난장판이야, 난장판."

아룬델은 대뜸 그리 말했다.

아룬델의 말마따나 왕국의 상황은 그냥 난장판이었다.

악마 숭배자 세력이 혼자 죽기는 싫다며 여기저기 깽판을 치고 다녔지만, 결과는 뒤바뀌지 않을 터다.

오히려 이리 깽판을 친 만큼 왕국에 남아있는 대부분의 자잘한 세력은 제국의 침략에 적극적으로 호응할 것이다.

전쟁이 시작되면 곧장 주르륵 밀려날 게 눈에 훤히 보였다.

"마경에 말이야."

아룬델이 혀를 끌끌 차며 말을 이었다.

"여러분이 활동할 수 있는 영역을 제공하는 걸 고려하고는 있는데, 그냥 내줄 수는 없어. 성과가 있어야 돼."

"..."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프레체스가 먼저 황도의 습격을 기획해 제안했다가 성과를 얻는 데 실패해 제국의 침략을 앞당겼지 않는가.

대체 무슨 낯짝으로 저쪽에서 먼저 성과를 운운하고 나오는지 알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아룬델과 탐욕의 악마를 숭배하는 자들은 애초에 사이가 좋을 수 없었다.

본디 악신이라 불리는 존재들은 유일하지 않았기에, 각각의 악신을 떠받드는 세력은 마경에서도 영역을 나누고 있었다.

먼 과거엔 탐욕의 악마를 숭배하는 세력이 마경에서 가장 강력했다.

허나 수백 년 전의 사건으로 인해 탐욕의 악마는 마경에서의 영향력을 대부분 소실했다.

그 빈자리를 다른 악신을 숭배하는 자들이 강탈했다.

최근 탐욕의 악마가 가장 적극적으로 숭배자들을 축복해 변화를 이끌었던 건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결과는 좋지 않았지만 말이다.

헌데 이제 와서 아룬델이 마경의 구석진 곳은 조금 내주겠다고 생색을 내자 탐욕의 악마가 거칠어진 분노와 탐욕을 드러냈다.

그 감정이 숭배자들에게도 전달되어 아룬델을 당장 뜯어 삼켜버리라고 충동질을 했다.

허나 살아남기 위해서는 이성을 되찾아야 했다.

얼마 안 가, 탐욕의 악마를 숭배하는 자들로부터 뻗어나오던 살기가 가라앉았다.

정적 속에서 아룬덴이 뚜벅뚜벅 걸어가 왕좌에 앉아 웃었다.

"엘-람의 사도. 우리에게 가장 위협이 되는 요소를 제거해야 해."

"...오시리스 백작령."

"그래, 그곳에서 머물고 있다고 하더라."

레이에 관한 정보를 구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레이라는 존재 하나 때문에 대규모 물자가 움직였던 탓에 레이를 특정하기가 너무 쉬워졌다.

허나 정보를 가지고 있음에도 마법사는 고개를 저었다.

"불가능하다. 오시리스 백작령에도 다수의 병력이 머물고 있다는 첩보를 접했다."

"왜 그리 부정적이야? 길어봤자 몇 달도 못 가서 망할 왕국인데, 왕국을 통째로 미끼 삼아서라도 제국의 병력을 분산시켜야지?"

"..."

글쎄.

어떻게든 병력을 분산시킨다고 해도, 레이는 강했다.

레이는 명백히 로드 급에 근접한 강자였다.

하지만, 이쪽에도 로드 급에 근접한 강자는 있었다.

"나도 도울테니 너무 겁 먹을 필요 없어. 어차피 거기서 '로드 급에 준하는 강자'는 엘-람의 사도, 단 한 명이잖아."

"...경계하고 있는 제국의 눈을 피하려면 극소수로 움직일 수밖에 없다. 엘-람의 사도를 제거하기 전에 포위될 거다."

"음, 그 말이 맞아. 그러니까 좀 더 비열하게 가야하지 않겠어?"

아룬델이 턱을 괴어내며 자기 머리를 툭툭 두드렸다.

"엘-람의 사도가 판단력이 흐려지게 만들어야 해. 자기가 불리한 전장에 발을 들이도록 만들어야지. 그러니까... 엘-람의 사도를 치기 전에 약점이 될만한 것들을 먼저 확보하는 건 어때?"

그 친구가 자기 가족을 엄청 아낀다더군.

아룬델이 그리 덧붙였다.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