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5화
레이가 마티아스 가문의 핏줄이다.
이는 명백한 증거가 있는 주장은 아니었다.
레이의 머리카락이 마티아스 가문에서 흔히 나타나는 흑발이긴 했지만 이것만으로 레이가 마티아스 가문의 핏줄이라 단정할 수는 없었다.
허나 마티아스 후작은 레이가 마티아스 가문의 핏줄이라 확신했다.
레이가 천박한 핏줄을 타고났다면 그만한 업적을 쌓을 수 없었으리라고, 마티아스 후작은 정말 그렇게 믿었다.
어쨌든 레이를 회유할 수만 있다면 마티아스 가문에겐 대박이었다.
문제가 있다면 어린 시절의 레이에게 마티아스 가문이 마냥 호의적이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가문 사람이라 인정해주지도 않았고 심지어 연좌제를 적용하겠다며 레이를 보호하던 벨라를 겁박하기도 했다.
다만 그 당시 마티아스 가문은 '추문'이 멀리 퍼지길 원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필립스 백작의 중재 아래 푼돈만 받고 깔끔하게 사건을 끝냈다.
이는 귀족들의 보편적인 시각에서 보자면 나름 '관대한 조치'이긴 했다.
허나 레이가 자신이 갓난아기 때 사건을 듣고 마티아스 가문에 부정적인 감정을 지녔을 수도 있었다.
그걸 다 고려해서, 마티아스 후작은 뻔뻔하게 밀고 나갈 것을 명했다.
어차피 레이가 갓난아기 때 벌어졌던 일 아니던가.
설령 누구한테 들었던 말이 있다고 해도 잘 달래서 구슬리면 어찌저찌 쌓인 감정을 해소할 수 있으리라고 마티아스 가문 사람들은 생각했다.
더군다나 마티아스 후작가의 제안은 레이에게 결코 해롭지 않았다.
레이가 앞으로 얼마나 대단한 직위에 오르든 간에 '출신 성분'은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며 레이의 발목을 붙들 것이다.
때문에 신분 세탁은 필수였으나, 특정 권세가의 양자로 들어간다 해도 눈 가리고 아웅 한다고 뒷말은 계속 나올 터였다.
하지만 마티아스 후작가와 실질적인 혈연관계에 있음이 증명된다면 레이에겐 장기적으로 대단한 이득이었다.
즉, 마티아스 후작가는 상부상조를 내걸고 레이에게 접근한 것이었다.
그런 이유로 아르파는 레이를 설득할 자신이 있었다.
조사를 통해 레이가 상당한 정치적 감각을 지니고 있다고 파악했기에 더욱 그랬다.
하지만 레이가 마티아스 후작가에 지니고 있던 적대감은 아르파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었다.
"이 씹새꺄!"
레이가 아르파에게 연거푸 폭력을 행사했다.
욕설과 함께 물건 부서지는 소리가 주점 안을 연이어 울렸다.
주점 주인은 가게 부서지는 소리를 들으며 울상을 지었다.
방 안에 있는 게 오시리스 백작가를 받드는 기사인 빅토르와 하무스였기에 감히 들어가서 말릴 수도 없었다.
불쌍한 주점 주인이 한숨을 푹푹 쉬는 사이 레이는 아르파를 걷어차며 고래고래 외쳤다.
"니들이 나까지 잡아죽이겠다고 하는 걸 내가 두눈을 시퍼렇게 뜨고 봤는데 어디서 개수작이야?!!"
그거 너 갓난아기 때 이야기인데 뭐 어떻게 두눈을 시퍼렇게 떴다는 거냐, 아르파는 그렇게 따져 묻고 싶었지만 눈치껏 입을 다물고 처맞는 데 집중했다.
레이는 손에 잡히는 대로 온갖 흉기를 휘둘렀다.
그래도 빅토르와 하무스가 끈질기게 레이를 뜯어 말려준 덕분에 아르파는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한참 동안 아르파를 쥐어팬 후.
숨을 몰아쉬며 간신히 진정한 레이가 다시 의자에 앉았다.
"하아... 야, 너도 앉아봐."
"..."
아르파가 눈치를 보다가 낑낑거리며 일어나 의자에 앉았다.
레이는 거의 다 박살 난 술병 중 간신히 멀쩡한 것을 하나 골라 술잔에 가져다 대며 입을 열었다.
"마티아스 후작님께 전해."
"..."
"내가 마티아스 가문에 개인적인 악감정은 좀 가지고 있어."
마티아스 가문 입장에선 작은 꼬장이었을지 모르나 그로 인해 벨라는 창관에 종속되게 되었다.
이는 금전적인 종속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기 동생을 위해, 그리고 동생이 남긴 아이를 위해 너무 오래 창관에 있었다.
