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3화
도리안은 황도 습격 사태 당시 방위전에 참전했었다.
비록 레이와 이렇다할 대화조차 나누지 못했지만 그날 도리안은 레이와 같은 전장 위에 서 있었다.
그렇기에 도리안은 레이의 용모를 기억하고 있었는데, 생각지도 못했던 장소에서 갑자기 레이가 나타나니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무슨...!'
레이의 정체를 알아챈 도리안은 거의 반사적으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레이에게 뛰어가서 속삭였다.
"이리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헌데 여기까지는 대체 어쩐 일로..."
레이가 제국 수호 훈장 수여자라는 사실은 대외적으론 비밀이었기에 도리안은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그러자 레이가 무뚝뚝하게 답했다.
"아, 별건 아니고. 여기 건물 좀 비워."
"예? 건물을... 말입니까?"
순간 도리안은 레이가 별채를 혼자 쓰려고 건물을 비우라 명령하나 싶었다.
좀 과하긴 했지만, 레이가 제국 수호 훈장 수여자임을 고려하면 못할 요구도 아니긴 했다.
한편 파티에 참석한 자들의 시선이 점점 더 레이와 도리안을 향해 쏠렸다.
황실 직속 기사단의 단원이라면 제국에서도 알아주는 엘리트였다.
설령 타고난 배경이 좀 모자란다 해도 그들은 황제의 명을 가까이서 받드는 존재였다.
때문에 그들은 나쁜 의미로든 좋은 의미로든 먼저 저자세를 취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시피 했다.
헌데 누가봐도 도리안은 갑자기 별채로 쳐들어온 청년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파티에 참석한 자들은 도리안의 태도를 보며 호기심을 드러내면서도 만약을 위해 자세를 고쳐 앉았다.
다른 이들의 관심 속에서 레이는 술잔을 바꿔 들고 홀을 걸으며 말을 이었다.
"피난민을 수용해야 해."
"피난민을... 말입니까?"
피난민을 수용해야 하는데 별채를 왜 비워야 한단 말인가.
도리안은 아직까지도 영주성 별채 안에 피난민을 들일 수 있다는 사고 자체를 못하고 있었다.
레이는 그런 도리안을 보며 눈살을 살짝 찌푸리더니 술잔을 기울였다.
"오시리스 백작이 공을 많이 들이긴 했는데, 전쟁이 앞당겨져서 피난민을 수용할 준비가 완전히 갖춰지지 않았어."
레이는 그래도 오시리스 백작을 옹호해주었다.
실제로 오시리스 백작이 '나름' 공을 들여놓기도 했고, 필립스 백작령과 가까이 있는 영지를 다스리는 오시리스 백작과 굳이 날을 세워봤자 좋을 게 하나도 없었다.
"피난민을 수용할 숙소가 부족한데, 이 날씨에 맨땅에서 열흘씩 밤을 지새우게 하면 얼어 죽기 좋잖아. 안 그래?"
"예... 그렇겠죠...?"
"그러니까 쓸데없이 자리 차지하고 있지 말고 건물 비우라고."
"..."
도리안은 드디어 레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정확히 알아들었다.
레이는 지금 별채를 피난민에게 내주겠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도리안은 솔직히, 남의 영지민들이 추위에 덜덜 떨다 몇 명 얼어 죽는 것쯤은 결코 큰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특권 계층들에게 그건 사소한 문제에 가까웠다.
허나 레이가 문제 삼는다면, 이건 존나 큰 문제가 됐다.
홀을 걷던 레이가 다시 술잔을 바꿔들고 도리안을 빤히 쳐다봤다.
"왜? 싫어?"
"아, 아뇨, 아닙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럼 빨리 다른 애들한테도 방 좀 빼라고 해."
"...제가 말입니까?"
"어, 네가 해야지. 그럼 내가 할까?"
레이가 제국 수호 훈장 수여자라는 건 대외적으로 기밀이었다.
물론 레이는 이제 와서 자기 정체를 꽁꽁 숨길 생각은 없었지만, 막상 별채 안으로 들어와 보니 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제국의 귀족은 물론이고, 제국과 협력 중인 국가의 귀족과 상인들도 소수나마 섞여 있어 대놓고 훈장을 깠다간 필요 이상으로 시끄러워질 게 뻔했다.
그냥 도리안을 내세워 짐부터 빼게 한 다음에 상황 정리되면 짧게 진실을 알리는 게 편할 듯 싶었다.
레이의 재촉에 도리안은 억지로 홀에 위치한 단상 위로 올랐다.
도리안은 홀 구석구석까지 목소리를 전파시켜주는 장치를 잡고서 입을 열었다.
"어... 파티를 즐기시는 중에 죄송합니다만."
도리안이 멋쩍어하며 말을 이었다.
