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6화
본래라면 상황이 훨씬 열악해야 했지만.
레이의 활약 덕분에 피난민들은 얼어 죽거나 굶어 죽을 걱정을 덜을 수 있었다.
며칠에 걸쳐 숙소를 배정받은 뒤, 피난민들을 큰 혼란 없이 질서를 유지하며 생활했다.
질서를 유지하는 데는 피난민들의 평균적인 의식 수준이 높았던 덕도 있었지만 지미 패밀리의 활약이 컸다.
그렇게 심각한 문제들은 어떻게든 해결되었으나 피난민들은 여전히 고달픈 신세이긴 했다.
숙소의 숫자가 부족했기에 피난민들은 작은 공간에 옹기종기 모여 생활해야 했다.
사적인 공간 따위는 생각할 수도 없었고, 기껏해야 몸을 누인 채 뒤척일 수 있는 공간 정도만 확보할 수 있었다.
피난민에게 지급되는 식량도 결코 풍족하지는 못했다.
전쟁을 앞두고 오시리스 백작가 또한 상황이 좋지만은 못했기에 피난민에게 배급할 수 있는 식량은 한계가 있었다.
필립스 백작이 자기 재산까지 풀어 피난민들을 지원했으나 그 역시 한계가 있었다.
자그마한 숙소에서 부족한 식사를 하며 타지 사람들의 눈치를 보는 생활을 이어가다 보니 피난민들은 정신적으로 많은 피로를 느꼈다.
자그마한 갈등 탓에 서로 다툼이 발생하는 경우가 잦아졌고 전염병도 걱정되는 상황이었다.
허나 어쩔 수 없었다.
애초에 풍족한 생활을 즐기려 피난을 온 것은 아니지 않은가.
조금 힘들다 해도 전쟁이 끝날 때까지는 견뎌낼 수밖에 없었다.
레이가 나선다고 해도 더 이상 무언가를 해주기는 힘들었고 피난민들 또한 이 정도면 감지덕지라는 걸 인지하고는 있었다.
그런데.
이변이 찾아왔다.
주변 지역에서 대규모 물자가 오시리스 백작령으로 공급되기 시작한 것이었다.
처음에 오시리스 백작은 물자를 끌고 다가오는 이들을 보며 대형 상단이 웃돈을 받고 물자를 거래하러 왔나 싶었다.
하지만 오시리스 백작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안녕하십니까."
물자를 가져온 이들 중 대표로 나선 아르파가 오시리스 백작과 접견했다.
아르파는 어깨에 힘이 가득 들어간 채 오시리스 백작과 인사를 나누었다.
"마티아스 후작님께서 전하라 하셨습니다."
아르파는 오시리스 백작에게 마티아스 후작의 서신을 건넸다.
서신에서 마티아스 후작은 고난을 맞이한 필립스 백작령의 제국민들을 가엽게 여기고 있으며 그들을 수용하겠다고 자처한 오시리스 백작에게 크게 탄복했다고 밝히고 있었다.
서신의 내용을 구두로도 반복한 아르파가 마티아스 후작의 뜻을 강조했다.
"마티아스 후작님께서는 황제 폐하를 모시는 제국의 귀족으로서 의무를 다하고 싶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르파는 계속해서 입을 놀렸다.
오시리스 백작의 측면 방향에 앉아 있던 레이가 아르파를 빤히 쳐다봤지만, 아르파는 얼굴에 철판을 깔고 모른 척을 했다.
레이는 아르파를 바라보다 속으로 실소했다.
'마음이 급했나 보군.'
마티아스 후작가.
썩어도 준치라고, 근 몇 년 사이 마티아스 후작가가 휘청거린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 근본이 어디 간 것은 아니었다.
마티아스 후작가는 여전히 막대한 자산을 굴리고 있었고 가문을 이끄는 마티아스 후작 또한 정무 감각이 나쁜 편은 아니었다.
마티아스 후작이 생각하기에, 레이가 마티아스 후작가에 강한 적대감을 지니고 있다면 그건 굉장히 부정적인 일이었다.
당장은 괜찮다 해도 추후 레이의 적대감이 마티아스 후작가의 미래에 어찌 영향을 끼칠지 누구도 확신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레이의 적대감은 기회가 왔을 때 빠르게 해소시켜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그 와중 마티아스 후작가는 레이가 고향에 강한 애정을 품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신분을 가리지 않고 고아들까지 주워다가 키울 만큼, 레이는 고향과 고향을 살아가는 주민들을 사랑했다.
