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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등가의 소드마스터-257화 (257/446)

257화

레이가 하늘에서부터 떨어져 지면에 닿기까지.

그 일련의 과정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던 것인지 제대로 이해한 자는 극히 소수였다.

마족들 또한 상황을 단편적으로만 이해한 채 혼란을 느꼈다.

명확한 사실 하나는, 침입자들이 막강한 화력을 뚫어내고 지면에 착지하는 데 성공했다는 것이었다.

지면에 맞닿은 침입자 세 명이 마족들을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세 명 모두 로드 급은 아니었다. 그것만은 확실했다.

로드 급만 아니라면 화력과 숫자로 압도해낼 수 있었다.

아무리 저들이 제국에서도 손에 꼽히는 강함을 지녔다 하더라도, 장막 안에는 저들의 무장과 체력을 소모시킬 병력이 충분했다.

저 침입자들은 하늘에서 요격을 뚫어내고 지상에 내려앉는 과정에서 이미 무수한 아티펙트를 소모했다.

그런 일이 한두 번만 더 반복돼도 상황은 종료될 것이다.

마족들이 흑마법을 발현하고 육체를 변형시켰다.

악신의 축복 아래 마족들의 눈동자가 시뻘겋게 발광했다.

비록 이곳이 마경은 아니었지만, 사령검의 영향력과 프레체스의 보조가 더해지며 마족들의 힘을 강화시켰다.

"..."

안소니우스는, 자신의 이마 위에 흐르는 것이 식은땀임을 뒤늦게 알아챘다.

이토록 열세인 전장 위에 발을 들이고 나서야, 안소니우스는 긴장이나 동요 따위의 감정이 자신에게도 이렇게나 생생하게 찾아올 수 있음을 깨달았다.

안소니우스는 전장 위에서 등을 보이고 도망치던 타락한 자들의 심정을 드디어 미약하게나마 공감하며 성물에 담긴 힘을 본격적으로 끌어냈다.

창, 검, 방패, 그리고 갑주의 사슬 하나하나까지 그 전부가 강력한 성물이었다.

하이템플러, 안소니우스.

그는 혼자이되 혼자가 아니었다.

안소니우스 본인은 그 사실을 탐탁지 않아 할 테지만, 안소니우스의 무장에는 성직자들이 무릎을 꿇고 간절하게 기도했던 수십 수백 년의 세월이 축성되어 있었다.

수많은 성직자들의 기도가 안소니우스와 함께하니, 그는 혼자이되 믿음으로 이루어진 군단이었다.

쿠웅!!!

빛으로 이루어진 반투명한 성이 안소니우스를 중심으로 내려앉았다.

빛의 성에서 뻗어 나간 축복이 어두웠던 땅을 밝게 물들이며 사방으로 너울졌다.

불길함을 느낀 마족들이 안소니우스를 향해 무차별적으로 화력을 쏟아부었다.

허나, 빛으로 물든 지면에서 신성한 방벽과 사슬이 솟아올라 가해지는 공격을 대부분 상쇄해내기 시작했다.

까드드드드득!!!

신성한 방벽과 사슬이 바스러지고 솟아오르길 반복하며 눈부신 섬광을 내뿜었다.

시야가 밝게 물든 사이 거대한 덩치를 지닌 마물 몇 마리가 안소니우스를 향해 돌진해 왔다.

안소니우스는 덤덤하게 검을 뽑아들고 망치처럼 휘둘렀다.

굉음과 함께 마물의 머리가 터져나가고, 그 틈을 타고 배후를 파고든 마족을 안소니우스의 방패가 찍어 내렸다.

교단이 자랑하는 하이템플러의 무력이 유감없이 발휘되는 사이.

미하엘이 골든타워를 향해 묵묵하게 나아가며 미약한 검기를 발현했다.

미하엘의 기세는 너무나 잔잔해서, 한 마족은 그것이 함정일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측면에서 미하엘을 기습했다.

촥-

무언가가 잘려나갔다.

마족은 미하엘을 향해 뻗어 가던 자신의 팔뚝이 양단되었음을 뒤늦게 알아챘다.

미하엘의 검에는 여전히 미약한 기운만이 맺혀있을 뿐이었다.

미하엘이 그려낸 검의 궤적이 이번엔 목으로 다가오자, 마족은 그제야 자신이 무엇에 베였는지 어렴풋이나마 눈치챌 수 있었다.

어둡게 내려앉아 흡사 그림자를 닮은 섬광이 미하엘의 검에서부터 뻗어나왔다.