"피난민을 수용하기 위해 별채를 비워야 하니, 짐을 옮길 준비를 해주시길 바랍니다. 영주성 본관에 새롭게 머물 곳이 준비되었다고 합니다."
"..."
파티를 즐기던 이들은 도리안의 말을 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도리안이 몇 번이나 같은 말을 반복하자 그제야 날 선 반응이 돌아왔다.
"...도리안 경,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오?"
"피난민? 피난민 수용을 이곳에 하겠다고?"
"오시리스 백작께선 어디 있소? 오시리스 백작과 말씀을..."
자꾸 딴소리가 나오자 레이가 도리안을 툭툭치고는 귀에다 뭐라고 속삭였다.
도리안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레이의 말을 전했다.
"그... 건방지게 말대꾸하지 말고 빨리 짐이나 빼시랍니다."
"?"
별채에 있던 자들은 순간 도리안이 미쳤나 싶었다.
*
별채를 비우라고 일방적으로 명령한 뒤에도.
레이는 피난민들이 사용할 숙소와 물자를 확보하기 위해 계속해서 오시리스 백작령을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재화가 많이 도는 오시리스 백작령인 만큼 넓은 저택을 다수 소유한 부르주아들이 꽤 많았다.
레이는 전시 상황이랍시고 그들의 저택을 강제로 징발했다.
물론 당연히 반발이 돌아왔지만...
"내 저택에 비천한 천민놈들이 발을 들이게 할 수는 없소!!"
"이 새끼 끌고 가."
"뭣? 자, 잠깐, 내가 누구인줄...! 크아악!"
완전히 묵살됐다.
레이는 피난민들에게 엄청난 대우를 해주기를 원하진 않았지만, 최소한의 의식주가 확보되길 바랐다.
더군다나 공짜로 바라는 것도 아니었다.
황실에서는 이미 오시리스 백작령에 피난민 수용을 대가로 충분한 지원을 했다.
이놈저놈 중간에 해먹은 양이 있어 준비가 미흡해졌을 뿐이었다.
레이는 그걸 지금 토해내게 만드는 중이었고 말이다.
레이는 겸사겸사 오시리스 백작령의 무역용 창고도 개방하게 만들어 피난민들의 짐을 보관하게 했다.
어차피 전쟁 때문에 교류가 중단되며 비어있는 창고가 많아 공간은 충분했다.
그렇게 한 사흘 정도 레이가 깽판을 치고 다니자 상황이 어느 정도 정리가 됐다.
그 기간 동안.
오시리스 백작은 세간에 떠돌던 뜬소문이라 생각했던 정보들을 취합하여 상황을 파악하는 데 성공했다.
필립스 백작령의 레이.
프리슬란 후작이 증손녀의 혼약자로 삼으려고 했던 자였으며, 제국 수호 훈장을 수여받은 제국의 전쟁 영웅.
사실 아직까지도 전혀 믿기지 않는 내용이긴 했지만 어쨌든 이게 현실이었다.
"..."
현재 오시리스 백작령에서는 황제가 파견한 특별 감찰관이 영지를 들쑤시고 다닌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물론 힘 좀 있는 제국의 귀족들은 소문이 자자한 '특별 감찰관'이 제국 수호 훈장 수여자임을 눈치 채고 있었다.
덕분에 오시리스 백작은 골치가 매우 아팠다.
오시리스 백작령은 이번 전쟁 때문에 여기저기서 거래가 중단되며 꽤 큰 손실을 입게 되었다.
그렇기에 오시리스 백작은 제국에서 내어준 전쟁 지원금으로 그 손실을 일부나마 메움과 동시에 중앙에서 파견된 귀족들과 인맥 다지기에 힘쓰려고 했다.
허나 레이가 깽판을 쳐준 덕분에 죄다 실패했다.
가뜩이나 부족한 예산은 피난민 먹여살린다고 줄줄 셀 예정이었고, 힘 있는 제국 귀족들은 레이와 필립스 백작에게 주목하느라 오시리스 백작은 안중에도 없었다.
"후..."
오시리스 백작은 피곤이 가득한 눈동자로 맞은편에 앉은 필립스 백작을 쳐다봤다.
필립스 백작은 과거에 비해 때깔이 아주 고와져 있었다.
그게 굉장히 아니꼽게 느껴졌던 오시리스 백작은 결국 참지 못하고 한 마디 했다.
"팔자 피셨구려."
"크흠..."
헛기침을 한 필립스 백작이 겸연쩍어하며 대꾸했다.
"이번에 오시리스 백작께서 준 도움은 잊지 않겠소."
"그리 해주면 참 고맙겠소."
근 몇 년 새 루비하 왕국과의 갈등 때문에 손실이 막심했던 오시리스 백작이 한숨을 푹 쉬었다.
*
"우와..."
자그마한 응접실 안에서.
플로리아가 레이에게서 훈장을 받아들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제국 수호 훈장이라니, 참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는 물건이었다.
