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7화
아르파는 자신에게 부여된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아르파는 보고를 올릴 준비를 하며 마티아스 후작의 인자한 웃음소리를 기대했다.
허나 마티아스 후작은 고함과 물건 깨지는 소리로 아르파의 기대에 보답했다.
가신이 열심히 마티아스 후작을 뜯어말리는 소리도 아르파에게 들려왔다.
가신들은 후작가 재정이 궁핍해졌으니 값비싼 물건 좀 깨부수지 말라고 마티아스 후작을 타박하고 있었다.
결국 마티아스 후작은 집기를 집어 던지길 멈추고 괴성만 고래고래 질러댔다.
[그걸 좋다고 처먹어?!! 으아아!!]
마티아스 후작은 자기가 보낸 물자를 레이가 넙죽넙죽 받아 처먹었다는 소식을 듣고 뒷목이 당겼다.
안 그래도 빠듯한 후작가의 재정이 이번 일로 더욱 빠듯해질 예정이었으니, 마티아스 후작 입장에선 거품을 물고 발작할 사안이기는 했다.
그후, 마티아스 후작은 간신히 마음을 진정시키고 가신들을 불러모아 회의를 진행했다.
가신들은 '레이가 마티아스 가문의 핏줄이라는 정보를 찔끔찔끔 밖으로 흘려볼까'에 관해 논의했다.
가신들은 대체로 정보를 흘리자는 쪽에 찬성했다.
레이도 받아먹은 게 있어 이에 관해 대놓고 적대감을 표하진 못하리란 의견이 많았다.
허나 마티아스 후작은 가신들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았다.
[더는 도박수를 둘 수는 없다.]
당장은 마티아스 후작가가 흔들리고 있지만 체급이 있었기에 시간만 있다면 천천히 회복할 수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굳이 도박수를 두기 보다는 리스크를 낮추는 게 우선이라고, 근래 자신감이 떨어진 마티아스 후작은 주장했다.
더군다나.
[아직 황제 폐하께서 어떤 의중을 지니고 계시는지 확인되지 않았다.]
이게 가장 큰 문제였다.
만약에라도 황제가 레이를 내칠 생각이라면 판도가 또 뒤바뀔 터다.
황제의 의중이 명확해질 때까지는 욕심을 내지 않고 레이와 적절한 거리를 유지할 필요성이 있었다.
마티아스 후작이 그러한 주장을 강하게 밀어붙이자 가신들도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레이에 관한 논의가 끝나자 그 다음은 전쟁에 관한 논의가 시작됐다.
슬슬 전쟁이 시작될 예정이었지만 다들 태도가 느긋했다.
마티아스 후작가의 영지는 최전방과 멀리 떨어져 있었다.
전쟁에 지원된 후작가의 병력들을 위한 후속조치에 관한 논의를 제외하면 그다지 머리 싸맬 게 없었다.
그렇게 이런저런 사안에 관한 회의가 끝난 후 마티아스 후작은 아르파에게 당부했다.
[오시리스 백작령 인근에서 계속 정보를 수집해.]
"예, 알겠습니다."
아직 레이 개인에 관한 정보가 부족했다.
아르파는 자기 출장 기간이 꽤나 늘어날 것임을 직감했다.
*
전쟁이 시작됐다.
전쟁이 시작되었다는 소식이 퍼졌지만 오시리스 백작령의 분위기는 여전히 잔잔했다.
최전방이 아니었기에 전쟁이 터졌다고 해도 오시리스 백작령 주민들에게 크게 와 닿는 게 없었다.
더군다나 제국이 작정하고 준비한 전쟁 아니던가.
왕국이 격렬히 저항한다 해도 일방적으로 밀려버릴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기에 오시리스 백작령에 와 있는 귀족들도 큰 긴장감을 느끼지는 못했다.
알레시아 또한 마찬가지였다.
