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화
중간 평가 시험에 관한 내용이 생도들에게도 공지됐다.
2급 생도들은 올 게 왔다는 반응이었고, 3급 생도들은 시험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 알지 못해 2급 생도들에게 묻고 다니거나 저들끼리 논의하고는 했다.
3급 생도들의 기숙사 앞에서, 쥬세핀이 거대한 가방을 품에 안고는 심각한 표정으로 자문했다.
"가방... 가방 안을 어떻게 채워야 하는 건가...?"
중간 평가 시험에 참가할 때 들고 갈 수 있는 가방 무게에는 제한이 있었다.
아티펙트를 사용하는 등의 꼼수는 당연히 불가능하기에 가방 내부엔 반드시 필요한 물건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구비해야 했다.
훈련 도중에는 먹을 것을 구하기 힘들기에 식수와 보존식은 필수적이었는데, 무게 제한이 있으니 얼마나 쑤셔 넣어야 하나가 문제였다.
다들 진지하게 고민하던 중, 레이가 가까운 곳을 지나가고 있던 세바스에게 손을 흔들었다.
"선배님!"
"...?"
세바스가 눈살을 찌푸리며 다가왔다.
레이가 쥬세핀이 품에 안고 있는 가방을 가리키며 물었다.
"뭐 채워야 합니까?"
"..."
세바스의 표정이 좋지 않자 레이 곁에 있던 데런이 얼른 질문을 조금 바꿨다.
"혹시 선배님의 지혜를 저희에게 나눠주실 수 있으실까요?"
그제야 조언을 해줄 생각이 든 세바스가 짧게 답했다.
"물하고 소금 약간."
"...더 없습니까?"
"가능하다면 비싼 포션 한 병만 더 챙기던지."
쥬세핀에게 손짓해서 자리를 뺏어 앉은 세바스가 한숨을 푹 쉬고는 설명을 덧붙였다.
"빨갱이들아, 이번 훈련이 하루나 이틀 동안 하는 것도 아니고 최소 일주일 단위인데... 식사를 안 해도 보름 정도는 버틸 수 있단 말이야, 우리가?"
"어... 네."
"근데 탈수 오면 그냥 좆 돼. 뭐 방법이 없어. 탈수 와서 쓰러지잖아? 무조건 남한테 업혀가야 해. 그러니까 물이랑 소금만 챙겨. 다른 문제는 정신력으로 해결되는데, 탈수는 안 돼."
옆에서 세바스의 이야기를 듣던 레이가 웃음을 터뜨렸다.
엑스퍼트 급 정도 되는 강자들은 마나라는 에너지 원이 있기에 평범한 인간보다 훨씬 열약한 환경에서도 장기간의 생존과 작전 수행이 가능했다.
허나 수분 섭취를 못 하면 아무리 엑스퍼트 급이라 해도 육체 능력을 유지할 수 없었다.
마법사가 동행하거나 물을 생성하는 아티펙트를 소유하고 있다면 걱정이 해결되겠지만 이번 시험에선 도움을 받을 수 없었다.
"이야, 빡쎄긴 한가 보네요, 선배님."
"어, 각오 단단히 해. 그리고... 씹어 삼킬 수 있는 가죽끈 같은 거 설탕물이나 소금물에 끈적하게 절여서 검집에 동여매든가 해. 시험 도중 그거라도 씹어먹어야 안 쓰러지고 버틴다."
"내부에선 식량을 구하기 어렵나 봅니다?"
"아마 힘들 거야. 기대하지 마. 그래도 열심히 하다 보면 중간쯤 가서 교관님들이 작은 이벤트 하나 열어주신다."
이벤트를 열어준다는 이야기에 쥬세핀이 가장 먼저 화색했다.
"벌써 기대되는 것 같습니다...!"
"어, 열심히 기대해."
세바스가 웃는 얼굴로 그리 말했다.
