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1화
레이는 병실에서 계속 휴식을 취했다.
전신을 혹사시켰던지라 제대로 움직이려면 며칠 더 골골대야 했다.
기실 며칠이 아니라 몇 달 단위의 요양이 필요했지만, 침대에 계속 누워있는다고 해서 깎여나간 수명이 돌아오는 것도 아니었다.
남은 평생을 누워있을 게 아니라면 억지로라도 움직여야 했다.
"레이."
스페라가 병문안을 찾아왔다.
스페라가 침대 위에 뻗어 있는 레이를 보고 반갑게 인사했다.
"오랜만이에요."
"안녕하세요, 아가씨. 그동안 별 탈 없이 잘 지내셨나요?"
"네, 저는 잘 지냈어요."
"프리슬란 가문에도 별일 없었죠?"
"네... 아! 증조부님께서 레이가 이지스에 입학한 후 뒷목을 가끔씩 잡으시더라고요."
"저런, 혈압 조심해야하는 춘추이신데."
레이의 말을 듣고 가볍게 웃은 스페라가 가까이 다가와 앉았다.
"매번 큰일에 휘말리네요."
"음... 운도 지지리 없죠."
사실 그동안은 사서 고생한 감이 컸다.
허나 황도에서의 전투만큼은 레이도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레이는 이지스에 반쯤 휴가를 보낸다는 생각으로 입학한 것인데, 결과적으로 수명을 절반 넘게 날려먹게 되었다.
'그나마 공적이라도 확실히 세워서 다행이지...'
레이는 이번 공적의 대가로 황실의 드래곤하트를 반드시 받아낼 생각이었다.
레아의 드래곤하트 문제만 해결되면 레이는 심적인 여유를 찾을 수 있었다.
스페라는 복잡해 보이는 레이의 표정을 바라보다 다시 입을 열었다.
"더이상 레이의 신분과 공적을 세간에 숨기는 건 힘들지 않을까요?"
"하... 아무래도 그렇겠죠?"
황도 한가운데서 그 난리를 쳤다.
황실이 레이에 관해 침묵하는 중이라 당장은 다들 쉬쉬하고 있지만, 얼마 안 가 레이의 존재에 관해 알 사람은 다 알게 될 터다.
'대외적으로 은폐한다고 해도 권력 좀 가졌다는 인간들은 다 알게 되겠지...'
그럼 은폐를 하나 마나다.
레이가 깝깝한 표정을 지었지만, 스페라는 오히려 조금 신나보였다.
"레이는 역시... 황가의 일원으로 들어가게 되지 않을까요?"
다른 걸로 레이의 공적을 보상해주기엔 황제도 감당하기가 힘들 터다.
억지로 공적을 깎아내리는 건 에른스트도 반대할 테고, 장기적으로 현명한 판단도 아니었다.
결국 가장 안정적인 선택지는 레이를 황실에 편입시키는 것이 될 것이다.
레이의 수명 문제를 모르는 스페라는 그렇게 확신했다.
"조금 아쉽네요, 레이."
스페라는 처음 레이를 만났을 때를 떠올리며 후후 웃었다.
증조부가 웬 이상한 놈을 주워왔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짧은 시간만에 레이는 이미 제국에 막대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영웅이 되어 있었다.
스페라는 자기가 지닌 조건보다 더 뛰어난 배우자를 만날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결과론적으론 스페라의 예측이 옳았다.
레이는 너무나 뛰어났기에 스페라와 혼약 관계로 묶이기가 곤란했다.
"레이가 조금만 못났어도 제게 잡혀 살았을 거예요."
"하하하..."
그럴 듯한 이야기였기에 레이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잔잔하고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대화를 이어가다, 스페라가 살짝 표정을 굳혔다.
"앞으로 레이에게 연줄을 대기 위해 접근하는 사람들이 많아질 거예요."
"그러게요."
레이가 한숨을 삼켰다.
관심이 끌리면 변수가 많아진다.
그러한 상황을 잘 활용하면 좋은 기회도 잡을 수 있겠지만, 그것도 수명이 많이 남았을 때 이야기였다.
레이 입장에선 변수를 늘려 기회를 잡기보단 리스크를 줄이는 게 우선이었다.
그렇기에 이제까지 공적을 감추었지만, 더는 힘들어 보였다.
스페라가 조심스럽게 충고했다.
"제가 레이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게 낯부끄럽긴 하지만... 조심하세요."
처세에 주의하란 이야기였다.
특히 황제나 황실을 자극할 수 있는 일은 피하는 게 좋았다.
레이가 누운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조심해야죠."
"혹시 곤란한 일이 생기면 말해줘요. 제가 꼭 도와줄게요."
"그때는 아가씨께 부탁하겠습니다."
"네, 꼭 말해줘요. 근데... 필립스 백작령으로 돌아갈 계획이라면서요?"
