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7화
하늘이 어둑하게 가라앉았을 때.
레이는 홀로 주점에 들러 술을 주문했다.
레이는 주점에서 가장 좋은 술을 주문했지만 막상 주인이 내온 것은 황도에서 쉽사리 찾아 마실 수 있는 것보다 싸구려 술이었다.
레이는 개의치 않고 잔을 채우고 잔을 비웠다.
애초에 레이는 술맛을 잘 몰랐다. 레이가 자신있게 분별할 수 있는 건 기껏해야 도수 정도였다.
레이와 면식이 있는 자들은 한 번씩 아는 척만 하고 자리를 비켜주었다.
레이의 표정이 워낙 안 좋아 보였기 때문이었다.
짤랑!
레이가 얼음을 생성해 술잔 위로 떨어뜨렸다.
얼음을 타 먹는 종류의 술은 아니었지만 레이는 차가운 게 좋았다.
그렇게 레이가 홀로 말없이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데 술집 문이 벌컥 열렸다.
새롭게 주점으로 들어온 이들은 용병들이었다.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는 소문을 듣고, 필립스 백작령에 뭐 건질 것이나 일거리가 없나 찾아온 자들이었다.
만약 주민들이 집을 버리고 멀리 대피한다면 빈집이나 털어먹으려 들 것이다.
딱 그 정도 수준의 양아치였다.
용병들은 넓게 자리를 차지하고 앉더니 시끌벅적하게 떠들기 시작했다.
거칠게 구른 용병이라는 걸 드러내듯 온갖 추잡한 욕설이 쉴새 없이 입에서 쏟아져 나왔다.
시간이 지나 본격적으로 취기가 오르자 그들의 목소리는 더욱 커졌다.
원래도 표정이 굳어 있던 레이는 그냥 짜증이 났다.
조용히 술잔을 기울이던 레이가 용병 무리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레이와 눈이 마주친 용병이 곧장 인상을 썼다.
"뭘 쳐다봐, 새끼야."
일단 욕설부터 내뱉은 용병이 레이의 얼굴을 훑어보곤 미간을 찌푸렸다.
"어, 이 새끼 여기서 못 보던 얼굴인데. 신입이냐?"
"..."
"혼자 왔어? 야야, 일로 와 봐."
남의 집구석에 기어들어와서 주인 행세 하는 꼴을 보고 레이가 낄낄거리며 웃었다.
레이의 웃음이 터지자 술집 안이 조용해졌다.
용병들은 화가 났고, 백작령 사람들은 레이의 눈치를 보았다.
백작령 사람들은 레이가 지미와 매튜에게 '작위'를 물어다 주었음을 인지하고 있었고, 그게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일인지 대충이나마 알고 있었다.
그들은 호기심과 두려움이 섞인 눈으로 레이와 용병들을 번갈아 쳐다봤다.
레이는 술잔을 마저 기울이고는 짧게 말했다.
"물이 많이 나빠졌군."
"이 새끼가 뭐라는 거야?"
용병 한 명이 레이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주점 주인은 미리부터 핏물을 닦을 걸레를 선반 아래서 주섬주섬 꺼냈다.
그때 술집 문이 벌컥 열리며 한 사람이 더 주점 안으로 들어왔다.
지미였다.
지미는 안쪽을 둘러보더니 귀찮은 기색을 내비치며 레이에게 접근하던 용병에게 손짓했다.
"소란 떨지 말고 자리에 앉아 술이나 마셔."
"이건 또 뭐야?"
모여있던 용병들 중 한 사람이 벌떡 일어나서 지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다음 순간 뼈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땅을 굴렀다.
용병이 꺾인 다리를 감싸 쥐고 비명을 지르자 다른 용병들이 반사적으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무기를 들었다.
곧장 험악한 욕설이 용병들의 입에서 쏟아져 나오려 했지만, 그보다 앞서 주점의 주인이 꽥 소리쳤다.
"야 이 미친놈들아!!! 감히 헬름 자작님께 무기를 들이대?!!"
그 한 마디에 용병들은 혼란에 빠졌다.
눈을 빙글빙글 돌리는 용병들을 향해 지미는 말 없이 검을 뽑았다.
짙푸른 검기가, 지미의 검신에서 피어올랐다.
그제야 용병들은 정확하게 상황 파악이 되었다.
비록 지미의 차림새는 단출했지만 뽑혀 나온 검은 예기가 흘러넘치는 명검이었다.
명검 위로 피어오른 검기 또한 그 형태가 너무나 안정되어 있었다.