실제로 극기훈련 비스무리한 것을 진행하다 보면 도중에 교관들이 깜짝 이벤트를 열어주고는 했다.
생도들이 일주일 넘게 쫄쫄 굶어 맛이 갈랑말랑 할 때쯤.
딱 그런 타이밍에 나타난 교관들은 생도들을 환영해주며 수프를 끓이고 고기를 구웠다.
그리고 자기들끼리만 처먹었다.
'...시발.'
교관들이 쩝쩝거리며 자기들끼리 음식을 처먹으면, 생도들 중 한 놈쯤은 눈이 돌아서 교관에게 달려들고는 했다.
다른 생도들은 달려드는 놈을 막아 세우며 고기 냄새만 맡고 갈 길을 가야 했고 말이다.
이래저래 개고생한 기억이 떠오른 세바스는 눈을 한 번 질끈 감았다가 떴다.
"마음 단단히 먹고 잘 준비해 놔."
"예,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3급 생도들이 돌아가며 세바스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그리고 얼마 뒤, 중간 평가 시험이 진행되는 날짜가 다가왔다.
시험이 시작되기 전 팀 편성이 완료됐는데, 레이는 요하나와 함께 B팀에 속하게 됐다.
레이가 A팀에 속하게 된 데런의 어깨를 가볍게 쳐주었다.
"다치지 말고, 잘하고 와."
"예, 형님. 열심히 하겠습니다."
"응. 사실 별걱정은 안 해."
레이가 피식 웃었다.
데런은 필립스 백작령에서 좀 구시대적인 훈련도 자주 받았었기에 다른 생도들에 비해 깡다구는 확실하게 더 뛰어났다.
레이는 데런을 보낸 뒤 요하나와 함께 B팀의 집결지로 갔다.
B팀의 집결지에는 세바스와 하비의 얼굴도 보였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서로 간의 인사가 끝난 후 B팀에 속한 생도들이 넬슨을 따라 이지스 부지 내에 존재하는 황금탑으로 향했다.
겉모습 그대로 골든타워라 칭해지는 이 황금탑은 황도 곳곳에 세워져 있었으며 황도 아래를 흐르는 영맥의 마나를 제어하기 위해 건설된 시설물이었다.
골든타워 주위에는 마법사 다수가 결계를 전개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었다.
골든타워에 도착한 넬슨은 차렷 자세로 정렬해 있는 생도들에게 당부했다.
"마음 단단히 먹어라. 한 명이라도 낙오하면 모두가 실패한다. 죄인이 되고 싶지 않으면 끝까지 버텨라. 앞이 보이지 않아도 다리를 움직여라. 이지스에 짐덩이 따위는 필요 없다."
결계 안에서 진행되는 안전이 보장된 훈련인 만큼 생도들의 마음에 안이함이 깃들 수 있기에 넬슨은 생도들을 강하게 다그쳤다.
생도들의 눈빛이 결연해지자 넬슨이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짐이 되지 마라. 알겠나?"
"알겠습니다!!!"
"시험을 시작한다."
츠즈즉!
마법사들이 결계를 전개하기 시작했다.
레이는 곧장 체내의 마나를 코어로 끌어모아 완전히 가두다시피 했다.
현재 펼쳐지는 결계는 '공간 결계' 종류에 가까웠는데, 레이가 지닌 마나는 공간 결계에 강한 내성을 가지고 있었다.
레이가 아무 생각 없이 마나를 이리저리 흘려댔다간 결계가 뒤틀리거나 전개되기 전에 증발할 게 뻔했다.
화아악!!
풍경이 뒤바뀌고, 생도들은 사막 한가운데 서 있었다.
레이가 사막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돌로란체에 가기 전에 이런 곳에서 사막 구경을 먼저 하네.'
어디 샌드웜이라도 튀어나오지 않을까 레이가 두리번거리는데 2급 생도 로안이 가볍게 손을 맞부딪쳤다.
