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4화
황도를 떠날 때가 되었다.
레이는 황도를 떠나기 전 미하엘을 통해 모로스를 반환했다.
습격 사건 이후, 황도는 드래곤을 포함한 강대한 존재의 영향력을 완전히 배제할 수 있도록 방위 시스템을 재편하는 중이었다.
이 작업을 완료하고 검증하기 위해서는 모로스가 꼭 필요했다.
그와 별개로 제국의 신검을 수명도 얼마 남지 않은 레이에게 맡긴다는 것이 애초에 어불성설에 가깝긴 했다.
황제조차 황도 밖으로 들고 나가기는 어려워하는 제국의 신물 아니던가.
때문에 레이는 당연한 절차라 생각하고 모로스를 반환했다.
허나 모로스를 반환했다고 해도 이미 많은 사람들이 레이가 모로스를 다루는 모습을 목격했다.
모로스는 영웅성과 함께 황실의 전통성을 상징한다.
때문에 그날 레이를 목격한 귀족들 중 다수는 레이가 장래에 황실로 편입될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다.
그게 아니라면 아무리 상황이 위급해도 황제가 모로스를 내어주진 않았을 것이라고, 많은 귀족들이 그리 생각했다.
어쨌든 레이는 모로스를 반환한 후 새로운 검을 한 자루 하사받았다.
저번에 하사받은 검은 예식용에 가까웠지만 이번에 하사받은 검은 실용성에 치중되어 있었다.
레이는 새로운 검이 꽤 마음에 들었다.
20년 전 죽은 이름 높은 장인이 제작한 무구 중 최고로 꼽히는 검이라는데, 확실히 완성도가 높았다.
장인의 억센 고집을 반영하듯 불필요한 치장이 완전히 배제되어 있다는 점이 더욱 레이의 취향에 맞았다.
"만약..."
에른스트가, 레이가 맡겨두었던 드래곤하트가 삽입된 아티펙트를 돌려주며 입을 열었다.
"드래곤과 유사한 권능을 지닌 존재와 대치하게 되면 제어가 힘들 수도 있다. 유의하거라."
"예, 알겠습니다."
드래곤하트를 동력원으로 삼는 이상 해결 불가한 문제였다.
껄끄럽긴 했으나, 그렇다고 드래곤이 무서워서 정상급 아티펙트를 창고에 박아둘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근데, 후작님께선 한동안 황도에서 머무시겠군요?"
"그래. 황제 폐하의 곁을 지킬 것이다."
황도의 방위 시스템이 완전히 복구되기 전까지는 그리 해야 했다.
안 그래도 전쟁 때문에 병력과 물자를 여기저기 빼야하는데 에른스트까지 밖으로 돌릴 수는 없었다.
에른스트는 잠깐 말없이 레이를 바라보다 집무실 벽에 걸린 지도를 가리켰다.
"필립스 백작령엔 대피령이 내려질 거다."
제국이 레인저의 회유에 실패할 수도 있다.
루비하 왕국의 군단이 역공을 위해 시그니 산맥을 넘는 무리수를 둘 수도 있다.
그런 사태가 일어나면 전쟁의 승패를 떠나 필립스 백작령은 무고한 영지민들의 인명 피해를 다수 감수해야 했다.
많은 수의 제국군을 백작령 근방에 추가로 배치해 드넓은 시그니 산맥을 경계할 수 있는 방어선을 구축하면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이긴 했지만...
그건 너무 비효율적이고 비현실적인 방법이었다.
차라리 필립스 백작령과 가디 자작령을 잠깐 비우는 게 현실적인 선택이었다.
헌데 그렇게 발생된 피난민은 대체 어디로 가야 하느냐 하면, 바로 오시리스 백작령이었다.
오시리스 백작령은 요충지라 불릴 만한 지역 중 한 곳이었다.
루비하 왕국과 가장 가까운 항구 도시 중 한 곳이었으니, 전쟁 전부터 방위를 위해 제국군이 추가적으로 배치되고 있었다.
만약 필립스 백작가의 기사단까지 오시리스 백작령에 합류하면 어지간한 군단도 찍어누를 수 있는 전력이 갖추어질 터다.
"피난민을 수용하라는 황명이 오시리스 백작령으로 전달되었다."
물론 피난민 수용에 관한 문제는 이미 몇 달 전에 합의가 끝난 사안이었다.
에른스트와 황제가 오시리스 백작령에 물자를 지원하는 동시에 대놓고 피난민을 수용하라 압박을 넣으니 오시리스 백작도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오시리스 백작령에 피난민을 수용하기 위한 준비 작업이 한참 전부터 시작됐지만, 작은 문제가 하나 생겼다.
"...황도가 습격당해 전쟁이 앞당겨졌다."
본래 봄에 하려던 전쟁을 한겨울에 하게 되었다.
무식한 짓이었으나 악마숭배자들에게 시간을 주느니 물자를 쏟아부어서라도 빠르게 마무리 짓는 게 옳았다.
"전쟁이 앞당겨졌으니 피난민 수용 준비가 조금 미흡할 수 있을 것이다. 혹여 피난민을 핍박하려 든다면 훈장이라도 보이거라."
