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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등가의 소드마스터-278화 (278/446)

278화

바다.

레아는 평생 바다를 구경한 적이 없었다.

사실 필립스 백작령에서 생활하던 대부분의 주민이 그랬다.

레아는 당연히도 책에서만 보았던 바다를 보고 싶다고 징징댔다.

벨라 또한 레아와 함께 바다를 구경해보고 싶었다.

허나 레이가 함부로 밖에 돌아다니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기에 곤란해하며 레아를 달랬다.

그 모습을 본 지미가 레아와 벨라를 챙겨 바닷가로 향했다.

바닷가에 도착한 레아는 상상해본 적도 없는 거대한 크기의 호수에 압도되어 입을 헤 벌리고 있다가 빨빨거리며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한참 체력이 좋을 때라 지미와 벨라는 꽤 오랜 시간 레아를 쫓아다녔다.

"레아 수영해볼래!"

한겨울에 레아는 바다에 기어들어가겠다고 계속 떼를 썼다.

벨라가 절대 안 된다고 레아를 타박했지만 레아는 아무튼 괜찮다며 자꾸 바다 쪽으로 향했다.

덕분에 지미는 바다에 들어가려는 레아를 계속해서 잡아다가 모래사장으로 옮겨야 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보니 해가 수평선 너머에 걸치게 되었다.

체력이 덜 빠진 레아는 여전히 신나 있었지만, 벨라가 그만 돌아가자고 레아를 달랬다.

"어두워지면 위험해. 그러니까 그만 돌아가자."

"오늘 돌아가면 내일 또 와?"

"내일은 안 돼."

"그럼 안 갈래!"

"레아, 자꾸 고집 부릴거야?"

레아가 가기 싫다며 계속 징징댔다.

한편 두 사람의 대화를 곁에서 듣던 지미는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웬 젊은 사내놈들이 근처에 우르르 몰려와 저들끼리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지미는 아예 신경을 끄려고 했지만, 곧 돌멩이 하나가 지미를 향해 날아왔다.

지미는 날아오는 돌멩이를 보며 저게 진짜 순수한 돌멩이가 맞는지 잠깐 고민했다.

*

벤은 마나를 운용해 신체의 근력을 강화할 수 있었다.

지인한테 배운 기술이었는데, 그다지 대단한 수준은 아니었지만 한두 번 정도는 강력한 힘을 낼 수 있었다.

술에 취한 벤은 그 기술까지 활용해 손에 쥔 돌멩이를 투척했다.

아무나 맞으라고 던진 돌멩이였는데, 벤의 손에서 떠난 돌멩이는 비실비실해 보이는 노인을 향해 날아갔다.

다행히도 돌멩이의 궤적은 무난하게 노인을 명중시킬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벤은 곧 돌멩이에 피격당한 노인이 꽥 비명을 지르며 바닷가를 뒹굴 거라 확신했다.

그리고...

콱!!

노인이 날아오던 돌멩이를 한 손으로 움켜쥐었다.

벤과 함께 있던 무리들은 벤을 따라 돌멩이를 몇 개 더 던졌지만, 곧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깨닫고 움직임을 멈추었다.

수면 밑으로 잠겨가는 태양으로부터 뻗어나온 빛줄기가 역광을 만들어 낸다.

벤의 무리들은 역광 탓에 지미의 외관을 제대로 살피지 못했다.

다만 역광 아래 드러난 윤곽 만으로 지미가 비실비실한 노인네라 짐작했을 뿐이었다.

허나 어느 샌가, 비실비실한 노인네라 생각했던 남자의 윤곽이 거대한 거인처럼 비쳐지기 시작했다.

벤의 무리들은 직감적으로 일을 조졌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야, 야...!"

잘못 건드린 것 같으니 일단 도망가자.

그리 판단한 벤의 무리 몇 명이 등을 돌렸다가 깜짝 놀랐다.

웬 못 보던 청년 하나가 해안가 반대쪽에서 벤의 무리를 향해 뚜벅뚜벅 다가오고 있었다.

레이였다.

레이는 벤의 무리들을 보며 자기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이런 일이... 생길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예상보다도 너무 빨랐다.

레이가 코어를 활성화시켜가며 벤의 무리에게 접근했다.

"누가 보냈지?"

"에이씨...!"

벤의 무리 중 한 명이 다가오는 레이를 무시하고 도망치려 했다.

허나 레이를 지나쳐 뛰어가려던 순간 몸이 붕 뜨더니 모래사장에 거꾸로 처박혔다.

