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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등가의 소드마스터-272화 (272/446)

272화

제국 수호 훈장.

제국 수호 훈장은 작위나 신분 따위를 상징하지는 않는다.

제국의 역사에 새겨질 공적을 세우기 위해서는 그런 것쯤은 이미 전부 가지고 있어야 했다.

제국 수호 훈장은 그저, 수훈자가 이루어낸 영광스러운 공적에 따른 독보적인 권위를 상징했다.

황제를 제외한 모든 이들이 수훈자에게 먼저 예를 갖춰야 한다는 관습은, 당연히 그래야 했기에 계승된 관습이었다.

오시리스 백작 또한 그에 관해 잘 알고 있었다.

오시리스 백작은 제국 수호 훈장이 어떻게 생긴 물건인지도 잘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지만, 오시리스 백작은 말문이 막혀 침묵했다.

레이의 겉모습은 기껏해야 약관의 청년이었고, 대외적으로 레이는 작위조차 없는 일개 스콰이어일 뿐이었다.

헌데 그의 품에서 제국 수호 훈장처럼 생긴 물건이 나왔다는 것을... 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오시리스 백작은 쉽사리 결론 내리지 못했다.

눈앞의 상황이 너무나 상식을 벗어나 있었기에.

오시리스 백작은 결국 어설프게 미간을 찡그렸다.

"장난이... 너무 지나친 것 같..."

"오시리스 백작."

필립스 백작이 오시리스 백작의 발언을 제지한 후 깊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이 아이... 아니, 이분께서는 제국 수호 훈장의 주인이 맞으시네."

"..."

접견실에 있던 대다수의 사람들이 거북한 감정이 섞인 눈빛으로 필립스 백작을 바라봤다.

여전히 그들에게는 필립스 백작이 기분 나쁜 거짓말을 하는 것처럼 들렸다.

오시리스 백작 또한 여전히 이 상황이 믿기지 않아서, 고심 끝에 필립스 백작에게 물었다.

"책임질 수 있겠소?"

제국 수호 훈장이란 존재를 들먹이며 남을 기만했다면 이는 제국과 황제를 모욕한 것과 다를 바 없었다.

만약 이게 시답잖은 장난질이라면 지금이라도 멈추어야 했다.

허나 필립스 백작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책임지겠소."

"..."

오시리스 백작이 답답함을 억누른 채 자리에서 일어섰다.

여전히 이 상황이 이해가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오시리스 백작은 레이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제국의 수호자를 뵙습니다."

예를 갖춘 오시리스 백작이 몸을 더욱 낮추며 덧붙였다.

"부디 제가 저지른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주위에 있던 기사들 또한 오시리스 백작을 따라 황급히 예를 갖췄다.

레이는 그들을 바라보다 탁자에 박아넣은 훈장을 뽑았다.

*

"흠..."

앤더스는 서류를 살피다 미간을 찌푸렸다.

앤더스는 오시리스 백작령에서 재무관직을 수행하며 재정 업무를 담당하고 있었는데, 피난민 문제 때문에 근래 일이 많아졌다.

앤더스는 이에 대해 상당한 짜증을 느끼고 있었다.

대체 남의 영지 피난민을 수용하는 일에 뭐 이리 열성을 다해야 한단 말인가.

앤더스는 불만이 많았지만 위에서 압박이 강하게 들어왔기에 나름대로는 성의를 기울였다.

덕분에 피난민 수용과 관련된 작업들은 대체로 준수하게 진행될 수 있었다.

허나 한계 또한 분명했다.

피난민 숫자가 한두 명도 아니기에 그들이 머물 숙소를 전부 새로 건설할 수는 없었다.

원래 있던 건물들 중 여유가 있는 곳에 피난민을 수용해야 했는데, 순순히 자기가 소유한 건물을 빌려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결국 웃돈을 잔뜩 얹어주고 리베이트도 잔뜩 받고 하며 피난민이 머물 건물을 몇 채 마련했지만, 여전히 숫자가 부족했다.

그래도 어찌하랴. 여기서 더 잘할 수는 없었다고 앤더스는 자부했다.

오시리스 백작령이 해줄 것은 다 해주었으니 이제 피난민들은 알아서 자기 목숨을 챙겨야 했다.

"남의 땅에 기어들어와서 말이야..."

앤더스가 투덜거리며 서류를 옆으로 치웠다.

오늘은 중요한 일정이 있어, 슬슬 복장을 확인하고 나가봐야 했다.

헌데 그때 오시리스 백작이 백작령의 실무를 담당하던 관리들 다수를 접견실로 불러냈다.

앤더스가 짜증을 삼키며 접견실로 도착하니, 웬 어린놈 하나가 상석에 앉아 서류를 뒤적거리고 있었다.

'뭐 하는 놈이야?"

