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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등가의 소드마스터-262화 (262/446)

262화

황도에서 발생한 대규모 습격.

역사서를 뒤져도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제국은 황도의 방위 시스템을 처음부터 재설계하는 작업에 들어갔고, 또한 전쟁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상황이 혼잡한 가운데 권력가들은 서로 눈치를 보느라 굉장히 바빴다.

지금 같은 상황에선 말 한마디만 실수해도 칼 맞기 십상이었다.

역사적으로 이런 상황에서 눈치 없이 헛소리했다가 가문 단위로 갈려나간 놈들이 수두룩했다.

한편 그 와중에 테온은 데런과 같이 황성에서 훈장을 받았다.

제대로 된 무장도 갖추지 못했음에도 가장 먼저 앞으로 나서서 용감히 제국의 적들과 맞서 싸웠다...

뭐 그것 외에도 자잘한 이유가 더해져서 제국민들의 귀감이 되었다며 훈장이 수여됐다.

테온은 떨떠름하게 훈장을 수여받았다.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지만, 자신에게 수여된 훈장이 공적의 보상 따위가 아니라 정치적인 의미가 다분했음을 읽어낼 수 있었기에 마냥 좋아하기도 좀 그랬다.

물론 막혀있던 출세길이 뚫렸다고 생각하니 실실 웃음이 나오기는 했다.

제국은 제국을 위해 희생한 전사자들을 대대적으로 추모했고, 또한 황도 방위전에서 크게 활약한 영웅들을 적극적으로 부각시켰다.

그에 반해 이번 습격 사건의 원인 규명과 내부 배신자 색출은 비교적 물 밑에서 진행됐다.

제국군의 사기 저하, 제국의 명예 실추, 또한 내부 갈등을 최소화하기 위한 조치였다.

역사 속에서 악마 숭배자들은 항상 국가가 분열되었을 때 스며들어 저들의 세력을 키웠다.

좀 껄끄럽더라도 황제는 제국 내부의 갈등을 억제해야만 했다.

물론 이번 습격 사태에 남부의 수뇌부격 인물이 개입했다고 의심되면 내전이라도 치러야 했지만, 거기까진 연결고리가 발견되지 않았다.

그렇기에 제국은 혹시라도 심화될 지 모르는 지역 간 갈등을 희석하기 위해, 미하엘과 더불어 안소니우스를 이번 방위전의 영웅이라고 적극적으로 치켜세웠다.

안소니우스는 실제로도 대단한 활약을 했으나, 제국은 그의 활약을 더욱 극적으로 손질해 발표했다.

그가 남부와 교단을 대표할 수 있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남부 출신이고 명성이 자자한 하이템플러이자 성녀의 측근 중 한 명.

안소니우스만큼이나 대표성이 있는 인물은 찾기가 쉽지 않았다.

더군다나 안소니우스는 자기 세력도 작은 편이었으니 황제 입장에선 치켜세워줘도 부담이 적었다.

그렇게, 제국은 영웅들을 향한 찬사와 제국을 공격한 자들에 대한 복수를 대대적으로 천명했다.

현재 대부분의 귀족과 인근 국가들은 바짝 엎드린 채 자신의 무고함을 피력하며 황실과 제국을 향한 협조 의사를 밝히고 있었다.

처세를 조금만 잘못해도 본보기로 목이 매달리는 건 한순간이었다.

황도가 아예 무너졌다면 간을 좀 봤을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그런 것도 아니었다.

충성 경쟁 속에 황제는 루비하 왕국을 '정화'하기 위한 준비에 본격적으로 착수했다.

혼란 속에서도 차근차근 일이 진행되는 사이.

이지스 생도들은 다들 기숙사에서 머물며 가족과 가문 걱정을 하고 있었다.

물론 그들에겐 가족과 가문 걱정 말고도 걱정해야할 문제가 하나 더 있었다.

"시발..."

휠체어에 탄 채, 다른 생도들과 옹기종기 모여 식사를 하던 베르덴이 문득 심각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좆 된 거 같은데..."

몇 주 전만 해도...

베르덴은 레이를 향해 휘황찬란한 욕설을 퍼붓고는 했다.

레이가 하는 짓이 영 꼴같잖았기에 베르덴은 참 열심히 욕설을 퍼부었다.

레이가 비밀 교관일 수도 있다는 소문을 듣고 욕설을 줄이긴 했지만, 베르덴은 교관 한 사람의 눈밖에 나는 것 따위야 크게 신경쓰지 않았었다.

근데 상대가 사실 '그 훈장'의 소유자였다?

"..."

