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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등가의 소드마스터-271화 (271/446)

271화

오시리스 백작령으로 향하는 피난길에서.

레아는 몇 시간 걷지도 않고 힘들다며 찡찡대기 시작했다.

벨라가 레아를 안아주려 하는 것을 레이가 버릇 나빠진다며 중간에 말렸다.

벨라도 레이의 의견에 어느 정도 동의했기에 레아를 조금 더 걷게 하였다.

그렇게 시간이 좀 더 지나, 레아는 엄살이 아니라 진짜 체력적으로 힘들어서 찡찡대기 시작했다.

레이는 마음 같아선 레아를 끝까지 걷게 하고 싶었지만 짐 가방을 들고 있는 벨라가 레아까지 안아주려 했기에 그냥 레아를 자기 어깨 위로 올렸다.

목말을 탄 레아가 신나서 레이의 뺨을 주물럭거리는 사이.

레이는 카렌에게 다가가 슬그머니 물었다.

"안 힘들어?"

"...괜찮아."

카렌이 짧게 답했다.

애초에 카렌은 어린 시절부터 레이 덕택에 몸을 단련해서 평범한 주민들에 비해 체력은 월등히 좋았다.

레이는 몇 번 더 시답잖은 화제를 가지고 카렌에게 말을 걸었지만 계속해서 단답이 돌아왔다.

둘의 이야기를 듣던 레아가 불쑥 외쳤다.

"카렌 언니 삐졌다!"

"...안 삐졌어."

"카렌 언니 왜 삐졌어? 오빠가 선물 안 사줬어?"

레아의 물음에 카렌이 웃음 짓더니 레이의 어깨에서 레아를 떼어내 안아 들었다.

카렌에게 안긴 레아는 카렌의 가슴을 꾹꾹 눌러보며 중얼거렸다.

"언니 찌찌 짱 크다."

나도 어른 되면 이렇게 커지나? 근데 찌찌가 크면 뭐가 좋은 거지?

레아가 그런 고민을 하며 눈앞의 부드럽고 탱탱한 가슴을 만지작거리고 있는데 카렌이 입을 열었다.

"레아가 그림을 열심히 그렸는데... 오빠가 그림에 낙서..."

아니, 낙서는 적절한 비유가 아니었다. 카렌이 바로 표현을 바꾸었다.

"오빠가 레아가 그린 그림에 엄청 예쁘게 색칠을 해줬어."

"멋대로 색칠한 오빠가 나빠!"

카렌의 말에 담긴 의미를 단번에 유추해 그리 답하는 레아를 보고 카렌이 웃음을 터뜨렸다.

레이가 앓는 소리를 냈지만, 의외로 카렌은 기분이 좀 풀렸는지 그 뒤로 레이와도 두런두런 대화를 이어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큰 문제 없이 피난민들은 오시리스 백작령에 도착할 수 있었다.

오시리스 백작령이 코앞이라는 소식이 피난 행렬에 번지자 피난민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피난민들이 무사히 피난처에 도착했음을 안도하며 웃음 짓는 사이 필립스 백작이 타고 있는 마차부터 오시리스 백작령으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그 뒤를 기사들을 포함한 신분이 좀 높은 자들이 뒤따랐는데, 레이는 홀로 피난민 행렬에 남았다.

'어디... 준비가 얼마나 잘 되어 있으려나...'

레이는 오시리스 백작령이 피난민을 수용할 준비를 완벽하게 해놓았으리라고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다.

그건 이 세계의 행정력으로는 실질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또한 전시 상황에서의 비리와 횡령은 인류 역사의 무구한 전통이었다.

황제와 에른스트가 특별히 압박을 가했다 해도 그런 것을 원천 차단할 수는 없었다.

'뭐, 일단 한 번 보자고.'

그렇게 생각한 후 레이가 안내를 받은 곳이 허름한 천막 몇 개 펼쳐놓은 공터였다.

제대로 된 숙소는 어디 있느냐는 말에 관리는 뇌물을 요구했고 말이다.

레이는 '그럼 그렇지 씹새끼들아'를 중얼거리며 관리의 뺨부터 후려쳤다.

쫘악, 쫘악, 본보기로 걸린 관리는 제대로 반항도 못하고 연거푸 뺨을 내주었다.

"커억!! 자, 잠깐...!! 무슨 짓...!!"

쫘악!

허우적거리는 관리를 레이는 계속해서 후려쳤다.

힘 조절을 해주었기에 관리는 기절하지 않고 얻어맞는 고통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관리가 꽥꽥 비명을 지르자 소란을 감지한 오시리스 백작령의 병사들이 달려왔다.

병사들은 미리부터 소요사태가 발생하면 철저히 제압하라는 명령을 받았었다.

또한, 병사들은 외지인이 오시리스 백작령까지 피난을 와서 혼란을 가중시키는 게 굉장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렇기에 건수를 잡자마자 흥분해서 우르르 몰려왔다.