도리어 알레시아는 근래 때깔이 더더욱 좋아지는 중이었다.
피난 와서 눈칫밥이나 얻어먹으며 비루한 생활을 이어갈 줄 알았는데 지금은 뭐 피난을 온 게 아니라 호화 여행을 온 것 같았다.
알레시아는 레이가 지닌 권위를 온몸으로 확인하며 그야말로 호가호위를 이어가고 있었다.
'역시 나의 직감은 틀리지 않았구나!'
알레시아는 홀로 뿌듯해하며 자기가 사람 보는 눈은 뛰어나다며 자화자찬을 했다.
얻어걸린 것에 알레시아가 의미를 부여하는 사이 알레시아 맞은편에 앉아 있던 카렌은 깨작거리던 다과를 내려놓았다.
풀이 죽어 있는 카렌에게 알레시아가 물었다.
"어디 아픈 것이냐?"
"아뇨, 몸은 괜찮아요."
"...설마 아직까지 레이에게 삐쳐있는 것이냐!"
"아뇨... 그런 거 아니에요."
"으으으으으음...."
아무리 봐도 아직까지 삐쳐있는 모양새였다.
알레시아가 눈가를 좁힌 채 지긋이 카렌을 쳐다봤다.
솔직히, 알레시아는 카렌의 행동이 전혀 이해가 안 됐다.
저게 대체... 무슨 배짱장사란 말인가?
레이는 제국에서도 손가락에 꼽을 권위를 움켜쥐게 되었다.
아직 자기 세력이 부족하긴 하나 그거야 시간이 지나면 금방 해결될 문제였다.
위명을 얻은 이상 레이가 몸을 함부로 놀릴 수는 없었으나 여자 좀 후리는 것 정도는 정말 일도 아니었다.
어지간한 귀족가의 여식도 레이가 작업을 걸면 복잡하게 계산 않고 몸부터 들이밀 게 뻔했다.
근데 대체 카렌은 무슨 자신감으로 삐친 티를 팍팍 내며 레이와 밀고 당기기를 하려 든단 말인가!
뭐, 남녀 간의 적절한 긴장을 위해 하루이틀은 툴툴댈 수 있겠지만 그게 열흘이고 보름이고 이어지면 정이 떨어지는 게 순리였다.
'입장이 아쉬운 건 레이가 아니라 우리이지 않는가!'
툭하면 레이를 붙들고 '나의 기사여!'를 외치며 징징거리는 알레시아가 할 말은 아니었으나, 어쨌든 알레시아는 카렌의 행동이 이해가 안 갔다.
'...저 커다란 가슴을 믿고 배짱을 부리는 것인가?'
알레시아가 그런 고민을 하고 있는데 카렌이 입을 열었다.
"옛날에 저는... 레이 곁에서 항상 함께하고 싶었어요."
"...레이와 항상 함께하지 못해 삐친 것이냐?"
"..."
"가슴이 불렀, 아니, 배가 불렀구나! 레이가 이리 우리를 신경 써주는 것만 해도 고마운 일 아니더냐?"
알레시아의 타박에 카렌이 잔잔하게 웃었다.
"제 바람을 이룰 수 없다는 건 한참 전부터 알고 있었어요."
유년기를 넘고 사춘기를 넘어서며 서로의 격차는 점점 더 끔찍하게 벌어졌다.
요하나와 루나는 레이의 곁에 설 수 있는 타고난 재능이 있었다.
알레시아는 어린 시절의 레이에게 미리부터 많은 은혜를 베풀어 놓았다.
허나 카렌에겐 아무것도 없었다.
카렌이 내세울 수 있는 건, 그래, 기껏해야 반반한 얼굴 정도였다.
이 변치 않는 현실은 오랜 시간 카렌을 불안하게 했고, 시간이 지날수록 비대해져만 가는 불안을 카렌은 외면해왔다.
