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홍등가의 소드마스터-263화 (263/446)

263화

이지스.

제국 최고의 군사 교육 기관.

비록 최근에 대형 사고가 터진 데다 전쟁이 코앞이고 생도들 중 다수가 크고 작은 부상을 입었다고 해도 계속 수업을 미룰 수는 없었다.

수업 재개가 결정된 후, 넬슨은 2급 생도와 3급 생도들을 모아두고 한 번 마음을 다잡아주는 시간을 가지려고 했다.

너무 엄하지는 않게, 허나 혼란한 정신을 다잡을 수 있도록.

넬슨은 그런 느낌의 훈계를 생각하며 교실로 들어왔고, 교실 안에 있던 레이와 눈이 마주쳤다.

"..."

"..."

넬슨이 눈을 깜박이다 어렵사리 물었다.

"그... 왜 여기 계십니까?"

"아, 떠나기 전에 잠깐 들렀어. 얼굴도 안 보고 헤어지면 섭섭하잖아."

안 그래도 일주일 안에 필립스 백작령으로 출발해야 했다.

다만 요하나와 데런도 눈에 밟혔고, 이지스의 분위기 환기도 필요할 것이라 생각했기에 뻔뻔하게 생도 복을 차려입고 이지스로 잠시 귀환했다.

레이의 의도는 좋았지만 넬슨은 속으로 이 새끼... 아니, 이분이 아주 끝까지 깽판을 놓는다고 생각했다.

레이가 넬슨에게 손을 휘저었다.

"나 신경쓰지 말고 하려던 거 해."

"..."

레이는 다른 학생들처럼 앉아있었다.

다만 의자에 앉아 있지는 않았다.

원래 있던 의자를 치우고, 바닥에 머리를 박은 채 엎드려뻗쳐 있는 베르덴을 의자로 삼아서 앉아 있었다.

베르덴은 한참 전부터 그러고 있었는지 이마가 땀으로 축축했다.

이마가 축축해지니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 더욱 배에 더욱 힘을 줘야 하는 악순환이 발생했다.

마나라도 활용할 수 있었다면 상황이 나았겠지만, 당연히도 금지였다.

"꺼윽... 크흑..."

"..."

넬슨은 숨이 넘어갈 것처럼 끅끅거리는 베르덴을 외면한 채 단상 앞에 섰다.

그리고선 준비해왔던 이야기를 되도록 빠르게 끝낸 후 레이를 돌아봤다.

"그... 혹시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지?"

"아, 내가 할 말?"

레이가 책상에 팔을 올리고 턱을 괴었다.

물론 레이 앞에 있는 책상은 나무나 금속 따위로 이루어진 책상이 아니었다.

로안과 다른 2급 생도 한 명이 허리를 뒤로 젖힌 채 서로의 어깨에 정수리를 붙이고 버티며 인간 책상 노릇을 하고 있었다.

레이가 로안의 배 위에 팔꿈치를 올리고 무게를 싣자 로안이 거품을 물려고 했다.

넬슨은 역시나 로안을 외면했다.

레이는 생도들을 돌아보며 짧게 말했다.

"다들 잘해 줬다."

그 한 마디에.

생도들은 심장이 고동치는 것을 느꼈다.

레이가 대체 왜 이지스까지 기어들어온 것인지 아직도 이해가 전혀 안 갔지만.

그런 것과 별개로 레이라는 존재는 제국민들 모두가 동경하고 동경해야만 하는 영웅이었다.

영웅의 짧은 찬사는 이지스 생도들에게 격정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레이는 그렇게 생도들을 흥분시켜 놓고는 불쑥 짜증을 냈다.

"그리고 새끼들아, 그 좀 쓰잘데기 없는 똥군기 좀 없애라. 목욕탕부터 시작해서 그런 게 한두 개냐? 대체 왜 그러는데?"

베르덴 위에 앉아서 할 만한 소리는 아니었다.

