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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등가의 소드마스터-274화 (274/446)

274화

빅토르와 하무스는 고급 주점에서 방을 잡고 레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두 사람 다 이제는 서임을 받은 기사이자 더 높은 경지를 개척할 수 있으리라 기대받는 오시리스 백작령의 인재였다.

빅토르와 하무스는 레이를 기다리며 레이와 처음 만났을 때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뭐 그런 놈이 다 있나 싶었는데."

"그때 이미 완숙한 엑스퍼트 이상이었잖아."

"진짜 황당해가지고..."

두 사람의 기억 속에 레이는 상식을 까마득히 벗어난 범상치 않은 인재로 남아있었다.

그렇기에 레이가 베일에 가려져 있던 제국 수호 훈장의 주인이었음을 동료 기사에게 언질받았을 때도 크게 놀랍지는 않았다.

"아... 근데 괜히 들뜨네."

빅토르가 멋대로 새어나오는 웃음을 억지로 삼켰다.

질투는커녕 함부로 동경하기조차 힘들 만큼 잘난 놈이 먼저 얼굴 좀 보자고 연락을 해주었다고 생각하니 괜시리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그건 하무스도 마찬가지여서, 실룩이는 자기 입꼬리를 손으로 꼬집어야 했다.

기다림 끝에 마침내 레이가 주점에 도착했다.

발걸음 소리를 듣고 자리에서 일어난 빅토르와 하무스는 레이에게 어떻게 인사를 건네야 하는지 뒤늦게 고민이 되어 서로를 마주 봤다.

허나 생각을 정리할 새도 없이 레이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둘 다 오랜만이야."

"어, 어어... 오랜만이야."

"오, 오랜만이네."

빅토르와 하무스는 무심코 반말로 대꾸했다가 레이의 눈치를 살폈다.

허나 레이는 전혀 개의치 않고 자기 자리를 찾아 앉았다.

빅토르와 하무스도 안심하며 다시 자리에 앉는데, 열려 있던 문으로 처음 보는 남자가 레이를 따라 방에 들어왔다.

빅토르와 하무스가 눈을 깜박이며 레이가 동행인을 소개시켜주길 기다렸다.

허나 레이는 동행인을 쳐다보지도 않고 술병부터 열었다.

"그동안 잘 지냈냐?"

"어어, 잘 지냈어."

"잘 지냈으면 다행이고. 이제 둘 다 서임 받은 거야?"

"어, 빅토르도 서임 받아서, 이제 우리 둘 다 기사야."

"잘 됐네. 축하해, 빅토르."

"하하, 고마워."

"근데... 얼굴 보자마자 미안한데, 부탁이 있어."

레이가 술을 잔에 졸졸 따르며 말을 이었다.

"일단 이 안에서 나눈 대화는 바깥에 가져가지 않는 걸로. 괜찮지?"

"뭐? 아, 응. 알겠어. 걱정 마. 기사의 명예를 걸고, 그렇게 할게."

"고마워. 그리고 혹시 나 좀 말려야겠다 싶으면 둘이서 같이 잘 뜯어말려 줘."

"?"

뜯어말려 달라고?

빅토르와 하무스는 레이가 하는 말을 이해 못하고 얼을 타다 자리가 어색해지려 하자 레이의 동행인을 돌아봤다.

"근데 이분은 누구셔...?"

"마티아스 후작가에서 오셨다네."

"..."

빅토르와 하무스의 안색이 나빠졌다.

자세한 사정까지는 모르지만, 몇 년 전에 레이는 마티아스 후작가라면 아주 발작을 했다.

갑자기 발작하며 사고를 치려던 레이를 뜯어말려본 경험이 있는 두 사람은 긴장을 팍 끌어올렸다.

한편 레이는 마티아스 후작가가 보냈다는 남자에게 손가락을 까닥였다.

"하고 싶은 이야기 있으면 여기서 해."

"여기서 말입니까...?"

빅토르와 하무스의 존재 탓에 잠깐 뜸을 들인 남자가 결국 입을 열었다.

"너무 놀라지 마십시오, 레이 님."

"..."

"레이 님께선... 마티아스 후작가의 핏줄이십니다...!!"

"..."

"레이 님께서 지니신 밤하늘처럼 아름다운 검은 머리카락이 이 사실을 방증합니다!"

"..."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처음엔 심각한 얼굴로 이야기를 듣던 하무스가 턱을 괴며 말했다.

"레이, 이놈 사기꾼 같은데?"