"하하, 예, 알겠습니다. 근데 오시리스 백작이 제 이름을 모를까요?"
"중앙에서 활동하는 귀족은... 얼마 안 가 모두가 네 이름을 알게 될 것이다. 허나 외곽 지역이라면 시간이 더 오래 걸릴 수 있겠지."
황실에선 이번 황도 습격 사태 때 제국 수호 훈장 수요자가 활약했다는 단편적인 사실만 공표했다.
표면적으론 레이의 신분에 관한 사안을 대외비에 붙인 것이다.
허나 이번엔 레이를 직접 본 사람들이 너무 많아 정보 통제가 될 리가 없었다.
뒷조사 좀 하면 레이의 진짜 신원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고 말이다.
"하아."
레이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예견되었던 일이니 새삼스레 스트레스 받을 것도 없었다.
에른스트가 지도에서 눈을 뗀 후 가라앉은 목소리로 레이에게 당부했다.
"연락책을 마련해놓을 테니,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거라."
"예, 감사합니다."
"그래, 가서도 몸조심하거라."
*
헤어지기 전.
요하나가 레이를 꽉 끌어안았다.
울지는 않았다. 다만 요하나는 한참을 그러고 있었다.
"...다치지 마."
"걱정하지 말고, 잘하고 있어."
레이가 손을 휘저어 요하나의 머리카락을 헝클었다.
한참 어린 나이에 그랬던 것처럼 요하나는 레이의 품에 잠깐 이마를 비비고 떨어졌다.
레이는 데런과도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나 먼저 고향에 좀 가 있을게. 학기 끝나고 보자."
"예, 형님."
"겸손은 적당히 떨고, 우습게 보이지 말고 항상 자신감 있게. 처세에 신경 쓰고, 사람 가리지 말고 잘 사귀어 둬."
레이는 마지막까지 잔소리를 했다.
생도, 교관, 자문관... 그들 모두가 배경이 부족한 데런에게 강한 힘이 되어줄 인맥들이었다.
또한, 그들 모두가 레이보다도 훨씬 오래갈 데런의 인연들이었다.
꺼벙한 쥬세핀도, 은근 줏대 없이 구는 아론도 언젠가는 완숙하게 변해 데런과 함께 미래를 개척할 것이다.
그런 미래를 상상해본 레이가 작별 인사를 마무리 했다.
요하나와 데런은 제자리에 서서 떠나는 레이의 뒷모습을 한참 지켜봤다.
그후, 레이가 황도에 있는 프리슬란 가문의 저택으로 돌아오니 마차가 준비되어 있었다.
레이가 마차에 타기 전 스페라가 밝은 얼굴로 인사했다.
"다음에 봐요."
"네, 잘 지내세요, 아가씨."
레이가 마차에 타기 전에 뒤돌아서려던 순간.
언제 인사가 끝나나 기다리고 있던 세리아가 뒤에서 레이를 붙잡아 들어 올렸다.
겨드랑이 사이를 잡혀 자동으로 축 처져버린 레이를 세리아가 마차 안에 실었다.
세리아가 마차에 타기 전 가볍게 손을 흔들자 스페라가 웃음을 머금은 채 고개를 살짝 숙였다.
*
마차를 타고 가던 레이의 입가에 웃음기가 감돌았다.
워프 게이트 등을 이용해 이동거리를 단축했기에 필립스 백작령까지는 금방이었다.
필립스 백작령과 가까워질수록 공기의 내음이 달라졌다.
세리아와 마차를 타고 가며 옛날 생각이 난 레이는 어디 산적이라도 습격하지 않을까 살짝 기대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제 창밖의 풍경이 완전히 익숙해져서, 레이는 미리부터 마차에서 내릴 준비를 했다.
마침내, 마차가 필립스 백작령 안으로 진입했다.
곧 익숙한 목소리가 레이의 귓가를 울렸다.
"나의 기사여!"
레이가 웃음을 터뜨렸다.
간만에 들으니 알레시아의 목소리가 굉장히 반갑게 느껴졌다.
세리아는 자기 몸을 마차 구석으로 밀며 레이에게 나가보라고 손짓했다.
세리아가 얼굴을 드러내면 또 격식 따위를 서로 차려야 하니, 괜히 레이를 환영하는 분위기가 흐려지지 않도록 배려한 것이었다.
레이는 사양 않고 혼자 마차 밖으로 나갔다.
레이를 향해 총총총 다가온 알레시아가 환히 웃다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안색이 좋지 않구나!"
"네?"
"어디 아픈 곳이라도 있느냐?"
"어... 여행이 약간 피곤했나 봐요. 잘 지냈어요?"
"나의 기사가 자리를 비워 잘 지내지 못했느니라!"
"그래도 예정보다 빨리 귀환했잖아요."
"이러다 나의 기사가 나의 기사가 아니게 될 것 같아 불안하구나 나의 기사여!"
알레시아의 힐난 아닌 힐난에 레이가 낄낄 웃었다.
잠깐 알레시아의 장단에 어울려준 레이는 친히 마중을 나온 필립스 백작과 가볍게 인사를 나누었다.
