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홍등가의 소드마스터-258화 (258/446)

258화

생도들은 부상자를 데리고 장막의 외곽으로 향했다.

생도들이 방금까지 서 있던 장소에서는 막대한 섬광과 폭풍이 휘몰아쳤다.

마스터급을 제외하고는 제국에서도 손에 꼽히는 강자들의 전력은 생도들의 상상을 훨씬 웃돌았다.

살을 에워싸는 전장의 울림에 생도들이 표정을 굳히고 있는데, 가까운 곳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제국군이었다.

이미 한 번 패퇴했던 제국군 십여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 중 선두에 선 기사가 아직 피딱지가 굳지 않은 얼굴로 물었다.

"지원이 왔나?"

"...예."

"그렇군."

짧은 문답 이후, 기사는 전장을 향해 걸었다.

기사를 따라가는 한 무리의 제국군을 보며 생도들은 제자리서 멈춰 섰다.

"저..."

생도들 중 누군가가 입을 열자 기사는 고개를 돌려 입을 열었던 생도를 위아래로 살폈다.

생도는 검 한 자루를 제외하면 제대로 된 무장도 갖추지 못한 맨몸이었고, 드러나 있는 표정에는 갈등, 혼란, 두려움 따위의 감정이 내려앉아 있었다.

기사는 여전히 무던한 목소리로 생도들에게 말했다.

"너희는 준비가 갖춰지지 않았다."

"..."

"안전한 곳에서 대기해라."

그리 말하고 기사는 떠났다.

생도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나아가는 제국군의 뒷모습을 보며 부끄러움을 느꼈고, 한편으로는 그 감정을 외면하기 위해 애썼다.

우리는 아티펙트는커녕 제대로 된 갑주조차 장비하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가 제대로 된 준비도 없이 전장 위에서 고기방패처럼 소모된다면 제국에도 막심한 손해가 될 것이다...

그런 변명 따위를 곱씹으며 눈을 돌리려 했다.

허나 베르덴은, 다른 생도들과 달리 공포보다는 굴욕감을 먼저 느꼈다.

그는 자신이 겁쟁이라 무시당했다고 생각하며 저 멀리 보이는 제국군을 따라 몸을 움직였다.

한 명이 움직이니 그 다음은 쉬웠다.

2급 생도 몇 명이 베르덴을 따라 발걸음을 돌렸다.

3급 생도들도 따라오려고 하자, 2급 생도들이 짜증스럽게 손을 휘저었다.

"너희는 부상자를 지켜. 이건 명령이야."

"가만 있어라. 니들이 아직 공적을 탐낼 짬밥은 아니잖아?"

마른 웃음을 낄낄거린 2급 생도들이 섬광이 비치는 전장으로 다가가며 호흡을 골랐다.

"아... 근데 말이야, 그거 누가 할래?"

"왜 날 쳐다봐? 가장 먼저 나선 새끼가 하라고 해."

그 말을 듣고 피식 웃은 베르덴이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내고 어색하게 중얼거렸다.

"...제국의 적을 척살하라."

"아 시발, 니가 하니까 폼이 안 산다, 폼이."

2급 생도들이 투덜거리며 검을 뽑아냈다.

*

프레체스가 검을 내리그었다.

너무나 단순한 동작이어서, '내리그었다' 외에 더 이상 뭐라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레이는 프레체스의 검을 방어하려 하지도 않았고 흘려내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리했다간 뭉개질 거라는 걸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레이는 프레체스의 검격을 상쇄시키기 위해서 양손의 검을 교차시켜 베어냈다.

침묵 속에서 서로의 검이 맞부딪쳤다.

레이는, 자신이 만들어낸 빛의 칼날이 프레체스의 검격에 의해 갈라져 나가는 걸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깡- 금속이 두들겨 맞는 소리가 귀를 울렸다.

검을 타고 흐른 반동이 레이의 머리를 뒤흔들며 감각을 왜곡시켰다.

레이는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한쪽 무릎을 지면에 박아넣었다.

"..."

쿵!

레이가 무릎을 꿇고 나서야 땅이 울리고 바람이 불었다.

