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5화
제국의 신검이 아공간에서 뽑혀 나온다.
황제의 권위를 상징하는 모로스가 모습을 드러내자 상황을 지켜보던 자들이 다들 황급히 무릎을 꿇기 시작했다.
레이는 시야가 확 넓어지는 것을 느끼며 조소했다.
"그래, 뭐... 험하게 굴리시는데 이 정도 체면은 세워주셔야지."
레이가 모로스를 손에 쥐고, 발걸음을 내디뎠다.
제국의 군단이 허리를 세우고 일어나, 레이가 나아가는 길을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레이가 장막을 향해 걸어가며 호흡을 골랐다.
만약 장막을 파괴하는 데 성공한다면 굳이 레이가 전투에 나설 필요는 없었다.
레이가 나서지 않아도 제국의 군단이 타락한 자들을 척살할 터였다.
하지만 장막을 파괴하는데 실패한다면, 소수 인원으로 장막 내부로 진입해야 했다.
"...침입 가능 인원은 세 명이 한계라고 했나?"
"그렇소!"
매그나가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이 앞장선다 해도, 장막의 반발 작용을 감안하면 네 명 이상은 돌입하기 힘들 것이오."
고작 세 명이다. 팀을 편성하려면 최정예로 맞추어야 했다.
더해서, 저 안쪽에 악마숭배자가 들끓는 이상 적절한 대응을 위해선 신성력을 사용할 수 있는 자가 필요했다.
"미하엘, 안소니우스를 호출해."
안소니우스는 성기사 계열로만 한정하면 최고 전력 중 한 명이었다.
레이의 요구에 미하엘이 잠깐 내키지 않는 듯한 기색을 보였다.
"그건..."
"출신 문제 때문에 그러나?"
미하엘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남부 출신의 이지스 교관이 배신했다는 보고가 들어왔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대놓고 왈가왈부하기에는 적절치 못했다.
레이가 짜증스럽게 미하엘을 타박했다.
"정신 차려. 한참 제국이 단합해야 하는 시기에 출신 성분 때문에 선을 긋겠다고? 무슨 정신 나간 짓이야?"
"죄송합니다. 생각이 짧았습니다. 다만 그가 협조 요청에 응할지는..."
안소니우스는 교단에 소속된 하이템플러였으며, 이번 작전은 생환을 보장하기 힘든 특공 작전이었다.
협조를 구할 수는 있겠지만 안소니우스가 자원하지 않는다면 작전에 참여하길 강제할 수는 없었다.
그때, 제국군을 헤치며 안소니우스가 나타났다.
"참여하도록 하지."
안소니우스가 레이 앞에 섰다.
얼마 전, 레이는 안소니우스를 향해 우리가 함께 이겨내야 할 시련이 기다리고 있지는 않을까, 그리 입을 놀렸었다.
헌데 레이가 경고했던 대로 사고가 터져버리니, 오로지 누이만을 위해 기도를 올리는 안소니우스라 해도 운명과 사명에 가까운 무언가를 조금은 느낄 수밖에 없었다.
또한, 제국의 안정이 누이를 위한 길이라는 레이의 주장에 안소니우스 또한 동의하고 있었다.
"이전에 네가 말한 대로 되었군."
"그래. 불행히도 말이야."
씁쓸하게 웃은 레이가 자기 뺨을 매만졌다.
이제 한 사람만 더 채우면 되었다.
레이가 고민하고 있는데 미하엘이 입을 열었다.
"제가 같이 진입할 겁니다."
"황제 폐하께서 허락하셨나?"
"제가 자원했고, 황제 폐하께서 인허해주셨습니다."
"...그럼 잘 부탁하지."
"영광입니다."
장막을 통과할 때의 부하를 견뎌내기 위해선 마법사의 육체 강도로는 안 됐다.
기사가 필요했고, 미하엘이라면 현재 투입 가능한 기사 전력 중 최강에 가까웠다.
습격대의 구성원을 갖춘 레이가 세부적인 사안을 논의하려 하는데, 앞으로 나아가던 제국의 군단을 아직 앳된 느낌이 남아있는 소녀가 가로막았다.
요하나였다.
"레이!!!"
요하나가, 눈물이 가득 고인 눈동자를 내비치며 소리쳤다.
"가지 마!!"