베르덴 한 명 매장하는 건 입 한 번만 놀려도 가능했다.

베르덴의 표정이 침울해지자, 그꼴을 옆에서 지켜보던 로안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베르덴, 나는 그분과의 첫 만남 때 애들 앞에서 바지를 벗겼어."

"저런."

베르덴이 탄식했다.

2급 생도들이 과연 누가 더 좆 됐느냐 토론 중인 와중에 세바스와 하비는 여유로웠다.

세바스와 하비는 적어도 이지스 안에서는 레이를 조심스럽게 대했다.

적어도 대놓고 욕을 박은 적은... 몇 번 있었지만, 그래도 다른 생도들보다는 사정이 나았다.

만약 누군가가 세바스에게 레이와 무슨 관계냐고 묻는다면, 세바스는 자신있게 비누도 주워드렸던 사이라고 답할 것이다.

한편.

한 칸 떨어져서 모여있던 3급 생도들의 분위기도 그다지 좋지 못했다.

쥬세핀은 고기를 입에 넣고 한 번 씹을 때마다 여러번 표정이 왔다갔다 했다.

쥬세핀과 레이의 악연은 입학시험 때부터 이어졌다.

쥬세핀은 눈물을 질질 짜며 레이를 매도했던 과거를 떠올리곤 식은 땀을 줄줄 흘렸다.

'가족이...! 가문이...!'

레이의 말 한마디면 날아간다!

어지간한 권력가도 남들 눈치보여서 할 수 없는 일을 레이는 할 수 있었다.

'하, 하지만 나한테 식사도 사줬고...! 고, 공부도 가르쳐줬고...!'

어쩌면 내가 레이의 마음에 은근히 들었던 걸지도 모른다!

쥬세핀은 그런 행복회로를 돌리며 남몰래 히죽이다 표정을 굳히길 반복했다.

이 자리에 있는 이들 중 아론만이 유일하게 명확한 승리의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아론은 진즉 시답잖은 저항을 포기하고 레이의 따까리 역할을 받아들였었다.

비록 귀족의 자존심을 버렸으나, 인생에서 가장 잘한 선택이었다고 아론은 자찬했다.

"물이 달다, 달어."

인마, 내가 제국수호훈장 수여자랑 으이?! 식사도 같이 먹고! 목욕탕도 같이 가고! 잠도 같이 자고! 마 다했어 인마!

자기 인생 최대 업적을 남들에게 떠드는 상상을 해본 아론이 기분 나쁘게 웃었다.

그렇게 각자 다른 생각을 하며 식사를 하는데 생도 한 명이 다시 레이 이야기를 꺼냈다.

"근데 그... 그분에 대해 정식으로 공표는 안 되었더라?"

레이의 신분과 공적에 관한 이야기였다.

대외적으로 공표를 하려했다면 진즉 황실에서 그리 했을 것이다.

지금까지 침묵하고 있다는 건 레이의 존재를 대외적으로는 은폐하겠다는 뜻이었는데, 생도들이 생각하기에는 그게 큰 의미가 있나 싶었다.

레이가 모로스를 쥐고 장막 안으로 진입하는 모습을 본 자들만 셀 수가 없었다.

대외적으로 공표는 안 하더라도 알 사람은 레이에 대해 다 알게 될 터다.

그에 관해 생도들이 드문드문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 아론이 한 마디 했다.

"혹시 이지스에 다시 돌아오시는 거 아니에요? 생도 신분으로."

푸흡, 생도 몇 명이 마시던 물을 뿜었다.

레이가 이지스로 다시 돌아와? 그리고선 뻔뻔하게 다시 생도 노릇을 하려고 한다고?

상상만 해도 정신이 나갈 것만 같았다.

2급 생도 한 명이 아론에게 물컵을 던지며 짜증을 냈다.

"야, 말 좀 되는 소리 좀 해. 할 일도 많으실 텐데 여기를 다시 오시겠냐? 잠깐 인사해주신다고 들리실 수는 있어도."

"어... 그렇겠죠?"

"...그렇겠지?"

또 묘하게 확답하기는 힘들었다.

애초에 레이가 왜 이지스에 와서 그 난리를 피웠는지 모르는 생도들은 거북함과 함께 음식을 씹어 삼켰다.

*

레이의 걱정과는 다르게.

황제는 레이에게 쉽사리 황실의 드래곤하트를 하사해주었다.

물론 레이가 세운 공적을 고려하면 당연히 내어주어야 할 물건이었지만 레이는 황제가 좀 더 간을 보려 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레이의 예상은 빗나갔다.

