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화
프레체스가 성검을 쥐었을 때.
성검을 지키던 기사들은 무심코 비웃음을 머금었다.
비록 프레체스가 성검에 손을 댔다는 사실은 굉장히 불쾌했으나, 그녀가 사용도 못할 무기를 탐낸다고 다들 조소했다.
허나 프레체스가 손에 쥔 성검이 뽑혀 나오기 시작했고, 프레체스를 향해 날을 세우던 기사들의 표정이 급격히 굳어졌다.
프레체스는 그들의 반응을 보며 유쾌함을 느꼈다.
너희를 최초로 구원한 자가 누구였는지.
이 아이가 어떤 몰골로 최후를 맞이해야 했는지.
또한 너희가 떠받드는 존재가 대체 얼마나 끔찍하고 불완전한 존재인지...
보여주고 증명해서 그 맹목적인 믿음을 일그러뜨리고 싶었다.
그건 다분한 분풀이였다.
하지만.
프레체스의 손아귀에 쥐여 뽑혀 나오던 성검이 덜컥 멈추었다.
프레체스는 몇 번 더 덜컥거리다 뒤늦게 레이를 돌아보았다.
레이는 지친 기색으로 입꼬리를 뒤틀었다.
"혹시 뽑히는 줄 알고 기대했어?"
"..."
"근데 어쩌지? 그거 뽑고 싶으면 나한테 허락받아야 돼."
"...허락해줄 생각은 있느냐?"
"맨입으로?"
프레체스가 가슴에서 뽑아냈던 드래곤하트를 레이에게 던졌다.
레이가 드래곤하트를 내려다보더니 짧게 혀를 찼다.
"이거 장물이잖아. 내가 장물은 안 받아요."
나름대로 장단을 맞춰준 프레체스가 피식 웃었다.
"이 육체보다... 네가 더 상위의 권한을 지니고 있다는 말이냐?"
"뭐, 그런가 보지. 아니면 그 육체의 자격이 박탈당했거나."
프레체스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가, 아쉬움이 가득한 손길로 성검을 놓았다.
성검의 가호를 빌리지 못한다면 이제 더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육신의 형태를 유지하는 것조차, 더는 불가능했다.
프레체스가 미련을 털어내며 레이를 마주 봤다.
"우리는,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그녀가 다루고 있던 육신은 본체가 아니었다.
레이는 어깨를 한 번 으쓱이고 말았다.
악마숭배자 놈들과 계속해서 투닥거리다보면 프레체스의 본체와 만나게 될 날도 오겠지만, 과연 그때까지 자신이 살아있을지 레이는 의문이었다.
트드득!
프레체스의 육신이 조각조각 바스러져 나갔다.
프레체스는 하늘을 바라보다 눈을 감은 채, 그렇게 먼지로 변해 사라졌다.
모래 알갱이 같은 것이 바람을 타고 멀리멀리 흩날렸다.
결착이 났다.
레이는 호흡을 천천히 몰아쉬었다.
강한 탈력과 육신을 쥐어짜는 고통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허나 이곳에서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오메가시리즈를 검집에 꽂아넣고 모로스를 아공간에 수납한 레이가 앓는 소리를 내며 다리를 움직였다.
가까이 있던 기사가 다가와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음... 전혀 안 괜찮아."
레이가 장막이 펼쳐졌던 장소를 돌아보았다.
상공에 잠시 열렸던 워프게이트가 깨져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과연 몇 놈이나 도망갔을까.
레이는 부디 제국군이 악마숭배자들을 잘 때려잡았기를 바랐다.
*
"..."
레이가 눈을 떴다.
병실의 침대 위였다.
정확히는, 이지스 안에 존재하는 병동의 개인실 안이었다.
레이는 병실에 누울 때까지의 과정이 잘 기억나지 않아 눈살을 찌푸렸다.
현장 지휘관을 만나 상황 보고를 듣기도 했고, 사상자 수습에 관여도 했었다.
눈이 땡땡 부어서 서럽게 울고 있던 요하나와도 마주쳤던 것 같은데... 기억이 어렴풋했다.
어쨌든 정신이 돌아오니 몸에서 고통부터 느껴졌다.
레이는 숨이 턱턱 막히는 것을 느끼고 억지로 호흡을 다잡았다.