도망치려던 놈의 종아리를 걷어차서 부러뜨린 레이는 벤의 무리를 심문할 생각으로 거리를 좁혔다.

그때 아직 술이 좀 덜 깬 벤이 냅다 외쳤다.

"너, 너 내가 누군 줄 알아?!"

"...?"

레이도 좀 당황했다.

이 새끼 뭐지...? 순순히 신분을 밝히겠다는 소리인가...?

레이가 황당한 감정을 담아 쳐다보자 벤도 자신감을 얻었다.

벤의 삼촌은 위병의 높으신 분...까지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위병들에게 영향력을 행사 가능한 위치인지라 마을 주민들은 눈치를 봐야 했다.

벤을 그걸 믿고 입을 더 놀리려 했으나 그보다 앞서 레이가 강한 적대감을 드러냈다.

"그래, 설명해봐. 네가 누군데?"

"...컥, 컥!"

레이가 작정하고 기세를 드러내 찍어누르자 벤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이내 벤을 비롯한 벤의 무리들이 혼절해서 거품을 물고 툭툭 쓰러졌다.

상황이 그리 되니 레이는 다시 한 번 당황했다.

"...뭐야?"

한편 상황을 지켜보던 지미도 주변을 경계하며 슬금슬금 다가왔다.

혼절한 벤의 무리들을 확인한 지미가 레이에게 물었다.

"이것들은 왜 이래? 혹시 죽였어?"

"아뇨, 죽은 건 아닌 것 같고... 난 아무것도 안 했는데 갑자기 기절하던데요?"

"갑자기? 독이라도 씹었나? ...독은 아닌 것 같은데?"

"아니... 근데 지미, 이 새끼들이 방금 흉기로 뭘 던진 거예요?"

"돌."

"예?"

"돌멩이라니까."

지미가 손에 쥐고 있던 돌멩이를 보여주었다.

레이가 눈살을 찌푸렸다.

"마법이 새겨져 있거나 독 묻어있는 것 아니에요?"

"한 번 살펴보든가."

지미가 건네준 돌멩이를 레이가 유심히 살펴보았다.

아무리 봐도 그냥 평범한 돌멩이였다.

"...이거 뭐 하는 새끼들이야?"

레이와 지미가 같이 황당해하며 기절한 놈들을 내려봤다.

그 모습을 레아가 벨라에게 딱 붙어서 흥미진진하게 구경했다.

*

오시리스 백작은 강한 두통을 느꼈다.

어제 저녁쯤, 웬 미친놈들이 피난민들을 공격했다.

만약 피난민 중 별 볼 일 없는 평민을 공격했다면 유야무야 덮고 넘어갈 수도 있었을 테지만...

그 미친새끼들은 레이와 아주 가까운 지인을 공격했다.

애미애비 없는 정신나간 새끼들.

오시리스 백작은 속으로 온갖 욕설을 중얼거린 뒤 맞은편에 앉아있던 레이에게 고개를 숙였다.

"송구합니다."

"아니, 뭐, 너무 그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백작님."

레이가 손을 휘저은 후 오시리스 백작에게 물었다.

"그래서, 그 습격자들이... 누구를 특정해서 노린 건 아닌 것 같다?"

"예, 그렇습니다."

오시리스 백작은 소식을 듣자 마자 습격 사건을 조사하라 명했다.

오시리스 백작의 명령을 받은 병사들은 밤새 백작령을 헤집어 가며 조사를 진행했고, 조사는 의외로 빠르게 마무리 되었다.

이번 습격은 레이의 지인을 처음부터 노리고 행해진 범죄는 아니었다.

피난민에 대한 불만이 가득했던 오시리스 백작령 주민 몇 명이 불만을 표출하기 위해 충동적으로 벌인 일이었다.

"진술이 전부 일치하고... 정황으로 보아도 그렇습니다."

그냥 외진 바닷가에 있는 피난민을 노렸을 뿐인데 세 사람이 걸렸다는 소리였다.

작정하고 지미, 벨라, 그리고 레아를 해치려 했다면 평범한 돌멩이를 던져대진 않았을 것이다.

레이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하, 이것 참..."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레이만큼이나 오시리스 백작도 상황이 어처구니가 없었다.

"죄인에게 어떤 처분을 원하십니까?"

"얹혀사는 입장에서 피를 많이 보고 싶지는 않네요. 주동자 몇을 제외하면, 관대하게 조치해주시길 바랍니다."

"예, 알겠습니다."