"뭣...! 그 무슨 망발이오?!"

"이름 좀 날렸다 싶으면 꼭 이런 사기꾼이 꼬인다니까? 사돈의 팔촌이니 뭐니 혈연이라고 떠들면서 등쳐먹으려 드는 놈들. 수법이 아주 뻔해. 변하지를 않아, 변하지를."

세간에서 유명한 사기꾼들의 수법 중 하나가 거짓 혈연을 내세우는 것이었다.

하무스가 보기에 눈앞의 남자는 딱 사기꾼의 전형이었다.

빅토르 또한 하무스의 주장에 동의하며 혀를 끌끌 찼다.

"담대하긴 하네. 사칭해도 마티아스 후작가를 사칭해? 마티아스 후작가에 알려졌다간 바로 목이 잘릴 텐데."

"이보시오, 나는 그런 저열한 사기꾼이 아니오!!"

사기꾼이다, 사기꾼이 아니다, 세 사람의 목소리로 방안이 금방 시끄러워졌다.

그 속에서 레이는 두손으로 마른세수를 하며 중얼거렸다.

"아, 좆 같네."

*

남자의 이름은 아르파.

젠트리 계층인 그는 마티아스 후작의 심복 중 한 명으로 '민감한 잡무'들을 담당하고는 했다.

마티아스 후작가는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명문가였지만 요새는 상황이 좀 힘들었다.

황위 계승 때 줄을 탄 것이 치명적이었다.

다행히도 줄을 잘못 탄 것치고 아주 심대한 타격을 받지는 않았으나 그럼에도 엄청난 출혈을 감수해야 했다.

현재 마티아스 후작가는 가문을 보존하기 위해 잔뜩 수그린 채 충실히 제국의 일을 돕고 있었다.

헌데 최근, 황도에 머물던 마티아스 가문 사람으로부터 레이에 관한 정보가 입수됐다.

당연히 마티아스 후작은 베일에 감싸여 있는 제국 수호 훈장 수여자에 관해 조사해보라 명령했다.

그렇게 조사를 진행한 끝에 마티아스 가문은 큰 어려움 없이 레이의 존재를 특정할 수 있었다.

그런데 조사 결과.

레이가 마티아스 후작가의 피를 이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 발견됐다.

이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가 혈연이었다.

마티아스 후작가는 레이와 끈끈한 연을 만들 기회를 결코 놓칠 수 없었다.

이미 황실, 프리슬란 후작가, 알슈테인 공작가가 레이에게 눈독을 들이고 있었기에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긴 어려웠지만.

그래도 레이를 마티아스 가문의 사람이라 주장할 수만 있다면 엄청난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

레이와의 관계를 어떻게든 '정상화'시켜야 했다.

성공만 한다면 마티아스 가문에게는 그야말로 대박이었다.

그래서 마티아스 후작은 레이에게 아르파를 파견했다.

아르파는 레이를 어떻게든 잘 구슬려서 마티아스 후작과 만남을 가질 수 있게 만들어야 했다.

"신이 도우셔서 우리의 인연이 이렇게 닿게 되었습니다."

"..."

"마티아스 후작님께서 레이 님을 한번 뵙고 싶어 하십니다."

"..."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하잖습니까. 오랜 기간 단절되었던 관계를 바로 회복하긴 힘들겠지만, 그래도 뿌리라는 것은 바뀌지 않는 법입니다."

"..."

레이가 뚱한 얼굴로 아르파를 보았다.

아르파는 레이의 허락을 받고 준비해두었던 말을 이것저것 떠들고 있었지만 당연히 레이에겐 전혀 와닿지 않았다.

'하아...'

레이가 한숨을 삼켰다.

레이는 이 세계를 21세기 대한민국을 살아갔던 전생의 사고관으로 재단하려 들지는 않는 편이었다.

살아가는 세계가 다른 만큼 보편적인 상식, 감수성, 윤리 의식 또한 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레이는 특권 계층에 속한 귀족들이 피난민들이 얼어 죽는 걸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해도 그들을 무작정 악인으로 규정하지는 않았다.

마티아스 후작가와 관련된 일 또한 마찬가지였다.

물론, 레이는 마티아스 후작가를 싫어했다.

마티아스 이름만 들어도 짜증과 분노가 치솟을 만큼 감정이 좋지 못했다.

'진짜 좇 같아서...'

지금으로부터 20년 전쯤.