레이는 이로써 자신이 죽고난 이후에도 벨라와 레아가 무사히 살아갈 발판을 다 마련했다고 생각했으나... 문제가 하나 생겼다.

황제가 드래곤하트를 하사하며 조건을 건 것이다.

만약 황제가 불합리한 조건 따위를 여럿 걸었다면 레이는 따지고 들었을 것이다.

허나 황제가 내건 조건은 단 하나였으며 합리적인 명분 또한 충분했다.

레이는 의심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황제가 내건 조건을 받아들여야 했다.

황도 안에 존재하는 프리슬란 가문의 저택 안에서.

에른스트가 중요한 물건을 보관하기 위해 제작된 보석함 형태의 아티펙트를 열었다.

함 안에는 황실의 드래곤하트가 담겨 있었다.

에른스트가 레이를 향해 함을 돌려서 보여주며 입을 열었다.

"드래곤하트를 황도 외부로 반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예..."

황제가 내건 조건이 바로 이것 하나였다.

황실의 드래곤하트를 황도 밖으로 반출하지 말 것.

황실의 드래곤하트를 활용해 어떤 시술을 하든 관여하진 않겠지만, 황도 안에서 행하라는 의미였다.

에른스트가 레이의 표정을 살피며 말을 이었다.

"황제 폐하의 뜻을 곡해하지는 말거라. 황제 폐하께서 직접 옮기신다고 해도 황실의 드래곤하트를 황도 외부로 반출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으니."

바로 이 점 때문에 레이는 황제의 조건을 받아들여야 했다.

황실의 드래곤하트 하나하나가 황실 입장에선 다른 것과 비할 수 없는 보물이자 생명줄이었다.

이걸 함부로 들고 나가는 것? 철저하게 금지되어 있었다.

오직 황족만이 가슴에 황실의 드래곤하트를 이식하고 황도 밖으로 나설 수 있었다.

그걸 손에 들고 나가는 건 황제라도 원칙상 불가능했다.

황제는, 레이가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 황실의 드래곤하트를 어떻게 활용하든 간에 관여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허나 황실의 드래곤하트를 황도 밖으로 반출하는 것만은 허가가 불가능하다는 조건을 붙였다.

황제가 레이를 감시하기 위해서 그런 조건을 걸었을 수도 있고, 실제로도 그런 의도가 조금은 함의되어 있을 터다.

허나 그런 의도가 없었다고 해도 황제는 똑같은 조건을 걸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레이는 황제의 조건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하..."

조금, 골치가 아팠다.

어쩌면 레아를 황도까지 데려와야 할 수도 있었다.

레아에게 드래곤하트를 이식하고, 레이는 레이 대로 황실의 드래곤하트가 소실된 것처럼 꾸미고... 그 외에도 황실의 드래곤하트를 추적할 마법적 수단 따위가 존재하는지 확인해보아야 했다.

'아프텔에 루나의 도움까지 받으면...'

어찌저찌 가능하지 않을까.

일단 이 부분은 필립스 백작령으로 돌아가 의논을 한 번 해봐야 했다.

레이가 억지로 표정을 풀자 에른스트가 짧게 한숨을 쉬었다.

"시술을 언제쯤 진행할 예정이냐? 도움이 필요하다면 아낌없이 지원해주겠다."

"음..."

레이가 자기 뺨을 매만졌다.

루나는 로필렌과 함께 '가짜 심장강화 이론'을 창조했다.

그걸 리실로테 레코드 등의 시스템을 활용해 아프텔에게 전달했고, 레이는 그것을 황실로 전달했다.

그 이론은 겉으로는 그럴싸하지만 검증이 불가능했기에 황실의 마법사들도 속일 수 있었다.

가짜 이론에 따르면 만약 심장 강화에 실패할 시 드래곤하트는 소실되고 피시술자는 사망할 수 있었다.

레이는 처음부터 그런 내용이 가짜 이론에 담길 수 있도록 루나에게 요구했다.

레이가 삶의 끝자락에 이르렀을 때, 지푸라기를 잡듯이 시술을 받았다가 자신은 목숨을 잃고 드래곤하트는 소실된 것처럼 꾸미기 위해서였는데...

"..."

과연 루나는 레이가 요구했던 가짜 이론의 내용에서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했을까.

레이는 그게 갑자기 걱정되어 침묵하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에른스트의 질문에 답했다.

"...위험한 시술이니까, 최대한 미뤄보려고 합니다. 실패하면 죽을 수도 있으니까요."

"알겠다. 시술에 필요한 준비가 있다면 완벽히 갖출 수 있도록 돕겠다."

"예, 감사합니다, 후작님."

레이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고향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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