허나 생도들은 반문 못하고 고개를 수그려야 했다.

*

레이는 차근차근 이지스를 떠날 준비를 마쳐갔다.

물론 빠르게 정리할 것만 정리하고 훅 떠나버릴 수도 있었지만 레이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루나의 존재를 비롯해 필립스 백작령에 상주하는 전력이 충분했기에 레이는 조금 더 여유를 부릴 수 있었다.

물론 계속 황도에 죽치고 있을 건 아니었다.

제국이 전쟁을 선포하기 전, 그리고 필립스 백작령 사람들이 본격적으로 대피 절차에 들어가기 전에 필립스 백작령에 도착할 생각이었다.

"하아..."

레이는 이지스 내부 공원의 벤치에 앉아 차가운 공기를 들이마셨다.

남들에겐 상담키 힘든 난해한 고민들을 레이가 되새기고 있는데 세리아가 다가왔다.

"조카."

"네, 고모."

레이는 세리아가 또 겨드랑이 사이에 손을 끼워 넣지는 않을까 긴장하면서도 일단 반갑게 답했다.

세리아는 왠지 모르게 뿌듯한 표정으로 양손을 뻗어 레이의 뺨을 꽉 잡았다.

"허가받았어."

"눼? 뭐여?"

뺨이 눌려서 발음이 뭉개졌다.

레이는 세리아의 손을 떼어내며 다시 물었다.

"뭘 허가받아요?"

"같이 갈 거야. 조카랑."

레이의 표정이 삐딱해졌다.

*

"흐흥~"

필립스 백작령 인근의 시그니 산맥에서.

로필렌은 콧노래를 부르며 마법을 활용해 마물의 사체를 질질 끌고 갔다.

근래에는 기분 좋은 일들이 이래저래 많았다.

일단 레이가 따로 손을 써준 덕분에 황실 마탑에서 나올 때 맺어야 했던 계약 각인의 규제가 완화됐다.

정기 보고 절차도 생략됐고, 이제 황실 마탑의 허가 없이도 여기저기 나돌아다닐 수 있었다.

운신의 폭이 굉장히 자유로워졌다는 의미였다.

더군다나 얼마 전 로필렌은 6서클의 경지에 올랐다.

이제 누가 뭐래도 로필렌은 뛰어난 고위마법사였다.

서클은, 그 자체로는 동력원이라기보다 일종의 마나 연산자에 가깝다.

로필렌이 루나의 연구를 보조하며 루나와 보폭을 맞추기 위해 발악하다 보니 자연스레 서클이 분열되어 개수가 늘었다.

마법사로서의 역량과 깨우침이 발전하자 서클이 뒤늦게 그 뒤를 쫓아간 격이었는데, 상당히 드문 현상이었다.

어쨌든.

최근 몇 년 동안 로필렌은 사는 게 재밌었다.

그렇게 로필렌은 룰루랄라 마물의 사체를 질질 끌고 가다 숲 너머로 고개를 돌렸다.

"...자꾸 몰래 국경 넘어 침입하면 다칠 거야."

"오해하지 마. 작정하고 잠입했으면 훨씬 늦게 들켰을걸?"

브랜딜이 손을 흔들며 로필렌에게 다가왔다.

물론 아주 가까이 다가오진 않고,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 채 로필렌을 마주 봤다.

"전쟁이 코앞이야. 충돌은 불가피하겠지. 물론 악마숭배자들을 몰아내기 위해 한시적으로 우리 레인저도 제국과 협력할 수 있겠지만, 만약 상황이 꼬이면..."

브랜딜이 양 주먹을 들고 툭툭 마주쳤다.

브랜딜이 전하고자 하는 말의 의미는 간단했고, 또한 옳았다.

혼잡한 전쟁 상황에서 뒤통수를 치거나 뒤통수를 맞는 건 일상이었다.

