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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등가의 소드마스터-270화 (270/446)

270화

필립스 백작령에서 진행될 피난을 며칠 앞두고.

레이는 루나와 함께 시그니 산맥 안으로 깊이 들어갔다.

레이는 커다란 마차를 가지고 얼어붙은 산길을 올랐는데, 굳이 직접 마차를 끌 필요는 없었다.

고위 바람 정령, 칼가가 있었기 때문이다.

칼가가 열심히 상승기류를 만들어 마차를 옮기는 모습을 보며 레이가 흐뭇하게 웃었다.

"칼가 익스프레스..."

[...]

레이가 이상한 단어를 중얼거리자 칼가는 기분이 나빠졌다.

그래도 까라면 까야하는 위치였기에 마차가 뒤집히지 않게 열심히 바람의 세기를 조절했다.

그렇게 산맥을 나아가다 보니 피 냄새가 풍겨오기 시작했다.

레이는 아티펙트를 전개할 준비를 하며 이완된 몸을 긴장시켰다.

그때, 어둠 속에서 레인저들이 나타났다.

미리 연락을 받았던 브랜딜이 환영 마법에 의해 가려져 있는 레이의 얼굴을 쳐다봤다.

"음, 혹시..."

"어이, 오랜만이군."

레이가 손을 흔들자 브랜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오랜만이네."

"피 냄새가 나던데. 축출 작업이 있었나?"

전쟁을 앞두고 레인저들 모두가 제국 쪽에 붙는 것에 찬성할 리는 없었다.

뒤에서 칼에 찔리고 싶지 않으면 먼저 숙청을 단행해야 했다.

브랜딜은 어깨를 으쓱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레이는 내심 안도하며 피식 웃었다.

"너희가 역으로 당하지 않아서 다행이네."

제국 쪽에 붙기로 한 레인저 세력이 역으로 축출당할 가능성도 아예 배제할 수는 없었었다.

상황이 그리되었다면 레이 입장에서 골치가 아주 아팠겠지만, 다행히도 아직까지는 상황이 순조로운 것 같았다.

그후 레이는 브랜딜의 안내를 받아 레인저의 단장이 기다리고 있는 막사 앞에 도착했다.

제2특수작전잔, 속칭 레인저의 단장 로베리가 레이가 가져온 마차를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마차는 왜 가져왔지?"

"아, 이거 선물이야."

레이가 칼가에게 마차를 내려놓게 한 후 마차 안을 뒤적였다.

주변에 있던 레인저들이 무기를 겨누고 경계했으나, 레이는 크게 신경 쓰지 않고 마차에서 상자 하나를 꺼내 뚜껑을 열었다.

상자 안에는 술병이 가득 차있었다.

"자, 여기."

"...그게 뭐지?"

"선물이라니까?"

"..."

로베리는 어이없어하며 수하에게 손짓했다.

그러자 레인저 중 한 명이 나서서 상자 안에 있는 술병을 집어들었다.

레인저는 술병 안의 액체를 쇠막대기나 가루 같은 것에 떨어뜨려 독성을 검사했다.

이것저것 확인해 본 레인저가 마침내 술병에 든 액체를 살짝 찍어 입에 대보았다.

"이건...!"

"뭐야, 술이 아니야?"

"평범한 술은 아닙니다."

"그럼 뭔데?"

"아주 비싼 술입니다."

레인저가 진지한 얼굴로 그딴 소리를 하자 로베리가 짜증스럽게 자기 수하를 노려봤다.

그러는 사이 레이는 마차에 든 술상자를 하나씩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이거 굉장히 비싼 술이거든? 황도에서 가져온 거야. 레인저들이 몇 명인지는 모르겠지만 넉넉하게 가져왔으니 한 병씩은 돌아갈 거야."

"...무슨 수작이지?"

"다른 건 아니고, 개인적인 부탁이 있어서."

"부탁?"

"이거 줄 테니까 전쟁 시작하면 필립스 백작령 내려와서 물건 좀 털어가지 마."

"뭐...?"

"어차피 털어갈 것도 없어. 다 챙겨갈 거거든. 근데 너희가 괜히 또 돈 되는 것 없나 뒤적거린다고 백작령 건물 박살 내놓으면 그거 복구하는 것도 엄청 귀찮은 일이란 말이야."

"..."

"그러니까 이거 받고 좋게좋게 넘어가자. 애들 단속 좀 해달라고."

"..."

로베리는 레이가 지금 하는 말이 진심인지 농담인지 헷갈렸다.

허나 레이는 로베리가 눈살을 찌푸리든 말든 자기 할 말만 빠르게 끝냈다.

"이거 너 혼자 긴빠이... 아니, 꿀꺽할 생각은 하지 마. 술 가져왔다고 다른 레인저들한테도 소문 쫙 내고 갈 테니까. 챙길 거면 한 상자 정도만 따로 챙겨."