"요하나...?"
"가지 말라고!!"
감히 레이의 앞을 막아선 요하나를 누군가가 끌어내려고 접근했지만 미하엘이 제지했다.
요하나가 레이를 향해 터벅터벅 걸어오며 소리질렀다.
"네가!! 네가 가지 않아도 되잖아...!!"
레이에게 다가온 요하나가 레이의 옷깃을 꽉 움켜쥐었다.
요하나는 차오르는 불안 때문에 손아귀를 거칠게 떨면서 목소리를 짜냈다.
"그냥...!! 그냥 여기 있으라고...!!"
주변으로 눈을 돌리면 휘황찬란 무장을 장비한 제국의 군단이 가득했다.
목에 힘을 잔뜩 주고 자신의 무력과 위세를 자랑하려고 안달나 있던 자들이 이곳에 가득했다.
헌데, 헌데 대체 어째서.
"네가 왜... 싸워야 되는데...!!"
"..."
레이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해주고 싶은 말들이 많았지만,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울먹이는 요하나를 바라보다, 레이는 결국 뻔하디 뻔한 말을 간신히 뇌까렸다.
"...걱정하지 마."
"가지 말라고!!"
요하나가 레이의 옷깃을 더욱 강하게 움켜쥐고 외쳤다.
"왜 자꾸 이러는 거야!! 대체 왜!!"
"..."
레이는 이렇다 할 대답을 해주지 못했고, 요하나는 레이의 고집을 꺾을 수 없음을 깨달았다.
요하나는 레이를 향한 원망스러운 마음을 감추지 못한 채 모두의 앞에서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대체 왜... 왜 그러는데..."
"..."
"흐윽...! 루나한테 다 이를 거야..."
"아니 그건 좀..."
흠칫 놀란 레이가 요하나를 안아주었다.
울음을 터뜨린 요하나를 달래줄 말이 너무나도 빈곤하다는 것을, 레이는 마음 깊이 느끼며 턱에 힘을 주었다.
"...걱정말고 기다리고 있어."
레이가 안주머니에 있던 훈장을 꺼내 요하나의 손에 쥐여주었다.
"나 다녀올 때까지 이것 좀 맡아주고."
"흐윽! 흑...!"
요하나는 훈장을 꽉 움켜쥔 채로, 결국 더는 레이를 막지 못하고 보내주었다.
요하나가 울면서 옆으로 비켜서자 이번엔 세리아가 레이 앞에 섰다.
눈을 깜박이는 레이에게 세리아가 짧게 말했다.
"잘 다녀와. 무사하게."
세리아는 그리 말하며 가지고 있던 모든 아티펙트의 제어 권한을 레이에게 양도했다.
그 뒤에도.
레이, 안소니우스, 그리고 미하엘이 나아가는 길을 따라.
군단의 지휘관들과 이름 높은 기사들이 저들이 지닌 가장 강력한 병기의 제어권을 순차적으로 양도했다.
엄숙한 분위기 아래, 매그나만은 여전히 들뜬 표정을 드러내며 조언했다.
"아티펙트를 수십 개 들고간다 해도 태반은 돌입 과정에서 소실될 것이오. 또한 어차피 수십 개의 아티펙트를 동시에 다룰 수는 없으니, 진입하자마자 동력원을 폭주시켜 적들을 폭격하시오."
값비싼 아티펙트를 일회용짜리 폭탄으로 사용하는 격이었지만 그보다 더 효율적인 전략은 없었다.
매그나는 두뇌를 열심히 굴려보다 조언을 덧붙였다.
"아, 그리고, 혹시라도 드래곤하트를 동력원으로 사용하는 장비가 있다면 가지고 들어가지 마시오. 제어에 문제가 생길 수 있소."
"참고하도록 하지."
레이가 마침내 장막 앞에 섰다.
*
장막 내부의 제국군은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다.
소수의 생존자들이 장막의 끝자락으로 잠시 물러났는데, 프레체스는 굳이 뒤쫓지 않았다.
이곳에서 제국군이 소수나마 살아나가야 장막 안의 참혹했던 전장을 증언할 테고, 그래야 제국 내부의 갈등 또한 더욱 격화될 것이다.
프레체스가 제국을 배신한 키어런에게 잠시 시선을 두었다가 골든타워를 돌아보았다.
