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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등가의 소드마스터-259화 (259/446)

259화

유려하지도 아름답지도 경이롭지도 않았다.

프레체스가 대적해야 했던 검의 궤적은 그저 기괴했다.

그건 검술이란 개념의 극한 따위가 아닌, 검술이란 개념의 모독에 가까웠다.

프레체스는, 레이의 검격을 마주하며 불합리함을 느꼈다.

서로의 육신에서 재현된 과거의 신화가 한쪽을 집어삼킨다.

닿지 못한다.

닿지 못하리라는 걸 알았지만.

프레체스는 미련을 버리지 못한 듯 검을 들어 올렸고, 내리그었다.

잔잔한 침묵 속에서.

프레체스가 쥐고 있던 검이 바스러졌다.

그 이후에야 프레체스의 가슴이 길게 갈라졌다.

오른팔 또한 거의 다 잘려나가, 바람이 불어오자 금방이라도 떨어져 나갈 것처럼 이리저리 흔들렸다.

"..."

프레체스가 검을 내려놓았다.

프레체스는, 미련 가득하게 잡아 쥐고 있던 과거가 이미 떠나갔음을 새삼스럽게 느꼈다.

시간이 흐르고 많은 것이 바뀌어갔다.

많은 것이 진보됐고 많은 것이 몰락했다.

다만 프레체스만이 과거에 서 있었을 뿐이었다.

트득!

프레체스가 다루던 육체가 바싹 마른 모래성처럼 금이 가기 시작했다.

프레체스는 여전히 덤덤하게 바라보았다.

곧 그녀의 입이 열렸다.

"미련하고, 멍청하고, 불쌍하구나."

프레체스는 레이를 동정했다. 그것만은 진심이었다.

"너 또한... 마찬가지다. 당연히 이루어야 할 사명을 위해 희생했다고 생각하며, 자유의지조차 박탈당한 주제에 이러한 결말을 스스로 선택했다고 자위하며... 후회를 제대로 곱씹지도 못하고... 그렇게 흩어지겠지."

"..."

"그러니 나는 너를 동정하겠다."

"...이봐, 드래곤."

레이가 핏물을 입에서 뱉어내고는 피식 웃었다.

"나도 이게 병신 같은 소꿉놀이라는 건 알아."

프레체스의 표정에 변화가 일었다.

약간의 당혹감이 그녀의 표정에 서렸다.

레이는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어 올리며 숨을 크게 내쉬었다.

"이게, 저 하늘 너머에서 우리를 구경하고 있는 새끼들을 위한 재롱잔치라는 걸... 나도 안다고."

아, 시발 좆 같네.

레이는 욕설을 한 번 중얼거리고는 다시 프레체스를 마주 봤다.

"나의 바람은 대단치 않아. 거창한 사명이나 대의 따위도 없어."

일이 꼬여서, 세상이 험악해서 이리 징글징글하게 몸을 굴리고 있었지만.

레이의 바람은 항상 소박했다.

레이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프레체스에게 물었다.

"너도 마찬가지잖아. 거창한 사명이나 대의 때문에 이 지랄을 떠는 건 아닐 거 아니야? 딱 보니 기분 좆 같으니까 꼬장 좀 부려보는 것 같은데... 안 그래?"

"..."

"결국 이건 유치한 감정싸움일 뿐이야. 너나 나나... 다를 게 없지."

프레체스는 눈을 꾹 감았다가 뜨고는 웃음을 머금었다.

"그래, 네 말이 맞구나."

기껏해야 옹졸한 분풀이.

이런저런 치장을 덧붙여봤자 그 본질은 바뀌지 않았다.

"네 말이... 맞아."

프레체스는 악신의 축복이 무너져가는 육체에 내려앉으려하는 걸 느꼈다.

프레체스는 거부했다.

여기서 더 이상 악신의 축복을 내려받으면 지금의 육신이 완전히 악신의 축복에 잠식됐다.

프레체스는 그리 되길 바라지 않았다.

더군다나, 설령 악신의 축복을 내려받는다고 해도, 지금의 육신은 곧 붕괴됐다.

"...아쉽지만, 여기까지구나. 그만 마무리를 지어야겠어."

"그래, 마무리를 지어야지."

핏물을 흘릴 만큼 흘린 레이가 간신히 균형을 다잡았다.

레이는 프레체스가 수작질을 부리기 전에 베어버릴 작정으로 전진했다.

프레체스는, 레이에게 아직 숨겨둔 수단과 여력이 남아있음을 느꼈다.

프레체스가 움직이는 육신으로는 더 이상 레이에게 대항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살아남아있던 제국군이 전장에 합류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전력은 대단치 않았지만, 프레체스가 레이에게 무너진 이상 전장의 균형이 어느쪽으로 기울 지는 명확했다.

프레체스는 자신의 계획이 실패했음을 깔끔하게 인정했다.