마티아스 후작가 내에서는 레이의 신분과 자라온 환경이 천해 저리 꼴값을 떤다고 뒷말이 무지하게 나오긴 했지만...
어쨌든 이용할 수 있는 건 이용해야 했다.
그런 이유로 결국 마티아스 후작은 '물자 공세 계획'을 승인했다.
레이가 정녕 고향을 사랑한다면 고향 사람들이 물자가 부족해 고난을 겪는 와중에 개인적인 감정 때문에 마티아스 후작가의 지원을 거부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런 전제하에 시행된 계획이었다.
물론 이 계획은 그야말로 돈지랄이었다.
전쟁 때문에 물자 값이 종류를 가리지 않고 날뛰는 중 아니던가.
최근 마티아스 후작가의 사정도 별로 좋지 못한데 이렇게 물자를 매입해 쏟아붓는 건 마티아스 후작가 입장에서도 엄청난 출혈이었다.
그러나 결국 마티아스 후작은 계획을 진행시켰다.
마티아스 후작가의 신용을 내세워 오시리스 백작령 주변 지역의 물자를 매입해 깡그리 밀어 넣기를 명령한 것이다.
만약 레이가 마티아스 후작가의 지원을 순순히 받는다면, 후작가를 향한 적대감을 누그러뜨릴 수밖에 없었다.
받아 먹은 걸 아예 무시할 수는 없을 테니 추후 '혈연관계'에 대해 다시 이야기할 수도 있을 터다.
그것만으로도 투자 가치는 충분했다.
"후후후..."
아르파는, 레이가 마티아스 후작가의 물자 지원을 거부할 기색을 보이지 않자 음침한 웃음을 흘렸다.
비록 출혈은 컸지만 계획대로 일이 흘러가고 있음을 확인한 아르파는 희열을 느꼈다.
레이는 그 꼴을 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손해 보는 장사를 하네.'
장기적으로는 마티아스 후작의 판단이 옳았다. 그러니까, 레이가 오래 살 수만 있다면 말이다.
그러나 대단한 기적이 일어난다 해도 레이는 그리 오래 살 수 없었다.
그러니 마티아스 후작가는 그냥 가만히만 있어도 되는 걸 굳이 돈을 쏟아부었다는 의미였다.
'하하...'
레이는 상황이 어처구니가 없어 피식 웃었다.
귀족 가문의 자존심 좀 내세운다고 벨라에게 푼돈 좀 뜯었다가 엄청난 출혈을 감수하게 된 꼴 아닌가.
당시에는 누구도 지금과 같은 상황을 예상하지 못했을 테니 마티아스 후작가 입장에선 운이 나빴다고 표현해도 크게 틀린 소리는 아니었다.
레이의 표정이 좋아 보이자 아르파 또한 자신감을 얻었다.
이번에 후작님께 보고할 때는 집무실의 집기가 깨져나가는 소리는 듣지 않아도 될듯싶었다.
그렇게 겉으로는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물자 양도가 이루어졌다.
그 덕분에 필립스 백작령의 피난민들은 숨통을 트게 되었다.
그후 아르파는 오시리스 백작령을 떠나기 전에 레이에게 마차 한 대를 은밀하게 선물하고 갔다.
마차 안에는 당연히 값비싼 재화가 가득했다.
레이는 마차 안의 재화를 또 누구에게 어떻게 나눠줘야 하나 고민해야 했다.
그렇게 각자가 만족하며 상황은 정리되는 듯했지만...
하나 문제가 있었다.
일이 거기에서 안 끝났다는 것이었다.
*
마티아스 후작가가 요즘 비실비실 대고는 있다만.
그럼에도 마티아스 후작가는 제국의 명문가로서 넓은 지역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당연히도 많은 이들이 마티아스 후작가의 행적을 항상 신경쓰고 있었다.
그런데, 마티아스 후작가가 갑작스레 엄청난 출혈을 감수하고 막대한 물자를 오시리스 백작령에 제공했다.
심지어 오시리스 백작령은 최전방도 아니었기에 황제에게 충성을 증명하기 위한 조치라고 보기도 힘들었다.
그렇기에 다들 마티아스 후작가의 목적을 알아내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 과정에서 많은 이들이 레이의 존재를 특정했고, 레이가 고향 사람들을 지극히 아낀다는 정보 또한 얻어낼 수 있었다.
헌데 마티아스 후작가가 레이의 마음을 얻기 위해 왜 그렇게까지 출혈을 감내했을까?