그림자와 뒤섞여 은밀하게 감추어진 검격이 마족을 다시 한 번 가르고 지나갔다.

촤악-

그림자 베기라고 일컬어지는 미하엘의 검술에 마족은 무력하게 목이 잘려나갔다.

미하엘에게 다가오던 적들이 그 광경을 보고 주춤거리며 속도를 늦췄다.

그 찰나, 하늘이 더욱 어두워졌다.

거대한 날개를 지닌 말이 검은 화염에 휩싸인 채 하늘에서부터 강하하고 있었다.

암흑 정령, 그것도 고위 암흑 정령이었다.

고위 암흑 정령은 막대한 화력을 토해낼 수 있었으며 무력화시키기가 굉장히 까다로웠다.

침입자의 힘을 빼는데 정령만큼 효과적인 수단도 없었다.

허나 프레체스는 미간을 찌푸리며 정령을 후방으로 물리라고 손짓했다.

명령을 받은 흑마법사가 정령을 불러들이려 했지만 그보다 먼저 정령의 비명 소리가 장막 안을 거칠게 울렸다.

"..."

프레체스가 핏물을 뒤집어쓰고 비명을 질러대는 정령을 바라보다 가까운 곳에 서 있던 마족들에게 손짓했다.

"머리 위다."

"?!"

콰가강!!!

검기의 다발이 허공을 갈라내고 마족들의 머리 위를 폭격했다.

마법을 준비하던 마족들이 프레체스의 경고 덕분에 간신이 목숨을 지킨 채 지면을 굴렀다.

"하르시아...!"

악몽이라 칭해도 좋을 그 이름을 누군가가 입에 담자 전장 위로 동요가 퍼져 나갔다.

하르시아. 마족들 중 몇몇은 하르시아의 이름을 곱씹으며 흡사 겁에 질린 어린 아이처럼 몸을 떨었다.

그 광경을 보며 키어런이 낄낄댔다.

"헛소문인줄 알았는데... 제국이 정말 하르시아의 검술을 복구하는데 성공했나보군."

600년이 지났음에도, 하르시아가 남긴 발자국은 지워지기는커녕 더욱 거대해져서 전장 위의 모든 존재를 압박하고 있었다.

미하엘 또한, 번져나가는 적들의 동요를 느끼며 환희했다.

미하엘은 전장의 두려움조차 망각하고 고조되는 감정을 통제 못 해 어깨를 잘게 떨었다.

미하엘은, 자신이 새롭게 쓰여질 신화 속 전장 위에 서 있음을 다시 한 번 자각했다.

기사로서 이보다 더 목숨을 걸만한 가치가 있는 전장은 존재치 않았다.

미하엘은 죽음을 각오했다. 도리어 죽음을 바랐다.

영광스럽게 삶을 태우고 자신의 이름이 역사에 새겨지길, 마음 깊이 바랐다.

그게 미하엘의 로얄가드가 아닌 기사로서의 탐욕이었다.

한편, 적의 공세가 약화된 것을 확인한 레이가 아티펙트를 준비했다.

"전투가 길어지면 불리해. 곧바로 저 여자와 골든타워를 타격한다."

레이가 지닌 아티펙트의 출력이라면 비행 쯤은 얼마든지 가능했다.

레이가 자기 몸뚱이를 적들의 한가운데 꽂아넣겠다고 나오자 안소니우스가 레이를 보호하기 위한 신성 결계를 있는 대로 전개했다.

그 모습을 보며 프레체스가 중얼거렸다.

"오겠군."

골든타워가 완전히 무너지면 프레체스의 계획에도 차질이 생긴다.

레이가 이곳에 도달하기 전에 요격해야 했다.

레이를 확실히 저지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자는, 이곳에 프레체스밖에 없었다.

드드득!

프레체스가 드래곤하트에서 사령검을 뽑아냈다.

"이곳을 지켜라."

검은 갑주를 입은 기사에게 사령검을 건네준 프레체스가 그렇게 명령했다.

사령검을 뽑아낸 탓에 침식이 약간 늦어지겠지만, 침입자 문제를 해결하는 게 우선이었다.

레이가 신성 결계로 몸을 감싸고 아티펙트의 추력을 이용해 지면을 박차는 순간.

프레체스 또한 양 날개로부터 불길을 토해내며 지면을 찍어눌렀다.

섬광 덩어리가 서로를 향해 쏘아져 나가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콰앙!!!!!!

