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5화
필립스 백작의 시선이 삐딱해진 찰나.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클레멘스가 휠체어를 타고 집무실로 들어왔다.
클레멘스는 레이와 백작의 이야기를 문밖에서 들었던 듯 웃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상인 일을 하면서... 행운이 찾아와 갑작스레 재물이 불어난 자들을 종종 볼 수 있었습니다."
"근데?"
"흥청망청 재물을 쓰다가 패망한 졸부가 한둘이겠습니까. 그에 반해 백작님은 절제력이 아주 뛰어나신 편입니다."
클레멘스가 편을 들어주자 필립스 백작의 목에 힘이 들어갔다.
기세등등해진 필립스 백작을 보고 낄낄 웃어댄 레이가 허공에 손을 휘저었다.
"예전부터 백작님의 품위에 비해 집무실이 좀 남루하지 않나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안 그래도 한 번 얘기하려고 했는데, 이제 좀 괜찮네요."
"흠..."
뿌듯한 표정의 필립스 백작을 뒤로하고 레이가 클레멘스에게 물었다.
"그런데 클레멘스, 요즘 바쁘겠어?"
"예, 그렇습니다."
관리해야할 예산이 잔뜩 늘어났으니 안 바쁠 수가 없었다.
늘어난 재물을 창고에 박아만 둘 수는 없으니 결국 이런저런 투자와 사업을 진행해야 했다.
들뜬 기색을 내비치는 클레멘스를 바라보던 레이가 살짝 목소리를 낮췄다.
"웬만하면 들어줄 테니 필요한 게 있으면 말로 해. 뒤로 응? 그러지는 말고."
"항상 경각심을 지니고 있겠습니다."
클레멘스는 고개를 낮추며 레이의 경고를 받아들였다.
그 이후 분위기를 환기하기 위해 몇 분 동안 잡담을 이어간 레이가 본론을 꺼내 들었다.
"드려야 할 말씀이 몇 개 있습니다만... 아, 클레멘스, 너도 같이 들어."
돈을 다루려면 결국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야 하는지 알아야 했다.
레이는 백작과 클레멘스에게 황도에서 있었던 일련의 사건들과 함께 최근의 정세에 대해 설명했다.
아주 세세한 일까지 굳이 나열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제국 수호 훈장은 꺼내 보였다.
필립스 백작은 제국 수호 훈장을 보고 깜짝 놀라더니 이내 실소에 가까운 웃음을 터뜨렸다.
제국 수호 훈장.
참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는 물건이었다.
"이젠 여실히 내가 그대를 존대해야겠군."
"불편하니 그러지 말아 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음, 앞으로 조심하셔야 합니다."
"무엇을?"
"앞으로 필립스 백작령에 관심을 보이는 작자들이 늘어날 것 같습니다. 잘 걸러내셔야 합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했네."
"잘 해내실 것이라 믿습니다."
훈장을 품에 집어넣은 레이가 화제를 돌렸다.
"곧 전쟁이 시작될 겁니다. 대피령도 전달되겠죠."
"대피령이..."
필립스 백작이 한숨을 삼켰다.
영지를 비우고 대피한다는 게 머리로는 이해해도 마음이 참 거북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레이는 창밖으로 시그니 산맥을 돌아보며 백작과 마찬가지로 한숨을 삼켰다.
"시그니 산맥은 너무 넓습니다. 적대적인 병력이 움직여도 감지하기가 힘들죠. 대처하기도 힘들고요. 백작령의 사수를 고집하는 건 비효율적이고 위험한 선택입니다."
"나도 동의하네. 아쉽지만 어쩔 수 없겠지."
영지의 확장이나 사업의 진행 등...
필립스 백작령의 부흥을 위해 본격적으로 이것저것 알아보는 중이었지만 일단은 멈춰 세워야 했다.
"...허나 레이, 영지를 완전히 비우면 약탈을 막을 수 없을 걸세."
"백작령 전체는 아니더라도, 주요 시설들은 결계로 보호할 수 있을 겁니다. 그래도... 하하, 모조리 털릴 수 있다고 생각하고 챙길 걸 챙겨야 될 것 같네요."
최악의 상황을 대비하고 움직이는 게 좋았다.
영지를 비우면 당장 레인저들부터 간간이 산에서 내려와 뭐 쓸만한 건 없는지 슬쩍 뒤져볼 게 뻔했다.
백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1주일 안에 영지민들에게 대피령을 선포하고, 2주일 안에 피난 준비를 마칠 수 있도록 하겠네."