답은 어렵지 않게 나왔다.
레이는 아직까지 작위를 받지 못했다.
100년에 한 번 수여될까 말까 한 제국 수호 훈장은 받았는데 작위는 받지 못했다. 겉으로 보기에 정말 우스운 일이었다.
황제는 대체 왜 이런 조치를 취한 것일까?
둘중 하나였다.
레이를 토사구팽할 생각이든가, 아니면 레이를 황가로 편입시킬 생각이든가.
레이가 토사구팽 당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외하면 10년 안에 레이는 황가로 편입될 확률이 높았다.
황제가 레이에게 모로스를 손에 쥐는 것을 허락했다는 증언이 그러한 추측에 신빙성을 더했다.
그렇기에, 일단 점수를 따놓긴 해야 했다.
그걸 가장 처음 결행한 게 마티아스 후작가였고 말이다.
제국의 강대한 귀족 가문들은 선수를 따였다는 걸 깨닫고 다급해졌다.
이제까지는 서로 눈치를 보느라, 또한 황제의 속내가 신경 쓰여 함부로 레이에게 접근하지 않고 미적거리고 있었지만 마티아스 후작가가 먼저 움직인 이상 더는 미룰 수 없었다.
레이의 정체를 알고 있던 제국의 귀족 가문들은 레이에게 점수를 따기 위해 경쟁적으로 오시리스 백작령에 물자를 밀어 넣기 시작했다.
그건 인도적 지원이라기 보다는 한 없이 조공에 가까웠다.
경쟁이 과열되며 한시가 급해졌기에 대부분의 귀족 가문은 멀리서 물자를 보내기 보다는 오시리스 백작령 인근의 물자를 매입해 레이에게 보냈다.
덕분에 오시리스 백작령 인근 지역의 물가가 미친듯이 치솟으며 물자가 거덜나기 시작했다.
그러다 결국 인근 지역 몇 군데에서는 필수적인 물자조차 거덜나는 바람에 오시리스 백작령에 풀린 물자를 웃돈에 웃돈을 주고 재매입하는 웃지 못할 사태도 벌어졌다.
그꼴을 실시간으로 보며 레이는 턱을 괴고 중얼거렸다.
"...지랄났네."
마티아스 후작가가 쏘아 올린 작지 않은 공이 지금의 개판을 만들어냈다.
만약 레이의 몸이 멀쩡했다면 황제가 이꼴을 보며 꽤나 착잡해 했을 것이다.
어쨌든 물자와 선물은 계속해서 쏟아져 들어왔다.
그 상황을 레이는 마냥 좋아할 수 없었다.
이런 일이 반복될수록 레이의 신분이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그건 결국 레이가 감수해야 할 변수와 리스크가 증가한다는 뜻이었다.
"하아..."
레이가 한숨을 푹 쉬었다.
머리가 좀 아팠지만 어쨌든 당장은 상황이 긍정적이었다.
더는 필립스 백작령에서 온 피난민들이 굶주림을 견뎌낼 필요가 없었다.
도리어 필립스 백작령에 있을 때보다 더 잘 먹고 지내는 게 아닌가 하는... 그런 느낌까지 들 정도였다.
한편.
필립스 백작은 입가에 어린 환한 미소를 숨기지 못한 채 오시리스 백작과 차를 마시고 있었다.
필립스 백작은 남의 영지로 피난을 왔을 뿐인데 자기 재산이 계속해서 불어나는 아주 기이한 경험을 하는 중이었다.
다른 귀족 가문에서 필립스 백작에게도 레이에게 우리 가문 좀 잘 말해달라며 뇌물에 가까운 선물을 떠안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레이가 그냥 받으라고 했기에 필립스 백작도 부담 가지지 않고 선물을 싹싹 긁어 담는 중이었다.
오시리스 백작은 때깔에서 빛이 나는 필립스 백작을 보며 결국 아니꼬움을 참지 못하고 한 마디 했다.
"팔자 피셨구려."
"아니... 오시리스 백작께서도 크게 도움을 받았잖소."
필립스 백작의 말마따나 쏟아져 들어오는 물자 덕분에 오시리스 백작도 자금난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반박할 말이 없었던 오시리스 백작이 괜히 헛기침을 하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오시리스 백작의 허가가 떨어지자 기사 한 명이 황급히 방 안으로 들어와 예를 갖추고는 보고를 올렸다.
"황제 폐하께서 진군을 명하셨다고 합니다."
전쟁이, 시작되었다.
표적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