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9화
레이는 카렌을 달래기 위해 애썼다.
허나 카렌은 자신의 정성이 깃든 선물이 덮어쓰기 당했다는 것을 깨닫고 쉽사리 서러운 감정을 털어내지 못했다.
차라리 선물을 쓸모없다고 선반 안에 박아두었으면 충격이 덜 했을 것이다.
카렌이 계속 훌쩍이자 결국 레이는 곧이곧대로 황도에서 있었던 일을 설명했는데, 썩 현명한 대처는 아니었다.
레이의 설명을 전부 듣고 카렌이 되물었다.
"...성검을 살짝 뽑았을 때 새어나온 신성력이 브로치에 깃들었다고?"
"응."
"..."
카렌이 탁해진 눈동자로 레이를 바라봤다.
그걸 지금 변명이라고 떠들고 앉아있느냐, 뭐 그런 감정이 깃든 눈빛이었다.
사실 레이가 생각하기에도 자기 변명이 좀 병신 같기는 했다.
헌데 거짓말은 또 아니었던지라 레이는 답답해하며 해명을 계속했다.
결국 식사를 깨작거리던 카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그만 갈게."
"아니 진짜라니까. 잠깐만, 카렌!"
삐진 티를 팍팍 내는 카렌을 레이가 쫓아갔다.
그렇게 홀로 남게 된 루나는 덤덤하게 남은 식사를 마저 하고 결계 작업을 시작했다.
좀도둑들을 막기 위해 결계를 전개하는 거야 어렵지 않았지만 동력원이 문제였다.
강력한 동력원이 없다면 간단한 결계라도 몇 달씩이나 유지하기 힘들었다.
"..."
루나는 일단 한 달 정도 버틸 수 있는 결계를 전개하기로 결정했다.
전쟁이 길어진다 해도 한 달 단위로 찾아와 보수하면 될 문제였다.
루나가 주섬주섬 작업을 진행하고 있으니 레이가 축 처진 얼굴로 돌아왔다.
카렌을 깔끔하게 달래주는 것은 실패한 모양이었다.
어쨌든 루나는 작업을 이어갔고, 이내 마무리 지었다.
언제든 결계를 활성화시킬 수 있게 만들어놓은 루나가 돌아갈 준비를 했다.
레이가 루나를 향해 물었다.
"어디로 갈 거야?"
"...시그니 산맥으로 갈 거예요."
산맥에 있는 연구실을 찾아갈 거란 뜻이었다.
이 야밤에 산맥을 오르는 건 루나에게 너무나 위험...하지는 않겠지만.
레이는 결계 때문에 집까지 찾아온 루나를 바래다주겠다며 따라나섰다.
"..."
길을 걸으며 다시 한 번 둘 사이에 침묵이 감돌았다.
레이는 감정을 덜어내기 위해 노력했다.
늪에서 허우적거리듯 소모적인 고뇌에 시간을 쏟을 여유는 레이에게 없었다.
지금은 실리적인 고민을 해야 할 때였다.
숨을 크게 들이마신 레이가 입을 열었다.
"루나."
"..."
"네가 말해준 시술 말이지... 혹시 레아가 받으면 용혈을 안정시킬 수 있을까?"
루나가 고개를 들어 레이를 쳐다봤다.
루나는, 눈빛으로 욕설을 하고 있었다.
기가 죽은 레이가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곧장 설명을 덧붙였다.
"아니, 그게 말이지 루나야..."
만약 루나의 시술이 레아에게도 효과가 있다면 레이가 감수해야할 리스크가 크게 줄어들었다.
레아를 황도까지 데려가는 모험을 감행하지 않아도 되니 말이다.
루나는 레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지 이해했지만,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안 돼요."
루나가 레이를 연명시키는 데 이용하려고 하는 드래곤하트는 발레리우스의 드래곤하트 조각이었다.
정확히는, 울트가 소유했던 아티펙트인 '발레리우스'에 삽입되어 있던 드래곤하트 조각이었다.
그 작은 드래곤하트 조각엔 발레리우스의 소망과 권능이 농축되어 있었다.
그로 인해 발현되는 기이한 현상을 루나가 연구하고 응용해서 레이의 심장을 보호할 수 있는 시술을 개발한 것이었다.
아무 드래곤하트나 가지고 시술을 진행할 수는 없었고, 권능이 강하게 깃든 발레리우스의 드래곤하트 조각은 한 사람분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루나의 시술은 반드시 레이가 받아야했다.
"...그리고 레아에겐 이 시술은 큰 도움이 되지 못해요."