황도를 오염시킨다는 계획은 실패했다.

계획이 실패한 이상, 이제 잘 물러나기라도 해야 했다.

카각!!!

레이가 프레체스를 향해 검을 휘둘렀고, 무언가가 막아섰다.

지팡이였다. 아공간에서 튀어나온 지팡이가 레이의 검을 막아섰다.

"...!"

레이는 지팡이의 형태가 익숙함을 깨달았다.

몇 년 전 레이가 오시리스 백작령에서 악마숭배자와 맞붙었을 때, 바로 그때 타라니스 가문의 마법사인 브리기테가 눈앞의 지팡이를 다루었다.

지팡이의 정체는 사령검과 마찬가지로 악신의 유물이었다.

당시 레이는 브리기테를 죽이는데 성공했지만 악신의 유물을 파괴하는 것은 실패했었다.

그때 파괴하지 못한 악신의 유물이 지금 눈앞에 나타났다.

레이의 표정이 단번에 일그러졌다.

"이런 시발..."

쩌엉!!!

지팡이로부터 마나가 터져나오며 레이를 밀어냈다.

발을 지면에 박아넣은 레이는 단숨에 돌진해서 저 빌어먹을 지팡이와 프레체스를 베어내려 했다.

허나 프레체스는 남아 있던 힘을 한꺼번에 소진해서 레이의 발을 잠시 묶었다.

레이가 자기 몸에 엉겨붙은 프레체스의 권능을 찢어내는 사이.

프레체스는 무너져가는 몸뚱이를 짜내 날개를 펼쳐서 골든타워까지 빠르게 물러났다.

육체가 거의 붕괴된 상태로 프레체스가 돌아오자 악마 숭배자들이 동요했다.

프레체스는 짧게 명령했다.

"계획은 실패했다. 귀환한다."

카득!!

프레체스가 골든 타워 안으로 지팡이를 꽂아넣었다.

지팡이가 황도에 흐르는 영맥의 마나를 흡수해 골든타워로 전달했다.

골든타워가 다시 기동되며 상공을 향해 빛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아프텔이 레이에게 조언했다.

[장거리 전이... 워프 마법입니다.]

본래는 워프와 관련된 마법을 짧은 시간 만에 준비할 수는 없었다.

허나 프레체스가 장악한 골든타워에는 처음부터 워프게이트를 전개하기 위한 기능이 포함되어 있었다.

거기다 지팡이에 농축되어 있던 막대한 악신의 축복이 골든타워에 더해지며 기적을 가능케 했다.

[이대로 두면 놓칩니다.]

"보조해. 반드시 잡는다."

사령검에 지팡이에 배신자에 악마숭배자에...

저것들을 여기서 놓치면 수지가 안 맞아도 너무 안 맞았다.

깎여나간 목숨값을 생각해서라도 전부 잡아 죽여야 했다.

트드득!

한편 인근을 뒤덮고 있던 장막에도 균열이 일어났다.

프레체스가 레이와의 전투에서 힘을 대부분 사용했고, 또한 인근에 내려앉은 악신의 축복이 워프게이트를 열기 위해 급격히 소모되며 장막이 약화됐다.

곧 장막이 파괴되고 제국군이 쏟아져 들어올 터다.

레이는 그때까지 악마숭배자들을 붙잡아두어야 했고, 악마숭배자들은 늦지 않게 워프게이트를 열어야 했다.

프레체스는 레이가 다가오는 걸 느끼며 골든타워 안에 있던 드래곤하트를 뽑아냈다.

본래 골든타워 안의 드래곤하트는 영맥을 오염시키기 위한 핵으로 사용될 예정이었다.

허나 영맥의 오염을 포기함으로서 드래곤하트는 본래의 역할을 잃었다.

프레체스가 마음대로 사용해도 문제될 게 없었다.

콰득!

프레체스가 바스러져 가는 육신에 드래곤하트를 박아넣었다.

아무리 모로스라 해도 프레체스가 육체에 박아넣고 사용하는 드래곤하트에 간섭할 수는 없었다.

화아악!!

강대한 출력이 프레체스의 육신으로부터 뿜어져 나왔다.

어지간한 기사라면 다가가기도 힘들었을 테지만, 레이에겐 가소로웠다.

레이는 삽시간에 프레체스에게 접근해 검을 휘둘렀다.

콰드드드득!!!

막대한 마나가 집약되어 있던 방어막이 시푸른 검강에 의해 무력하게 잘려나갔다.

드래곤의 권능과 악신의 축복조차 레이의 검격에 찢겨져 나갔다.

근방에 있던 마족들은 감히 레이에게 대적할 생각도 못하고 뒷걸음질쳤다.

레이는, 그들에게 있어 살아있는 악몽이었다.

쫘악!!!!

결국 레이가 프레체스의 허리를 반쯤 잘라냈다.