앤더스는 그리 묻고 싶었으나 접견실 안의 분위기가 아주 얼음장 같아 함부로 입을 열지 못했다.

심지어 접견실의 주인이어야 할 오시리스 백작조차 침묵한 채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잠시 뒤.

레이가 서류뭉치를 내려놓았다.

레이는 콧잔등을 매만지더니 실무자 몇을 대동하고 밖으로 나갔다.

앤더스는 그제야 마음 놓고 숨을 내쉬려고 했지만, 분위기가 여전히 얼어붙어 있어 다시 입을 다물었다.

침묵이 길어졌다.

앤더스가 결국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한마디 하려고 한 순간, 레이가 접견실로 돌아왔다.

상석에 앉은 레이가 높으신 분들이 전부 지켜보는 가운데 첫 마디를 내뱉었다.

"개판이네."

*

훈장을 꺼내보인 뒤.

레이는 일단 실무자들이 작성한 서류와 보고서들부터 살폈다.

서류상으로는 피난민이 머물 숙소의 60% 정도가 준비되었거나 완공 단계였다.

전쟁이 일찍 시작했으니 미흡한 부분이 있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문제는 서류에 적혀 있는 숙소라도 제대로 준비되어 있느냐는 거였다.

레이는 실무자 몇을 데리고 직접 밖으로 나가서 서류에 적혀 있는 내용이 사실인지 시찰했다.

시찰을 빠르게 진행한 레이는 실소를 터뜨렸다.

"아이고 이 씹새끼들아..."

보고서에 적힌 숙소 중 절반 정도는 제대로 준비되어 있었다.

허나 남은 절반은 문제가 꽤 있었다.

아예 유령 숙소도 있었고, 허름한 천막 하나 펼쳐놓은 곳도 있었고, 혹은 바가지를 씌우겠다고 단단히 벼르고 있는 여관을 피난민 숙소랍시고 서류상에 기입해 놓기도 했다.

레이는 크게 충격받지는 않았다.

사실 레이 또한, 이 정도면 꽤 준수한 결과물이라고 생각하기는 했다.

윗선에서 계속 압박하지 않았다면 서류에 적힌 것의 반의 반도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았을 것이다.

하여튼 지금 준비 상태만 보면 피난민의 5할 정도는 어렵게나마 수용 가능했다.

"숙소가 이 정도면..."

피난민을 위해 구비된 식자재나 약재 같은 것은 상황이 비슷하거나 더 열약할 확률이 높았다.

레이는 짜증이 가득한 얼굴로 접견실로 돌아왔다.

"개판이네."

혀를 끌끌 차며 머리카락을 쓸어올린 레이는 이번 일과 관계된 오시리스 백작령의 실무자들은 벽 가까이에 일렬로 세웠다.

영문도 모른 채 줄을 맞추고 선 실무자들에게 레이가 손가락을 까닥였다.

"오시리스 가문 출신이라면 옆으로 나와봐요."

본인의 성이 오시리스거나 부모의 성이 오시리스인 젠트리 계층들에게 한 이야기였다.

레이가 손을 휘젓자 몇몇 실무자들이 눈치를 보며 옆으로 빠졌다.

앤더스는 오시리스 가문 출신이 아니었기에 자리를 지켰다.

레이가 어깨를 풀며 물었다.

"다 나왔습니까?"

그래도 오시리스 가문의 자존심은 챙겨준 레이가 남아있는 실무자들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앤더스는 다가오는 레이를 보며 눈을 껌벅였다.

다음 순간.

레이가 앤더스의 뺨을 후려쳤다.

쫘악, 가죽 터지는 소리가 울렸다.

"어억...!"

앤더스가 기함하며 옆으로 넘어졌다.

상황을 지켜보던 이들도 깜짝 놀라서 어깨를 움찔 떨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레이는 억지로 앤더스를 일으켜 세워 다시 한 번 뺨을 후려쳤다.

쫘악, 잠깐 시야가 아득해졌던 앤더스가 뒷걸음질을 치며 나오는 대로 소리쳤다.

"미, 미쳤소? 가, 감히 귀족에게 어찌 이런...!"

설령 같은 귀족이라 하더라도 공적인 자리에서 이런 무례를 저지를 수는 없었다.

허나 그 말을 듣고 레이는 실소했다.

레이 또한 오시리스 영주성의 관리들 대부분이 귀족이거나 젠트리 계층이라는 걸 모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레이는 앤더스의 머리털을 움켜쥐고 입꼬리를 뒤틀었다.

"상황 파악이 덜 됐군. 전시 횡령을 저질렀단 죄목으로 목부터 잘라줄까? 내가 못할 것 같아?"

"..."

앤더스는 고통 탓에 거칠게 숨을 몰아쉬다 오시리스 백작을 돌아봤다.