굉음과 함께 지면에 떨어져 내린 레이가 포장된 도로를 긁으며 주르륵 미끄러졌다.

레이는 몸을 멈춰 세우기 위해 노력하며 실소했다.

한계까지 검강의 위력을 끌어내 허공에서 맞부딪쳤는데 힘에서 도리어 레이가 밀렸다.

지금까지 상대의 힘을 뚫어내고 짓이기는데 익숙했던 레이에게는 생소한 일이었다.

프레체스는 거대한 불꽃의 날개를 펼친 채 레이에게 다가왔다.

서로가 마주 서자 영혼 안에 내재되어 있던 '권능'이 반응했다.

같은 기원을 지닌 권능끼리 공명이 일어나며 자꾸만 제어를 힘들게 했다.

프레체스는 그러한 현상을 억누르는데 익숙했지만 레이는 전혀 그렇지 못했다.

레이는 멋대로 발현된 해독 권능으로 프레체스를 바라보다, 가라앉은 목소리로 평했다.

"넌, 드래곤이 아니군."

*

지금으로부터 약 600년.

최후까지 존재했던 드래곤들은 약속된 시간이, 혹은 허락된 시간이 다했다며 흙으로 돌아갔다.

만약 그것이 필연적으로 맞이해야 할 운명이었다면 그런 운명을 거스르기 위해선 분명 대가가 필요했을 것이다.

레이는 그 대가가 무엇이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눈앞에 있는 존재가 온전한 드래곤이 아님은 파악할 수 있었다.

"적어도 본체는 아니야. 계약자? 분신? 아니면 직접 만든 인형인가?"

물론 프레체스는 신화 속 드래곤처럼 막강한 힘을 휘둘렀다.

허나 프레체스가 휘두르는 힘의 대부분은 본인의 것이 아니었다.

황도 아래의 영맥과, 영맥의 마나를 제어하기 위해 배치된 드래곤하트.

프레체스는 그곳에서부터 막강한 힘을 끌어내 사용하고 있었다.

물론 프레체스가 드래곤이란 존재와 아주 밀접하게 관계되어 있다는 것은 분명했지만, 확실히 본체는 아니었다.

프레체스는 가만히 레이를 지켜보다 싱긋 웃었다.

"이 몸이 본체가 아니라 해서 무엇이 달라지지?"

어마어마한 출력과 드래곤의 권능, 거기에 악신의 축복까지.

프레체스가 온전한 드래곤이 아니라 해도 감당키 힘든 적이란 사실은 변치 않았다.

"..."

레이는 말없이 두 자루의 검을 손에 쥐고 프레체스를 향해 가속했다.

프레체스는 뒤로 물러서며 레이에게 불꽃을 끊임없이 쏟아냈다.

레이의 코어와 서클로부터 발산되는 냉기가 불꽃을 짓뭉갰지만, 프레체스는 힘의 크기로 레이를 찍어누르려 했다.

레이는 온몸이 비명을 지르는 걸 느끼며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전력을 다하면 프레체스의 화력 자체는 뚫어낼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리 무식하게 전투를 이어가면 몸뚱이가 얼마나 버틸지 확신이 안 섰다.

그 순간.

레이가 손에 쥔 모로스의 검 자루에서 섬광이 번쩍였다.

화아악!

"...?!"

모로스.

시조룡의 의지가 깃들어 있는 제국의 신검.

프레체스가 그리했던 것처럼, 모로스 또한 황도의 시스템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존재였다.

츠즈즉!

모로스로부터 퍼져 나간 빛의 파동이 프레체스가 장악하고 있던 황도의 시스템에 간섭하기 시작했다.

프레체스는 저항하려 했지만 완전히 모로스의 간섭을 배제할 수는 없었다.

결국 프레체스에게 공급되던 막대한 출력의 에너지가 끊겨나가며 프레체스의 등 뒤에서 휘몰아쳤던 불꽃의 날개가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어머니..."

프레체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의 표정을 울음을 참는 것처럼 보였다.

"끝까지 당신은 변치 않으셨군요."

프레체스는 잊혀간 과거를 추억하다, 현실로 돌아와 주먹을 움켜쥐었다.

"당신의 헌신이 저를 괴롭게 합니다. 다만 원망하진 않겠습니다. 부디... 마지막 순간까지 당신이 후회 않고 만족하셨기를 바랍니다."

프레체스가 피워 올린 불꽃의 날개가 완전히 사라졌다.