"비켜!!!"

조장 역할을 맡고 있는 고참 병사가 앞을 가리고 있던 피난민을 걷어찼다.

피난민이 데굴데굴 구르고, 고참 병사는 관리를 패고 있는 레이를 보고 가장 먼저 무기를 뽑아들려고 했다.

하지만.

어느샌가 그는 팔이 꺾인 채 땅에 무릎을 꿇게 되었다.

"...?"

고참 병사가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몸을 일으키려 하는데, 등 뒤에서 누군가가 시푸른 검기가 서린 단검으로 목을 겨눠왔다.

"함부로..."

아티펙트의 은폐 기능을 해제한 뱅이 단검을 병사의 목 가까이 끌어당기며 거칠어진 목소리로 경고했다.

"저분께 무례를 범하지 마라. 두 번 경고하지는 않겠다."

직후 레이가 다가와서 짜증스럽게 병사의 턱을 걷어찼다.

턱이 반쯤 부서진 병사가 기절한 채 땅을 나뒹굴었다.

다른 병사들은 뱅의 무위를 보고 공포에 질려 주춤거렸다.

언뜻 봐도 최소 기사급 강자인 뱅을 병사들이 상대할 수는 없었다.

한편 레이는 붓기 시작한 관리의 뺨을 툭툭 치며 눈살 찌푸렸다.

"야."

"...예."

관리는 자기가 제대로 잘못 걸렸다는 걸 깨닫고 태도를 공손히 했다.

레이가 한숨을 푹 쉬며 물었다.

"피난민들 숙소, 아직 제대로 준비 안 되어있어?"

"그..."

관리가 주변을 슬쩍 둘러보고는 자기를 도와줄 사람이 없음을 깨닫고 입을 열었다.

"모자라긴 합니다. 전쟁이 예정보다 빨라져서..."

"아, 그래, 이해해. 근데 얼마나 모자란데?"

"그게... 글쎄요..."

관리는 오시리스 백작령이 현재 수용 가능한 피난민 숫자를 대략적으로나마 알고는 있었지만 일단 고개를 저었다.

"제가 말단이라서 자세히는..."

"잘 모른다고?"

"예옙. 그래도 절반 가까이는 수용할 수 있지 않을까..."

"절반? 그럼 나머지는?"

"이, 이제부터 논의를..."

"이제부터?"

레이가 재차 한숨을 쉬었다.

뭐, 상황이 상황인 만큼 피난민의 절반이라도 수용될 수 있다면 감사한 일일지 몰랐다.

필립스 백작이 직접 강하게 요구한다면 남은 절반도 얼어죽지는 않게 보호받을 수 있을 터다.

그 와중 피난민들은 챙겨왔던 재산의 태반은 털리겠지만 피난민 신분에 그 정도로만 끝나도 감지덕지였다.

근데 레이는 딱히 그런 꼴을 보고 싶지가 않았다.

레이는 잠시 고민하다 혼자 중얼거렸다.

"뭐, 어차피..."

여기까지 '소문'도 금방 퍼질 텐데, 죽을 날도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뭐 대단찮은 걸 숨기겠다고 눈치를 보겠는가.

"쉽게 가자, 쉽게."

결정을 내린 레이가 일단 지미 패밀리들부터 소집했다.

레이는 지미 패밀리에게 피난민들을 통제하고 있으라 명령한 후 관리의 멱살을 움켜쥐고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관리가 질질 끌려가며 겁에 질려 물었다.

"왜, 왜 이러십니까?"

"넌 말단이라서 잘 모른다며? 그래서 높으신 분부터 만나뵈려고."

레이의 시선이 오시리스 백작령의 영주성으로 향했다.

*

오시리스 백작이 필립스 백작을 환대했다.

알슈테인 공작가의 세리아와 작위를 지닌 지미와 매튜 또한 환대했다.

오시리스 백작은 네 사람을 친히 접견실로 안내했다.

그 사이 알레시아는 오랜만에 플로리아와 만남을 가졌다.

시녀가 차와 다과를 놓고 나간 후 형식적인 귀족들의 인사를 끝마친 알레시아가 다짜고짜 외쳤다.

"플로리아도 이제 노처녀구나!"

콱!

플로리아가 반사적으로 알레시아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꽤 세게 얻어맞았기에 알레시아가 자기 정수리를 움켜쥐고 낑낑댔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플로리아가 놀란 얼굴로 사과했다.

"어머, 미안."

노처녀...

자유로운 삶을 사랑하는 플로리아는 평생 그런 단어를 신경 쓰지 않을 줄 알았다.

허나 막상 노처녀라 불릴 시기가 닥쳐오니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후우..."

플로리아는 차를 홀짝이며 신음을 삼켰다.