"아니..."

"난 그만 간다. 목숨 무사히 부지하고, 앞으로도 우리가 부딪칠 일이 없기를 바라지."

레이가 손짓하자 칼가가 바람을 일으켜 빈 마차를 들어 올렸다.

어처구니가 없어 말문이 막혔던 로베리가 그제야 다시 입을 열었다.

"잠깐, 내가 모든 일탈을 통제해줄 수는 없어."

"알아. 근데 신경 좀 써달라고. 필립스 백작령에 꽤 강력한 결계도 전개되어 있을 거야. 레인저가 좀도둑질하다 전력에 손실나면 쪽팔리잖아?"

레이는 거기까지 말하고 루나와 함께 로베리에게서 등을 돌렸다.

로베리는 레이를 붙잡지도 못한 채 멍하리 바라봤다. 붙잡은 이유 같은 게 딱히 없기도 했다.

레이는 술 상자 하나를 들고 왔던 길을 돌아가며 주변의 레인저들에게 술병을 하나씩 건네주고 떠났다.

로베리는 한참 동안 가만히 앉아있다가 콧잔등을 매만졌다.

"...미친놈."

바로 떠오르는 게 욕설밖에 없었다.

뭐, 그렇다고 해도.

아직 긴장과 혼란이 가시지 않은 부대에 순차적으로 술을 한 병씩 돌리는 것쯤은 나쁘지 않은 일일지도 몰랐다.

로베리는 일단 레이가 가져온 술이 문제가 없는지 다시 한 번 검사하라고 명령했다.

*

며칠 뒤.

필립스 백작령에서도 피난이 시작됐다.

백작령의 영지민들은 무거운 짐을 등에 지고 낑낑거리면서도 질서정연하게 움직였다.

곧 기다란 행렬이 줄 세워져 오시리스 백작령으로 향할 준비를 마쳤다.

피난민의 통제 임무를 받은 병력들이 열심히 돌아다니며 혼란을 방지하는 사이.

언덕 위에서 레이가 길게 늘어선 행렬을 바라보다 루나에게 물었다.

"루나, 같이 갈 거지?"

"..."

루나가 고민하다 고개를 저었다.

"...해야 할 실험이, 조금 남아있어요."

"아... 그래?"

레이는 굳이 루나가 해야 할 실험이 무엇인지 캐묻지 않았다.

다만 필립스 백작령에 남아있겠다는 루나가 걱정은 되었다.

"루나, 그래도 혼자 남아있는 건..."

"혼자는 아니에요. 로필렌도 실험을 돕겠다고 했어요. ...걱정마요. 오래 걸리지는 않아요. 금방 마무리하고 따라갈게요."

로필렌도 이제는 고위 마법사였다.

전투 경험은 없다시피 했지만 충분히 도움이 되는 전력이었다.

더군다나 루나에겐 고위 정령 칼가가 있었다.

"위험할 거 같으면... 바로 피할게요. 칼가도 있잖아요."

루나는 칼가를 마음대로 다룰 수 있었다. 그건 굉장한 이점이었다.

보통 고위 정령쯤 되면 자기를 이동수단으로 삼는 것은 자존심이 상한다며 거부하는 경우가 많았다.

허나 칼가는 꼼짝없이 라이딩을 당해야 했다.

고위 바람 정령의 기동성을 제대로 따라잡을 수 있는 존재는 극소수니, 상황이 위험해지면 그냥 도망치면 되었다.

루나의 말을 이해한 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알았어.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빨리 와."

"네, 빨리 갈 거예요."

잠시라도 레이와 떨어져 있는 게 루나도 마음이 편치 못했다.

눈 돌리면 꼭 사고 치는 게 레이였다.

루나는 레이의 손을 만지작거리다 당부했다.

"몸 조심해요."

"응, 알았어."

"...카렌이랑도 꼭 화해해요."

"아, 그건 당연히 그래야지."

레이가 앓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까지 카렌은 조금 삐쳐있었다.

*

다행히도 피난 행렬이 움직이기 전 매튜가 영주성에 도착했다.

매튜는 영주성 정문에 나와있던 필립스 백작에게 예의를 갖춘 후 레이를 보고 입꼬리를 올렸다.

매튜는 아직 '귀족 뽕'이 덜 빠진듯 행복한 얼굴로 어깨에 힘을 꽉 주고 있었다.

평생의 숙원이던 신분 상승의 꿈이 이루어졌으니 아직 한참 꺼드럭거릴 시기이긴 했다.

매튜가 두 팔을 활짝 벌리며 외쳤다.

"우리 조카가 여기 있었구먼!"

"아니, 왜 내가 매튜 조카예요?"