어차피 중요한 이야기는 영주성에 들어가서 할 것이기에 필립스 백작은 인사만 짧게 나누고 자리를 비켜주었다.
필립스 백작이 비켜서자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레아가 와다다 달려왔다.
"오빠 왔다!!"
"..."
레이가 레아를 보고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잠깐 못 본 사이 레아는 키가 조금 자란 듯 싶었다.
앙증 맞은 몸짓으로 달려온 레아가 폴짝 뛰어 레이에게 안기며 외쳤다.
"오빠 빨리 왔다!!"
"그래, 오빠 왔다, 동생아."
레이가 대충 레아를 흔들어준 후 바닥에 내려놓았다.
레아는 마차 안에 뭐가 들어 있을까 슬쩍 살피더니 눈동자를 반짝반짝 빛내며 외쳤다.
"선물!! 선물 줘!! 레아 선물!!"
맡겨놓은 거 내놓으라는 듯 두 손을 내미는 레아를 보며 레이는 동생 기강을 잡을 때가 돌아왔음을 깨달았다.
레이가 슬그머니 주먹을 들어올렸다가 내리쳤다.
헌데 레아가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두 팔을 들어올려 막았다.
콩!
"어쭈?"
레이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자 레아가 곧장 와다다 도망쳤다.
레이가 혀를 끌끌 차며 손짓했다.
"이리 와, 이리 와."
"..."
레아가 눈치를 보다 슬금슬금 다시 다가왔다.
레이는 언제든지 도망칠 준비를 하는 레아에게 미리 준비해왔던 선물을 짐마차에서 꺼내 잔뜩 안겨주었다.
레아가 곧바로 함박웃음을 머금었다.
"선물이다!"
신이 난 레아는 입을 다물지도 못한 채 품에 가득 선물을 안고 뒤뚱거리며 벨라에게 돌아갔다.
너무 신이 나서 '오빠 최고!' 따위의 립서비스도 잊은 레아를 보며 레이는 다시 한 번 기강 다지기를 다짐했다.
침이라도 흘릴 것처럼 헤벌레 웃으며 좋아하는 레아를 뒤에 두고 벨라가 다가왔다.
"우리 아들, 왜 이렇게 얼굴이 상했어?"
"음..."
알레시아에 이어 벨라까리 이리 말하자 레이는 진짜 자기 안색이 좋지 않은가 고민했다.
"...마차를 오래 타서 약간 피곤한가 봐요."
결국 레이는 뻔한 핑계를 대며 벨라와 마주 안았다.
그 이후 카렌이 다가와, 레이 품에 얼굴을 묻으며 조용히 속삭였다.
"보고 싶었어."
"..."
레이는 말 없이 카렌을 안아주며 그녀의 은은한 체취를 느꼈다.
잠시 동안 조용히 레이의 품에 안겨있던 카렌이 한 걸음 물러서며 물었다.
"요하나랑 데런은?"
"둘다 이지스에서 잘 하고 있어. 근데... 루나가 안 보이네?"
"아... 요즘 중요한 마법...? 실험을 하고 있다고 들었어. 시그니 산맥에서. 그래도 금방 돌아올 거야."
"그래? 그럼 방해하면 안 되겠네."
레이가 시그니 산맥을 돌아봤다.
서클에 새겨진 계약각인을 통해 저 너머에서 루나의 존재감이 느껴졌다.
루나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음을 확인한 레이가 마중을 나온 다른 사람들과도 인사를 나누었다.
그 사이 세리아는 슬쩍 마차에서 빠져나와 피코르의 안내를 받아 영주성으로 향했다.
잠시 뒤.
레이 또한 마중 나온 사람들과 인사를 끝내고 영주성을 찾았다.
필립스 백작의 집무실을 찾아가며 레이는 묘하게 간질간질한 느낌을 받았다.
필립스 백작의 집무실 또한 레이가 참 어릴 때부터 드나들었던 장소였다.
그렇기에 이런저런 추억이 깊게 배여 있는 장소... 였으나.
"..."
필립스 백작의 집무실 안으로 들어온 레이가 말 없이 주위를 살폈다.
오래 사용해 낡았지만 나름 고풍스러운 멋이 있었던 집무실 안의 집기들...
그것들이 전부 반짝반짝 빛나는 고급품으로 바뀌어 있었다.
의자나 탁자 따위의 가구도 마찬가지였다.
전부 다 어설프게 값 좀 나가는 고급품들로 교체되어 있었다.
벽을 돌아보자 보석이 올올히 박힌 예식용 보검 하나가 떡하니 걸려서 시선을 사로잡았다.
더 이상 이곳은 레이에게 추억의 장소가 아니었다.
"..."
레이가 묘하게 떫어 보이는 눈빛으로 필립스 백작을 돌아봤다.
필립스 백작은 괜히 레이의 시선을 피하며 헛기침을 했다.
몇 달 못 본 사이에 때깔이 많~이 고와지셨습니다.
그따위의 문장을 우물거리던 레이가 최대한 말을 순화시켰다.
"팔자 피셨군요."
"..."
이번엔 필립스 백작의 시선이 삐딱해졌다.
거울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