어느새 레이가 프레체스의 지근거리까지 접근해 검을 들어 올리고 있었다.

레이의 검격에는 들뜬 감정이 약간이나마 묻어나왔다.

빼앗긴 황도의 시스템 일부를 모로스를 활용해 잠시나마 되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마법사와 학자들의 의견이 적중했다.

프레체스는 무력화됐고, 이대로 프레체스만 베어버린다면 레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쉽게 장막을 파괴할 수 있었다.

이미 가슴이 쥐어짜이는듯한 고통을 느끼고 있던 레이는 이번 일격이 마지막이 되길 바랐다.

그 찰나.

프레체스의 허리춤에서 장식처럼 매달려 있던 검이 뽑혀 나왔다.

쩌엉!!!!!

검이 맞부딪치며 흙먼지가 확 일어났다.

레이는 프레체스와 검을 마주 댄 채 움직임을 멈췄다.

레이가 온 힘을 다했던 방금의 일격을... 프레체스는 완벽히 상쇄시켰다.

굉음이 터지고 흙먼지가 일었지만 프레체스는 그 모든 충격을 부드럽게 흘렸다.

레이는 굳은 얼굴로 프레체스를 응시했다.

프레체스가 레이의 시선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오만하구나, 인간. 드래곤이 힘자랑밖에 할 줄 모르는 멍청한 짐승이라 생각했느냐?"

"..."

"이 육신이 무엇이냐고 물었지? 이 육신은 동족의 것이다."

프레체스는 산뜻하게 미소지었다.

너무나 오랜 세월 동안 풍화되어 이젠 잘 떠오르지 않았던 기억과 감정들이 오늘따라 유난히 살갑게 느껴졌다.

"이 육신의 주인은... 유별났지. 그래, 아주 유별난 아이였다. 드래곤하트를 가지고 태어나지 못한 돌연변이. 심장이 없는 기형아..."

"..."

"간신히 생존은 가능했지만, 나는 이 아이가 동족의 짐덩이와 다를 게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의 착각이었다."

이 아이가 가졌던 것.

자기 것이 아닌, 다른 존재들의 힘을 받아들일 수 있는 재능.

심장이 있어야 할 위치에 다른 존재들의 힘을 받아들여 정제해낼 수 있는 재능.

"이 아이는 우리가 생각지도 못했던 것을 창조했고, 우리가 해내지 못했던 위업을 이루었다. 그리고 자기 역할을 다했을 때 산산이 바스러졌지."

"..."

"그 산산이 바스러진 육신을 내가 이어붙였다. 이 아이를 사랑했으니까. 이 아이의 육신이 흙으로 돌아가 망각되는 걸 바라지 않았으니까."

"..."

레이는 맞대었던 검을 회수하고 물러서며 자세를 다시 잡았다.

미리 대처하지 않으면 대응할 수 없음을, 직감적으로 레이는 깨달았다.

프레체스는 여전히 추억에 잠긴 채 잔잔한 웃음을 입가에 머금고 있었다.

"이 아이는 마법이 아닌 검을 쥐었다. 드래곤하트가 아닌 정제된 마나와 신성력을 가슴에 품었다. 그 지식을... 너희에게 베풀었지."

프레체스가, 마침내 추억에서 벗어나 레이를 직시했다.

"이 아이는 너희가 다루는 수많은 검술의 시초이자..."

또한.

"최초의 성녀이며 용사였다."

이 아이가 그려내던 검의 궤적을 추억하며, 프레체스는 검을 움직여보곤 했다.

인간의 역사에 기록되지 못한 까마득한 과거부터 지금까지, 마음이 괴로울 때마다 그렇게 어설픈 추모를 보내고는 했다.

덧없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 프레체스는 이 아이가 그러내던 궤적을 닮아갈 수 있었지만, 단지 그뿐이었다.

단지, 그뿐이었다.

"얄팍한 인간의 검술로..."

덧없이 하늘만을 갈라냈던 검이 긴 시간을 건너 마침내 레이를 향했다.

"한 번 받아내 보거라."

프레체스가 검을 움직였다.

위에서 아래로 떨어져 내리는 검격이 풍경을 갈라냈다.

레이는 물러서지 않고 양손에 쥔 검을 프레체스를 향해 교차시켰다.

서로의 육신에서 재현되는 건 썩어버린 과거의 유물.

멸망을 이겨낸 가장 찬란했던 역사가 상처 입고 일그러진 채 맞부딪쳤다.

대립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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