그렇게 숨을 고르다 옆을 돌아보자 의자에 앉아있는 에른스트가 보였다.
"..."
"..."
눈싸움 끝에 레이가 미간을 찌푸렸다.
"아니, 슬슬 인사 좀 먼저 해주실 때 되지 않았습니까?"
"공적인 자리에서는 그렇게 하겠다."
"제국의 소드마스터께서 좀 옹졸하십니다?"
"인정하마."
에른스트가 한숨을 길게 쉬었다.
"늦어서 미안하구나."
"예... 치고받다 보니까 후작님이 안 계셔서 많이 아쉽더군요."
에른스트가 함께했다면 이번에 했던 고생의 반절도 안 했을 것이다.
물론 적들도 에른스트의 존재를 주의하며, 에른스트가 황도에 도착하기까지의 시간을 계산하고 습격을 감행했을 게 분명했다.
다만.
레이는 에른스트를 기다렸다가 장막에 진입한다는 선택지를 고를 수 있었다.
그렇게 하지 않았던 건 상황이 급박했던 탓도 있지만... 독보적인 공적이 필요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레이가 끙끙 앓다가 가장 먼저 알아야 될 것을 물었다.
"데런은 살아있습니까?"
"위험했지만, 다행히 목숨을 잃지는 않았다."
안소니우스가 건네준 성물을 사용한데다 생도들이 가방에 하나씩 챙겨놨던 포션을 죄다 들이부은 덕분에 데런은 지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생존할 수 있었다.
아슬아슬했으나 결국 데런은 살아남았다.
"치료를 받고 있고... 의식도 되찾았다고 하니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다."
"다행이네요. 근데 악마숭배자 놈들은 다 잡았습니까?"
"주요 전력 중 다수가 워프게이트를 통해 도주했다."
"아이고..."
레이가 자기 미간을 매만졌다.
잡아야 될 놈을 못 잡은 게 짜증스럽긴 했지만, 그보다 다른 부분이 더 신경쓰였다.
"그놈들 놓친 게 제 책임이다... 이런 식으로 말 나오면 섭섭할 것 같은데요."
"그럴 일은 없다. 황도를... 습격한 악마숭배자들은 영맥을 오염시켜 황도를 마비시키려 했다고 한다."
영맥이 오염된다면 정화 작업이 끌날 때까지 제국은 발이 묶인다.
그 기간이 5년만 되었어도 제국의 적들에게 엄청난 기회가 되었을 터다.
만약 정화 작업에 소요되는 기간이 수십 년이었다면, 제국은 황도를 버렸어야 했을 지도 몰랐다.
"네가 아니었다면 대응이 늦어져 영맥의 오염을 피하지 못했을 것이다. 누구도, 네 공적을 폄하할 수 없다."
"오... 그러면 이번에는 드래곤 하트를 하사받을 수 있을까요?"
레이가 노골적으로 물었다.
레이가 요구하는 드래곤 하트는 시조룡이 남긴 '황실의 드래곤 하트'였다.
이렇게까지 공적을 세웠는데도 황제가 계속 간을 본다면 레이도 매우 곤란했다.
만약 이번에도 황제가 황실의 드래곤 하트를 내어주지 않는다면 레이도 계획을 바꿔야 했다.
"..."
잠깐 침묵이 흐른 후.
에른스트가 답해주었다.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혹여 황제 폐하께서 네 공적에 걸맞은 상을 내려주시지 않는다면, 내가 황제 폐하께 직접 간언을 드리겠다."
에른스트는 여태까지 이런 일로 빈말을 하진 않았다.
레이는 당장은 에른스트를 믿어보기로 하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네, 감사합니다."
"그리고... 네가 알아두어야 할 것이 있다."
에른스트는 이제 막 정신을 차린 레이를 오래 붙잡아둘 생각이 없었기에 짧게 말했다.
"전쟁이 시작될 거다."
본래도 제국은 루비하 왕국의 악마숭배자 세력을 축출하기 위해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헌데 이번 습격에서 루비하 왕국에 존재한다고 판단되었던 악신의 유물이 여러 개 모습을 드러냈다.
더는 전쟁을 미룰 수 없었다.