드드득!
프레체스가 손을 휘저을 때마다 골든타워 측면이 조각조각 분해되더니, 이윽고 내부에 있던 드래곤하트가 노출되었다.
검은 갑주를 입은 기사가 프레체스에게 사령검을 건넸다.
프레체스가 사령검을 쥐고 만족스럽게 웃었다.
사령검. 악신이 내린 가장 위험하고 강력한 귀물 중 하나.
프레체스는 검은 물이 떨어지는 마법진으로 골든타워 내부의 드래곤하트를 감싸고는, 그 중앙에 사령검을 밀어넣었다.
끄드득!!
사령검이 드래곤하트를 파고든다.
타락한 기운이 드래곤하트를 침식하기 시작하며 주위의 마나가 요동쳤다.
사령검은 드래곤하트를 침식한 후, 그 아래 있는 영맥까지 침식할 터다.
이대로 침식이 완료된다면.
프레체스가 펼친 장막이 사라졌을 때, 장막 안에 고여있던 오염된 마나가 역류하며 영맥이 흐르는 지역을 광범위하게 오염시킬 터다.
영맥이 오염되는 순간 황도는 자체적인 방위 기능을 대부분 상실하게 된다.
그리 되면 제국은 정화 작업이 완료될 때까지 막대한 병력을 오직 황도를 수호하기 위해 배치해야만 했다.
"결국 정화 작업이 완료될 때까지... 제국은 소극적인 움직임밖에 취할 수 없겠지."
이 정화 작업이란 게 정말 짧게 잡아도 1년, 어쩌면 수십 년 이상 힘을 쏟아야 하는 일이었다.
제국의 발을 오래 묶어놓기 위해선 영맥을 확실하게 오염시켜야 했다.
그리고 앞으로 몇 시간이면, 사령검의 침식이 완료될 예정이었다.
해야할 작업을 끝낸 프레체스가 고개를 돌렸다.
가까운 곳에 이지스의 생도들이 널브러져 있음을 프레체스는 처음부터 인지하고 있었다.
제국의 예비 전력들인 만큼 살해하거나 병신으로 만들어 놓을 필요가 있었다.
프레체스는 마족들을 보내 생도들을 처리하려 했다.
헌데 그보다 앞서 생도 한 명이 몸을 일으켜 프레체스가 있는 방향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한편, 데런은 당황하고 있었다.
함부로 움직이지 말라고 데런을 막아섰던 테온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앞으로 걷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마족, 되살아난 사체, 그리고 강대한 기운을 지닌 적들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던 테온이 실소를 흘렸다.
"키어런...!"
현장에서 여러 공적을 세운 키어런은 은퇴할 나이가 아님에도 이지스의 교관으로 오게 되었다.
그 탓에 좌천이니 뭐니 말이 좀 나왔었는데, 어쨌든 고향이 가깝다 보니 테온은 키어런과 간간이 사적인 대화를 나누고는 했다.
"하, 진짜..."
테온은 키어런의 얼굴을 정확히 확인하고는 연거푸 웃음을 터뜨렸다.
키어런은 다가오는 테온을 흥미롭게 지켜봤다.
테온이 과연 살려달라고 빌까?
아니면 아예 이쪽으로 빌붙으려 할까?
그도 아니면 배신한 이유가 대체 무엇이냐고 따져 물으려 할까?
키어런은 테온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상당히 궁금했다.
허나 테온은 키어런에게 어떤 것도 묻지 않았다.
단지 홀로 욕설을 중얼거렸을 뿐이었다.
"저런 잡놈들 때문에 내가..."
최근 몇 년 동안.
제국의 남부에 위치한 세력들이 불온한 움직임을 몇 번 가져갔고, 그 탓에 남부 출신의 인물들이 불이익을 받는 경우가 많아졌다.
이지스에서 수학하던 테온은 자신과 고향이 가까운 선배들이 알게 모르게 이런저런 불이익을 받는 모습을 직접 보았다.
테온 또한 은연중에 행해지는 멸시와 의심의 시선을 감수해야 했다.
테온은 갑갑했다.
테온은 자신의 노력과 열정이 온전히 인정받기를 바랐다.
허나 그리되지 못했고, 답답한 나날이 길어질수록 테온은 신경적으로 변했으며, 주변의 시선은 더더욱 안 좋아져 갔다.