어설프게 배운 칼잡이 따위는 결코 아니었다.
용병들은 곧장 무기를 멀리 버리고 무릎을 꿇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부디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다들 비슷한 문장을 연거푸 외쳤다.
용병들은 지미를 상대할 수도 없었고, 상대할 수 있다고 해도 귀족에게 머리를 들이대는 건 정신 나간 짓이었다.
용병들은 식은땀을 뚝뚝 흘리며 지미에게 용서를 빌었다.
지미는 용병들을 한참 동안 내려보다 입을 열었다.
"함부로 행패 부리지 마라. 목 간수하고 싶으면 얌전히 기다리고 있다가 일거리나 받아가."
지미는 용병들 우두머리의 멱살을 움켜쥐고 자기 앞으로 당겨서 재차 경고했다.
"필립스 백작님께서는 영지민들을 사랑하신다. 함부로 해를 끼쳤다간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 거다."
건장한 성인 남성이 지미의 한손에 들려 대롱대롱 흔들렸다.
용병들의 우두머리가 켁켁거리며 목을 위아래로 끄덕였다.
지미는 잡고 있던 멱살을 놓아주며 손을 휘저었다.
"꺼져."
지미의 한마디에 용병들이 굽실거리며 주점을 나갔다.
분위기가 조용히 가라앉은 가운데 지미가 레이의 옆자리에 앉았다.
"혼자 마시냐?"
"네, 뭐... 근데 물이 많이 나빠진 것 같네요."
"요즘은 특히 어수선하지."
루비하 왕국과 전쟁이 난다는 소문 때문에 그랬다.
혼란이 찾아오면 빼먹을 게 많아지니 루비하 왕국과 국경이 맞닿아 있는 필립스 백작령에 잡것들이 기웃거리는 일이 많아졌다.
허나 그걸 제외하더라도 예전보다는 물이 나빠지긴 했다.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레이가 정말 병적으로 물 관리를 했기 때문이다.
깡패들이 돈 좀 뜯고 힘 자랑 좀 하고... 마을 사람들끼리 인맥과 뒷돈으로 권력 놀음 좀 하고... 부모 없는 애들 노예처럼 이리저리 써먹고.
정도의 차이만 있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
허나 레이는 병적으로 그런 것들을 싫어했고, 관리했었다.
그러다 레이가 손을 떼니 몇몇 사소한 부분들은 옛날 모습으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물론 지금도 지미가 처음으로 필립스 백작령에 발을 디뎠을 때와 비교하면 환경이나 의식 따위가 믿기지 않을 만큼 개선된 수준이었다.
악랄하고 무식하게 행동하던 주민들이 날이 갈수록 정감가고 사람답게 구니 필립스 백작도 자기 영지에 더욱 애정을 보이기 시작했었다.
그런 식으로 선순환이 이루어져 지금에 이른 것이었다.
처음엔 필립스 백작도, 백작령도, 영지민들도 지금과는 달랐다.
그걸 완전히 바꾼 게 레이였다.
짤랑!
레이가 술잔에 얼음을 띄워 지미에게 건넸다.
얼음 타서 먹는 술이 아니었기에 지미가 눈살을 찌푸리는데, 레이가 불쑥 물었다.
"지미, 내가 언제 처음 살인을 저질렀는지 알아요?"
"..."
침묵이 감돌았다.
기다려도 답변은 돌아오지 않았다.
지미는 그다지... 레이가 언제 처음 살인을 저질렀는지 알고 싶지 않았다.
알아봤자, 정말 어디에도 도움되지 않는 쓰레기 같은 정보였다.
그래서 지미는 침묵했다.
레이는 자기 술잔을 다시 채우며 과거를 회상했다.
레이는 사람을 죽였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벨라를 위하고 세상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사람을 죽였다.
사람을 죽이는 건 물리적으로 크게 어렵지 않았다.
마나라는 에너지원은 인체에 초인적인 힘을 부여했다.
극의에 이른 기사가 하늘을 갈라내게 만들어주는 에너지원 아니던가.
물론 대여섯 먹은 어린아이가 기적적으로 마나를 다루어봤자 잠깐 동안 성인과 비견되는 근력을 얻는 정도였지만, 그만해도 충분했다.
작은 날붙이를 숨겨서, 작은 몸뚱이로 비틀비틀 걸어가, 방심한 상대의 급소에 날붙이는 찔러넣는 것 정도는 전혀 힘든 일이 아니었다.
그러니 사람을 죽이는 건 물리적으로 크게 어렵지 않았다.
또한, 정신적으로도 크게 어렵지 않았다.