"전쟁 때문에 가봐야 할 것 같네요. 전쟁 끝날 때까지는 가족 곁에 있으려고 하는데, 뭐 오래 걸리진 않겠죠."
"증조부님께서도 전쟁은 빠르게 마무리 될 거라고 하셨어요. 몸 조심해서 잘 다녀와요. 아, 그리고 저도 내년쯤에 이지스에 편입할 예정이거든요?"
"아가씨께서요?"
"3급 생도 커리큘럼만 마치고 나오겠지만요. 어쨌든 그때 한 번 들려줘요. 생도 말고... 교관 같은 걸로요."
스페라가 장난스럽게 부탁하자 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키는 게 불가능한 약속이 되겠지만, 지금부터 티를 낼 이유는 없었다.
조금 더 레이와 이야기를 나눈 스페라가 푹 쉬라고 작별 인사를 건네고 병실을 나갔다.
*
슬슬 몸이 의식하는 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병실 안을 한 바퀴 걸어본 레이가 데런이나 한 번 만나러 가봐야겠다고 생각하며 옷을 갈아입었다.
데런도 현재 이지스 병동 안에 있어 오래 걸어갈 필요도 없었다.
헌데 레이가 문을 나서기 전에 세리아가 찾아왔다.
레이가 세리아를 보고 반가운 기색을 내비쳤다.
"고모!"
"..."
세리아는 말 없이 레이를 품에 안고 등을 몇 번 토닥여주더니 한 걸음 떨어졌다.
"...디오리카도 오겠다고 했어. 나랑 같이."
"아, 짭조카님께서요? 근데 어디 있어요?"
"그냥 두고 왔어."
레이가 웃음을 터뜨렸다.
디오리카도 레이가 제국수호훈장 수여자라는 걸 알게 되었을 테니, 정보가 더 퍼지기 전에 어떻게든 얼굴을 먼저 보려고 했을 터다.
세리아는 레이한테 귀찮게 굴지 말라며 디오리카를 버려두고 왔고 말이다.
버림받은 디오리카를 생각하며 낄낄거린 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에 한 번 뵙죠, 뭐."
세리아가 알슈테인 공작가에 속해있는 이상 공작가를 굳이 무시할 필요는 없었다.
가문 내의 세리아의 입지를 위해서라도 적당히 대접은 해줘야 했다.
한편 세리아는 레이의 복장과 병실 내에 준비된 휠체어를 보고 레이에게 물었다.
"어디 가?"
"데런 얼굴 좀 보려고요. 휠체어가 있긴 한데, 몸도 다 나았고 그냥 걸어갈까 싶네요."
"...조카 함부로 움직이면, 위험해."
"걱정마세요. 이제 괜찮아요."
"데려다 줄게. 고모가."
세리아가 그리 말하며 레이의 겨드랑이 밑을 잡았다.
레이가 기겁하며 나름대로 격렬하게 저항하기 시작했다.
레이의 몸부림이 그치지 않자 세리아가 결국 마지막 카드를 꺼냈다.
"아티펙트."
"..."
"비싸. 엄청."
세리아가 빌려준 아티펙트가 비싸다는 뜻이었다.
레이는 그걸 하나도 남기지 않고 깔끔하게 부숴 먹었다.
물론 레이도 할말은 많았다.
알슈테인 공작가에서 과연 레이가 부숴 먹은 아티펙트 비용을 청구할까?
아마 청구할 생각도 없을 테고, 황실에서도 황도 방위에 도움을 준 이들에게 충분한 상을 내릴 것이다.
허나 레이는 세리아에게 그런 것을 일일이 따박따박 따지고들 입장이 못되었다.
결국 레이는 축 늘어진 채 세리아에게 잡혀 병실을 나섰다.
복도를 지키던 로얄가드가 잡혀 나오는 레이의 몰골을 보고 짧게 감탄했다.
"오..."
감탄사 한 마디에 참으로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었다.
세리아는 로얄가드를 향해 레이를 슬쩍 내밀어보곤 다시 갈 길을 갔다.
다행히 데런의 병실에 도착할 때까지 경비 몇 명을 빼고는 다른 사람을 마주치지 않았다.
마침내 레이가 축 늘어진 채 데런의 병실에 도착했다.
레이가 세리아에게 잡힌 채 병실로 들어오자 데런이 환히 웃었다.
"형님...!"
배에 구멍이 뚫려 피를 엄청나게 흘린 탓에 당시의 기억이 흐릿하긴 했지만.
그럼에도 데런은 마지막 순간 보았던 레이의 뒷모습만큼은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세리아는 레이를 데런 앞에 안착시켜 준 후 말했다.
"기다릴게. 문밖에서."
돌아갈 때도 데려다 준다는 의미였다.
레이는 세리아의 배려에 눈물이 다 날 것 같았다.
