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홍등가의 소드마스터-266화 (266/446)

266화

지미가 떫은 표정을 지었다.

사실 레이의 발언이 그다지 찌질하지는 않았다.

아니, 물론 찌질한 발언이긴 했지만 지미는 그보다 더욱 찌질한 언행들도 살면서 많이 보았다.

다만 상대가 그리 잘났던 레이였기에 지금의 언행이 유난히 찌질하게 느껴졌고, 또 안쓰러웠다.

레이는 정이 많았다.

정이 많았기에 자신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고 갈팡질팡해대는 게 이해는 갔다. 이해는 갔지만...

지미는 자기 가슴이 답답해져서 쓴소리를 했다.

"너는 대체... 언제까지 그럴 거야? 끊을 거면 확실하게 끊어내든가, 아니면 마음을 다르게 먹든가. 끝까지 어설프게 붙잡아만 둘 거냐?"

"..."

레이는 할 말이 없었다.

입을 다문 레이를 향해 지미가 한숨을 푹 쉬었다.

"레이, 상대방 입장도 좀 헤아려 봐. 그렇게 질질 끌다가 어느 날 네가 픽 쓰러져 버리면... 카렌은 어떨 것 같은데?"

지미는 카렌이 어찌 행동할지 눈에 빤히 보였다.

함께하지 못한 시간과 함께하지 못한 모든 것들을 후회하며, 조금 더 빨리 레이를 붙잡지 못했던 과거의 자신을 원망할 것이다.

지미의 질책에 침묵을 이어가던 레이가 결국 말을 돌렸다.

"그냥 다른 이야기 하죠."

"하아, 그래, 그러자."

"나 이거 받아 왔어요."

레이는 제국 수호 훈장을 꺼내 지미에게 전하며 필립스 백작에게 했던 이야기를 반복했다.

지미는 제국 수호 훈장을 만져보다 고개를 저었다.

이게 레이의 목숨값이라 생각하니 그다지 기분이 유쾌하지 못했다.

이번에도 한바탕 하고 온 것 같은데 과연 레이가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물어보기가 겁나서 함부로 묻기 힘들었다.

"...결국 소문대로, 이번 겨울에 전쟁이 나는 거냐?"

"네, 그럴 거예요."

"그러면 왕국이랑 전쟁은 언제쯤 끝날 것 같은데?"

"전쟁은 금방 끝날 거예요. 근데 루비하 왕국의 국왕을 축출하고 권력 공백이 생기면... 그게 장기적으로 문제가 좀 되겠죠."

왕국에 존재하는 여러 세력이 서로 권력을 더 차지하겠다고 싸우기 시작하면 답도 없다.

제국이 적당한 지도자를 밀어줘서 상황을 정리하려 하겠지만...

그런 식으로 일을 진행해서 잘 풀렸던 적이 역사적으로 드물었다.

"그러니 전쟁 끝나도 한동안은 긴장 좀 해야 될 거예요."

결국 필립스 백작가는 군비를 유지하거나 도리어 더 증강할 수밖에 없었다.

예전 같으면 영지가 파산했겠지만, 이제는 다행히 큰 무리가 가는 지출은 아니었다.

"어쨌든... 피난 갈 때 혼란이 생기지 않도록 주민들 통제하는 걸 도와줘요. 중요한 건물 있으면 미리 말해주고요. 결계로 보호해야 하니까."

"결계로 어떻게 보호할 건데?"

"글쎄요? 특정 범위의 산소 농도를 낮추는 결계 같은 건 유지보수도 쉽고 좀도둑들도 차단할 수 있어서 괜찮지 않을까 싶은데... 루나와 의논 좀 해봐야겠네요."

"...레이."

"왜요?"

지미가 고민 끝에 물었다.

"몸은 진짜 어떠냐?"

"..."

레이가 습관적으로 미간을 매만지더니 어깨를 으쓱였다.

"좋지는 않아요."

"얼마나?"

"저번에 말했잖아요. 앞으로 길어봤자 2년이나 3년..."

두통을 느낀 지미가 손으로 자기 눈두덩이 위를 꾹꾹 눌렀다.

말이 2년이나 3년이지, 언제 숨 넘어가도 이상하지 않을 수준일 게 분명했다.

지미는 심란함이 고스란히 묻어나오는 목소리로 반쯤 애원하듯 레이에게 호소했다.

"레이, 나는 두려워."

"..."