레이는 정면에서 프레체스의 일격을 제대로 받아내지 못했다.

이 결과는, 근력 같은 육체 성능의 격차로 인해 발생한 것이 아니었다.

이건 기술의 격차였다.

무언가를 베어낸다. 그러한 개념의 극한이 프레체스의 검격에 담겨 있었다.

서로가 존재했던 시간의 간극만큼이나, 레이와 프레체스가 자아내는 검격 간에는 까마득한 격차가 존재하고 있었다.

그 메우지 못할 불합리함 속에서 레이는 숨이 턱 막혀오는 것을 느꼈다.

프레체스가 검을 찔러온다.

레이는 어깨로 다가오는 프레체스의 검을 옆으로 흘려내려 했고 실제로도 흘려냈지만.

직진하던 프레체스의 검은 어느새 사선 방향으로 힘을 전달하며 레이의 자세를 다시 한 번 무너뜨렸다.

레이는 무너진 균형을 억지로 다시 세우며 모로스를 사선으로 올려 벴다.

프레체스가 손쉽게 공격을 막았고, 레이는 연속해서 오메가 시리즈를 찔러넣으려 했다.

허나 프레체스가 손목을 살짝 비틀어 힘을 전달하자 모로스의 궤적이 뒤틀리며 오메가시리즈의 전진을 막아서는 모양새가 되었다.

흐름이 끊겨 황급히 물러서는 레이를 향해 프레체스가 검을 횡으로 휘둘렀다.

바람 소리도 들리지 않았건만 쇄골 아래의 갑주와 살갗이 베였다.

레이는 그 사실을 프레체스와 거리를 벌리고 한참 뒤에야 깨달았다.

프레체스가 행하는 동작 하나하나의 완성도가 궤를 달리했다.

검술의 완성도만 따지면 프레체스는 제국의 소드마스터라 칭해지는 에른스트와 필적했다.

아니, 도리어... 검술이란 단어에 내재된 본질적인 의미에 있어 프레체스는 에른스트보다도 한발 앞서 있었다.

그녀의 일격에 담긴 것은 인간이 감히 상상하기조차 힘든 수백 수천 년의 세월.

지근거리에서 검술로 맞붙으면 프레체스가 레이를 압도한다.

레이는 정면대결을 포기하고 곧장 아티펙트를 사용했다.

촤아악!!!

랜스 형태의 아티펙트가 프레체스를 향해 쏘아졌다.

아티팩트로부터 강풍이 터져나와 프레체스의 자세를 억지로 흐트러뜨렸다.

균형을 잃은 프레체스를 아티펙트가 그대로 꿰뚫어버리려 했지만, 프레체스는 덤덤하게 검을 휘둘렀다.

드드득!

뒤틀린 각도에서 뻗어나온 검격이 아티펙트의 장갑을 잘라내고 내부로 파고들었다.

코어가 바스러진 아티펙트가 무력하게 폭발하는 사이.

레이가 쏘아낸 도약검기가 허공을 갈라내며 떨어져 내렸다.

콰가강!!!

레이는 계속해서 도약검기로 프레체스를 폭격하며 아티펙트 다섯 개를 한꺼번에 전개했다. 단번에 찍어누를 작정이었다.

사방에서 공격이 쏟아져 내리자 프레체스의 눈동자가 세로로 찢어졌다.

만물의 흐름을 읽어내는 눈동자가 개안되며 프레체스에게 가장 가까이 접근한 아티펙트부터 반으로 갈라졌다.

카가가가가각!!!

삽시간에 레이가 전개한 아티펙트가 모조리 바스러졌다.

레이가 그것을 인지했을 때 프레체스는 이미 레이 앞에 서 있었다.

"검을 들어라."

쩌엉!!!

프레체스의 참격을 막아내며 레이가 이를 악물었다.

프레체스의 몸뚱이는 억지로 이어붙인 누더기나 다를 바 없었지만, 그녀의 참격은 올곧고 아름다웠다.

레이는 그것에 겁을 먹었다는 것을 순순히 인정했다.

검을 휘두른다는 그 순수한 개념에 있어 레이는 그녀에게 결코 닿지 못했다.