언제 어떻게 상황이 뒤바뀔지 모른다. 어제의 아군이 오늘의 적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러니 브랜딜은 로필렌에게 전쟁 앞두고 괜히 시그니 산맥에서 활개치지 말고 몸 좀 사리라고 경고 겸 충고를 해주고 있었다.

허나 로필렌은 시니컬한 기색으로 답했다.

"쓸데 없는 걱정을 해줘서 고맙군."

로필렌은 다시 마물을 질질 끌고 비탈길로 향했다.

브랜딜은 로필렌을 따라 걸으며 혀를 빼물고 죽어 있는 마물의 사체를 살폈다. 와일드호그였다.

"와일드호그만 벌써 수십 마리 째 아니야?"

근래 로필렌에게 산 채로 잡혀갔다가 죽어서 돌아온 와일드호그가 한두 마리가 아니었다.

브랜딜이 직접 확인한 사체만 열 개가 넘어갔으니 실제로 잡아죽인 숫자는 그 세 배는 될 것이다.

"시그니 산맥에 와일드호그 씨가 마르겠어. 내장 필요해? 어디 창관이라도 크게 개업하나? 아니면 실험 재료?"

평소 조용히 산맥을 관찰하다 돌아가고 했던 브랜딜은 오늘따라 말이 많았다.

로필렌이 와일드호그의 사체를 비탈길 아래로 굴리려다가 브랜딜을 돌아봤다.

"해부학적으로 와일드호그의 심장 구조가 마물들 중 인간과 가장 유사한 편이야."

"...?"

"그래서 써먹었는데, 와일드호그를 이용한 실험도 이제 끝낼 거야. 구조가 유사하다 해도 완전히 동일하지는 않으니까... 완벽을 기하기 위해선... 슬슬 진짜 인간이 필요하지 않겠어?"

"오우..."

브랜딜이 슬그머니 몇 발자국 더 물러섰다.

"마법사가 그리 말하니 소름이 돋는군. 농담처럼 들리지가 않아?"

브랜딜은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솔직히 조금 겁먹었다.

로필렌이 입꼬리를 뒤틀더니 비탈길 아래로 와일드호그의 사체를 굴려 보내며 말을 이었다.

"넌 안 잡아갈 테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흠... 모쪼록, 우리가 충돌할 일이 없기를 바라지."

"너희가 목숨을 부지하려면 당연히 그래야지."

로필렌의 답변은 평소처럼 건방졌고, 브랜딜은 피식 웃었다.

그게 작별 인사였다.

브랜딜과 로필렌은 등을 돌리고 익숙하게 각자 갈 길을 갔다.

걸음을 재촉한 로필렌은 시그니 산맥에 존재하는 작은 분지에 도착했다.

로필렌과 루나는 바로 이곳에 새로운 실험실을 하나 마련했다.

만약 '자그마한 사고'가 발생해도 민간인 피해를 방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로필렌은 계속해서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발걸음을 옮겼다.

"흐흥~ 흥~"

최근 루나는 심장과 연관된 생체 실험에 집중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발레리우스의 아티펙트에서 얻은 드래곤하트를 활용한 심장의 강화, 혹은 무언가로부터 심장의 부하를 낮추는 연구를 하고 있었다.

그 탓에 와일드호그가 생체 실험을 위해 대량으로 소모됐는데, 이제 와일드호그에서 뽑을 수 있는 데이터는 거의 다 뽑아냈다.

물론 루나가 심장에 관한 연구 하나만 붙잡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시간이 날 때마다 이것저것 동시 연구를 진행했는데, 로필렌은 솔직히 그 연구들 중 하나만 쫓아가는 것도 벅찼다.

특히 물질을 이루는 입자와 관련된 연구 쪽은 기존의 마법 이론들과 괴리감이 상당해서 로필렌은 직관적인 깨달음이나 이해 같은 것을 거의 포기하고 있었다.

물질간 상호 작용의 소멸이 어쩌구저쩌구 전하역전 현상을 유발하는 게 어쩌구저쩌구...