과거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레이의 인격은 더욱 냉혈하고 잔인하게 변모했다.
갓난아기였던 레이는 이 세상을 증오했다.
이 세상에 자신을 떨어뜨린 초월적인 존재와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들을 전부 증오했다.
그렇기에 과거의 레이는 사람을 죽이는 것에 제대로 된 죄책감을 느끼지 못했다.
과거의 레이는, 얄팍한 기준을 내세워 컴퓨터의 시스템을 최적화시키듯 사람을 처분했다.
도움이 될 놈.
도움이 안 될 놈.
해를 끼칠 놈.
레이는 사람을 세 종류로 분류했고, 해를 끼칠 놈이라고 분류한 것들은 되도록 제거했다.
딱히 나이를 가린 것도 아니었다.
유전 형질에 의해 나타나는 인격장애와 폭력성은 어린 나이부터 뚜렷이 발현되며 교육을 통한 교정이 불가능하다.
적어도 레이가 지니고 있는 전생의 지식으로는 그랬다.
그렇기에 정도가 극심하다고 판단되면 제거했다.
레이는 꾸준하게 필립스 백작령에 악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요소를 배제해왔으며, 그런 과정을 통해 이곳의 의식 수준을 인위적으로 끌어올렸다.
지금의 필립스 백작령에 흐르는 따뜻한 웃음들이 얼마나 많은 핏물을 밟고 이루어진 결과물인지...
오직 레이만이 정확히 알고 있었다.
"..."
레이는, 루나에게서 과거의 자신을 겹쳐봤다.
레이는 벨라를 사랑했으며 그녀의 선택을 온전히 존중했다.
상황에 맞춰 벨라를 설득하기 위해 노력하기도 했지만.
만약 벨라가 고집을 꺾지 않으면 상황을 뒤틀어서라도 벨라에게 맞춰주었다.
레이는 벨라를 위해 희생하길 마다하지 않았고 도리어 기꺼워했다.
과거의 레이는 지금의 루나보다도 훨씬 거칠었으며 극단적이었고 또한 비틀려 있었다.
그 모습을 남들에게 오롯이 보였다면 얼마나 끔찍하고 기괴하게 비쳐졌을까.
레이는 떠오르는 생각을 그대로 뱉었다.
"지미, 지미의 눈에는 내가 어떻게 비쳐졌나요. 내가 얼마나 괴이한 괴물처럼 보였나요."
레이는 그리 물었다가 재차 실소했다.
루나는... 레이가 바라던 모습으로 성장했다.
레이는 루나가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되, 대의나 자기 목적을 위해 '작은 희생' 쯤은 무릅쓸 줄 아는 강인함과 판단력을 갖추길 바랐다.
약간의 어긋남은 있었지만 분명 루나는 레이가 바라던 모습으로 성장했다.
허나 루나가 레이를 위해 밟고 있던 선을 넘고 '작은 희생'쯤은 무릅쓰겠다고 했을 때.
레이는 기쁘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대체 왜 기쁘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을까.
과거의 레이에게 있어 루나라는 존재는 수단이었다.
디나르 산 레전드리 고아.
레이는 그렇게 루나를 칭했고, 실제로도 그리 여겼다.
허나 이제 와서 레이는 루나가 손을 더럽히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다.
루나가 스스로의 손에 부정함을 묻히지 않기를, 레이는 바라고 있었다.
더는 레이에게 루나가 단순한 수단이 아닌 사랑하는 가족이었기에, 그렇게 바라고 있었다.
자기모순.
지금의 레이는 끔찍한 자기모순의 덩어리였다.
그렇기에 레이는 루나의 물음에 제대로 답해주지도 못했고, 루나를 막아 세우지도 긍정하지도 부정하지도 못했다.
얼마나 악한 사람을 희생시켜야 착한 마법사로 남을 수 있나요.
레이도 알지 못했다.
레이는 마치 도망치듯 산맥을 떠나 이곳을 찾아와 술잔을 채웠다.
그리 한심해 빠진 주제에, 레이는 지미에게 물었다.
"지미, 나는... 나는..."
스스로가 너무나 병신같고 부끄럽고 비참해서.
그래서 몇 번이나 망설인 레이는 울 것 같은 얼굴로 지미에게 답을 구했다.
"나는... 벨라에게 착한 아들이었을까요?"
지미는 레이를 바라보다 마침내 침묵을 깨고 피식 웃었다.
"최고의 아들이었지."
짠, 가라앉은 공기 속에서 술잔이 맑게 맞부딪쳤다.
피난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