진즉 정면 대결을 회피하기로 결정한 레이는 어떻게든 다른 요소에서 승부를 보려고 했다.

촤악!

장막을 통과하는 과정에서 반파되었던 아티펙트 중 아직 기동 가능한 것들이 레이의 부름에 응답했다.

레이는 움직이는 아티펙트를 프레체스에게 모조리 쏟아부으며 화력으로 찍어누르기 위해 발악했다.

처음과는 완전히 뒤집어진 전투의 형세 속에서.

프레체스는 온갖 아티펙트를 부수고 베어내며 성큼성큼 레이에게 다가갔다.

레이는 그 모습을 보며 공포를 느꼈고, 프레체스는 조소했다.

"얄팍하구나, 인간. 검술도, 의지도."

"실망시켜서 미안하군."

레이는 자신이 행하는 검술이 얄팍함을 충분히 잘 알고 있었다.

레이의 검술은 스스로 개척한 것이 아닌 부여받은 것. 그걸 20년도 안 되는 세월 동안 간신히 체화시켜 그럴듯하게 활용할 뿐이었다.

그렇기에 고집을 부리지 않고 화력으로 찍어누르려 했으나 그것도 여의치가 않았다.

끄드득!!

레이는 코앞까지 다가온 프레체스의 발걸음을 늦추기 위해 코어와 서클을 한계까지 회전시켰다.

시푸른 냉기가 공간에 내려앉으며 서로의 육신을 만신창이로 만들었다.

죽은 사체를 조각조각 이어붙인 프레체스의 육신은 계속해서 삐걱거리며 갈라지려 했지만, 의지를 현실에 구현하는 드래곤의 권능이 육신의 형태를 유지시켰다.

레이가 자기 입술을 깨물고 강하게 짓눌렀다.

'이대로는 내가 밀린다.'

다른 수단을 강구해야 했다.

지원을 부를까? 불가능하다.

미하엘과 안소니우스는 제국을 대표하는 강자였지만, 지금은 적의 공세 속에서 버티는 것만으로도 한계였다.

어떻게든 레이가 홀로 프레체스를 꺾어내야 했다.

"..."

아직 레이에겐 사용할 수 있는 강력한 수단이 몇 개 남아있었다.

그것들을 사용한다면 아무리 검술의 역량이 뒤떨어진다 해도 프레체스를 확실하게 찍어누를 수 있었다.

허나 그 대가는 남아있는 삶의 대부분이 될 것이다.

"..."

아직은 안 된다.

아직은 눈에 밟히는 것이 너무 많아, 남아있는 삶을 함부로 포기할 수가 없었다.

레이는 억지로라도 다시 거리를 벌려 프레체스를 상대하려 했다.

도주할 것처럼 움직이는 레이를 보며 프레체스가 입꼬리를 뒤틀었다.

"끝까지 어설프구나."

쿵- 정체를 특정하기 힘든 힘이 레이를 지면으로 찍어눌렀다.

레이가 발이 묶인 사이 코앞까지 접근한 프레체스가 검을 들어 올렸다.

"이 아이는 검 한 자루로... 지면을 부수고 하늘을 갈라냈다."

쩌억- 그런 굉음과 함께 공격을 막아낸 레이의 어깨에서 핏물이 튀었다.

프레체스는 더는 도망가게 하지 않겠다는듯 레이를 압박하며 실망한 기색을 내비쳤다.

"이형의 존재를 베어내는 것... 네가 지닌 검술의 가치가 정녕 그것뿐이더냐?"

"..."

레이가 인상을 찌푸렸다.

검 한 자루로 지면을 부수고 하늘을 갈라냈다... 그건 하르시아 또한 마찬가지였다.

단지, 레이가 너무나 어설프고 미숙해서 과거의 신화를 재현해내지 못할 뿐이었다.

레이는 자신의 어설픔은 인정했지만, 하르시아를 향한 모욕은 인정할 수가 없었다.

카가각!!!

검이 맞부딪치고, 다시 레이가 뒤로 밀려나며 피를 흘렸다.

레이는 이대로는 안 된다는 걸 명확히 깨달았다.