레이는 상심을 억지로 털어내며 데런을 마주봤다.
"잘 살아있네."
"하하. 예, 건강합니다."
"웃음이 나오냐? 왜 앞으로 나서서 배에 구멍은 뚫려? 응?"
"어, 음... 하하... 죄송해요, 형님."
데런이 어색하게 관자놀이를 긁적였다.
레이는 농담과 진담을 섞어 데런을 타박했다.
결코 대적 불가한 적을 상대로 머리부터 들이민 걸 빈말로도 잘했다고 칭찬해주긴 어려웠다.
데런의 이마를 집게손가락으로 툭툭 밀쳐낸 레이가 잔소리를 그만하고 전쟁 이야기를 꺼냈다.
곧 루비하 왕국과의 전쟁이 발발할 것임을 설명해준 레이가 한숨을 푹 쉬었다.
"너희는 이지스에서 남은 학기 잘 보내고... 나는 돌아가 봐야 될 것 같아."
"아..."
데런이 아쉬움을 드러냈다.
허나 고향이 걱정되는 것은 데런 또한 마찬가지였고, 그렇기에 더더욱 레이를 말릴 수는 없었다.
우울감이 서려있는 표정을 짓는 데런에게 레이가 당부했다.
"잘 지내. 열심히 하고. 그래야 다음엔 배에 구멍 안 뚫리지."
"네, 형님. 열심히 할게요."
"요하나랑도 잘 지내고. 여기서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가족이잖아."
"누님이 형님 걱정 많이 하더라고요. 몸 괜찮으세요?"
"걔가 걱정이 좀 많아."
레이는 웃고 말았다.
"어쨌든 전쟁이 길어지진 않을 거야. 제국도 작정했고, 왕국 내 협력자도 많으니까. 잘하면 이번 학기 끝날 때쯤 전쟁이 마무리될 거야. 수습은 한참 더 걸리겠지만... 하여튼 그때 필립스 백작령에서 다시 보자."
"예, 형님. 알겠습니다."
그 뒤로 잠시 동안 레이와 가볍게 대화를 이어가던 데런은 문득 카렌 생각이 났다.
데런은 고민하다 결국 카렌 이야기를 꺼냈다.
"형님, 근데 카렌 누님 말입니다."
"응, 카렌이 왜?"
"물론... 카렌 누님께서 형님에게 일편단심이긴 하지만..."
"...?"
"너무 방치? 하시는 건 아닌지..."
레이의 표정이 묘해지자 데런이 얼른 말을 덧붙였다.
"카렌 누님이 미모도 좋으시고 추파도 많이 받으시고... 언제 시답잖은 놈이 낚아채도 이상하진 않잖습니까."
"..."
"그렇게 되기 전에 좀 제대로... 표현할 건 하고 해야하지 않을까요?"
데런도 답답해서 해보는 소리였다.
레이의 그 묘한 거리두기를 곁에서 지켜본 입장에서 왜 저러나 싶을 때가 참 많았다.
데런은 레이의 눈치를 슬금슬금 보면서도 이야기를 꺼낸 김에 할 말을 다했다.
"혹시 카렌 누님이 다른 남자를 만나도 형님은 괜찮습니까?"
레이의 미간이 슬그머니 구겨졌다.
카렌이 다른 남자를 만난다. 그런 일을 상상하니 짜증이 불쑥 차올랐다.
레이는 은연 중에, 카렌은 한눈을 팔지 않으리라는 기대와 바람을 자신이 지니고 있었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그건 굉장히... 이기적이고 쿨하지 못한 생각이었다.
제대로 선을 긋지도 못해, 마음에 제대로 답해준 것도 아니야, 몇 개월 단위로 나돌아다니며 방치해, 그러면서도 상대의 마음이 변치 않기를 바란다.
찌질하다.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그랬다.
미간을 꾹꾹 눌러대는 레이를 향해 데런이 말했다.
"형님, 시골에는..."
"야 인마, 황도 물 좀 몇 달 먹었다고 벌써 시골 타령이냐?"
"그게 아니라... 어쨌든 시골에는 오락거리가 그다지 없잖아요? 그래서 다들 연애하느라 바쁜데 카렌 누님은 얼마나 외롭겠어요? 또... 형님만 바라보는 게 카렌 누님 한 분만 있는 것도 아니고..."
"이 새끼 이거 꼭 많이 해본 것처럼 얘기하네."
"...형님, 제가 이걸 물어봐도 되나 싶은데..."
"뭘 물어."
"...혹시 여자랑 진짜 한 번도 안 자 봤어요?"
"?"
레이가 얼이 빠진 채 눈을 깜박이자 데런이 심각해져서 다시 물었다.
"그, 진짜 안 서기라도 합니까?"
"아니 이 건방진 새끼가 근데."
레이가 일단 손에 잡히는 걸 던졌다.
고향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