하지만 아주 사소한 '계기' 탓에, 카렌은 더는 그 불안에서 눈을 돌릴 수가 없게 되었다.
"아가씨, 저는... 레이에게 사랑받기를 바랐어요."
사랑을 속삭이고, 마음을 나누고, 몸을 겹칠 수 있기를 바랐다.
허나 이제 와서 카렌은, 자신에게 레이가 품어준 감정이 이성을 향한 사랑이 맞는지조차 자신할 수가 없었다.
어쩌면 레이가 품고 있는 감정은 어린 시절 추억을 향한 미련이나, 혹은 단순한 동정일지도 몰랐다.
레이가 카렌에게 품고 있는 감정의 정체가 고작 그런 것이라면...
"저는 그냥... 레이에게 짐덩이밖에 안 되잖아요."
"..."
알레시아는 고민했다.
저거 지금 나 들으라고 하는 소리인가?
카렌의 진심이 무엇이든 간에 카렌의 이야기는 알레시아에게도 통용되는 내용이었다.
덕분에 내상을 입은 알레시아가 흐물흐물해져서 흐느적거리는데, 카렌이 붉어진 눈시울을 훑으며 중얼거렸다.
"그만 포기할까요...? 레이의 기억 속에 귀찮은 짐덩이로 남고 싶지는..."
"그건 아니 된다!"
쾅!
기겁하며 탁자를 내려친 알레시아가 허리를 숙여 카렌과의 거리를 확 좁혔다.
"그건 절대로 아니 되느니라!"
카렌이 빠지면 '연합 전선'이 붕괴된다.
연합 전선이 붕괴되면 고아들과 한 세트로 묶여있던 알레시아도 나가리 된다는 소리였다.
알레시아는 카렌의 어깨를 흔들며 어떻게든 카렌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주려고 했다.
허나 알레시아의 노력에도 카렌은 여전히 고민이 깊어 보였다.
*
세상 만사가 긍정적으로만 돌아가면 참 좋겠다만.
본디 세상 이치가 빛이 있으면 어둠 또한 따라오는 법이었다.
물자가 미친듯이 쏟아져 들어오며 피난민들은 궁핍한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으나, 그 이후로 오시리스 백작령 주민들의 역차별 논란이 불거졌다.
정확히는, 등 따숩게 지내는 피난민들을 보고 오시리스 백작령 주민들이 강한 불만을 품게 되었다.
피난민이랍시고 자리를 차지한 것들이 룰루랄라 꿀을 빨고 있으니 주민들 입장에서는 속이 뒤틀릴만했다.
허나 피난민들을 향한 물자는 레이가 끌어온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또한 막대한 물자가 오시리스 백작령에 풀리면서 물가가 안정되게 되었기에 오시리스 백작령 주민들도 많은 이득을 보았다.
레이가 아니었다면 오시리스 백작령 주민들도 지금보다 훨씬 궁핍한 생활을 보냈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평균적인 교육 수준이 낮은 오시리스 백작령 주민들은 대부분 거기까지 생각이 돌아가지 않았다.
그들은 그냥 겉만 보고 피난민들을 향한 혐오를 내비쳤다.
당장은 대놓고 표출되지 않았으나 불만은 쌓이는 중이었다.
개전 소식이 알려지고 이틀 뒤, 해가 넘어가려면 두어 시간 정도 남았을 때쯤.
오시리스 백작령의 허름한 술집에서도 불만 어린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시발, 그 좆 같은 쥐새끼들!"
"우리한테 돌아와야 할 걸 그 새끼들이 죄다 갉아먹고 있잖아!"
"다 죽여버려야 돼!"
마을 청년들과 중년들이 옹기종기 모여 술을 마시며 불만을 토로했다.
허름한 술집인 만큼 신분이 높은 사람은 없었기에 다들 쉽사리 감정을 드러냈다.
"우리가 아주 호구인 줄 알아."