"네가 나에게 벨라와 레아를 끝까지 책임져달라고 할까 봐, 그게 두렵다고."

레이는 침묵했다.

지미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그 전부가 염치 없고 부질 없게 느껴졌다.

오랜 침묵 끝에, 레이는 씁쓸한 웃음을 머금은 채 가지고 왔던 검 한 자루를 지미에게 건넸다.

"선물이에요."

장인 이름값 때문에 더럽게 비싼 실전용 검이었다.

지미는 검을 받아 한 번 뽑아보고는 그다지 기뻐보이지는 않는 얼굴로 답했다.

"잘 쓸게."

"잘 써요. 하하... 지미가 꿍쳐놓은 돈 뜯어서 대장간 찾아갔을 때가 엊그제 같은데."

"가지고 있던 비상금을 네놈한테 몽땅 뜯겼었지."

"이거 참... 시간이 많이 빠르네요."

두통이 조금 심해졌다.

레이는 속이 울렁거리는 걸 느끼며 지미에게 부탁했다.

"지미, 요즘도 밭에서 브라시아 키우고 있죠? 그거 한 뿌리만..."

좋지 않은 추억이 떠오른 지미가 버럭 소리쳤다.

"아니 그거 라파라고 이 새끼야!"

"다들 잡혔을 때 그렇게 얘기하더라고요."

레이와 지미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낄낄거리며 웃었다.

*

Antimatter.

분명 강력한 마법이다.

허나 한 번에 생성할 수 있는 반물질이 너무 극소량이었다.

대량으로 생성하기 굉장히 어려운 게, 까딱 잘못하면 주변의 물질과 반응해 바로 소멸했다.

"..."

루나가 Antimatter 마법을 발현하다 고의로 마법의 균형을 흐트러뜨렸다.

허공에 떠 있던 눈으로 보이지도 않던 알갱이가 곧장 강렬한 빛과 열기로 변환됐다.

화아악!!

루나가 전개한 실드를 뜨거운 열기가 빗겨 흘렀다.

시간이 지나 열기가 가라앉자 완전히 녹아내린 지면 일부가 눈에 들어왔다.

루나는 검붉게 타들어간 지면 앞에 서서 생각에 잠겼다.

Antimatter... 생성부터 유지와 보관까지 까탈스럽긴 참 까탈스러운 마법이었다.

리스크도 컸고, 이걸로 적을 제대로 타격하기 위해선 또 여러 마법을 엮어내야 했다.

뭐, 그래도 즉발성만큼은 어느 마법보다 우수했다.

생성하기 힘들긴 하지만 1 그램만 모아도 산 하나가 우스웠다.

기대보다 못해서 그렇지, 잘 개선만 하면 매우 강력한 마법이 될 것이다.

루나는 정사면체의 단절된 공간 안에 존재하는 0.5 g 질량의 반물질을 바라보다 눈을 돌렸다.

레이가 찾아왔다.

레이는 루나를 발견하고는 웃음이 가득한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잘 지냈어? 새로운 마법 개발해?"

"..."

루나는 표정이 읽히지 않는 얼굴로 레이를 바라보다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잘 다녀왔나요?"

"응, 잘 갔다 왔어."

"...레이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요."

*

레이는 루나와 함께 산길을 걸었다.

산길을 걸어가며, 황도에 갔다오는 사이 있었던 일들을 루나에게 세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물론 황도 한가운데 전개된 장막을 뚫고 들어가 목숨을 걸고 싸웠다는 이야기는 생략했다.

그냥 자신의 특수한 힘을 이용해 장막을 부수는데 공헌을 했다, 그런 식으로 있었던 일을 축소했다.

허나 루나는 중간에 어떤 이야기가 생략되었는지 어럽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다.

루나가 레이의 말을 끊으며 물었다.

"...또 무리했어요?"

"무리는 무슨."

레이가 어색하게 웃었다.

그 웃음을 보며 루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

눈을 감으면 떠오르는 과거의 기억 속에서.

레이는 항상 자신의 삶을 너무나 쉽사리 소모시켰다.

레이는 처절하고 강박스럽게 자신의 삶을 소모시켰고, 이제 레이에게 남은 것은 불안정해진 심장의 고동 뿐이었다.

루나는 레이가 바뀌지 않으리라는 걸 알았다.

얼마남지 않은 삶조차 너무나 쉽사리 소모할 것이란 걸 알았다.

루나는 그런 레이를 설득할 자신이 없었다.