"미리 이야기했던 대로 내가 지휘권을 행사할 거야. 이번 시험에선 내가 지휘관이니까 명령을 잘 따라주길 바라."
"예, 알겠습니다."
3급 생도는 물론이고 2급 생도들 또한 존댓말로 답했다.
시험의 형상을 띈 군사 작전 훈련이니만큼 지휘 체계를 존중해야 했다.
로안이 손짓하자 다들 준비했던 짐을 들어 올렸다.
거대한 가방 안에 식수가 가득 차 있어서 무게가 더럽게 무거웠지만 다들 이를 악물고 가방을 멨다.
"출발하자. A팀보다 먼저 도착해야지."
로안이 앞서 걸으며 소금에 절여놓은 가방 끈을 입에 물었다.
다른 생도들도 미리부터 호흡을 고르며 앞발을 내디뎠다.
헌데, 얼마 가지 않아 땅이 위아래로 흔들렸다.
쿠웅-!
"...벌써?"
생도들은 방금의 땅 울림이 샌드웜 따위의 마물이 출현할 징조라고 생각했다.
과거에 비슷한 훈련을 몇 번 받은 2급 생도들은 습격이 너무 빠르지 않나 의아함을 품으면서도 검 자루를 잡았다.
허나 얼마 안 가 다들 자신의 판단이 틀렸음을 인지했다.
쿠구구궁!
땅이 계속 흔들렸다. 흔들리다 못해 눈에 보일 만큼 위아래로 물결치기 시작했다.
생도들은 이게 땅이 흔들리는 게 아니라 공간 자체가 뒤틀리기 시작했다는 걸 직감적으로 느꼈다.
"뭐야, 이것도 시험이야...?"
"그럴 리가...!!"
"결계에 문제가 있는 것 같은데?"
"시발, 시작하자마자 이게 뭔 개지랄..."
"흥분하지 말고 진형 갖추고 주변 경계해!!"
로안이 그리 소리치자 생도들도 일단 짐을 내려놓고 코어를 최대한 활성화시켰다.
대부분의 생도들은 지금 이 현상이 일시적일 것이라 믿었다.
이 시험에 사용되는 고위 결계를 전개하기 위해 제국에 충성하는 고위 마법사들까지 다수 협력했다.
약간의 문제가 생겼더라도 금방 해결해주리라고, 생도들은 그리 믿었다.
허나 시간이 지날수록 사태는 더욱 심각해져 갔다.
그드드드드득!!
풍경이 쩍쩍 갈라졌다.
모래 폭풍이 휘날릴 만큼 지면이 강하게 요동쳤다.
심지어 결계가 뒤틀리는 반동으로 인해 허공에서 강한 압력이 발생해 몇몇 생도들을 덮쳤다.
콰앙!!
"크윽!"
갑작스레 충격을 받아 옆으로 튕겨져나간 생도를 다른 생도가 붙잡았다.
피해가 본격적으로 발생하기 시작하자 분위기가 급격히 험악해졌다.
"야!!! 이대로 가만히 있을 거야?!!"
"기다려!! 함부로 움직이지 말고 일단 기다려!!!"
"기다리면 해결책이 나오냐?!"
2급 생도들이 당혹감이 가득한 목소리로 고함을 질러댔다.
웬만큼 실력 좋은 마법사가 아니라면 현재 전개되어 있는 고위 결계를 정확히 분석하는 건 불가능했고...
때문에 기사학부 생도들은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할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결계가 안정되리라 믿고 가만히 기다려야 하는가.
아니면 위험을 무릅쓰고 결계를 부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가.
누구도 확답할 수가 없었다.
"넌 아직도 이게 시험 같아?!! 문제가 생겼잖아!! 안에서 결계를 부숴야 해!!"
"결계를 부수려 했다가 잘못 건드리면 우리 진짜 좆 될 수 있어!! 밖에서 대기하던 고위마법사만 몇 명이었는데!! 잠깐 기다려 봐!!"