그럼으로써 그녀의 모든 인간 관계와 사회적 관계는 창관 안에서 이루어지게 되었고, 결국 창관이 벨라의 세계가 되었다.
그 시점부터, 창관을 떠난다는 것은 벨라에게 있어 모든 관계의 단절을 뜻하게 되었다.
벨라는 그것을 두려워했다.
무엇하나 제대로 배운 것이 없던 벨라는 자기 세상을 부수고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갈 자신이 없었다.
레이는 그런 벨라를 이해했고, 또한 벨라의 삶을 부정할 수 없었기에 벨라를 창관에서 억지로 끌어내지 못했다.
그건 틀린 선택은 아니었다.
물질적 풍요만이 삶의 행복을 결정하지는 않기에.
누군가에겐 더럽고 추잡한 일이 누군가에겐 정신을 지탱할 프라이드가 될 수 있기에.
레이가 벨라를 억지로 창관에서 끌어냈다면 벨라는 결코 자주 웃지 못했을 것이다.
결국 벨라는, 레아가 태어나고 나서야...
진정 과거의 종속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상에 발을 내디딜 수 있었다.
그래서 레이는.
레아를 살려야만 했다.
"...내가 마티아스 가문에 개인적인 악감정은 지니고 있지만."
레이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내 사적인 감정 때문에 제국의 한 축을 담당하는 훌륭한 가문과 대립하거나 적대할 생각은 없어. 불이익을 줄 생각도 없고. 다만..."
깨진 술병을 집어든 레이가 탁자 위를 긁어내서 자신과 아르파 사이에 선을 그었다.
"내 이름 팔아먹을 생각은 하지 마. 이해해?"
"..."
"내 생부의 성함은 에반이야. 만약 헛소문 같은 게 돈다면, 그때는 나도 가만있지 않을 거야. 후작님께 그렇게 전해 드려."
"..."
"그만 가 봐."
"예, 실례했습니다."
아르파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살짝 비틀거리더니 이내 균형을 잡고 방을 떠났다.
난장판이 된 방 안에는 침묵이 내려앉았다.
빅토르와 하무스가 서로 눈치를 보는데, 레이가 혀를 차며 툴툴댔다.
"너무 신경 쓰지는 마. 내 가정사가 좀 복잡해."
"어... 그래 보이네..."
빅토르가 눈치 없이 고개를 주억거리자 하무스가 빅토르의 옆구리를 강하게 찍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레이는 술을 홀짝이며 짜증스럽게 중얼거렸다.
"애비가 많으면 이게 문제라니까."
대체 애비가 얼마나 많길래 저런 소리를 하지?
빅토르와 하무스는 굉장히 궁금했지만 차마 물어보지는 못했다.
그렇게 혼자 술을 홀짝이던 레이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품에 손을 넣었다.
"..."
"아, 맞다. 훈장 구경할래?"
마른 침을 삼키고 있던 빅토르와 하무스가 사레에 들려 쿨럭거렸다.
*
잔잔한 파도가 너울진다.
내륙에서는 보기 힘든 풍경을 바라보며 레이가 세리아와 함께 바닷가를 걸었다.
세리아는 맨발로 모래의 질감을 느끼며 잔잔하게 웃었다.
사실은, 조카가 좀 더 어렸을 때 같이 여행을 떠나 여러 장소를 체험시켜주고 싶었다.
허나 상황이 잘 받쳐주지 않았다.
세리아는 장래에 레이를 도와주기 위해서라도 힘을 기르고 자기 위치를 잡아야 했다.
그래서 세리아는 조카의 곁을 계속 지켜주지 못했지만, 너무나도 뛰어난 조카는 세리아의 도움 없이 홀로 재능을 꽃 피우고 세상에 이름을 알렸다.
그렇기에 세리아는 뒤늦게나마 조카와 함께 바닷가를 걸으며 흐뭇함을 느꼈다.
"..."
"..."
할 이야기가 있다며 시간을 만들어 달라고 먼저 부탁한 건 레이였다.
레이는 차가운 바닷바람을 느끼다가 내키지 않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고모, 마티아스 후작가 말이에요..."
"..."
세리아는 잠깐 멈춰 섰다가, 다시 모래사장을 걸었다.
세리아가 약간 앞서 있었기에 레이는 세리아의 표정을 살필 수 없었다.
갈등하던 레이가 턱을 긁적이며 말을 이었다.
"마티아스 가문 사람이 절 찾아왔었어요. 아버지 문제로요. 제가 마티아스 가문의 혈육일 수 있다고... 그래서 저는... 그쪽 가문이랑 상관 없다고, 다시는 찾아오지 말라고 돌려보냈는데... 고모께는 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어, 음..."