프레체스는 육신이 너무 망가진 탓에 더는 레이에게 대항하지 못했다.

프레체스를 지나친 레이는 그대로 골든타워를 폭격해 부숴버리려고 했다.

골든타워를 지키고 있는 적들이 여럿 보였지만 찢어발기면 끝날 문제였다.

헌데, 갑작스레 거대한 태풍이 레이를 중심으로 몰아쳤다.

프레체스가 레이를 몰아내기 위해 드래곤하트의 마나를 한계까지 끌어내서 고위마법에 필적하는 태풍을 만들어냈다.

프레체스는 아예 레이에게 직접 들러붙어 자신이 마법의 핵이 되어 레이를 외곽으로 밀어냈다.

그러고 있는 사이에도 상공의 워프게이트는 점점 더 형태를 갖추어갔다.

꾸득!

삽시간에 장막의 경계선 가까이까지 밀려난 레이가 프레체스의 안면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온 힘을 다해, 프레체스의 머리를 장막을 향해 처박았다.

쩌억!!!!

약해질대로 약해진 장막에 공간을 괴리시키는 힘과 악신의 축복과 드래곤의 권능이 뒤섞여 처박혔다.

쩌억!!! 쩌억!!! 쩌억!!!

레이가 연거푸 프레체스의 머리를 장막에 처박았다.

레이는 아주 신경질적으로, 프레체스의 머리를 완전히 깨부수기라도 할 것처럼 그 동작을 반복했다.

결국 장막 일부가 바스러지며 구멍이 뚫렸다.

레이와 프레체스가 뚫린 구멍을 통해 동시에 장막 밖으로 튕겨져 나갔다.

한편 장막 밖에서 대기하던 제국군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막대한 화력이 바스러진 장막의 구멍에 집중되며 장막 자체를 완전히 무너뜨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황도에 집결한 제국군이 장막 안으로 돌진하기 시작했다.

장막 안에서 전개되던 워프게이트도 거의 완성 단계에 이르렀다.

이제 악마 숭배자들의 도주를 막아내는 것은 제국군의 몫이 되었다.

거대한 함성이 귀를 울렸다.

소수의 제국군은 레이와 프레체스를 쫓았다.

레이는 망토의 도움을 받아 공중에서 활공하며 프레체스를 돌아보았다.

프레체스는 장막 밖으로 나오고 나서야 뒤늦게 불꽃의 날개를 펼치고 황도에 존재하는 광장 한가운데에 착지했다.

콰앙!!!

그녀가 내려앉은 곳은 성검이 박혀 있는 광장이었다.

혼란 속에서도 굳건히 성검을 지키고 있던 기사들이 프레체스의 급습에 방패를 세운 채 뒤로 밀려났다.

이윽고 레이 또한 지면에 내려앉았다. 레이의 눈에 성검 앞에 서 있는 프레체스의 모습이 보였다.

투둑!

프레체스가 가슴에 박혀있던 드래곤하트를 뽑아냈다.

드래곤하트의 에너지가 너무 강해, 더는 망가진 육신이 버텨낼 수가 없었다.

더는 무슨 수를 써도 지금의 육체를 유지시킬 수 없었다.

이제는, 정말 마지막이었다. 이제야...

"이제야 너와 이별하는구나."

프레체스는 담담하게 슬퍼했다.

"우리는 이미 한참 전에 이별했지만... 내가 너를 놓아주기까지 너무 많은 시간이 걸렸구나."

처음부터, 프레체스는 오늘 이 자리에서 이 아이의 육신을 흙으로 돌려보낼 생각이었다.

너무 오래 붙잡고 있어서, 그리고 더는 자신이 예전과 같지 않았기에.

이제는 그만 이 아이의 흔적을 지워줄 생각이었다.

오랜 시간 지키고 가꾸고 또한 아껴왔던 조잡한 누더기가 무너져 간다.

악신의 축복도 드래곤의 권능도 전부 사라져가며, 오래된 육신의 눈동자에 아주 잠깐 과거의 광명이 깃들었다.

"마지막 만큼은..."

네가 선택했고, 네가 최후를 맞이했던, 바로 그 모습으로.

최초의 용사.

최초의 성녀.

그리고 가장 먼저 성검을 쥐었던 자.

그날의 모습 그대로...

프레체스가 과거를 추억하며 성검을 쥐었다.

성검이, 뽑혀나온다.

그리고.

덜컥!!

반쯤 뽑혀나오던 성검이 덜컥 멈추었다.

하나 남은 팔로 몇 번 더 성검을 덜컥거려본 프레체스가 고개를 돌려 레이를 보았다.

레이가 프레체스를 향해 검지 손가락을 들어올려서 좌우로 흔들었다.

"혹시 뽑히는 줄 알고 기대했어?"

"..."

"근데 어쩌지? 그거 뽑고 싶으면 나한테 허락받아야 돼."

대립 (5)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