"쥐새끼들 배를 갈라서 먹은 걸 다 토해내게 해야 된다니까."
"백작님께서는 대체...!! 후우..."
아무리 가슴이 답답해도 귀족을 함부로 모욕했다간 또 나중에 어떻게 문제가 될지 몰랐다.
결국 술집 안의 주민들은 오시리스 백작을 잠깐 운운하다가 다시 피난민들을 욕했다.
피난민들을 향한 분노를 안주 삼아 술을 들이켜길 한참.
취기가 올라 판단력이 흐려져 갈 때쯤 한 청년이 혀를 찼다.
"그 쥐새끼들 요즘은 여행이라도 온 것처럼 바닷가도 돌아다니더라?"
"바다 구경은 시발..."
광활한 해안가는 오시리스 백작령 주민들의 자랑거리였다.
허나 그곳을 피난민들이 밟고 돌아다닌다고 생각하니 속이 배배 꼬이는 것 같았다.
욕설이 이어진 끝에, 벤이라는 이름을 가진 청년이 술병을 강하게 내려놓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씹새끼들이 거기가 어디라고 발을 들여...! 본때를 보여줘야 한다니까?"
"그래, 본때를 보여줘야지!"
"아주 조져버려야해!!"
다들 벤의 주장에 호응했다.
쏟아지는 환호가 벤의 감정을 고양시켰다.
열기가 오른 벤은 결국 피난민을 조져버리겠다며 평소 같이 어울리던 무리들을 데리고 술집을 박차고 나왔다.
벤이 술집의 출입문에 서서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조져버리러 가자!!!"
"우와아아!!!"
벤을 바라보던 이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술을 급하게 퍼마신 탓에 다들 그리 제정신은 아니었다.
그리 꼴값을 떤 다음에 그냥 집에 들어가서 잠들어도 되었지만...
그날 따라 술이 독했던 탓인지 벤의 무리들은 실제로 바닷가를 찾아갔다.
해가 지는 해안가에서는 피난민처럼 보이는 가족들이 모래사장을 걷는 모습을 드물게나마 확인할 수 있었다.
"..."
"..."
"..."
처음 기세만 보면 당장 피난민에게 달려들어 주먹질을 할 것 같았던 청년들은 막상 해안가에 도착하자 서로 눈치를 보았다.
바닷바람을 맞고 깨어난 이성이 뒤늦게 청년들의 마음을 쫄리게 만들었다.
그래도 자존심 때문이라도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었다.
벤은 고심 끝에 해안가에 굴러다니는 주먹만한 돌을 주워들었다.
"야, 이걸로 던져서 맞추면 되잖아."
"오...!!"
해안가에 돌멩이는 넘쳤났다.
누가 돌을 주워 던졌는지 돌만 보고 어떻게 파악할 것인가.
먼 거리에서 돌을 던져서 맞추면 얼굴을 내보이지 않고도 피난민을 공격할 수 있었다.
"아주 죽여버려야 돼."
돌을 던져 표적의 머리를 깨부숴 놓는다면 앞으로 쥐새끼들은 바닷가에 얼씬도 하지 않을 것이다.
다들 좋은 생각이라고 벤을 칭찬하며 날카로운 돌들을 주워들었다.
무기가 생겼으니 이제 적절한 표적을 물색해야 했다.
주변에 목격자가 있으면 안 되니, 외진 곳에 돌아다니는 개인이나 가족을 노려야 했다.
그렇게 열심히 물색한 끝에 청년들은 괜찮은 표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청년들이 발견한 표적은 바닷가를 걸어가던 3인 가족이었다.
여자와 아이는 신경 쓸 것도 없었고, 두 사람과 함께 걷고 있는 남자는 참... 갱년기가 온 힘 없는 노인을 그림으로 그려 가져다 놓은 것 같았다.
표적의 외관을 보고 자신감을 얻은 벤은 가장 먼저 돌을 들어 올렸다.
표적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