"바빠지겠군요. 아시겠지만... 주민들이 혼란에 빠지지 않도록 신경 써서 통제해야 됩니다. 질서 유지가 가장 중요하니까요."
"염두에 두겠네."
그밖에도 이런저런 사안에 대해 클레멘스와 백작과 함께 토의한 레이가 어느 정도 이야기가 마무리되자 검 한 자루를 짐에서 꺼냈다.
보석이 여기저기 박혀있는 예식용 보검이었다.
"백작님께 드리려고 챙겨온 선물입니다. 저 벽에 걸려있는 것보다는 그래도 10배는 비싸지 않을까 싶네요."
레이가 검을 건넸다.
필립스 백작은 화려하게 장식된 검집을 보며 헤벌레 웃었다가 뒤늦게 표정을 다잡았다.
어쨌든 필립스 백작이 좋아하니 피식 웃은 레이가 말을 이었다.
"기사님들 드릴 선물도 가지고 왔으니, 대피령 내리기 전에 한 번 모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세간에 나름 명검이라 불릴만한 물건이 짐마차에 잔뜩 실려 있었다.
중상급 정도 되는 전투용 아티펙트도 기사들에게 나눠줄 수 있을 만큼 챙겨왔다.
레이는 이제 그 정도쯤의 물건들은 달라는 대로 받아올 수 있는 입장이었다.
앞으로 며칠 동안은, 선물을 뿌리느라 바쁠 예정이었다.
"아, 클레멘스, 네게 줄 선물도 있긴 한데, 다음에 따로 얘기하자고."
"예, 감사합니다."
그후 레이는 백작과 이야기를 마무리 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필립스 백작령에 귀환한 후 아직 얼굴을 못 본 사람들이 많았다.
레이는 아빠 얼굴을 볼 생각에 묘하게 신이 났다.
*
지미를 찾아가기에 앞서.
레이는 영주성에 머물고 있다는 파견병들부터 찾아갔다.
필립스 백작령의 방위를 도우라고 황실이 파견한 병력들이었는데, 이런 경우 파견병들은 보통 콧대 높게 굴고는 했다.
귀하신 몸이 시골까지 내려왔으니 알아서 대접해야한다는 논리였다.
허나 필립스 백작은 파견병들의 태도가 예상보다 훨씬 겸손했으며, 현재는 조용히 영주성에 머물고 있다고 이야기했다.
에른스트나 황제가 파견병들에게 무언가 언질을 준 모양이었다.
레이는 안심하면서도 파견병들의 얼굴이나 한번 확인할 생각이었다.
헌데 가장 처음 마주친 파견병의 얼굴이 익숙했다.
"뱅?"
"다시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뱅이 곧장 무릎을 꿇고 예를 갖췄다.
레이도 반가움을 드러냈다.
"어, 그래. 다시 보니 반갑네."
뱅은 울트를 찾기 위해 알리모에 잠입했을 때 동행했던 기사였다.
뱅은 아주 깍듯한 태도로 레이를 다른 파견병들에게 안내했다.
파견병들은 총 8명이었고, 기사, 마법사, 성기사들로 이루어진 고급 전력이었다.
뱅을 제외하면 레이와 일면식이 없는 자들이었다.
허나 파견병들은 레이의 신분을 정확히 알고 있는지, 먼저 고개를 숙여왔다.
레이는 굳이 기강을 더 잡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에 그냥 가볍게 경고했다.
"목에 힘 주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사람들 겁 주지 마. 필립스 백작님과 필립스 백작 영애께 예의 지키고. 싸가지 없게 굴다 걸리면 재미 없을 거야."
"예, 걱정하지 마시고, 저희가 필요하면 불러주십시오. 그때까지 조용히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역시나 깍듯한 답변이 돌아왔다.
레이는 파견병들과 인사를 끝내고 지미를 찾아가기 위해 말을 빌렸다.
알레시아가 친히 말을 내어주며 외쳤다.
"나의 기사여! 또 나를 두고 금방 떠나면 아니 된다!"
"음... 한동안은 우리 아가씨 곁에 머물까 생각 중이야."
둘밖에 없었기에 레이는 말을 편하게 했다.
알레시아는 흡족해하면서도 레이의 뺨을 만져보며 당부했다.
"몇 달 만에 돌아왔으니 좀 휴식을 취하거라. 피곤해 보이는구나!"
"당장은 힘들지 않을까 싶네. 앞으로 몇 주는 또 바쁠 것 같아서."
"또 무슨 일이 있느냐?"