물론 이번 습격 사태로 인해 황도의 시스템을 처음부터 재편하고 재건해야 하는 제국 입장에선 전쟁을 수행하기가 부담스럽기는 했다.
허나 악마숭배자가 날뛰어 전선이 늘어나는 꼴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빠르게 루비하 왕국 쪽 일을 정리해야 했다.
레이가 덤덤하게 전쟁 소식을 받아들였다.
"역시 그렇게 됐군요."
레이 또한 예견하고 있던 일이긴 했다.
만약 이번에 프레체스의 작전이 성공해 황도가 오랫동안 기능이 정지하게 됐다면 제국이 적극적으로 전쟁을 수행하기가 곤란해졌을 수도 있었다.
허나 프레체스는 실패했고, 이제 세상은 제국의 분노를 감당해야 했다.
"만약의 사태를 위해... 필립스 백작령에 소수의 정예군을 파견해 놓았다. 추가적인 조치가 필요하다면 빠르게 취해 주겠다."
"감사합니다."
레이는 에른스트의 배려에 솔직하게 감사를 표했다.
다만 그와 별개로 레이는 필립스 백작령을 크게 걱정하고 있지는 않았다.
필립스 백작령에 가장 위협이 되는 루비하 왕국의 레인저들을 포섭 중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그곳에는 루나가 있었다.
루나의 뒤를 받쳐줄 그래듀에이트도 두 명이나 백작령에 있으니 어지간한 군단이 공격해와도 군단 쪽이 증발할 확률이 높았다.
루나를 생각하며 마음의 여유를 되찾은 레이가 표정을 풀었다.
에른스트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레이에게 당부했다.
"복잡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자꾸나. 당장은 몸을 회복하는데 집중하거라."
"예,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이것 좀 반납할게요."
레이가 허공에서 모로스를 뽑아들었다.
에른스트가 모로스를 바라보다 등을 돌렸다.
"당분간은 네가 지니고 있거라."
에른스트가 병실에서 나가고, 레이는 떨떠름하게 모로스를 다시 아공간에 수납했다.
그 이후 요하나가 찾아왔다.
요하나는 레이의 얼굴을 보자마자 퉁퉁 부어있는 눈으로 또 울음을 터뜨렸다.
"흐어어엉..."
세상 서럽게 우는 요하나를 향해 레이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요하나, 나이가 몇 살인데 자꾸 우냐?"
레이가 그리 짓궃게 타박해도 요하나는 울음을 그치지 못했다.
레이 본인은 몰랐지만, 레이의 안색은 창백하게 가라앉아 있어 누가 봐도 건강 상태가 심각해 보였다.
요하나가 계속해서 눈물을 뚝뚝 흘리자 레이가 손을 뻗어 요하나의 뺨을 매만졌다.
"나 괜찮다니까. 크게 다친 곳도 없어. 멀쩡해. 그러니까 그만 울어. 귀 아프다."
"흐윽, 흑!"
"데런은 봤어?"
"흑! 응... 데런은 이제 괜찮아. 흐윽!"
"아이고, 다행이네. 걔는 왜 배에 구멍이 뚫려서는..."
레이가 궁시렁대며 분위기를 풀어보려 했다.
허나 요하나는 그저 자기 뺨에 닿아있던 레이의 손을 꽉 움켜쥐고는 끅끅거리며 눈물을 삼켰다.
레이는 요하나가 그만 울음을 그쳐주기를 정말 마음 깊이 바랐다.
"진짜 그만 울어. 응?"
"..."
요하나가 쓱쓱 눈을 훔쳤다.
레이를 정말 많이 걱정했지만... 그래도 어디 크게 뭉개지거나 잘린 곳은 없어보여 다행이었다.
간신히 울음을 그친 요하나가 잠겨있는 목소리로 투덜댔다.
"몸도 안 좋다면서 왜... 왜 자꾸 나서는데...!"
"그래도 잘 풀렸잖아. 데런도 구했고. 그러니까 좀 봐 줘라."
데런 이야기가 나오자 더는 요하나도 뭐라 하지 못했다.
요하나가 뚱한 얼굴을 한 채 레이의 손을 조물조물 만지며 시간을 보내고 있자 치료사와 성직자가 레이를 찾아왔다.
"...나 갈게."
요하나가 레이의 눈치를 보다 자리를 비켜 주었다.