"대장 아들이니까 내 조카지."

지미가 들으면 뒷목 잡을 소리에 레이가 낄낄거리며 손을 휘저었다.

"지미한테나 가봐요. 늦게 왔으니 일 좀 열심히 돕고요. 귀족이라고 꾀부리지 마요."

"누구 명이신데, 충실히 따라야지. 근데 안색이 좀 안 좋다?"

"피곤해서 그래요. 빨리 지미한테나 가 봐요."

"알겠어."

매튜가 말을 타고 사라졌다.

이제 슬슬 마차가 영주성에서 출발해야 했다.

필립스 백작과 알레시아가 마차에 올라타자, 기다리고 있던 세리아가 레이를 번쩍 들어 올려 마차로 향했다.

헌데 레이가 좌우로 몸부림을 치며 세리아에게 외쳤다.

"고모, 고모! 잠깐만요."

"왜?"

"저는 마차 안 타려고요. 가족들이랑 같이 걸어갈게요."

충격적인 레이의 발언에 세리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가족이랑?"

"네, 가족이랑요."

"나는, 가족 아니야?"

"..."

뒤늦게 말실수를 깨달은 레이가 입을 다물고 식은땀을 흘렸다.

"...아니, 고모, 물론 고모도 제 사랑하는 가족이신데..."

레이가 다른 피난민들과 함께 걸어가겠다는 이유는 두 가지였다.

일단 벨라가 마차에 타지 않기로 했다.

레아가 멀미 때문에 마차에 타기 싫다며 자기도 걸어가고 싶다고 고집을 부린 것도 이유였지만...

벨라 본인도 병자, 노인, 아주 어린 아이들, 임산부들을 싣느라 마차가 부족한 상황에서 굳이 특별 취급 받기는 싫다고 걸어가겠다고 했다.

오시리스 백작령까지의 거리가 그리 멀지는 않기에 레이도 벨라를 뜯어말리진 않았다. 다만 만약의 상황을 위해 곁을 지킬 생각이었다.

그에 더해 카렌도 피난 행렬에 섞여 있었는데, 레이는 걸어가며 카렌과 오해를 마저 풀고 싶었다.

레이가 떠듬떠듬 변명을 이어가자 세리아는 풀이 죽었다.

세리아도 마음 같아선 피난 행렬 선두에서 레이를 들고 자랑하며 걸어가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필립스 백작의 호의를 무시하는 일이 되어버리기에 마차에 타긴 해야 했다.

세리아는 실망이 컸으나 그래도 레이의 의견을 존중해주었다.

그렇게 마차가 선두에서 출발하며 필립스 백작령의 피난이 시작됐다.

레이는 피난 도중 문제가 생기지 않기를 바랐고, 실제로도 그렇게 되었다.

그건 참 다행이었지만.

오시리스 백작령에 도착하자마자 문제가 발생했다.

"자자, 일단 다들 이곳에서 머물면 된다. 함부로 소란피우지 마라."

허름한 천막 같은 걸 대충 펼쳐놓은 넓은 공터에 피난민 일부를 몰아넣은 오시리스 백작령의 관리가 그리 말했다.

참고로 지금은 한겨울이었다. 모닥불을 피워도 이런 공터에서 며칠씩 밤을 지새우기는 어려웠다.

검 두 자루만 허리춤에 찬 채 피난민 사이에 섞여 있던 레이가 관리에게 다가가 물었다.

"그... 제대로 된 숙소는 언제쯤 배정받을 수 있습니까?"

"제대로 된 숙소?"

관리는 레이를 비웃으면서도, 레이의 차림새가 허름하진 않았기에 최소한의 예의는 지켜 답했다.

"일단 기다리시오."

"그래도 언제쯤 배정받을 수 있는지는 알려주셔야..."

"씁, 일단 기다리라니까."

가만히 기다리라는 말을 듣고 가만히 기다리면 좋은 대접을 받을 수 있는가?

레이의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 가만히 기다리라 했다고 진짜 가만히 기다리면 피 보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그때, 인상을 찌푸린 레이를 향해 관리가 씨익 웃으며 손가락으로 동전 모양을 만들었다.

"뭐, 그래도..."

"..."

"충분한 성의를 보인다면 그쪽은 괜찮은 숙소를 우선해서 배정받을 수 있도록 손 써주겠소."

"아... 성의를 보인다면..."

고개를 끄덕인 레이가 곧장 관리의 뺨부터 후려쳤다.

쫘악- 누가 말릴 새도 없이 가죽 터지는 소리가 공터를 울렸다.

레이는 옆으로 돌아가는 관리의 머리통을 움켜쥐어 고정시킨 뒤 연거푸 뺨을 후려쳤다.

"이 개새끼들이 시작부터 개수작질이네?"

피난 (4)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