레이는 할 말이 궁하다는 걸 느꼈다.
세리아에게 무엇을 전하고 싶은지, 레이 스스로도 명확히 표현하기가 힘들었다.
"그러니까... 고모께서는... 마티아스 후작가가 미우신가요...?"
"..."
세리아는 말 없이 계속 걸었다.
마티아스 후작가가 밉냐고...? 글쎄...
"..."
에반.
나의 오빠이자 나의 보호자이자 나의 유일한 가족.
그가 죽었다.
그의 죽음을 알았을 때 세리아는 격렬한 분노와 증오의 감정을 느꼈다.
오빠의 죽음에 관여한 죄인들이 있다면 당연히 죗값을 치르게 만들어야 했다.
하지만, 오빠의 죽음에 관여한 직접적인 당사자들은 이미 오빠의 손에 죽었다.
그럼 대체 누구를 탓해야 한단 말인가.
오빠의 아내를 길러 낸 벨라를 탓해야 할까?
오빠의 아내와 불륜을 저지른 놈이 속해 있던 마티아스 후작가를 탓해야 할까?
제대로 된 수색도 않고 오빠에게 나의 전사 통지서를 보내 오빠를 절망케 한 알슈테인 공작가를 탓해야 할까?
그도 아니면...
분수에 맞지 않는 욕심을 부리느라 오빠의 부담을 가중시키고 오빠의 곁도 지키지 못한 나 자신을 탓해야 할까.
"..."
고향에 돌아왔을 때 남아있던 건 오빠의 무덤을 지키던 조카 한 명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세리아는 갈 곳을 잃은 분노와 증오를 밀어내기로 결심했다.
그 대신에, 오빠가 마지막으로 남긴, 또한 오빠를 마지막까지 돌보던 조카를 사랑하기로 했다.
단지 그뿐이었다.
"조카."
세리아가 등을 돌려 레이에게 손을 뻗었다.
주물주물, 아이 다루듯 레이의 뺨을 매만진 세리아가 레이의 얼굴 여기저기에 뽀뽀를 해왔다.
이럴 때마다 레이는 낯부끄러워 죽을 맛이었지만,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도 세리아의 뽀뽀 세례를 견뎌냈다.
충분히 뽀뽀를 퍼부은 세리아가 레이의 뺨을 잡고 말했다.
"괜찮아. 조카가 있으니까."
"..."
레이는 참 뒤늦게도 세리아가 마음에 걸렸다.
벨라에게는 이제 레아가 있었다.
보육원에서 성장한 다른 아이들은 서로가 가족과 마찬가지였다.
허나 세리아에게 남은 가족은 이제 레이 한 명이었다.
레이는 그 점을 너무 간과한 것은 아닌지, 뒤늦게 곱씹었다.
한편 세리아는 레이의 뺨을 몇 번 더 쭈물거리다 완력으로 레이를 잡아올렸다.
어어 하는 사이에 목말을 타듯 세리아의 어깨 위에 올라타게 된 레이가 빽 소리쳤다.
"아니 고모!!"
덩치는 레이가 세리아보다 조금 더 컸다.
세리아도 고강한 기사인 만큼 레이를 목말 태우는 것이야 전혀 부담될 게 없었지만, 남들 보기에는 영 좋지 못했다.
레이가 나 좀 내려달라고 꽥꽥 소리쳤지만 세리아는 레이가 불만을 토로하든 말든 모래를 밟고 걸으며 레이에게 지시했다.
"만세."
"..."
"조카, 만세."
"..."
레이가 기운이 빠져 축 처져 있다가 결국 두 손을 하늘 높이 들어 올렸다.
그러자 세리아가 속도를 높여 바닷가를 달리기 시작했다.
바닷바람이 불어오자 레이는 힘 빠진 목소리로 애처럼 우아아아 비명을 질러댔다.
아이들을 데리고 바닷가에 나온 부모들이 그 모습을 보며 저들끼리 웃었다.
*
아르파는 오시리스 백작령에 동행했던 고위 마법사의 도움을 받아 마티아스 후작에게 연락을 넣었다.
아르파의 보고를 받은 마티아스 후작은 한동안 집무실의 물건을 집어 던지느라 바빴다.
이것저것 부서지는 소리를 전해 들으며 아르파는 레이가 역시 마티아스 가문의 핏줄임을 확신했다.
한편 간신히 마음을 진정시킨 마티아스 후작이 아르파에게 전했다.
[후우... 이 수단만큼은 쓰지 않으려 했거늘...]
"...진행합니까?"
[진행해!!]
마티아스 후작이 버럭 소리쳤다.
가정사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