"하, 시발..."
앞으로는 어떨까.
여기서 무사히 살아나간다고 한들, 사람들은 더욱 짙은 선입견을 지니고 테온을 바라볼 것이다.
테온이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그들의 선입견을 지울 수는 없을 것이다.
"빌어먹을..."
얼굴을 쓸어내린 테온이 결국 검을 뽑아들었다.
검을 뽑아서, 키어런을 겨누었다.
"네놈에게 죽을 거다."
테온은 악에 받쳐서 반쯤 흐느끼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네놈에게 죽어서!! 나의... 순수성을 증명하겠다."
테온이 이를 악 물고 발걸음을 내디뎠다.
그 모습을 보며 키어런이 눈살을 찌푸리더니, 가타부타 떠들지 않고 곧장 검기의 다발을 쏘아냈다.
테온을 갈갈이 찢어서 아주 곤죽을 만들어버릴 생각이었다.
테온은 무의미한 발악이라는 걸 알면서도 검을 휘둘렀다.
콰가가강!!!
검기의 다발이 지면을 폭격했다.
키어런은 여전히 눈살을 찌푸린 채 테온이 서 있던 장소를 보았다.
그곳에는, 검기의 다발을 상쇄하고 회피하느라 피투성이가 된 데런이 테온의 뒷덜미를 잡아끌고 있었다.
죽지 못한 테온이 핏물을 뱉어내며 소리쳤다.
"너 지금 뭐 하는...!!"
"그러게요."
데런이 깊게 베인 어깨를 움켜쥐며 실소했다.
"만약 형님이었다면 상처 하나 없이 멋지게 선배를 구해냈을 텐데... 하하..."
얼마 못 가 웃음을 멈춘 데런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내가... 형님처럼 할 수는 없어요."
레이처럼 할 수는 없다.
그건 너무나도 잘 알고 있지만.
"형님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추하게 행동할 수 없어요."
테온의 뒷덜미를 놓아준 데런이 찬란히 빛나는 검기를 발현했다.
"저는, 겁쟁이처럼 죽지는 않을 거예요."
데런이 허리를 펴고 적들을 향해 검을 겨누었다.
그리고 데런의 뒤로, 이지스의 생도들이 하나둘 걸어와 검을 뽑고 진형을 갖추었다.
그래, 어차피 죽음을 피할 수 없다면.
하다못해 명예롭게 죽어야 했다.
죽음을 각오한 생도들의 기세가 날카롭게 다듬어져 갔다.
키어런이 그 광경을 보며 피식거리던 찰나, 프레체스가 손을 휘저었다.
쩌억!!!
섬광이 번쩍이고, 데런이 땅을 나뒹굴었다.
프레체스는 다른 생도들을 한 명씩 돌아보며 무심하게 물었다.
"또 앞장설 인간이 있나?"
"..."
생도들이 데런을 돌아보았다.
데런의 옆구리에는 주먹만한 구멍이 뚫려 피가 줄줄 새고 있었다.
생도들은 프레체스가 어떤 공격을 가했는지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
항거할 수 없는 무력의 격차에 생도들의 몸이 얼어붙었다.
전장에서의 경험이 적은 생도들이었기에 더더욱 이러한 공포를 극복하기가 힘들었다.
"커윽...!"
데런이 피를 울컥 토해냈다.
어떻게든 일어나보려고 팔다리를 휘저어봤지만 몸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하..."
데런은 자조했다.
약하고 무력하다.
동경하던 자와 너무도 멀리 떨어져 있어, 그 뒷모습조차 제대로 그려낼 수가 없다.
언제쯤 당신의 모습을 흉내라도 내 볼 수 있을까.
사실, 평생을 바쳐도 불가능하다는 걸 잘 알고 있다.
하지만, 하지만 언젠가는... 언젠가 단 한 번이라도.
데런은 그런 바람을 담아, 장막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하늘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 찰나.
장막이 바스러지며 작은 틈새가 드러났다.
틈새 너머로, 푸르게 펼쳐진 하늘이 아주 잠깐 비쳤다가 사라졌다.
이변을 느낀 모두가 반사적으로 하늘을 향해 고개를 치켜들었을 때.
"나의"
데런이 환히 웃었다.
"영웅이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