"오늘은... 힘들 것 같고, 내일 자세히 설명해 줄게. 식사 같이 하면서."
"알겠느니라! 기다리고 있겠도다, 나의 기사여!"
"그럼 내일 보자."
레이가 말을 인계받아 영주성을 벗어났다.
레이를 태운 말이 힘차게 달려나갔다.
레이가 바람을 느끼며 주변을 둘러보는데 저 멀리서 붉은 머리카락을 지닌 소녀가 보였다. 카렌이었다.
카렌은 웃음을 머금고 마을 청년 한 명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레이는 괜히 마음이 불편해졌다.
데린이 주제넘게 떠들어댔던 말들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카렌이 다른 남자 어쩌구 저쩌구 시골에 오락거리가 어쩌구 저쩌구...
뭐 그딴 시답잖은 헛소리가 왠지 모르게 레이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한편, 카렌은 뒤늦게 말이 달리는 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렸다가 레이를 발견했다.
카렌의 입가에 맺혀 있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카렌이 환히 웃으며 손을 흔들어주자 레이도 마주 손을 흔들어주곤 계속 말을 몰았다.
레이는 묘하게 속이 불편했다.
*
말발굽 소리가 들려온다.
지미가 몇 년 전에 끊었던 담배를 다시 물었다.
점점 더 다가오는 말발굽 소리를 들으며 지미가 비장미 넘치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군."
아들(아님)이 영지로 귀환했다는 소식은 이미 들었다.
지미는 차분하게 호흡을 고르며 미리부터 마음을 다스렸다.
"아빠!!"
시발.
지미가 몸을 부르르 떠는 사이 레이가 사무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지미가 물고 있던 담배를 뱉어내며 레이에게 따졌다.
"왜 이렇게 일찍 돌아왔냐?"
"아빠 보고 싶어서요?"
지미가 두 눈을 질끈 감았다가 그냥 자리에 주저앉았다.
레이가 반대편 의자에 앉으며 입을 열었다.
"매튜는요?"
"자기 영지 구경하러 갔어. 전쟁 소식 들었으니 곧 귀환하겠지."
"아 그래요? 영지에 가 있는 줄 알았으면 데려올 걸 그랬네요."
매튜의 영지가 황도와 가까워서 충분히 가능했을 것이다.
레이는 가볍게 혀를 찬 후 지미의 얼굴을 살폈다.
"못본 사이 안색이 좋아졌네요? 경지가 올라서 그런가? 최근엔 오히려 젊어지는 것 같아요?"
"너는 안색이 영 별로구나. 많이 안 좋냐?"
"어... 나 그렇게 안색이 안 좋아 보여요?"
"용병일 할 때 너처럼 안색이 창백하게 질린 놈을 몇 명 봤지."
그놈들이 얼마 못 가 죽었다는 이야기를 지미는 굳이 덧붙이지 않았다.
레이는 뺨을 긁적이다 화제를 돌렸다.
"루나는요?"
"시그니 산맥에서 이것저것 연구하느라 바쁜 것 같던데. 살아있는 와일드호그가 필요하다고 해서 사냥을 몇 번 도와주기도 했어."
"와일드호그요?"
생체 실험이라도 하는 걸까.
마법사들이 마물 가져다가 만지작거리는 건 드문 일이 아니긴 했다.
루나도 그쪽에 관심을 가졌다는 게 레이에게 살짝 의외이긴 했지만 말이다.
"아... 근데 지미."
레이가 표정을 굳히더니 굉장히 심각한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그러자 지미도 덩달아 심각해져서 자세를 고쳐 앉았다.
"왜?"
"제가 없는 사이..."
"..."
"카렌이 혹시 다른 남자 만난 적 있나요?"
지미가 감탄했다.
"이야, 내가 평생 동안 들어본 것 중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오는 찌질한 소리다."
"놀랍게도 저도 동의하는 바입니다."
"얼마 전부터 너랑 잘해보는 건 포기했는지 마을 남자를 갈아 끼우며 만나고 다니던데?"
"아, 구라치지 마요!!"
레이가 버럭 소리치며 거품을 물 것처럼 발작하자 지미가 도리어 따지고 들었다.
"그러면 카렌이 천년만년 지고지순하게 너 하나만 바라볼 줄 알았냐? 걔도 한창때인데?"
"아니 진짜 구라치지 말라고요!!"
"구라 아니면 어쩔 건데?"
"아!! 지미!!"
레이가 세상 찌질하게 징징댔다.
거울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