레이를 온전히 존중하고 사랑했기에, 루나는 레이를 억지로 막아세울 수도 없었다.

하지만.

"레이."

"응?"

"나는 당신을 잃을 수는 없어요."

레이가 산길을 걷던 발걸음을 멈추고 루나를 돌아보았다.

루나는 여전히 인형처럼 무감정한 표정을 덮어씌운 채 레이를 마주봤다.

"과거의 기록을 봤어요. 레이가 사용하는 기술을 계승하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죠."

심장과 혈관을 비롯한 인체 순환계 전반에 막대한 부하를 가하는 기술들.

아무리 대단한 육체를 지녔다고 해도 삽시간에 무너질 수밖에 없는, 그런 자멸기에 가까운 기술들.

레이는 과연 무사할까?

아닐 것이다.

레이는 하루하루 죽음에 가까워지면서도 육체를 혹사하길 반복했다.

레이가 자기 삶을 얼마나 우습게 여기며 쉽사리 소모하는지 루나는 이제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레이는, 얼마나 남았나요?"

"..."

레이는 답하지 못했다.

당혹스러움을 숨기기 위해 웃지도 못했고, 능청스럽게 그게 무슨 이야기냐고 되묻지도 못했다.

차갑게 내려앉은 루나의 목소리가 레이를 그렇게 만들었다.

루나가 다시 물었다.

"...레이는, 나를 믿나요?"

"..."

"레이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을... 내가 레이 대신 지켜줄 것이라 믿나요?"

레이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번민, 걱정, 후회, 의심, 안타까움, 미안함...

레이가 루나를 마주할 때마다 항상 품었던 감정들.

그 감정들의 근원적인 원인을 루나는 너무나 정확하게 찔러들어 왔다.

"레이, 나는..."

레이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루나는 오늘 처음으로 말라 비틀어진 웃음을 머금었다.

"나는 레이의 부탁을 완전히 외면할 수는 없을 거예요."

"..."

"하지만 말이죠... 레이가 정말로 소중히 여기는 사람을 지키고 싶다면, 레이가 있어야 해요."

이건 루나의 경고였다.

당신이 소중하게 여기는 것들을 나 또한 소중하게 여겨줄 수는 없다는, 그런 경고였다.

허나 레이가 끝끝내 루나의 애원을 무시하고 자기 삶을 희생하려든다면.

만약 그리 한다면...

"나는 레이를 붙잡을 방법을 찾아낼 거예요. 나는 당신을 잃을 수는 없으니까요."

이건, 설득이 아닌 통보였다.

루나는 굳어있는 레이에게 한 발 한 발 다가가, 레이의 가슴에 이마를 맞댔다.

"심장, 아프죠?"

전신이 망가졌을 것이다.

허나 가장 시급한 건 심장이었다.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기 위해선 일단 심장 문제라도 해결해야 했다.

"...발레리우스가 남긴 드래곤하트를 활용해 레이의 심장을 보호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노력했어요."

그리고, 성과가 있었다.

루나는 드래곤하트를 이식해 심장에 가해지는 충격을 흡수하고, 흡수된 에너지로 심장의 펌프질을 도울 수 있는 시술을 개발했다.

이 시술은 생물의 심장에 가해지는 모든 부담을 극단적으로 낮출 수 있었다.

레이에게 꼭 필요했으며, 또한 목숨을 연명시킬 수 있는 시술이었다.

허나 문제가 있었다.

아직 시술은 미완성이었고, 레이가 지닌 특수한 성질의 마나 또한 변수를 일으킬 게 뻔했다.

더군다나.

"대부분의 실험을 와일드호그의 심장으로 진행했어요."

마물과 인간은 다르다.

아무리 해부학적 구조가 유사한 장기라고 해도, 동일하지는 않다.

루나는 결코, 마물에게만 실험했던 시술을 레이에게 행할 수는 없었다.

그러니까, 반드시.

"나는 인간을 사용해 이 시술의 안정성과 효과를 검증해야 해요."

시선을 피하던 레이가 그제야 루나를 똑바로 마주봤다.

레이는, 루나의 은색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몰골을 보며 그제야 죽음이 맞닿아 있음을 선명히 느꼈다.

루나가 레이의 뺨을 감싸 쥐며 속삭였다.

"대답해 줘요, 레이."

"..."

"당신을 위해... 내가 얼마나 악한 사람을 희생시켜야 착한 마법사로 남을 수 있나요."

거울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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