오시리스 백작은, 여전히 침묵한 채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앤더스는 그제야 자신이 눈앞의 청년에게 결코 항명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레이는 앤더스 뺨을 수차례 더 후려쳤다.

앤더스가 결국 입 안에 고인 핏물을 줄줄 흘리며 혼절하려하자 레이는 앤더스를 옆으로 밀쳐내며 손가락을 까닥였다.

"다음."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 놈들이 많았다.

쫘악, 쫘악, 레이는 계속해서 일렬로 서 있던 관리들의 뺨을 후려쳤다.

꽤나 지치는 작업이었지만 앞으로 일을 편하게 진행하려면 기합을 제대로 잡아야 했다.

이렇게 기합을 잡아놓지 않으면 또 정신 못 차리고 헛짓거리를 하려 들 게 뻔했다.

쫘악!

레이는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실무자의 뺨을 거칠게 후려치고는 호흡을 골랐다.

기분은 아주 상쾌했다.

상석으로 돌아온 레이가 의자에 등을 붙이며 입을 열었다.

"이제 좀 생산적인 논의를 해봅시다."

당장은 피난민들이 머물 수 있는 숙소부터 마련해야 했다.

며칠 굶는 것 정도야 상관 없었지만 지금 날씨에 밖에서 며칠 야영하면 사람 병신되는 건 금방이었다.

*

항구를 지닌 오시리스 백작령에선 무역이 활발했다.

다양한 지역과 교류가 잦다 보니 귀한 손님을 맞이해야 하는 경우도 많아졌다.

그렇기에 오시리스 백작은 영주성 별채를 특별히 공들여 꾸며놓고는 귀한 손님이 찾아왔을 때 제공하고는 했다.

지금 그 별채 안에는 제국의 귀족들이 가득했다.

그들 대다수는 오시리스 백작령을 사수하라는 황제의 명을 받고 이곳을 찾았다.

황제의 명령 아래 여러 귀족 가문에서 병력을 파견했는데, 현재는 어느 정도 편제가 끝나 있었다.

만약 오시리스 백작령이 공격받는다면 그들은 가문의 명예를 더럽히지 않기 위해서라도 용맹하게 전투에 임할 것이다.

허나 그런 것과 별개로.

이곳은 최전방도 아니었고 아직 전쟁이 시작되지도 않았다.

그렇기에 다들 마음이 풀린 채 오시리스 백작의 대접을 받고 있었다.

별채 안에서는 오늘도 간소하게나마 파티가 진행되는 중이었다.

귀족들은 파티를 즐기며 필립스 백작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시리스 백작과의 접견만 끝나면 필립스 백작이 별채를 찾아올 터다.

근래 자주 화제가 되었던 필립스 백작에게 많은 귀족들이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그때, 별채의 정문이 열렸다.

"...?"

누가 왔다는 소개조차 없었다.

다만 한 청년이 별채 안으로 들어오더니 파티가 진행되는 홀을 지나 성큼성큼 걸었다.

주변의 눈길이 쏠리기 시작했지만 청년은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이 정도면 500명은 거뜬하겠고..."

잘 우겨넣으면 1000명쯤은 충분히 수용 가능하리라.

청년은 그리 중얼거리며 음식을 옮기던 시녀에게서 술잔을 뺏어 들었다.

상황을 지켜보던 귀족들이 눈살을 찌푸렸다.

설령 청년이 아무리 지체 높은 가문의 자제라 하더라도 귀족 간에는 상호 존중이 기본이었다.

그럼으로서 귀족이라는 신분이 지니는 가치가 유지되는 것이었다.

헌데 청년은 기본적인 예법조차 지키고 있지 않았다.

몇몇 귀족이 청년에게 다가가 이게 대체 무슨 무례한 짓이냐며 따지고 들었다.

한편, 엘룬 기사단의 단원인 도리안이 의자에 앉아 술잔을 기울이고 있다가 자기 턱을 쓰다듬었다.

저 시건방을 떠는 청년의 얼굴이 어디선가 본 것처럼 묘하게 익숙...

"푸흡!!"

도리안이 마시던 술을 뿜어내자 맞은편에 앉아있던 귀족이 기겁했다.

도리안은 그러거나 말거나 거의 뛰쳐나가듯이 몸을 움직여 레이에게 한 소리 하고 있던 귀족들을 옆으로 쳐냈다.

밀쳐진 귀족들이 역시나 황당한 얼굴을 했지만, 도리안은 신경도 쓰지 않고 레이에게 속삭였다.

"황실 직속 기사단, 엘룬 기사단의 단원인 도리안입니다. 오시리스 백작령을 수호하라는 황제 폐하의 명을 받드는 중입니다. 이리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헌데 여기까지는 대체 어쩐 일로..."

"아, 별건 아니고."

레이가 술을 한 잔 삼키고는 말을 이었다.

"여기 건물 좀 비워."

피난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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