황족에게 있어 '황실의 드래곤하트'는 심장을 보호하는 장치임과 동시에 '용혈 저장소'에 가까웠다.
황실의 드래곤하트가 아니라면 황족의 체내에 흐르는 용혈을 안정적으로 저장하는 게 어려웠다.
괜히 지금까지 제국이 황실의 드래곤하트를 대체하지 못해 고생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
만약 루나에게 정말 많은 시간이 주어졌다면 연구를 통해 무언가 대책을 찾아낼 수도 있었겠지만...
레이와 레아는 그 시간을 기다려줄 수 없었다.
레이는 루나의 설명을 이해하고 한숨을 삼켰다.
결국 레아에게는 황실의 드래곤하트를 이식시켜야했다.
그러면서도 황실의 드래곤하트를 레이가 사용한 것처럼 눈속임 또한 해야했다.
그건 레이 홀로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이제껏 그래 왔듯, 레이는 또 루나에게 기대야만 했다.
"루나... 네게..."
레이는 자기가 염치없게 느껴지고 루나에게 미안해서 말끝을 흘렸다.
허나 루나는 쉽사리 레이가 하고자하는 부탁을 꿰뚫어보고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방법을 찾아볼게요."
"..."
"내가 레이를 도울 테니까, 그러니까..."
"..."
"꼭 우리 곁에 있어요."
루나가 레이의 손을 잡아왔다.
레이는 잠깐 망설이다 루나의 손을 움켜쥐고서 어둠이 내려앉은 길을 걸었다.
*
클레멘스는 레이의 부름을 받고 영주성 안에 있는 수련장을 찾았다.
수련장은 계단을 걸어 내려가야 해서 클레멘스는 기초적인 마법과 정령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수련장에 도착했다.
"레이 님. 아, 백작 영애께서도 계셨군요."
수련장 안에서는 레이와 알레시아가 클레멘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레이가 클레멘스를 향해 손짓했다.
"왔어? 일단 아가씨랑 계약 각인부터 하나 맺자."
굉장히 갑작스러운 요구였다.
허나 클레멘스는 불쾌한 감정을 내비치지 않고 레이의 말을 따랐다.
츠즉!
알레시아와 클레멘스 간에 계약 각인이 체결됐다.
알레시아의 셀로미어 용량이 얼마 남지 않아 강력한 계약을 맺을 수는 없었다.
그래도 지금 맺은 계약 각인을 통해 알레시아는 클레멘스의 행동 몇 가지를 제약할 수 있게 되었다.
가벼운 안전 장치를 하나 더 마련한 레이가 클레멘스에게 물었다.
"요즘 몸이 더 굳었지? 목발로는 걷기 힘든 것 같고."
"예, 그렇습니다."
"얼음 정령이 거동하는데 크게 도움이 되진 않을 테고... 그러니까 바람 정령과 계약시켜 줄게. 하루 몇 시간 정도는 수월하게 거동할 수 있을 거야."
"예? 아니, 어떻게..."
클레멘스는 레이가 정령과의 계약을 너무 쉽게 입에 담자 반사적으로 그리 되물었다.
레이가 고개를 돌려 알레시아가 미리 소환해두었던 바람 정령, 펜리르를 바라봤다.
"불러올 수 있는 친구 남아있지?"
[...]
펜리르가 굳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더는 동족의 배신자가 될 수 없다는 비장감이 펜리르에게서 느껴졌다.
그러자 레이가 흐뭇한 얼굴로 펜리르에게 다가갔다.
[깨갱!! 깽깽!!]
레이에게 몇 대 쥐어박힌 펜리르가 결국 친구를 찾아 떠났다.
잠시 뒤, 펜리르가 중하급 정도 되는 바람 정령을 하나 데려왔다.
레이가 흡족하게 웃으며 검을 뽑으려 했는데, 펜리르에게 불려 온 정령은 생각보다 클레멘스를 마음에 들어하는 눈치였다.
클레멘스 또한 계약 진행에 과격한 방법을 원치 않았기에 레이는 일단 상황을 지켜봤다.
츠즉!
마침내 클레멘스는 꽤 괜찮은 조건으로 계약 각인을 체결하는 데 성공했다.
그 모습을 보며 펜리르가 억울해하며 하울링 비스무리한 소리를 냈다.
나도 모너클 말고 네추럴이랑 계약하고 싶었는데! 어쩌다가 모너클이랑 노예계약을 맺어가지고!
그렇게 억울한 심정을 내비치던 펜리르가 알레시아와 눈이 딱 마주쳤다.