마티아스 가문 출신의 젠트리가 남의 여자나 후리고 다니다가 도끼에 대가리가 깨져 죽었다.

정확히는 평민이 휘두른 도끼에 대가리가 깨져 죽었다.

마티아스 후작가는 그 사건 탓에 가문의 위신이 상했다며 역정을 냈다.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제국에 존재하는 어느 귀족가라 해도 같은 상황에 처하면 마티아스 후작가와 비슷한 반응을 보였을 터다.

그후 마티아스 후작가는 저들 입장에서는 '푼돈'을 받고 깔끔하게 사건에서 손을 뗐다.

그럼으로서 벨라 또한 레이를 지킬 수 있게 되었다.

객관적으로 보자면 그 사건을 가지고 마티아스 후작가가 특별히 악랄하게 군 것은 아니었다.

문제는 마티아스 후작가가 벨라를 들들 볶은 결과 벨라는 창관을 벗어나지 못하게 되었고, 그 눈덩이가 요리조리 굴러 결국 '레아'를 태어나게 만들었다.

레이는 귀여운 동생 얼굴이 떠오르자 일단 욕설부터 뱉었다.

"아, 시발."

마티아스 후작가가 이쪽 세계의 기준으로 악랄한 개새끼까지는 아니라 해도.

레이는 간간이 자기 감정이 원하는 대로 마티아스 후작가를 그냥 조져버릴까 고민해보기도 했다.

허나 그렇게 해서 얻을 게 없었다.

마티아스 후작가를 괴롭히면 벨라가 좋아할까? 딱히 좋아할 것 같진 않았다.

더군다나 마티아스 후작가는 꽤 오랜 역사를 지닌 거대한 가문이었다.

만약 레이가 오래 살 수 있다면 마티아스 후작가를 들쑤시며 괴롭혀도 큰 문제가 없었을 터다.

허나 레이는 오래 살 수 없다.

신나게 마티아스 후작가를 들쑤시다가 레이가 픽 죽어버리면 레이와 가까웠던 이들에게 적대 세력만 늘려주는 꼴이 됐다.

그런 불상사를 면하려면 레이가 살아있을 때 마티아스 후작가를 풀뿌리 하나 남기지 않고 멸문에 가깝게 박살을 내야 했는데, 고작 분풀이를 위해 그런 일을 벌이는 것도 웃긴 짓이었다.

"..."

이제 와서는 레이는 그냥...

마티아스 후작가를 신경 쓰고 싶지가 않았다.

자기 몸뚱이에 누구 피가 섞여 있든 레이에겐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환생한 몸뚱이에 누구 피가 섞여 있든 그게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레이는 그저 자기가 가족으로 생각하고, 자신을 가족으로 여겨주었던 이들만 앞으로도 잘 지낼 수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후우..."

호흡을 고르며 마음을 가라앉힌 레이가 아르파를 마주봤다.

"이봐."

"예, 말씀해주십시오."

"느그 가문 출신 젠트리랑 내 생물학적 애미가 눈이 맞아서 떡을 쳤다는 건 아는데."

빅토르와 하무스는 이게 무슨 말인가 싶어 레이를 돌아봤다.

그러거나 말거나 레이는 떫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나는 그쪽 가문 자식이 아니야. 내 친아버지 이름은 에반이지."

"아니..."

"그리고 우리 사이에 그다지 좋은 추억도 없잖아. 후작가에서 나 잡아 죽이겠다고 내 양어머니도 협박하며 괴롭혔으면서."

레이의 말에 아르파가 기겁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누가 그런 거짓을 레이 님께 고했단 말입니까! 이건 모함...!!"

"모함?"

강인한 인내심에 의해 간신히 붙들려 있던 레이의 눈깔이 휙 돌았다.

깡!!!

레이가 쥐고 있던 술병으로 아르파의 대가리를 내리쳤다.

술병이 박살나며 아주 맑은 소리가 방안을 청량하게 울렸다.

레이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곧장 탁자를 뒤집어엎으며 외쳤다.

"이 씹새꺄, 내가 두 눈으로 똑똑히 봤는데 어디서 약을 팔아?!!"

"야야야야야!!!"

레이가 깨진 술병을 돌려잡고 아르파의 대가리를 찍어버리려 하자 이번엔 빅토르와 하무스가 기겁하며 달려들어 레이의 팔다리를 붙들고 늘어졌다.

한동안 물건 박살나는 소리와 세 사람의 고성이 주점 안에서 울려퍼졌다.

가정사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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