정략혼은 싫고, 이대로 혼약도 안 하고 늙기에는 남들 눈치가 너무 보이고, 그렇다고 아예 마탑에 소속되는 것은 자유를 완전히 포기하는 꼴밖에 안 되고...

"나도 알레시아처럼 '나의 기사'나 만들까 봐."

플로리아의 중얼거림을 들은 알레시아가 정수리를 비비다 말고 기세등등해졌다.

"흠흠, 아무리 찾아봐도 나의 기사만한 나의 기사는 구하기 힘들 것이다!"

"그... 알레시아의 '나의 기사'말인데, 곧 '남의 기사'가 되지 않을까?"

이번엔 알레시아가 정곡을 찔려 타격을 입었다.

플로리아는 부들대는 알레시아를 바라보며 고민에 잠겼다.

"음..."

최근 귀족들 사이에 필립스 백작령이 아주 핫했다.

프리슬란 가문으로부터 필립스 백작가가 상당한 자금 지원을 받고 있음이 확인되었는데, 그 이유에 대해 말들이 많았다.

그것 말고도 플로리아는 귀족 사회의 뜨거운 화제를 몇 가지 더 알고 있었다.

제국의 소드마스터가 택했다는 증손녀의 혼약자가 누구냐...

제국 수호 훈장 수여자가 누구냐...

황도 방위 전투에서는 대체 어떤 일이 있었나...

본래라면 큰 연관성을 느끼기 힘든 화제일 수도 있었다.

허나 플로리아는 레이가 숨기고 있는 저력을 일부나마 알고 있는 사람 중 하나였다.

그 모든 화제의 주인이 혹시 레이인 것을 아닐까.

플로리아는 요즘 그런 망상을 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플로리아는 알레시아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하나 고민이 좀 되었다.

헌데 그때 영주성 안이 시끄러워졌다.

"...무슨 일이지?"

"가보자꾸나!"

플로리아와 알레시아가 함께 소란이 이는 곳을 찾아갔다.

이내 두 사람은 오시리스 백작가의 기사들에게 둘러싸인 레이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레이는 얼굴이 퉁퉁 부은 관리를 질질 끌고 있었고 말이다.

"?"

"?"

플로리아와 알레시아가 동시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편 오시리스 백작가의 기사들은 굳은 얼굴로 레이의 앞을 막아섰다.

다짜고짜 오시리스 백작 얼굴 좀 보자는 레이를 그들로선 제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레이의 곁에 서 있던 뱅이 품 안에서 서류를 하나 꺼냈다.

황제가 직접 파견을 명한 파견대임을 증명하는 문서였다.

"급한 일이니 백작님과의 접견을 허락해주었으면 좋겠소."

"..."

문서를 읽은 기사의 표정이 떫어졌다.

문서에는 국새가 찍혀 있었고, 황실의 파견대라는 뱅의 무장 수준을 보았을 때 문서가 가짜일 확률은 적어 보이긴 했다.

"일단 기다려보시오. 확인을..."

"비켜."

레이는 기사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접견실로 발을 옮겼다.

오시리스 백작가의 기사들이 당황하며 레이를 막아서려 했지만 레이는 막무가내였다.

국새까지 찍힌 서류를 본 터라 기사들도 더는 레이를 적극적으로 막아 세우기가 곤란했다.

결국 기사들은 먼저 접견실로 뛰어가서 오시리스 백작에게 상황을 설명했고, 뒤이어 레이가 관리의 멱살을 잡고 질질 끌며 접견실로 들어왔다.

"실례합니다."

접견실 안에는 오시리스 백작은 물론이고 필립스 백작령 사람들도 있었다.

반가워하는 세리아를 제외하면 다들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멍하니 얼을 텄다.

레이는 벌벌 떠는 관리를 대충 구석에 던져놓은 후 황당한 기색이 역력한 오시리스 백작을 마주 봤다.

"피난민 수용 준비가 예상보다 미흡하더군요. 실무를 직접 본 관리들을 불러주실 수 있겠습니까? 관련 서류들도 가져오라 명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니..."

오시리스 백작은 혼란한 와중에도 정신을 붙들고 입을 열었다.

"일단 나가서 기다리게. 손님들도 계시는데 대체 무슨 무례인가?"

오시리스 백작으로선 정말 대단한 인내심을 발휘한 것이었다.

필립스 백작령의 손님들과 오시리스 가문을 따르는 기사들 앞에서 개쪽도 이런 개쪽이 없었다.

접견실로 달려왔던 기사가 '국새가 찍힌 문서'를 운운하지 않았다면 당장 레이를 제압해 감옥에 가둬두라고 명했을 것이다.

허나 레이는 순순히 물러나 주지 않았다.

콰악!!

레이가 제국 수호 훈장을 품에서 꺼내 탁자 중앙에 박아넣으며 웃었다.

"좋게 말씀드릴 때 빨리합시다."

피난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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