펜리르가 곧장 배를 까뒤집고 알레시아에게 애교를 부렸다.
알레시아는 뚱한 표정으로 펜리르의 배를 쓰다듬어 주었다.
한편 클레멘스는 바람 정령의 도움을 받아 어색하게 몸을 움직여 보았다.
정상적인 걸음걸이는 불가능했지만 충분히 연습한다면 어찌저찌 걷는 흉내는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클레멘스가 입술을 꾹 씹었다가 레이에게 거듭 감사를 표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그래, 앞으로 딴 생각 말고 더 잘해보자고."
"예, 노력해보겠습니다."
"곧 피난해야하는 거 알지? 짐 챙겨놔. 아, 근데 걔는 아직도 네 발로 다니냐?"
"..."
클레멘스가 어색하게 자기 뒷목을 매만졌다.
*
피난이 시작됐다.
한 번에 너무 많은 인파가 움직이면 통제하기가 힘들었다.
그렇기에 필립스 백작은 가디 자작령의 영지민에게 우선 피난할 것을 지시했다.
또한 필립스 백작은 병자, 거동이 힘든 노인, 아직 어린 아이들을 위해 마차를 몇 대 따로 준비해주었다.
지미는 디나르 지역으로 가서 패밀리와 함께 사람들을 통제하다 실소를 터뜨렸다.
"참 어색하군."
지미는 마차에 타는 노인과 아이들을 보며 그리 중얼거렸다.
한참 용병일을 할 때, 지미는 피난을 가는 행렬들을 가끔 마주칠 수 있었다.
피난민들 중엔 신체 건강한 남자가 다수였었다.
약하고 가난한 자들은 아예 버려지거나 행렬에 뒤처졌다가 죽어나가고는 했다.
헌데 이렇게 질서정연한데다 약자 배려가 갖추어진 피난 행렬이라니...
지미는 인생 참 오래 살고 볼 일이라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렇게 가디 자작령의 피난민들이 영지를 떠났다.
말을 탄 기사 몇과 병사들, 그리고 고용된 용병들이 피난민들을 통제하기 위해 동행했다.
레이는 별 걱정없이 떠나는 피난 행렬들을 보았다.
행렬의 선두에 있는 자가 울트 가디였다.
일이 꼬여 문제가 생긴다고 해도 울트라면 무력으로 진압할 수 있었다.
"나도 챙겨갈 짐이나 한번 더 확인해야지."
레이가 필립스 백작령을 향해 등을 돌렸다.
한편.
몇몇 용병단과 도둑들이 가디 자작령을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영지민들이 떠난 후 가디 자작령엔 침묵만이 내려앉아 있었다.
사람이 살았던 흔적은 고스란히 남아있는데 마을이 조용하니 분위기가 참 을씨년스러웠다.
물론 용병단과 도둑들의 눈에 가디 자작령은 보물 창고처럼 보였다.
피난민들이 값비싼 물건은 챙겨가려고 노력했겠지만 보따리 준비하는 것도 한계가 있는 법이었다.
잘 찾아보면 돈이 될 게 꽤 많았다.
아직 필립스 백작령은 대피가 끝나지 않아 마을을 터는 게 좀 위험한 행동이긴 했지만, 꾸물거리다간 다른 용병놈들이 선수를 칠 게 뻔했다.
"저기부터 가보자."
소규모 용병단의 우두머리는 좋은 자재로 건설된 저택들부터 뒤져보기 위해 움직였다.
저택 앞에 도착한 우두머리가 잠겨있을 게 분명한 저택의 문을 완력으로 뜯어냈다.
콰득!!!
우두머리와 용병단원들이 함께 저택 안으로 진입했다.
헌데 저택 안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뒤늦게 용병들은, 복도에서 무언가를 작업하고 있던 루나를 발견했다.
잠깐 당황한 기색을 내비친 용병들이 이내 덤덤한 목소리로 저들끼리 대화를 나누었다.
"어우, 첫 번째 집부터 운이 좋네. 혼자 있는 것 같은데."
"이쁘장하네. 돈 좀 되겠어."
"무슨 돈이야. 당장 팔아먹을 곳도 없잖아. 그냥 우리끼리 돌리고 깔끔하게 끝내자."
"근데 애 놓고 갔다고 또 찾으러 오는 거 아니야? 살짝 불안한데?"
"어찌할 거요, 대장?"
그렇게 용병들이 저들끼리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루나가 불쑥 물었다.
"...당신들은."
"...?"
"얼마나 나쁜 사람들인가요."
피난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