"돌려 말하는 게 아니고, 말 그대로의 의미니까 그렇게 부탁드리겠습니다. 괜히 분위기 험악해지는 걸 원치는 않아서요."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평민이 평민을 공격한 사안이라면 레이의 의중에 따라 가벼운 노역형 수준으로 처분을 끝내는 것도 가능했다.

허나 습격자들은 불행히도 지미를 공격했다.

지미가 평소 행색을 수수하게 하고 다녀서 그렇지, 그는 명백한 제국의 귀족이었다.

그것도 마음만 먹으면 제국 중앙으로 진출이 가능한 귀족이었다.

헌데 제국의 귀족인 지미를 돌멩이를 들고 습격했다.

작위를 하사한 황제의 위엄을 제대로 세우기 위해서라도 누군가는 목이 잘려야 했다.

이건 레이가 막고 싶다고 쉽사리 막을 수 있는 처분도 아니었고, 굳이 무리해서 막을 필요도 없었다.

"그럼 이만 일어나보겠습니다."

"예, 앞으로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확실히 조치해놓겠습니다."

그렇게 레이와 오시리스 백작의 대화는 마무리되었다.

접견실에서 나온 레이는 복도에 있는 창문을 통해 밖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레이는 자기 존재가 공개적으로 노출되는 것을 되도록 피하려고 했다.

허나 황도에서 모로스를 쥐었을 때부터 그건 불가능한 일이 되어버렸다.

당시의 선택을 레이는 후회하지는 않았지만, 그와 별개로 마음이 굉장히 껄끄럽기는 했다.

현재로선 벨라와 레아의 존재가 특정되는 것은 피할 수가 없었다.

정보를 접한 이들은 다들 벨라와 레아에게 관심을 가질 것이다.

그들 중 누군가는 두 사람을 이용하려 들 수도 있었고, 누군가는 표적으로 삼으려 들 수도 있었다.

이번 습격은 단순히 우연이 겹쳐 벌어진 일이라지만 다음에는 다를 수 있었다.

확실한 해결책 같은 건 없었기에 앞으로도 계속 주의를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물론...

레이의 죽음 이후에는 벨라와 레아의 가치 또한 소멸해서 다시 옛날처럼 돌아갈 수 있을 터다.

허나 힘 있는 권력자들에게 한 번 '인식'당한 이상, 두 사람에게는 레이 사후에도 확실한 그늘이 필요했다.

"..."

레이, 나는 두려워.

네가 나에게 벨라와 레아를 끝까지 책임져달라고 할까 봐, 그게 두렵다고.

지미는 거칠어진 목소리로 그리 호소했었다.

레이는 나를 믿나요.

레이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을 내가 레이 대신 지켜줄 것이라고 믿나요.

루나는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리 추궁했었다.

레이는 두 사람의 질문에 끝끝내 답하지 못했다.

허나 결국에는... 무릎을 꿇고 그들의 희생과 호의를 갈구하게 되리라.

레이는 눈앞에 그려지는 자신의 미래를 곱씹다가 숨을 크게 내쉬었다.

갑갑한 마음을 해소하기 위해 창문 너머의 풍경을 시야에 담아내는데, 마침 거리를 걷는 카렌의 모습이 보였다.

레이는 카렌을 가만히 지켜보다 괜히 툴툴댔다.

"쟤는 사춘기가 이제 온 건가..."

*

"흐흥~ 흥~"

로필렌이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실험실을 찾았다.

실험실 밖에서부터 피비린내가 풍겨왔지만 로필렌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마물이나 사람이나 그밖에 다른 종족이나 피비린내는 거의 다 비슷비슷했다.

신선하냐 썩어있느냐의 차이 정도만 있을 뿐.

"루나? 스승님? 어?"

별 생각 없이 실험실 안으로 들어온 로필렌은 투명한 벽 너머를 보고 깜짝 놀랐다.

"어어...? 이건 왜 아직 살아있지?"

벽 너머를 빤히 바라보던 로필렌이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스승님."

"...응."

"저기, 저기에 박혀있는 물건은 어디서 구하셨습니까?"

"...알리모에서 구했어."

알리모.

루나가 메테오를 지면에 박아넣어 재앙을 일으켰던 장소였다.

로필렌이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좀 위험하지 않을까요?"

로필렌이 말한 '위험'에는 복합적인 의미가 담겨있었다.

루나가 로필렌의 의견에 동의했다.

"...위험해."

그리고.

"쓸모가 없어."

루나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표적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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