그렇다고 레이가 훈장을 받은 것이 대단히 놀랍지는 않았다.
플로리아는 13살쯤에 레이가 로얄가드를 후드려 팼던 모습을 직접 보았기에, 레이가 상식 밖의 인물임은 한참 전부터 알고 있었다.
플로리아는 훈장을 만지작거리며 30분 정도 레이와 담소를 이어가다, 고민 끝에 좀 민감한 화제를 꺼냈다.
"레이, 요즘 우리 영지도 사정이 많이 안 좋아요."
"전쟁 때문에 그런가요?"
"네, 전쟁 위험 때문에 루비하 왕국과의 무역도 거의 끊겼고, 지금은 항구도 이용하기 힘드니까요..."
"무슨 말씀인지 알겠어요. 전쟁 마무리 되면 도움 드릴 수 있도록 할게요."
전쟁만 끝나면 오시리스 백작령을 지원할 수단은 꽤 많았다.
레이는 오시리스 백작가에 억한 심정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플로리아에게 과거 신세를 지기도 했었기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가 호의적인 답변을 해주니 플로리아가 활짝 웃었다가, 급격히 비장해진 얼굴로 두 눈을 번뜩였다.
"근데 레이..."
"네?"
"혹시..."
"혹시 뭐요?"
"...정략적 혼인관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음, 다른 사람 알아보세요."
말을 제대로 꺼내기도 전에 차인 플로리아가 쪽팔림 탓에 자기 얼굴을 감싸 쥐었다.
잠깐 동안 어깨를 부들부들 떨던 플로리아가 주먹을 말아쥐며 빽 소리쳤다.
"어차피 여자는 여럿 들일 텐데 나 좀 끼워주면 안 되나요?! 그, 뭐, 나 그렇게 나쁘지는 않잖아요!"
"플로리아 님에게 문제가 있다는 건 아닙니다만, 하여튼 안 됩니다."
"으읍..."
괜히 말을 꺼냈다가 망신만 당한 플로리아가 고개를 푹 숙였다.
"혹시 알레시아와 혼약을 맺을 생각인가요?"
"다른 여자와 먼저 혼약을 맺지는 않을 겁니다."
"알레시아가 부럽네요오..."
사업에 선점 효과가 얼마가 중대한 영향을 끼치던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레이를 찔러봤던 플로리아가 축 늘어져서 징징거렸다.
영지 상황도 나빴고 혼약에 관해 계속 압박이 들어왔던 탓에 충동적으로 내뱉었다지만 이리 단칼에 썰릴 줄 알았다면 입도 뻥긋하지 않았으리라.
플로리아의 투정을 레이는 낄낄 웃으며 들어주고는 찻잔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앞으로도 우리 아가씨와 잘 지내주세요."
"저도 마음 터놓을 수 있는 친구가 알레시아 말고는 별로 없어요. 근데 레이 얼굴 봐서라도 앞으로 더 열심히 친한 척 해야겠네요."
배가 아파도 티내지 않도록 노력하겠다.
그런 진담 섞인 농담을 건네는 플로리아를 보고 레이가 다시 웃음을 머금었다.
*
급한 일이 좀 정리되었다.
숨을 돌린 레이는 빅토르와 하무스랑 약속을 잡았다.
두 사람과는 오랜 시간 얼굴을 못 보긴 했지만, 그래도 몇 없는 '또래 친구' 느낌이 나는 인연이었기에 레이는 약간 들뜬 마음으로 약속 장소로 향했다.
헌데 길을 걷다보니 누군가가 계속 뒤를 밟고 있음이 느껴졌다.
대놓고 인기척을 드러내고 있어 암습이 목적인 것 같지는 않았다.
레이가 한숨을 푹 쉬었다.
앞으로 이런 식의 접촉은 빈번하게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레이가 황도 방위전에서 모로스를 쥐고 활약한 순간부터 이미 수많은 권력자들이 레이와의 은밀한 접촉을 준비해 왔을 게 분명했다.
레이가 뚱한 얼굴로 뒤를 돌아봤다.
"뻔한 이야기하려고 찾아왔으면 그만 돌아가지?"
"죄송합니다."
레이의 뒤를 쫓아오던 자가 무릎을 굽히며 깍듯하게 예를 취했다.
"실례를 범했습니다. 죄를 물으신다면 기꺼이 죗값을 치르겠습니다. 다만 뻔한 말씀을 드리려 찾아온 것은 아닙니다."
"야야, 안 들어 봐도 뻔하다."
"아닙니다, 레이 님. 저는...!"
레이의 뒤를 쫓아오던 자가 마티아스 후작가의 상징을 드러내 보이며 외쳤다.
"레이 님께서 지니신 출생의 비밀에 관한 이야기를 전해드리기 위해 왔습니다...!"
"아, 돌겠네 진짜."
가정사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