프레체스의 검은 완벽했다.

프레체스가 움직이고 있는 육신의 '본래 주인'은 더욱 완벽했을 것이다.

그리고.

하르시아는 그보다도 훨씬 더 완벽했을 것이다.

환영 속에서 리실로테가 잠시 비춰주었던... 하르시아가 그려냈던 검의 궤적은 분명 그러했다.

레이는 여전히 그날 환영 속에서 보았던 하르시아의 궤적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르시아의 움직임을 재현하려 해도, 중간중간이 뚝뚝 끊어져 있어 도저히 이을 방법을 찾을 수가 없었다.

하르시아였다면, 분명 프레체스의 검격을 부수고 꿰뚫고 두 검을 교차시켜...

"..."

재현해라.

단 한 순간만이라도.

그가 그려냈던 궤적을 재현해라.

하지만 어떻게?

그 뚝뚝 끊겨있던 움직임을 재현하기 위해 필요한 것.

대체 그 움직임을 재현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는 있었어.'

행하기가 두려워서 모른 척 했을 뿐이다.

자신의 재능이 지닌 한계를 알았기에, 레이는 하르시아가 해낸 것을 도전하기 두려워서 고개를 돌리고 모른 척 했다.

그건 분명 현명한 판단이었다.

레이는 하르시아가 될 수 없었다.

하르시아만큼 단단한 육체를 지니지도 못했고, 검에 관한 불세출의 재능을 지니지도 못했다.

하지만... 단 한 순간만이라도, 그가 그려낸 궤적을 재현할 수 있다면.

재현을, 해내야 한다면.

츠즉!

사방에 너울지던 냉기가 잔향을 남기고 사라졌다.

코어와 서클에서 발산되는 마나의 기류가 레이의 신체에 온전히 집중됐다.

인간의 육신은 코어에서부터 생성되는 공간검의 마나를 버텨낼 수가 없었기에, 온몸의 살갗이 찢어져 나가며 피가 흘러내렸다.

그럼에도 레이는 마나의 기류를 육신에 가두고 증폭시켰다.

프레체스는 레이의 변화를 개의치 않고 검을 사선으로 내리그었다.

지금의 자세로는 레이는 프레체스의 공격을 방어할 수 없었다.

당장이라도 몸뚱이를 땅에 굴려야 했지만.

레이는 도리어 프레체스를 향해 발을 내디뎠다.

지금 자세로는 프레체스의 공격을 방어할 수가 없다.

하지만 괜찮았다.

이건... 4차원의 시공간이 아닌.

한 단계 더 상위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자세의 치환.

그림을 바꿔 끼우듯, 레이의 육체가 과정 없이 자세를 바꾸었다.

카각!!

공격이 막혔다.

프레체스가 레이를 다시 보았다.

레이의 움직임이 뚝뚝 끊겨나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은 전혀 아름답지 않았다. 단지 기괴할 뿐이었다.

상위차원에서 이루어진 움직임이 4차원 시공간에 예고 없이 투영된다.

찌르고, 베고, 막는다. 그런 결과만을 4차원 시공간 아래에 둔 채 과정이 찢겨나갔다.

이것을 과연 검술이라 정의해야 하는가.

알 수 없었다. 그건 그냥 기괴했다.

다만 프레체스는, 레이의 움직임을 부숴내기 위해, 자신이 사랑했던 아이와 가장 닮아있던 자세를 취했다.

위에서 아래로, 검을 내리긋는다.

레이의 움직임이 한 번 더 끊겼다.

두 자루의 검이 교차해서, 맞닿은 지점을 찢어냈다.

굉음 따위는 울리지 않았다.

다만 프레체스가 쥐고 있던 검이 반으로 갈라져 지면에 떨어졌다.

그 이후에야 프레체스의 가슴이 길게 갈라졌다.

연약한 인간의 육신으로 상위 차원에 발을 들였던 레이 또한 전신에서 피를 쏟아냈다.

그러면서 레이는 웃었다.

"얄팍한... 검술이군."

"..."

프레체스가 반으로 잘려나간 검을 놓았다.

대립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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