"야, 마법사놈들이 제대로 했으면 지금 이런 문제가 생겼겠냐?!!"
"그럼 어쩌자고?! 이거 고위 결계야!! 어지간한 마법사도 분석할 엄두를 못 내는데 우리끼리 어쩔건데?! 일단 되는 대로 쑤셔보자고? 목숨 걸고 도박하냐?"
"가만히 있다가 다 뒈지게 생겼는데 도박이라도 해야지!!"
2급 생도 간에 고성이 오갔다.
3급 생도들은 2급 생도들의 고성을 들으며 하얗게 질린 얼굴로 숨을 몰아쉬었다.
지휘권을 가지고 있던 로안이 식은땀을 흘리다가 검을 뽑아들었다.
생도들을 진정시키기 위해선 검으로 검집을 두들겨 쇳소리라도 내야 했다.
허나, 그보다 앞서.
레이가 신경질적으로 지면을 찍어 밟았다.
쿠웅!!!!!
"...!"
"...!"
"...!"
막대한 마나의 파동이 지면을 타고 흘렀다.
흔들리던 지면이 공간을 괴리시키는 마나에 잠식되어 일시에 얼어붙었다.
사막의 열기가 차게 식었다.
내려앉은 차디찬 정적 속에서.
냉기를 쫓아간 생도들이 하나둘 레이를 돌아보았다.
모두의 시선이 모이자 그제야 레이의 입에서 거칠어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전부 닥쳐."
"..."
생도들은 시푸르게 물든 레이의 눈동자에 압도되었다.
방금까지 괴성을 지르던 2급 생도들도 숨소리조차 죽인 채 레이에게 집중했다.
허공을 뚫어져라 응시하던 레이는, 이윽고 결정을 내리고 검을 뽑아들었다.
"결계를 부순다. 무게 중심 낮추고 충격에 대비해."
생도들이 곧장 무릎을 꿇었다.
무릎을 꿇은 생도들의 중심에서 레이가 검강을 발현했다.
공간을 괴리시키는 강력한 힘의 기류를 레이가 횡으로 휘둘렀다.
불안정하게 요동치던 결계가 레이가 그어내는 검의 궤적에 따라 고스란히 찢겨나갔다.
끄드드드드득-!!
결계가 반으로 찢겨나가다 못해 결국 붕괴하기 시작했다.
그 반동으로 인해 태풍보다 거쎈 바람이 휘몰아쳤지만 생도들은 코어를 활성화시켜 몸을 지켰다.
후우욱...
결계가 완전히 바스러지며 바람이 가라앉았다.
생도들의 눈앞에 다시 골든타워가 보였다.
결계에서 벗어나는데 성공했으나 그 누구도 함부로 환호하지 못했다.
아직 피부 위에 남아있는 냉기 탓에 생도들이 숨을 죽이며 몸을 떠는 가운데.
레이가 심각한 표정을 하고 있는 넬슨을 향해 욕설을 퍼부으려다...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골든타워로부터 마법사에게 공급되었어야 할 막대한 마나가 어딘가로 흐르고 있었다.
레이와 가까이 있던 골드타워만이 아니라, 황도에 흐르던 마나의 줄기 다수가 어느 한 곳으로 집중되고 있었다.
땅을 박찬 레이가 골든타워 위로 올라갔다.
시야가 높아지니 마나가 어딘가로 흘러가는지 정확히 확인 가능했다.
마나의 도달점을 확인한 레이가 인상을 찌푸렸다.
데런이 포함된 A팀이 향했던 골든타워 쪽으로 마나가 집중되고 있었다.
허나 그것 말고도 문제가 많았다.
"..."
골든타워에서 내려온 레이가 섬뜩한 눈으로 넬슨을 돌아보았다.
"넬슨."
"...하명하십시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지 파악해서 보고해. 최대한 빠르게."
수호 (3)