레이가 예전에도 몇 번 얼굴을 보았던 치료사와 인사를 나눈 후 낮은 목소리로 부탁했다.
"밖에서 누가 우리 대화 엿듣는 일 없도록 신경 좀 써주시겠어요?"
"현재 로얄가드가 복도를 지키고 있습니다. 걱정하시는 일은 없을 겁니다."
"아, 그건 다행이네요. 그래서..."
레이가 끙끙거리며 허리를 살짝 세웠다.
"저 누워있는 사이 이미 제 몸을 살피셨을 것 같은데... 그래서, 얼마나 남았습니까?"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단도직입적인 답변이 돌아왔다.
"길어도 5년이 한계입니다."
얼마 전.
치료사는 레이에게 모든 수단을 동원했을 때 10년이 한계라고 말했다.
당장은 버틸만하지만, 무리하면 급격히 나빠질 것이고, 오래 살긴 확실히 글렀다는 이야기였다.
헌데 그 기간이 반으로 줄었다.
단순히 수명이 반으로 줄었다는 뜻이 아니었다.
이미 몸은 돌이킬 수 없이 나빠졌고, 침대에 시체처럼 누워서 연명 치료를 받아도 5년이 한계였으며, 지금 당장 픽 쓰러져 죽어도 이상하지 않다는 의미였다.
레이가 자기 미간을 매만졌다.
예상하고 있던 결과였다.
허나 예상하고 있던 결과라 해도... 막상 확진을 받으니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레이는 다른 걸 물었다.
"제 몸이 몇 번이나 더 전투를 버틸 수 있을까요?"
전투는 개뿔, 절대안정을 취해야 한다...
본래라면 그리 호통치며 레이를 뜯어말렸을 것이다.
허나 치료사도 이제는 레이가 어떤 각오로 삶을 소모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렇기에 치료사는 군말 없이 레이가 원하는 답변을 내놓았다.
"한 번... 아주 운이 좋으시면 두 번... 그 정도일 겁니다."
"..."
"이번처럼 무리하게 심장에 부하를 주시면... 결국 심장과 주요 혈관이 동시다발적으로 찢겨 나갈 겁니다. 이전에 드린 성물을 사용하면 전투를 치르고도 잠시 동안은 생존하실 수 있겠지만..."
치료사가 고개를 살짝 저었다.
"생존한다 해도 한 달 이상은 못 버팁니다."
"한 달이면 뒷정리 정도는 할 수 있겠네요."
피식 웃은 레이가 치료사에게 부탁했다.
"진통제 좀 주실래요?"
치료사가 준비해왔던 가방을 열었다.
가방 안에 들어있는 진통제의 종류는 다양했는데, 레이는 그중 연초처럼 생긴 것을 보며 물었다.
"그 돌돌 말린 건 뭡니까?"
"브라시아로 만든 진통제입니다."
브라시아라면 마약의 원료가 되는 식물이었다.
레이 또한 브라시아를 몇 번 본 적 있었다.
"지미가 브라시아를 밭에서 열심히 재배하던데..."
혼자 낄낄 웃은 레이가 브라시아로 만든 진통제를 달라고 했다.
치료사와 성직자를 내보낸 후, 레이는 진통제... 그러니까 연초를 입에 물었다.
화륵!
연초 끝에 불이 붙었다.
레이는 병실에 누워 천장을 가만히 바라봤다.
이렇게 혼자 누워있으니 몸의 고통과 번잡스러운 감정들이 머리를 어지럽게 했다.
레이는 눈을 감은 채 연기를 들이마셨다.
지금처럼 머리가 복잡할 때는 눈앞에 놓인 과제에 정신을 집중하면 잡생각이 좀 덜해졌다.
곧 전쟁이 터질 테고, 필립스 백작령 사람들은 만약을 위해 백작령을 비우고 대피할 것이다.
전쟁 도중 어떤 문제가 생길지 모르니, 레이도 필립스 백작령으로 가봐야 했다.
아무래도 1학기를 다 못 채우고 이지스를 나와야 될 것 같았다.
"돌아가서 레아 기강이나 잡아야지..."
우리 망할 동생 녀석...
레이는 웃었다. 그냥, 웃으려고 노력했다.
고향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