대체 황실 마탑에도 제대로 정의되지 않은 개념들을 루나가 어디서 배워왔는지 의문일 때가 많았다.

어쨌든, 로필렌은 요즘 사는 게 재밌었다.

로필렌은 예나 지금이나 학문적인 탐구에 집착하는 이론 마법학자였다.

츠즉!

로필렌이 분지에 전개되어 있는 결계를 열고 안으로 진입했다.

정말 중요한 연구를 진행하는 중이면 루나가 결계의 경계 수준을 확 끌어올리고는 했다.

허나 지금은 결계가 잠잠했기에 로필렌은 별 걱정 없이 연구소 안으로 들어섰다.

"다녀왔습니다~"

로필렌은 얼마 전부터 자기가 루나를 스승으로 모시겠다며 존댓말을 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평생 루나를 제칠 수도 없고 제치려고 들 것도 아니었으니 굽힐 건 미리 굽혀놓겠다는 뜻이었다.

눈치가 빠르다고 자부하는 로필렌이 주접을 떨어대자 루나는 그냥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곤 말았었다.

"루나? 안에 계십니까?"

로필렌이 주위를 살피다가 연구실 안에 홀로 가만히 앉아있는 루나를 발견했다.

"루나, 여기서 뭐하십니... 오...!"

루나의 앞에.

정사면체 형태의 단절된 공간이 둥둥 떠있었다.

외부와의 상호작용이 차단된 단절된 공간을 만들어냈다는 것 자체가 경악할 일이긴 했지만 로필렌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로필렌은 단절된 공간 안쪽을 바라봤다.

본래라면 빛조차 투과되지 않아 안쪽은 그저 어두워야 했지만...

로필렌은 그 내부에서부터 어두운 빛이 스며 나오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설마... 이게 말씀하신 그거입니까?"

"...응."

"아, 드디어 성공하셨군요...!"

과거, 루나는 로필렌에게 메테오가 효율이 나쁘다고 표현했었다.

물론 메테오에 비견되는 파괴력을 지닌 마법은 세상에 존재치 않았다.

다만 메테오는 마법을 전개하고 적을 타격하는 데까지 너무 많은 노력과 시간, 그리고 위험이 뒤따랐다.

더군다나 루나는 더 이상 오벨리스크 시스템을 마음껏 활용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만약의 대비해, 메테오를 대처할 수 있는 마법이 필요했다.

미리 준비할 수 있고, 원한다면 즉발성을 부여할 수 있으며, 화력 또한 최고위 섬멸 마법에 필적하는...

그런 대체재가 루나에겐 필요했다.

그래서 본래 진행하던 입자 관련 연구의 곁가지로 지금의 연구를 시작했고, 완성시켰다.

허나 그 '결과물'이 루나의 기대 이하였다.

예상보다 더욱 보관하기도 힘들었고 다루기도 난해했다.

짧은 시간 만에 대량으로 생성하는 것도 불가능한 탓에 화력도 좀... 애매했다.

루나는 연구의 결과물에 실망했지만 크게 내색하진 않았다.

그 와중 로필렌만은 잔뜩 신난 얼굴로 루나에게 외쳤다.

"이건 완전히 루나의 오리지널 마법입니다! 학계에 발표 못 하는 게 너무 아쉽군요!"

기존의 마법들과는 갈래 자체가 달랐다.

루나가 지금까지 오리지널에 가까운 마법을 몇 번 사용하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기존에 있던 것의 응용과 변형에 가까웠다.

허나 이번에 창조한 마법은 정말 말 그대로 루나의 '오리지널'이었다.

로필렌은 그 부분을 연거푸 강조하더니 기대에 가득 찬 목소리로 외쳤다.

"이름! 마법의 이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

잠깐 침묵한 루나는, 언제나 그렇듯 담담한 목소리로 마법의 이름을 읊조렸다.

"Antimat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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